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 예 방/청계 안정환

낙화암 (落花巖) - 청계 안정환

by 연송 김환수 2020. 2. 29.

낙화암(落花巖) - 청계 안정환 (晴溪 安定煥) / 1986SEOUL 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國破山河異昔時 獨留江月幾盈虧

국파산하이석시 독류강월기영휴

 

落花巖畔花猶在 風雨當年不盡吹

낙화암반화유재 풍우당년부진취

                                

                                 晴溪 安定煥

                                 청계 안정환

--------------------------------------------------------------------------

 

晴溪 安定煥 (청계 안정환)

雅號 : 晴溪

別號 : 禮堂. 詩庵, 金井山主人, 詩禮山房主人

 

작가 약력(略曆) 및 경력(經歷)

동경 아세아 미술대전 초대작가 동 초대작가상

일본 동화미술대전 추천작가 동 추천작가상

한중일 초대전 초대작가

SEOUL 미술대상 (1986SEOUL 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대한민국 서예전 초대작가




落花岩 (낙화암) / 晴溪 安定煥 (청계 안정환) / 1986SEOUL 美術大展 서예부문 대상


이 시는 조선중기의 문신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의 낙화암(落花巖)이라는 한시이다.



落花岩 (낙화암) /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

 

國破山河異昔時 (국파산하이석시)

나라(백제)는 없어지고 산천도 많이 변했는데

 

獨留江月幾盈虧 (독류강월기영휴)

홀로 강위에 떠있는 달은 언제나 변함이 없구나

 

落花巖上花猶在 (낙화암상화유재)

낙화암 기슭에는 아직도 꽃이 피고 있으니

 

風雨當年不盡吹 (풍우당년불진취)

모진 비바람도 그 해에 모두 떨어뜨리지 못하였음이라.

 

원문 번역

백제란 나라는 망했고 산천까지도 많이 변했건만

저 강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은 변함이 없구나

낙화암의 바위 틈엔 아직도 꽃이 피어 있고

바람과 비는 지금도 불기를 다하지 않는구나


나라(백제)는 없어지고 산천도 옛날과 다른데

강물에 달빛만 홀로 찼다 이지러지기 그 얼마이던가

낙화암 언덕의 꽃은 아직도 피고 있으니

그때 모진 바람 칠 때에 모두 날리지 않았음이라.

 

시제는 낙화암을 다녀와서로 번역된다.

國破 : 나라가 망하다. 山河 : 산천. 異昔時 : 옛적과 다르다.

: 홀로. 留江月 : 강위에 떠있는 달. 幾盈虧 : 몇 번이나 이지러지고 찼다. 곧 변함이 없다.

落花巖 : 낙화암 가에. 부여에 있음. 花猶在 : 꽃은 아직도 있다. 風雨 : 바람과 비. 當年 : 금년에. 不盡吹 : 다 불지 않고 있다.

 

작가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1497154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22(중종 17) 사마를 거쳐, 152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정자를 지내고,

153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성·보덕·집의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그 뒤 좌승지·한성부우윤·이조참의를 지냈다.


==================================================================================== 

석벽 홍춘경 (石壁 洪春卿)

 

洪春卿(1497年 燕山君3~1548年 明宗3)朝鮮 中期文臣으로 本貫南陽. 明仲, 石壁이다.

高祖司宰監 直長을 지낸 洪智이고, 曾祖同知成均館事를 지낸 洪敬孫이며, 祖父奉常寺副正을 지낸 洪閏德이며, 아버지는 藝文館 待敎를 지낸 洪係貞이며, 어머니는 彦陽金氏縣監을 지낸 金期壽의 딸이며, 첫째 夫人郡守를 지내고 固城君追贈李孟友의 딸 固城李氏이고, 둘째 夫人江陵金氏學生 金演의 딸이다.

 

1522(中宗17) 生員試3으로 及第하였고, 1528(中宗23) 式年文科乙科及第하여 弘文館 正字始作으로 修撰, 應敎 等을 지냈으며, 1536(中宗31) 文科重試壯元及第하여 司成, 都承旨, 禮曹參議에 올랐다.


1540(中宗35) 軍器寺正으로서 式年試試驗官을 맡았고, 이듬해 聖節使나라에 다녀왔다. 以後 左承旨, 漢城府 右尹, 吏曹參議, 黃海道觀察使 等歷任하였다.

