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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릉 - 논산 연무대

by 연송 김환수 2023. 7. 8.

견훤왕릉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한 이 묘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견훤묘는 10세기경에 축조한, 지름 10m, 높이 5m, 둘레 83m의 봉분으로 1981.12.21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 앞에는 1970년 견씨(甄氏) 문중에서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後百濟王甄萱陵 (후백제왕견훤릉)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은 935년 아들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나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936년 고려 왕건에게 귀화하였다. 936년 9월 신검과 왕건의 마지막 전투는 일리천에서 벌어졌다. 견훤이 고려군의 앞에 서자 후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패퇴한 신검은 충청도 황산 탄현까지 후퇴하였으나 결국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그런데 왕건은 견훤의 뜻과 달리 신검을 살려 주었다.

견훤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며칠 만에 황산(黃山)의 불당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936년 9월 8일이었고 나이는 70세였다.

 

황산의 불사(佛舍)에서 죽은 견훤은 인근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이 죽은 절을 논산 개태사로 보기도 한다. 『제왕운기』에 의하면 견훤이 사망하자 왕건이 부의를 넉넉히 해 주었다고 한다. 견훤이 묻힌 곳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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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릉 입구 교회 왼쪽 중앙계단을 100m정도 올라가면 왕릉이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기 힘드신 분들은 계단 반대편의 차도를 통하여 왕릉으로 갈 수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왕릉이 보인다.

왕릉에는 갓비석과 상석만 있고 다른 조형물은 없다.

後百濟王 甄萱陵 (후백제왕 견훤릉) 비석

후백제왕 견훤을 시조로 하는 황간 견씨와 전주 견씨,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를 시조로 하는 상주 견씨를 비롯하여 총 다섯 본관(황간, 경주, 상주, 전주, 청양)이 있으며, 별로 오래가지 못한 왕조라 존재감은 낮지만 태봉이나 금관국을 제외한 나머지 가야 등과 달리 지금까지 존속 중인 성씨다.

인구는 2000년 기준 340가구 1,141명으로 적은 편이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1,251명이 나타나 조금 늘었다.

 

甄자는 '견'과 '진' 두 독음이 있어 견훤의 이름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를 놓고도 논란이 있다.

다만 당대의 발음이 무엇이었지는 차치하더라도, 견훤의 후손인 견씨들이 '견'이라고 읽고 발음하고 있으므로 '견훤'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