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申緯)의 호는 자하(紫霞)이다. 1831년 봄(3월)에 자신의 거처에 “茶半香初室(다반향초실)”이란 당호를 걸었다.
다반향초 내용은 몽유선경(夢遊仙扃)이라는 시에 나오는데 "차를 반쯤 마시고 향을 음미한다(사른다)"는 뜻으로, 초의시집에 다반향초 서문을 써준 것은 1831년 4월이다.
다반향초는 다양하게 해석하는데 그 뜻은 비슷하다. 차를 반쯤 마셨어도 향은 처음과 같다. 차를 마신지 반나절이 지났으나 그 향은 처음과 같다. 차를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 그대로 이다.
다반향초는 차가 끝까지 같은 향을 유지하듯이, 우리 스스로의 삶도 한결 같은지 뒤돌아 보야야 한다. 늘 한결같은 원칙(原則)과 태도(態度)를 중시(重視)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晝寢. 夢遊仙扃 云綠陰如水鶯聲滑 芳草和煙燕影消 覺來. 足(卽)成一詩 - 申緯
주침. 몽유선경 운녹음여수앵성골 방초화연연영소 각래 족(즉)성일시 - 신위
오침 꿈속에 선경(仙扃)에 노닐며 이르기를, “녹음은 파란 물과 같아 앵무새 소리 교활하고, 안개에 쌓인 향긋한 풀에 제비 그림자 사라진다.” 꿈에서 깨자마자 시 한 수를 이루다.
즉, 낮잠을 자다가 꿈에 신선의 집에서 노닐며 시구를 얻었다 뜻이다.
夢遊仙扃(몽유선경) 茶半香初(다반향초) - 자하(紫霞) 선생 시 / 청계 안정환 서
人生何處不無聊 最是難憑夢境遙 仙子過頭靑玉杖 拉余携手畫欄橋
(인생하처불무료 최시난빙몽경요 선자과두청옥장 납여휴수화난교)
綠陰如水鶯聲滑 芳草和煙燕影消 短句分明留在記 香初茶半雨瀟瀟
(녹음여수앵성골 방초화연연영소 단구분명유재기 향초다반우소소)
인생이 어디선들 무료하지 않으랴만
기대기 가장 힘든 아득한 꿈나라 일세
청옥장(靑玉杖) 짚고서 지나가던 신선이
그림난간 다리에서 날 붙들어 손 끌었지
녹음은 강물같고 꾀꼬리 고운 노래
안개 잠긴 방초에 제비 그림자 사라진다.
단구(短句)는 또 또렷하게 기억속에 남아 있고
향 피우자 차는 반쯤 부슬부슬 비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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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어느 곳인들 무료하지 않겠는가?
이는 의지하기 가장 어렵나니 꿈의 경지에서 노닌 것을.
신선이 청옥장(靑玉杖)을 짚고 곁을 지나가며,
채색한 다리로 나를 잡아 손으로 끈다.
녹음은 파란 물과 같아 앵무새 소리 교활하고,
안개에 쌓인 향긋한 풀에 제비 그림자 사라진다.
단구는 분명히 기억에 남거늘,
차반쯤에도 첫 향기 속에 쓸쓸하게 비오네!
紫霞先生 夢遊仙扃 得句詩 晴溪 安定煥 書 (자하선생 몽유선경 득구시 청계안정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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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옥장(靑玉杖), 녹옥장(綠玉杖)
청옥장은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짚고 다니는 푸른 옥으로 만든 지팡이를 말한다.
녹옥장은 천제(天帝)가 사는 곳에 있는 녹옥수 나뭇가지로 만든 녹옥지(綠玉枝) 지팡이를 말한다.
녹옥은 통상적으로 대나무를 푸른옥에 비긴 것으로 대나무 지팡이를 말한다. 따라서 청옥장이나 녹옥장은 대나무 지팡이를 지칭한다고 보아도 된다.
※ 청색과 녹색 구분
청색은 매우 범위가 넓은 색을 가리키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검정색과 흰색의 사이' 라고 되어 있고, 남색, 녹색을 청색계통이라 말한다.
'藍(남, 쪽빛, 남빛)', '緑(녹/녹색)', '青(청, 파란색, 청색)' 정도의 색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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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申緯, 1769~1845) / 호 자하(紫霞) / 신자하(申紫霞),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799년(정조23)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ㆍ병조 참판, 강화 유수 등을 지냈다.
시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修堂全稿)》가 있다.
