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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춘풍추상 -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by 연송 김환수 2019. 1. 13.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春風)처럼 너그럽게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가을 서리(秋霜)처럼 엄하게 하라는 뜻이다.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말은 명대(明代)의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집 위대한 생애” (1989, 민족중흥회 발행, 비매품)에도 수록되어 있다.

持己秋霜 待人春風 一九七六年 丙辰 元旦 大統領 朴正熙

지기추상 대인춘풍  1976년    병진  원단 대통령 박정희


채근담(菜根譚)을 지은 홍자성(洪自誠)1600년대 전후 중국 명나라 신종대의 사람으로,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경력이나 인물됨에 대해서도 알려 진 바 없으며 스스로 환초도인(還初道人)’이라 불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춘풍추상(春風秋霜)이란 춘풍(春風)’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고, 추상(秋霜)은 가을 서릿발처럼 매섭고 엄하게 한다는 뜻이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春風)처럼 너그럽게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가을 서리(秋霜)처럼 엄하게 하라는 뜻이다.

 

201825,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 고 신영복 교수가 쓴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글귀가 담긴 액자를 하나씩 선물했다.


 

 춘풍추상은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에서 비롯된 말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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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風解凍 和氣消氷 (춘풍해동 화기소빙)

 

家人有過(가인유과)거든 (집안 사람에 허물이 있거든)

春風解凍 和氣消氷 (춘풍해동 화기소빙) 하라

 

잘못을 나무랄 때는 마치 봄바람이 언 땅을 녹이듯이 하라.

채근담(菜根譚)전집 제96장

 

 

봄바람에 얼음을 녹이 듯 따뜻한 마음으로 타이르는 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훌륭한 방법이다.

    

 

 
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 말기에 문인 홍자성(홍응명(洪應明),환초도인(還初道人))이 저작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전편 222조, 후편 135조로 구성되었고, 주로 전편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말하였고, 후편에서는 자연에 대한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처세를 다룬다.
 
채근이란 나무 잎사귀나 뿌리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말한다. 유교, 도교, 불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교훈을 주는 가르침으로 꾸며져 있다.


서양에 삶의 명언들이 가득 담긴 탈무드가 있다면 동양에는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채근담이 있다.
 

 

 

  

春風解凍 和氣消氷 (춘풍해동 화기소빙)

봄바람에 얼어 붙은 것을 녹이듯이 / 온화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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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人有過, 不宜暴怒, 不宜輕棄 (가인유과, 불의폭노, 불의경기)

집안 사람에 허물이 있으면

지나치게 화를 내서도 안 되고

가볍게 흘려버려서도 안 된다.

 

此事難言, 借他事隱諷之 (차사난언, 차타사은풍지)

그 일로 말하기 어려우면

다른 일을 빌려 은근히 깨우쳐야 하니,

 

今日不悟, 俟來日再警之 (금일불오, 사래일재경지)

오늘 깨닫지 못하거든

내일을 기다려 다시 깨우쳐야 하니,

 

如春風解凍, 如和氣消氷, 纔是家庭的型範 (여춘풍해동, 여화기소빙, 재시가정적형범)

마치 봄바람이 언 것을 풀고, 온화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 하여야, 이것이 곧 가정의 규범이 되리라.

 

晴溪 安定煥 (청계 안정환)

  

"봄바람이 언 것을 녹이고 화기가 얼음을 녹이듯"이라는 구절은 과실에 대하여 처벌 위주로 치닫는 관리주의(管理主義) 교육이 정신적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가장(家長) 또는 기업주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맹자』에도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라는 명구가 있는데 이 구절 역시 인간 상호간의 화해를 강조한 말이다.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같지 않고, 땅의 이득은 사람들의 인화만 못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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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간에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 家人有過(가인유과)

