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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부산전통예술관 - 상설전시실 (1층)

by 연송 김환수 2020. 5. 27.

부산전통예술관은 부산에 있는 기능분야 국가 무형문화재 및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 및 전통예술 활성화를 위하여 지상 3층 규모의 예술관을 건립하여 2019418일 개관하였다.

국가 및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기능분야 11종목(국가1, 부산10) 보유자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전승 전수교육을 통해 우리 지역 무형문화재의 우수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4호이신 전각장(篆刻匠) 청계(晴溪) 안정환(安定煥) 선생의 작품을 비롯하여 무형문화재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정보

 

부산전통예술관 https://www.btac.co.kr/

 

- 관람시간: 매일 10:00 ~ 17:00

- 휴관일 : 11, 설날, 추석 연휴 등 법정 휴일

- 관람료 : 무료

- 전화 : 051-7582530~1

- 위치: 부산 수영구 수영로521번길 63

- 도시철도 : 부산도시철도 2호선 금련산역 하차 2, 4번 출구 이용

 

- 버스 : 금련산역 정류장 하차 도보 15

전각장 청계 안정환 전시작품

和孔密州五絶, 東欄梨花화공밀주오절, 동란이화

공밀주의 오언절구에 답하여, 동쪽 난간 가에 핀 배꽃

 

蘇軾 (소식) = 蘇東坡 (소동파)

 

梨花淡白柳深青 (이화담백유심청) 이화는 담백하고 버들은 짙푸른데

柳絮飛時花滿城 (유서비시화만성) 버들개지 날릴 때 성에 배꽃 가득 피네

惆悵東欄一柱雪 (추창동란일주설) 슬프도다 동쪽 난간에 하얀 꽃 핀 배나무

人生看得幾清明 (인생간득기청명) 사는 동안 몇 번이나 맑은 네 모습 다시 볼까

 

◇ 孔密州(공밀주): 밀주지주密州知州 공종한孔宗翰을 가리킨다.

◇ 柳絮(유서): 버들개지, 버들솜. 버드나무의 꽃

◇ 惆悵(추창): 낙담하다. 슬퍼하다. 쓸쓸하다. 실의하다. 근심하고 슬퍼함

◇ 雪(설): 앞 글자 ‘柱’와 붙여 읽을 때 ‘雪’은 ‘눈’이 아니라 ‘눈처럼 흰 배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 淸明(청명) : 맑고 밝음. <청명절>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권력이나 젊음의 무상함을 말할 때 자주 쓰는 말로

‘권불십년權不十年’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만한 게 없다.

 

십 년 가는 권력이 없고, 열흘 가는 꽃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봄에 피는 배꽃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피었는가 하면 곧 지고 마는 배꽃에게는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조차도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시는 <동파전집(東坡全集)>에 ‘화공밀주오절 동란이화(和孔密州五絕·東欄梨花)’라는 제목으로 실려있으며 소식(소동파)가 후임인 공종한(孔宗翰) 밀주지사(密州知州)의 시 오언절구에 답한 것이다.

 

소식은 혁신 정치 세력에 밀려 항주(杭州), 밀주(密州 = 현 산동성(山東省) 제성(諸城)), 서주(徐州 = 현 강소(江蘇)), 호주(湖州 = 현 절강(浙江)) 등의 지방관을 주로 역임하였다.

 

○ 공종한孔宗翰 (1029? ~ 1088?)

 

자는 주한周翰, 공자孔子의 46대손으로 곡부曲阜(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속한다)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한 뒤 고향 선원현仙源縣(지금의 곡부현曲阜縣)에서 벼슬을 살았고, 여러 지역의 지주知州를 지냈다. 건주虔州에서 근무할 때는 수해를 잘 막아 조정에서 그를 치하하는 소리가 높았다

 

○ 소동파(소식, 蘇軾, 1037년~1101년)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소동파(蘇東坡)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