김택영은 그의 시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집(紫霞詩集)》을 중국 남통(南通)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신위의 시조는 장절공(壯節公) 평산(平山) 신숭겸(申崇謙, 877∼927)이며, 가계는 14세(世)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1374∼1446)를 중시조로 하는 문희공파다. 신개는 태조 2년(1393) 식년문과에 급제, 세종 29년(1447)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학자·문인·예술가·장군 등이 배출되었다.
부 신대승(申大升, 1731∼1795) 역시 영조 38년(1762) 진사 급제에 이어 경연시 문과에 장원하고, 영조 52년(1776) 승지, 정조 8년(1784) 가선대부의 가자(加資)를 받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했다.
자하의 외가는 물론 처가 역시 당대의 명문이었으며, 특히 장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뛰어난 서화(書畫)는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자하는 이같이 가규(家規)가 드높은 경화사족의 가문에서 영조 45년(1769) 8월, 한성 장흥방에서 대승의 차남(次男)으로 출생했다. 자를 한수(漢叟), 호는 홍전(葒田)이라 했다가 후에 자하라 했다. 창강이 찬한 <연보>에 의하면 “그가 어려서 경기 시흥의 자하산 별야에서 수학했으므로 ‘자하’로 자호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 산견되는 남다른 가문 의식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당시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작시법(作詩法)을 본받았다. 필법(筆法) ·화풍(畵風)도 신경(神境)에 이르렀으며, 아들 명연(命衍)이 부친의 유고를 거두어 문집을 엮었다.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脩堂全藁)》 《분여록(焚餘錄)》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등이 있다.
송나라 시가 소동파를 으뜸으로 삼는다면 우리 한국의 시는 마땅히 신자하(자하 신위·1769~1847)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문(文)은 연암(박지원·1737~1805)이고, 시는 자하 신위이며, 글씨는 추사(김정희·1786~1856)인데 이 세분이 각각 시·서·화에서 엄청난 성취를 이뤘기 대문에 후학들이 더 발전시킬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벽이 되었다.
신자하 시집(申紫霞 詩集)
光緖 33年(1907) 중국 江蘇 通州 翰墨林에서 발행된 신위(申緯) 선생의 시집인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6卷 2冊 완질본
<내용> 光緖 33年(光武11년. 1907년) 중국 江蘇 通州翰墨林에서 발행된 신위(申緯) 선생의 시집인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6卷 2冊 완질본으로 연활자본 1000부 인출본 중 한책이다. 크기 14.4×26cm
<참고>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해제
紫霞 申緯(1769~1845)의 詩文 중에서 900여수를 정선한 詩集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것이다. 申緯의 자는 漢叟, 호는 紫霞 또는 警修堂, 본관은 平山으로, 文僖公 申槩의 후손이며 參判 申年升의 아들이다.
1799년(正祖 23) 謁聖文科에 乙科로 及第한 후 줄 곧 閑職과 外官職으로만 있었다. 그 후 谷山府使, 承旨, 春川府使, 兵曹參判을 지냈다.
1828년(純祖 28) 江華留守가 되었으나 그를 총애하던 孝明世子가 1830년 병사하자 사임했다. 그후 平薪鎭僉節制使, 大司諫, 都承旨를 거쳐 1834년 憲宗이 즉위하자 吏曹 參判이 되었다. 그 후 兵曹, 戶曹의 參判을 歷任했다. 中國의 蘇軾(東坡)을 私淑하여 體와 型이 갖추어진 독특한 세계를 이루었던 그는 詩로써 詩를 논평한 평론가이기도 했다.
<東人論詩絶句>35首는 新羅의 崔致遠으로부터 高麗를 거쳐 당시까지의 대가를 작품에 대한 대표적 詩評이었다. 이 밖에 時調 40首를 漢詩로 번역하여 <小樂府>라 이름했으며, 書·畵에도 一家를 이루어 詩·書·畵 三絶로 이름이 높았다.
애국·애족 적인 그의 詩 작품 속에는 국산품 애용, 양반배척, 庶孼(서얼)의 차별 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등이 제시되어 있다. 개국 이래 詩作이 가장 많았었고, 100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저자에 대해서는 ≪警修堂全集≫ 해제참조, 31p]. 紫霞詩集은 滄江 金澤榮이 중국에 망명하여 通州에 들어갔을 때 紫霞의 詩가 중 국의 대가 翁方綱, 吳嵩梁을 통하여 天下에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다시 그 중에서 정 선하여 1907년 중국에서 출판한 것이다.