 

1545(仁宗 元年|明宗 卽位年) 吏曹參議中宗墓誌를 쓸 때 靖陵移葬事緣을 넣어 글을 지었다. 1547(明宗2) 兵曹參議를 지냈고, 이듬해 世上을 떠났다.


性品剛直하여 時俗에 따르지 않는 文章을 지었는데 특히 金生體의 글씨에 하였다고 한다. 洪春卿末年楊州 湘水里落鄕하여 물가 赤壁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石壁이라는 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홍춘경 묘표문

 

공의 이름은 춘경(春卿)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며 호는 석벽(石壁)이고 남양 사람이며, 고려 때의 공신으로 태사의 관직에 오른 열()의 후손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경손(敬孫)이고 관직은 동지성균관사를 지냈으며 조부 윤덕(閏德)은 봉상시부정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계정(係貞)으로 예문관대교였고 어머니는 정부인 언양 김씨(彦陽金氏)로서 홍치 정사년(연산군 3, 1497)생이다.


임오년(중종 17, 1522)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자년(중종 23, 1528) 문과에 급제했으며 병신년(중종 31, 1536) 중시에서 장원급제해 관직은 관찰사로 끝마쳤다. 52세까지 살았다.

 

관직을 역임한 것을 보면 홍문관에서는 정자와 수찬에서 응교에 이르렀고 시강원에는 사서와 문학으로부터 보덕까지 올라갔다.

승정원에서는 주서에서 시작하여 도승지까지 올랐고, 예조와 병조에서는 좌랑에서 참의까지 역임했다.

 

사간원에서는 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의정부에서는 검상을, 공조와 이조에서는 참의를 지냈고 호당사가(湖堂賜暇)에 뽑혔으며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조칙을 가져온 사신의 좌빈(佐儐)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어야 하는데 공을 선택하자 그에 응했다. 중국사신 한림 공용경(用卿)이 극구 칭찬하자 일대의 영광으로 여겼다.

 

공의 성품은 효도하고 우애하며 강직하고 방정했다. 모습이 청수하고 파리하여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으나 의를 보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여 여러 번 권간(權奸)으로부터 액운을 당했으나 다행히 화는 면했다.

 

문장을 지을 때는 근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오랜 옛 법을 좇아 통속적인 것을 버리고 삼대(三代)와 양한(兩漢)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으며 필법도 옛 것을 준수했다.

 

전 부인 이씨는 고성군(固城君) 맹우(孟友)의 딸이고 후 부인 김씨는 학생 연()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이씨의 소생이다.


맏아들 천민(天民)은 도승지였고 둘째아들 일민(逸民)은 연기현감을 지냈으며 막내아들 성민이(聖民)은 대제학 익성군이다.


맏딸은 현감 변개(邊愷)에게 시집가고 둘째딸은 학생 송상인(宋尙仁)에게 출가했다. 승지 홍천민의 아들 서룡(瑞龍)은 금산군수이고 서봉(瑞鳳)은 예조판서이다.

딸은 학생 남격(南格)에게 출가했다. 연기군수 일민의 아들 영필(永弼)은 진사이고 영희(永禧)와 영수(永壽)는 학생이다. 맏딸은 충의위 박덕남(朴德男)에게, 둘째딸은 충의위 이징(李澄)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영순(永順)은 생원이고 영부(永孚)는 군수이다. 익성군의 아들 서익(瑞翼)은 참의이고 딸은 참판 김시헌(金時獻)에게 시집갔고 측실 소생의 아들 서한(瑞翰)은 진사이다.

서룡의 아들 명현(命顯)은 별제이고 서봉의 아들 명일(命一)은 진사이다. 영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명원(命元)은 관찰사이고 명형(命亨)은 승지이다.

영희의 맏아들은 명달(命達)이고 나머지 둘은 어리며, 서익의 아들 명구(命耉)는 승지이고 명하(命夏)는 생원이다.


공이 의정(議政)이 된 것은 익성군이 두 번 책훈을 받아 관직 1품을 추은(推恩)받은 결과이다. 부인에게 증직한 정경부인의 직함은 공의 관작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손자 분충찬모 정사갈충 효성병기 영사공신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지의금부 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익영군(益寧君) 서봉 지음.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개성부유수 강화유수 도순찰사 관향사 이홍주(李弘胄) 글씨.

 

숭정 3(인조 8, 1630) 경오년 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