家人有過(가인유과)거든 / 집안식구에게 허물이 있으면

不宜暴怒(불의폭노)하고 / 사납게 화를 내어도 마땅치 않으며

不宜輕棄(불의경기)라 /  가벼이 버려서도 안된다. 버릴 기

此事難言(차사난언)이거든 / 그 일을 바로들어 말하기 어렵거든

借他事隱諷之(차타사은풍지)하고 / 다른 일을 빌어 은연중에 일깨워 주고 풍자할 풍, 욀풍

今日不悟(금일불오)거든 / 오늘 깨닫지 못하거든

俟來日再警(사내일재경)하고 / 내일을 기다려 다시 깨우쳐 주어서 기다릴 사

如春風解凍(여춘풍해동)하며 / 마치 바람이 얼어 붙은것을 녹이고

如和氣消氷(여화기소빙)하면 / 따뜻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 하는것이

纔是家庭的型範(재시가정적형범)이라 / 가정의 전형적인 규범이다. 재주 재, 잿빛 삼

 

남과 불화(不和)하면 관계를 끓고 지낼 수 있으나 가족사이가 불편한 관계에 놓이면 이는 천륜(天倫)에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식 교육을 친구사이에 바꾸어 했는데 이는 자칫 잘못하면 부자 사이에 불화가 있을까 염려해서 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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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선(禪)은 이름을 붙일 수 없고 - 晴溪 安定煥 (청계 안정환)

 

 

(선)

禪可禪非眞禪 (선가선비진선)

色可色非眞色 (색가색비진색)

眞禪無名 眞色無色 (진선무명 진색무색)

此是 眞空妙有 禪也 (차시 진공묘유 선야)

 

 

선(禪)을 선이라 하면 참된 선이 아니요.

색(물질)을 색이라 하면 참된 색이 아니다.

참다운 선은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진정한 색은 색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텅빈 가운데 묘(妙)함이 있는 선(禪)이니라.

 

 

詩禮山房主人 (시례산방주인) /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출생

晴溪居士 (청계거사) / 서예가 安定煥 (안정환)

別號 : 禮堂. 詩庵, 金井山主人, 詩禮山房主人

약력(略曆) 및 경력(經歷)

晴溪(청계) 安定煥(안정환) 작가

- 동경 아세아 미술대전 초대작가 동 초대작가상

- 일본 동화미술대전 추천작가 동 추천작가상

- 한중일 초대전 초대작가

- SEOUL 미술대상

- 대한민국 서예전 초대작가

-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 국민예술협회 초대작가

- 서울미술협회 초대작가

- 서예박물관 작품소장

- 부산시 문화대상 수상

-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24호 전각장(釜山市 無形文化財 第24號 篆刻匠)

- 청계전각연구실 인간문화재 소장

- 개인전 16회(釜山, 日本, 東京 各地域)

 

 

 

 

門 갑골문, 50×60cm, 晴溪(청계) 安定煥(안정환)

제7회 (사)대한민국서화디자인협회 "국제서화만세" 전, 2018.6.11-6.17(부산시청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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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溪(청계) 安定煥(안정환)은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24호 전각장(篆刻匠)이며 서화가(書畵家)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안씨(安氏)로 대종회 임원인 외임유사를 맡아 봉사하고 있으며, 경남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 (김해 예동<禮洞>) 출생이다.  전각장(篆刻匠)은 전통기법으로 나무, 돌, 금속, 갑골 등 단단한 물질에 글자나 문양을 새기는 장인을 말한다.   전각장(篆刻匠) 안정환은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조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익혔고, 저명한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던 부친(父親)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에게서 전각을 사사 받았다.   전각 분야에서 55년 이상 종사해왔는데 목각과 석각 외에도 동각(銅刻), 와각(瓦刻), 도자각(陶瓷刻), 금속각(金屬刻)에 두루 능하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은데 부친으로 부터 서법(書法)을 구(求)한지 70여년이 넘었다.   그는 조선시대 추사의 맥을 이은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기법과 그에 앞선 서도(書道)의 자세와 세예가로의 심상’을 잊지 않고 전각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 금강공원 정문의 현판인 “金剛公園(금강공원)”은 추사체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서예가(書藝家)이며 서화가(書畵家)이신 晴溪(청계) 安定煥(안정환)의 글씨다. 

