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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다솔사(多率寺), 효당스님 - 사천시

by 연송 김환수 2021. 3. 14.

다솔사(多率寺)는 경남 사천시 곤명면 봉명산(鳳鳴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연기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봉명산은 이명산이라고도 한다. 사찰이 자리한 일대는 봉명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503년(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대웅전·나한전(羅漢殿)·천왕전(天王殿)·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을 건립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磨崖佛)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 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道明)·낙화(樂華)·성진(聖眞)·풍운(風雲)·세진(洗塵)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이 절은 일제 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출처 : 다솔사(多率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효당이 다솔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를 널리 알리고 이 시대의 차(茶)세계를 정립하는데 이바지한 효당(曉堂) 최범술 선생(1904~1979)이 차를 대중화하는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http://dasolsa.kr/

 

다솔사(多率寺) – 천년고찰 다솔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솔사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嶽寺)’로 창건하여,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습니다.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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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은 추전 김화수 선생의 편액이다.

 

응진전은 청사 안광석 선생의 편액이다.
봉일암은 낙관은 없지만 허백련 선생의 글이다. - 추전 김화수 선생 말씀
청사 안광석 선생이 각(刻)을 했다.
청사 안광석 선생이 세긴(刻) 봉일암 우측 편액 앞에서 아드님이신 청계 안정환 선생 모습

 

좌측부터 청계 안정환선생, 봉일암 스님, 추전 김화수선생, 송윤수여사님

 

曉堂凡述之塔(효당범술지탑) - 청사 안광석 선생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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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 불교인물

 

해방 이후 해인사 주지, 제헌국회의원, 해인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한 승려.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 이칭 : 금봉(錦峯), 효당(曉堂)

◇ 성격 : 승려,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 출생 : 1904년 5월 26일 ~ 사망일1979년 7월 10일

◇ 저작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국의 다도 등

◇ 경력 : 해인사 주지, 제헌국회의원, 해인대학(海印大學) 이사장 및 학장

◇ 관련사건 : 국민대학(國民大學) 창설, 해인대학(海印大學) 설립

 

젊은 시절 이름은 영환(英煥), 당호는 금봉(錦峯), 법호는 효당(曉堂). 경상남도 사천 출신. 아버지는 종호(鍾浩),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1915년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사천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였다.

1917년 해인사지방학림(海印寺地方學林)에 입학하고, 환경(幻鏡)을 은사로 수계(受戒)를 받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지역에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통받았으며, 1922년 일본에 유학하여 1933년 동경의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박렬(朴烈)·박흥곤(朴興坤)·육홍균(陸洪均) 등과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박렬의 일본천황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하여 왔으며,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연루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29일씩 피검당하기를 3년동안 하였다.

 

1932년 김법린(金法麟)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였고, 1933년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해에 명성여자학교(明星女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본유학 시절 인도승 달마바라로부터 전하여 받은 불사리(佛舍利)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하여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는데, 이는 달마바라가 붓다가야의 대탑을 수리하고 그 탑 중의 불사리 약간을 나누어 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전한 것 중의 일부이다.

 

1934년 사천에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설립하였고, 1936년 다솔사불교전수강원을 설립하였다. 이 무렵 김법린·김범부(金凡父) 등이 다솔사에 머무르며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7년 고려대장경을 인경(印經)하였고, 1943년 9월부터 13개월 동안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상남도경찰국에 구검되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대표에 피임되었고, 그 해에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국민대학(國民大學)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의 5·10선거 당시 사천·삼천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1년 해인중고등학교를 창설, 이듬해에 해인대학(海印大學)을 설립하고 이사장 및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이후 다솔사의 조실(祖室)로 원효교학(元曉敎學) 및 다도(茶道) 연구에 전념하였고,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만년에는 오로지 불교인으로서, 평생 전념해온 원효 성사의 사상 및 그 교학의 복원과 연구에 전념하여 도제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또한 잊혀가던 차문화를 중흥시켜 현대 차도(茶道)의 중흥조로 불렸다.

 

1979년 7월 10일 서울에서 입적하자 다솔사에 부도(浮屠)를 봉안하였다.

1996년 10월 9일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2021314일 현재 부도탑은 그대로 설치되어 있다.

 

효당의 학문적 관심은 원효(元曉)·의천(義天)·초의(草衣)·만해(萬海) 등에 많았다.