卷頭에 1907년에 쓴 중국인 장건(張謇)의 題辭(제사)와 金澤榮의 서문과 연보가 수록되어 있다. 本集에는 보유 7수까지 합하여 古今體詩 931首 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卷{1}: 1811년 부터 1816년까지 의 작품 186수,
卷{2}: 1817년부터 1820년까지의 159수,
卷{3}: 1821년부터 1826년까지 의 163수,
卷{4}: 1827년부터 1830년까지의 110수,
卷{5}: 1831년부터 1834년까지의 139 수,
卷{6}: 1835년부터 1845년까지의 167수 등으로 나누어 실려 있고, 끝으로 補遺 7首 가 첨부되어 모두 931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권5}에는 <東人論詩絶句> 24 首와 <小樂府> 23首가 수록되어 있다. 警修堂全藁[奎6932] {권48}에는 <東人論詩絶 句> 35首와<小樂府> 40首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紫霞詩集에는 그 중 일부만이 수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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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半香初(다반향초)는 차를 마실 때 먼저 차의 향을 맡아서 음미한다. 茶半(다반)은 찻잔의 반정도를 마시는 것이고, 香初(향초)는 남은 찻잔의 차에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것이다.
다반향초론(茶半香初論)
중국 북송시대 황정견(1045~1105)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완당(阮堂,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예작품으로 유명해진 “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라는 시에 나오는 다반향초(茶半香初)는 추사(완당) 김정희의 대련 글씨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자신의 거처를 ‘다반향초실’이라 이름 지은 자하(紫霞) 신위(申緯) 시인과 더불어 다반향초라는 싯구를 조선에 소개하여 다인(茶人)들의 시심을 뒤흔든 분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다.
다반향초는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다” “찻잔에 차를 반쯤 따르니, 향기가 막 피어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와 조금씩 다른 해석도 많이 있다.
유홍준 교수는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은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오묘하게 행동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과 같네”
임광명(부산일보 기자)은 “차는 벌써 반을 마셨으되 향은 처음 그대로다”
최원준 시인은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 따르니 향기가 피기 시작하고, 신묘한 차향을 맛보고 있으니 물 흐르고 꽃이 피도다”
민병준은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이귀남 전 법무장관은 “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처음과 같은 향기를 머금은 차”
도예가 한용민은 “차를 마신 지 이미 반나절이 지났으나 입 안 가득 그윽한 차향은 처음과 변함없다”
정민 교수는 “고요히 앉은 곳 차 마시고 향 사르고 묘한 작용이 일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네”라고 해석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다반향초 글씨
靜坐處 茶半香初 (정좌처 다반향초)
고요히 앉은 곳, 차 마시다 향 사르고
(고요히 앉은 곳,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다)
妙用時 水流花開 (묘용시 수유화개)
묘한 작용이 일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네.
(신묘한 차향을 맛보고 있으니 물 흐르고 꽃이 피도다)
다반향초란 말이 나온 추사선생의 글씨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추사의 글씨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이 작품은 소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에 공개된 적이 거의 없다.
글씨는 붉은색 중국 고급 종이에 먹을 진하게 갈아서 썼다.
阮堂(완당)이란 서명 아래 白文(백문,음각)의 김정희 印(인) 과 주문(朱文, 양각)의 완당이란 인장을 찍었다.
구법이 정상적인 한시의 4, 3이 아닌 3, 4의 구문이다.
한시의 구절이 아니고, 중국의 선원이나 차관기둥에 적힌 영련(楹聯)에 가까운데 글귀는 추사선생이 지은 것이 아니고, 글씨는 추사선생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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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련 (楹聯)
영련은 중국 오대(五代)때에 후촉(後蜀)의 맹창(盟昶)이 학사 신인손(辛寅遜)에게 명하여 도부판(挑符版)에 ‘신년납여경, 가절호장춘(新年納余慶, 嘉節號長春)’의 대구를 쓰게 하여 침실 문위에 써 붙인 것이 시초이며 대련(對聯)의 일종이다.
※ 대련 (對聯)
판(板)이나 종이 등에 대구(對句)의 글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의 양쪽에 부착하거나 걸어 놓은 글이다.
많은 경우 기둥에 거는데 ‘주련(柱聯)’ ‘영련(楹聯)’ ‘영첩(楹帖)’ ‘대자(對字)’라고도 부르며 보통 색을 칠하여 글씨, 글귀가 돋보이게 한다.
문짝에 걸어 놓는 것을 ‘문련(門聯)’ 또는 ‘문심(門心)’, 문기둥 좌우에 거는 것을 ‘광대(框對)’, 새해에 쓰는 것을 ‘춘련(春聯)’이라고 한다.
송대(宋代)에는 기둥 위에 붙이는 것이 널리 퍼져서 경사(慶事)나 조상(弔喪) 때 이를 붙이는 것이 널리 행해지고, 명(明), 청(淸) 이후에는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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