 

 

 

 


전각장(篆刻匠) 청계(晴溪) 안정환(安定煥)
 
안정환(安定煥)의 부친(父親)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 1917~2004)의 本名은 안병업(安秉業)이며 경남 김해(金海)에서 태어났다. 1917년 일제 징용을 피하고자 사문(寺門)에 들어가 동래 범어사의 하동산(河東山)(1890~1965) 큰 스님 밑에서 불도를 닦았다. 그러던 중 글씨를 쓰고 나무토막에 글을 새기는 일을 즐겨하는 청사의 모습을 지켜 본 큰 스님이 정식으로 전각을 배우기를 권하여 소개한 이가 큰 스님의 외삼촌인 오세창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1942년부터 절과 서울을 오가며 7년이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도필생애(刀筆生涯)의 역정(歷程)이 시작되어진 것이다. 얼마 후 사문(寺門)을 떠났지만 진심으로 매달린 전각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해방되던 해에 환속한 고인은 그 해 부산교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했으며, 1952년에는 중국 갑골학(甲骨學)의 대가인 동작빈(董作賓)(1895~1963)에게 갑골문을 배웠으며 이 무렵에 동래여고와 한성여대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청사의 전각 작업 영역은 印章史나 다름 아니다. 갑골(甲骨) · 종정(鐘鼎) · 고전(古篆) · 대전(大篆) · 소전(小篆) · 한인(漢印) · 새인(璽印) · 무전(繆篆) · 조충전(鳥蟲篆) · 초형(肖形) 등에 걸쳐 어느 영역도 소홀히 하지 않고 시종일관 천착(穿鑿) 하였다. 청사의 서예와 전각은 고증학적 분위기와 괘를 같이 하여 전각예술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청대(淸代) 제가(諸家)들의 영향이 농후하다. 제백석 · 오창석 · 오양지 · 조지겸 등 전각 거장들의 필의(筆意)와 도법(刀法)의 기초 위에 선생의 심미안적 안목이 응집되어 표출되어지고 있다.
 

그는 1996년 9월 30일에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전각 920과(顆)를 포함하여 소장품(글,자료) 1,027점 (싯가 30억원 상당)을 기증하여 한 평생 철필(鐵筆) 공력이 사물화(私物化) 되지 않게 후인의 교화(敎化)를 위해 남겨두었다.
청사의 전각은 그의 저서인 <이여인존(二如印存)> · <법계인류(法界印留)>와 1997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행한 <전각 · 판각(板刻) · 서법(書法) 청사 안광석>에서 그의 인흔(印痕)을 볼 수 있다.

 
안정환의 부친 안광석은 범어사의 동산 혜일에게로 출가하여 동산의 외숙인 오세창에게 사사를 받아 전각계의 한 축을 구축하였다. 안정환은 부친에게서 전각을 사사 받아 이 분야에 계속(55년 이상) 종사한 자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을 1대로 이어온 6대 전각 장인 무형문화재 청계 안정환 선생의 전각장 기능 보유자 전승계보는 한국 전각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로 세한도를 받은 우선 이상적(2대)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역매 오경석(3대)에게 전수되었으며, 오경석은 그의 아들인 위창 오세창(4대)에게 전해 다시 일가를 이루었다.
청사(晴斯) 안광석(5대, 1917~2004) 전각장 보유자인 안광석의 아들인 안정환(6대,安定煥)도 부산에 정착하여 부친의 뒤를 이어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전각장(篆刻匠) 안정환의 계보는 추사 김정희(1대)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 이상적(2대), 이상적의 제자 오경석(3대), 오경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오세창(4대), 오세창의 제자인 안광석(5대), 안광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안정환(6대)으로 이어졌는데 한국 전각의 정통 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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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업이 만난 부산의 문화지킴이들 - (43) 전각장 안정환
일간리더스경제신문 승인 2015.05.25
http://leaders.asia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633 본문 일부 발췌
 
추사로 부터 이어오는 한국 전각의 정통맥을 잇는 전각장(篆刻匠) 안정환(安定煥·72)은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詩禮里) 상촌마을 광주 안씨 진사댁 후손으로 7세 때 조부(안우진)께 천자문부터 배웠다. 그리고 소학, 명심보감, 사서오경을 익히면서 서체와 필법을 익혔다.
 