『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 元曉聖師般若心經復元疏』·『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모집 자료』·『해인사사간장경누판목록』·「해인사와 3·1운동」 등의 논문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한국의 다도』 등의 저서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불교근세백년』(강석주,중앙일보사,1980)

「효당종사의 생애」(김지견,『주간종교』,1986. 8. 27. )

집필자 : 집필 (1997년)김상현

 

◎ 긍정적 평가​

일선에서 물러나 원효대사의 사상을 연구하고, 사천에 차밭을 가꾸어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를 만들기도 했고, 한국 다도의 입문서인 《한국의 차도》를 집필하여 그동안 다수 소실되었던 한국의 다도를 복원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 부정적 평가​

국민대학교 이사장을 지낼 당시 신익희 총장 해임을 주도하여 반발을 샀다. 독립운동도, 친일행각도 분명한 사람이지만 역사에선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 호불호가 갈리고, 불교계에선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비판 받고 있다.

 

◎ 친일의혹설

1937년 여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 그해 12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북중국 지역에 출정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 불교 단체인 북지황군위문단의 단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만당을 들기 이전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기초의원이었으며, 관동군에 위문행렬을 열고 일본 승려들과 다솔사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효당 최범술

◎ 약력​

일본 대정대학 예과 수료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 졸업

조선불교중앙총무부장

재단법인 불교중앙교단 이사

재단법인 가야총림 이사

해인사 주지

국민대학 이사장

해인중고등학교 창설

해인대학(海印大學) 설립, 이사장 및 학장

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경남 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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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 최범술 스님은 수많은 업적에도 불교계에서 조차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처승(帶妻僧)이었기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 대처승(帶妻僧) : 결혼하여 아내나 자식을 두고, 경우에 따라 육식을 하는 승려

 

참고로 일제시대에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대처승이었다.

해방 무렵에 전체 불교계에 결혼한 대처승이 결혼하지 않은 비구승보다 더 많아졌다.

 

1954년 5월 20일에 대통령 이승만이 유시를 발표하여 대처승은 일본 제국의 잔재이므로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담화문을 계기로 대처승과 비구승 간의 긴 분쟁이 발생했다.

 

대처승을 허용하는 파벌은 한국불교태고종을, 허용하지 않는 파벌은 대한불교조계종을 구성했다.

태고종은 1954년의 이승만 유시로부터 촉발된 사태를 불교계의 법난으로, 조계종은 왜색 척결을 위한 불교계 정화로 인식하여 시각 차이를 드러낸다.

 

태고종 측은 대처승을 허용한다뿐이지 비구승이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태고종 승려는 모두 대처승이라는 항간의 오해에 대해 경계했다. 또한 일본식이거나 세속화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오랜 분규와 물리적 충돌의 반복 속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대처승이라는 용어 대신 기혼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한편, 북한에는 가정이 있고 삭발하지 않으며 절에도 상주하지 않는 승려가 있어 대한민국의 대처승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나, "대처승"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는다.

 

효당의 부인 채정복(蔡貞福) 효당사상연구회 회주

독립운동가 효당 최범술(崔凡述) 스님 문집 펴낸 채정복(蔡貞福) 효당본가 반야로 차도문화원 본원장 <출처 : 월간조선>

 

오른쪽부터 채원화 원장, 효당 최범술 선생, 연세대 황원구·고성환 교수.1969년 촬영 <출처 : 현대불교신문>

 

광명학원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 3번째가 효당, 4번째가 김동리(교사), 왼쪽 끝이 김동리 첫 부인 <출처 : 불교평론>

 

독립운동가이시며 차인이셨고 초대 제헌 국회의원, 다솔사 주지로 지내면서 차를 알리고 이 시대의 차(茶)세계를 정립하는데 이바지한 효당(曉堂) 최범술 선생(1904~1979)의 발자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차인 효당 전시관 추진위원회(위원장 성원스님, 강화 선원사 주지)는 92주년 2011년 3.1절인 지난1일 오후3시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자락 다솔사 입구 휴게소 건물 2층 264㎡에 효당 전시관 개관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차단체 관계자, 불자, 승려 등 100여명이 함께 했다. 전시관은 건물주이자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성언 씨가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곳에 전시관을 개관하게 된 동기는 성원스님이 연꽃을 심기 위해 사남면 일대 적지를 찾아 다니던 중 효당 스님과 묘인 스님의 고향이 다솔사 임을 알고 지난 2010년에 본격 전시관 개관을 서두르게 되었다.

 

전시관에는 효당 선생의 둘째 딸이자 전시관장인 묘인 스님이 지난해 가을부터 각종 자료들을 정리했다.

독특한 서체로 쓴 붓글씨와 다솔사 대웅전 앞에서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 저술한 책(한국의 차도, 보련각) 자필원고 등 10여점이 전시되어 효당 선생의 발자취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관장인 묘인 스님은 이날 인사말을 하던 중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잊지 못해 한참을 묵묵히 서 있기도 했다.

또 “이 전시관은 평생을 올 곧게 살아 온 효당 선생의 얼굴과 넋이 될 것”이라며 그를 기렸다.

효당 선생은 고향이 사천이다. 1916년 다솔사로 출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