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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공단(宋公壇) 편액 - 박정희 대통령

by 연송 김환수 2021. 3. 6.

송공단(宋公壇) 은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왜란 때 순절한 여러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단(祭壇)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에 있다.

 

宋公壇(송공단) 박정희 대통령 편액 - 부산 동래시장

 

鳶鳴 / 두인(頭印) 

宋公壇

一九七二年 三月 二十五日

大統領 朴正熙 / 正熙(낙관)

七十三翁石佛謹鐫

 

鳶鳴(연명) / 솔개연, 울명 / 두인(頭印) : 수인首印. 서화작품의 우측 머리 부분에 찍는 인장(印章)으로 두인은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글귀로 작가의 개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宋公壇(송공단)

 

一九七二年 三月 二十五日 (1972년 3윌 25일)

大統領 朴正熙 / 落款 正熙(대통령 박정희 / 낙관 정희)


十三翁石佛謹鐫(칠십삼옹석불근전)

칠십삼세노인 석불 삼가 세기다.

 

1972년의 박대통령 송공단 글과 석불 선생의 출생년도 1899년을 감안하면 73세가 맞네요.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1899~1989) 선생은 대한민국 국새(國璽) 1호를 제작하신 당대의 최고 전각가입니다.

 

송공단 입구 외삼문에 걸려 있는 박정희 대통령 편액 - 宋公壇(송공단)

 

위 사진 첫번째 출입문에도 오래된 송공단 편액(아래사진)이 걸려 있는데 1972년 이전의 편액인 듯.

 

위 송공단 편액은 박대통령 편액이전의 현판으로 추정되는데 송공단 외삼문 왼쪽의 별도 출입문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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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공단(宋公壇)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제11호(1972.6.26)

 

부산 송공단(釜山 宋公壇)은 1742년(영조 18년) 조선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장군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가 있던 곳에 설치한 단으로서, 송상현공을 비롯하여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기념하여 만든 제단이다.

 

송공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현 부산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사람들의 전망제단(戰亡祭壇)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 양산부사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을 비롯한 순절의사들을 모셨는데, 1742년(영조 18년) 송공단으로 옮겼다.

 

송공단은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을,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文德謙),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서단에는 노개방(盧蓋邦)의 부인,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 정발의 첩 애향(愛香), 남단에는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과 두촌녀(二村女) 및 무명전망인을 모시고 매년 4월 15일 관에서 제사를 올렸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서 부산첨사 정발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부사맹(司猛) 이정헌(李庭憲)을 모셨으며, 1766년(영조 42년)에는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유생 양조한(梁潮漢)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후 부산진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은 정공단, 그리고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하신 분들은 윤공단으로 옮겨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매년 순절하신 날인 음력 4월 15일에 (재)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지금 동래시장 안에 있는 송공단은 부산광역시에서 1971∼1972년 대대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전면 입구에 외삼문·협문(夾門)이 있고, 재실 1동이 있으며 안에는 축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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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 정기호(石佛 鄭基浩) / 1899 ~ 1989

 

1949년 대한민국 국새 1호 제작. 옥새 전각장(玉璽 篆刻匠)이다.

 

정기호(鄭基浩)는 창원에서 부유한 면장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각가로는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1912년 마산 창신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6세 때 황소산(黃蘇山)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조선 옥새 전각장 계보(朝鮮 玉璽 篆刻匠 系譜)에 의하면 황소산은 옥새 전각의 계보를 이어 온 인물이다.

 

옥새 전각의 계보는 조선 후기 보장(寶匠)인 김익수(金益壽), 시불 황식(示佛 黃識), 대한제국의 옥새를 만든 토불 황소산(吐佛 黃蘇山)을 거쳐 그에게 이어진 것이다.

 

17세 때 정인보(鄭寅普)의 추천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10년간을 수학하고 192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찌다 도손(兄達 疇村), 이시이 소새기(石井 雙石)와 실력을 겨루었다.

 

이곳에서 마에시지 마지요꼬(前島千 代子)와 결혼하였다. 강렬한 중국의 기법을 익히고 일본의 풍부한 조화 기법을 배워서 선이 굵고 속기가 없는 한국적 독창성과 접목시켰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인격과 예기를 갖춘 성품을 지녔다.

 

1948년에 대한민국 국새 1호를 제작하여 1949년 5월 5일부터 대한민국 국새로 사용하였다.

서예가 김태석 인문(국새글씨,도장글) / 석불 정기호 전각

1955년 마산 창동에서 고죽당(古竹堂) 전각부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1974년에 눌원 문화상을, 1984년에는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에는 아들 정민조와 함께 부자전을 열기도 했다. 아들인 목불 정민조는 민홍규의 옥새 전각장에 의혹을 제기해 바로잡은 바 있다.

