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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남천 이성훈

녹죽상중하 탄허선사 - 남천

by 연송 김환수 2021. 5. 4.

禪師(탄허선사)의 禪(선) 綠竹霜中夏(녹죽상중하)

 

綠竹霜中夏 (녹죽상중하) 푸른 대나무는 서리 속에서도 여름이요,(여름처럼 푸르고)

靑松雪裏春 (청송설리춘) 푸른 솔은 눈 속에서도 봄이로구나.(봄날같이 파랗도다)

人能持此節 (인능지차절) 사람이 이 절개를 가지고 있다면,

何慮撼風塵 (하려감풍진) 어찌 바람과 티끌에 흔들릴까 염려하겠는가.

 

錄 呑虛禪師(록 탄허선사)의 禪詩(선시) 綠竹霜中夏 靑松雪裏春(녹죽상중하 청송설리춘) 李南泉(이남천) 書(서)

/ 낙관 李聖勳印(이성훈인) 南泉(남천) 

 

녹죽(綠竹)은 상중하(霜中夏)/ 푸른 대나무는 서리 속에서도 여름이요,

청송(靑松)은 설리춘(雪裏春)이라. / 푸른 솔은 눈 속에서도 봄이라.

이 세상 설핏 살아도 푸르게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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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呑虛) 스님

 

1913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 1983년 6월 5일)는 한국의 승려이다.

본관은 경주, 법명은 택성(宅成:鐸聲), 법호는 탄허(呑虛),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고전과 역경에 능통하였다.

 

탄허는 전북 김제 만경에서 유학자였지만 천도교 신자로 개종한 항일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는 정읍의 증산교의 일파 차천자교(車天子敎)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1918년부터 1928년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득도하겠다고 결심한 후 1929년에는 충남 보령으로 옮겨 14세 때 충청도 기호학파 최대 유학자인 면암 최익현의 문하 이극종(李克宗)으로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1934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로 출가했다. 이후 3년간 묵언(默言) 참선의 용맹정진으로 수행했으며, 15년간 오대산 동구 밖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1936년 6월에는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원사에 승려 연합수련소를 설치했고 한암스님 앞에서 <금강경(金剛經)> <기신론(起信論)><범망경(梵網經)> 등을 강의했다.

 

월정사(月精寺) 조실(祖室), 오대산연수원 원장으로서 승려들을 지도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역임했다.

 

1967년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을 지내면서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작업에 직접 투신, 〈한글대장경〉 간행에 공을 세웠다.

동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는 해외의 석학들을 위해 일본 도쿄대학의 동양학 세미나에서 화엄학 특강을 했다. 또한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심포지엄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았다.

 

1983년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입적했다.

 

저서 《신화엄경합론》

 

경력사항

1984.11 ~ 탄허불교문화재단 설립

1975 ~ 동국대학교 이사

1972 ~ 화엄학연구소 설립

1967 ~ 초대 동국역경원 원장

1964 ~ 1971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

 

대한불교조계종 36대 총무원장을 지낸 승려 원행(圓行)이 쓴 논픽션 <탄허 대선사 시봉 이야기>나 <10.27 법난>에 따르면 정승화 참모총장이 불교 신자였던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무르던 탄허를 종종 찾아뵙고는 했는데, 탄허는 평소 정 총장이 자신을 찾아올 때면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니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와 그렇게 약속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1979년 10.26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탄허는 제자 원행을 시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 좀 걸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원행을 직접 서울로 보내 정 참모총장을 만나서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든지 전화를 한 통만 해 달라"고 전하고 오게 했고, 원행은 참모총장 공관 앞에서 군인들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으므로 끝내 정 총장은 탄허를 만날 수 없었다.

 

두 달 뒤에 12.12 사태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군법사 한 명을 월정사로 보내 "감옥에서 공부하고 싶으니 탄허가 강의한 화엄경을 보내 달라"고 탄허에게 부탁했지만, 탄허는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가서 그 사람더러 '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내가 묻더라고 전하라.

 

그는 이미 실기(失機)했다."고 거절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0년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정승화 전 총장은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