 

석불은 외아들 목불에 이어 손자 경원군이 4세 때 토불(土佛)이라는 호를 내려 3대가 전각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불(佛)자 돌림의 부자손이 되었다.

 

정기호의 국새 전각은 아들 목불 정민조가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계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손자 정경원도 대를 잇고 있다.

 

정기호는 생전에 다도로 심신을 수련해서 다도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일본 수상이 방문하였을 때 석불이 새긴 반야 심경(般若心經)을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그 가치가 드높았다.

 

1980년에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2005년에는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한국미술관에서 전 일본 수상의 부인인 ‘미기 무스꼬’, ‘석불 정기호’, ‘목불 정민조’의 3인전을 개최하였다.

 

현재 석불선생의 아들인 목불(木佛) 정민조(鄭民朝) 선생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6호 동장각장(銅章刻匠)이다.

 

동장각은 국새, 옥새 등 도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속에 인문(印文)을 새기는 기술을 말한다. 동장각장의 전승 계보는 황소산(黃蘇山),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목불(木佛) 정민조(鄭民朝)로 이어진다.

 

참고로 대한민국 국새는 1948년 건국과 함께 첫 국새인 개국(開國) 국새가 제작되었다.

대전 국가기록원의 관인대장에 따르면 국새의 인문(印文)은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로 은으로 만들었다.

1963년 2번째 국새로 교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분실상태로 정확한 인뉴(印紐)의 생김새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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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새 변천 현황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사진에 따르면 인뉴(印鈕)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짐승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 공무원이 인뉴는 용 모양이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아래 사진이 1대 국새를 찍은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재질은 은이고 크기는 인면(印面) 부분이 정사각형으로 한 면이 2치(약 6 cm)이다.

인면에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고 전서체로 새겼다.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기록에는 1948년에 서울 충무로에 있는 천상당(天賞堂)이라는 곳에서 제작했다고 서술했다.

국새 사용기간: 1949년 5월 ~ 1962년 12월 31일

대한민국 국새 1호에 새겨진 서예가 김태석의 글씨. /사진제공=문화재청

 

대한민국 국새 1호의 도장글(印文)을 쓴 인물은 서예가인 성재 김태석(1874~1951년)이다.

 

김돈희·오세창과 더불어 근현대 서예계를 주름잡았던 그는 고종과 순종의 인장은 물론 대만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에게 옥새를 새겨줄 정도로 널리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오늘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시정부 수립 30주년이 되는 해에 국새 제작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마주한 그가 쓴 문구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였다. 하지만 그의 글씨가 담긴 대한민국 국새 1호의 실물을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국새를 비롯해 초대 행정부의 관인(官印)이 1960년대 즈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대 국새 실종사건

 

2005년 감사원 감사 결과 1대 국새와 1대 대통령인이 분실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국새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제헌 헌법 원문도 분실되어 국가기록물 관리가 그동안 허술했음이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에서는 대략 1965-66년 사이에 분실된 것으로 추정했다. 2대 국새를 새로 제작한 뒤 1대 국새를 금고에 넣어두었는데, 국새 관리부처가 바뀌는 와중에 잃어버린 듯하다. / 연합뉴스 기사

 

1대 국새와 관련해서는 이상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록에 남은 사진에는 1대 국새의 인뉴가 어떤 짐승 모양이다. 하지만 1대 국새를 실제로 다루었던 당시 공무원은 인뉴가 용 모양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각장 정기호(鄭基浩)는 생전에 자기가 1대 국새를 만들었다면서 도면을 남겼는데, 이 도면에도 인뉴가 용 모양이다. 국새는 나라를 상징하는 도장인 만큼 인뉴 모양으로 특별히 상서로운 상징을 고르는 법이다.

또한 위 사진에도 나오듯이 어떤 짐승이 인면 위에 비스듬히 앉았다.

인뉴의 동물들은 인면에 새기는 글자와 평행하게 똑바로 있음이 통례인 만큼, 인뉴 짐승의 이런 자세는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잘 쓰던 1대 국새를 왜 폐기하고 2대 국새를 새로 제작했는지도 의문인데, 제5대 국새 백서에는 "국새는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1962년 제작되었다." 하고 설명했다.

게다가 1대 대통령인까지 같이 분실되었기 때문에,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고위층 인사가 1대 국새와 대통령인을 작정하고 빼돌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겼다.

 

국가기록원에서 현상금을 걸어 수배했으나, 처음 분실 사실이 발표된 2005년부터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