조부는 부친(安光碩)을 일제 말기 보도연맹을 피해 동래 범어사에 출가시켜 동산(東山) 혜일(慧日) 큰스님에게 맡겨진다. 법명을 대희(大喜)라 했다. 청남 오재봉과 동문 수학한다. 동산스님은 손재주가 빼어나 글을 잘쓰고 인장을 곧잘 새기는 대희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서울 조계사로 보내면서 “저녁 예불이 끝나면 주지스님 허락받아 외삼촌 오세창 문하에서 서예와 전각을 배우도록 해라”는 동산스님의 편지와 대희의 작품을 본 오세창이 문하생으로 거두었다.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와 와당, 갑골문과 전각에 있어서 당대의 일인자 오세창(吳世昌, 오경석의 아들)에게서 배웠다. 이로 말미암아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과 이상적(李尙迪·1804~1865, 한어역관, 김정희 문인), 추사로 이어지는 학맥과 서맥을 잇게 된 것이다.
부친은 해방 후 부산의 대각사를 비롯하여 창원 등지의 절에서 주지로 근무했으나, 불교정화운동 때 환속하여 부산에서 한성여대 등의 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치기도 한다. 때맞춰 고향에서 중학 과정을 마친 안정환이 부친으로부터 서예와 전각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침 받는다.
배운대로 전각하였지만 잘못된 칼품이 보이면 나무람과 동시에 애써 새긴 전각을 도려내어 버려 다시 작업하게끔 훈련 받았다. 어른(부친)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잘못 새겼으니 파내어 버려야 해”라는 환청을 듣고 마음가짐을 다시한다. 그야말로 엄격하고 철저한 도제식(徒弟式)교육이었다.
 
1967년 해군제대 후 해외선박회사 매니저로, 무역회사와 선박회사를 설립(1980)하여 생활인으로서 모범을 보이면서도 붓과 칼을 놓지 않았다. 틈틈히 부친이 머물고 있는 대구·서울 등지에 가서 부친의 예술세계를 배우고 작업의 완성을 위한 예(藝)과 도(道)를 깨쳤다. 그러기에 안정환은 그의 부친의 공부를 닮아 전각의 기법뿐 아니라 서법도 바로 체득함으로써 각(刻) 기능만 앞세우는 여타 장인들과는 달리 전각의 자법(子法)·장법(章法, 문장구성법)·도법(刀法, 조각도 다루는 법)들을 모두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6년 서울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백제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도 수상하였다. 1993년 금정구 남산동에 전각연구실 ‘安之居’를 개설하였다. 편액은 부친이 이름지어 전각해 주었다.
 
대스승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를 익히고 연구하여 자신의 서체 ‘청계서체(淸溪書體)’를 만들었다(1999). 추사체를 닮아 글에 힘이 뻗치고 기운이 흘러 넘친다. 1980년 제1회 안정환 서도전을 부산일보 전시실에서 연다. 그가 속한 예비역 해군동지회 창립기념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였다. 이를 계기로 통영 앞바다에서 인양된 총통(銃筒)에 새겨진 14자 ‘一射敵船必水葬 龜艦黃字驚敵船’(한 번 쏜 화살은 적의 배를 장사 지내고, 거북선의 누런 글자만 보고도 적의 배는 도망간다)를 2.1m 종이게 써서 해군본부에 전달하게 되었고 해군본부는 이를 영인하여 ‘복사 불허’란 지시사항으로 각 함대에 배부하였다.
 
1988년 이후 일본의 각 지역을 돌면서 전시한다. 2000년 일본 구마모토 전통공예관 개인전, 2001년 대마도 예원전을 비롯하여 나가사끼전, 벳부시 우좌신궁 등의 개인전 초대전을 통해 한국의 서예와 전각의 우수성을 일본 등지에 알렸다. 이와 함께 근대일본미술협회와의 교류전도 어느듯 십수 회에 달한다. 국내 보다 일본에서의 활동이 컸다.
 
2008년 11월과 2012년 6월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청계 안정환 서도전」을 열어 반백 년 서예와 전각작업의 결실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의 도록에서 보는 청계의 글은 품위 있으면서 활달 경쾌하다. 1951년부터 64년 간 닦아온 외길 서예인의 장도(長途) 위에 45년 간의 전각인생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갑골문을 비롯한 전서와 예·행·초서를 망라하였다. 특히 그만의 필치로 만든 글(그림글자(?))은 아름답기까지하다. 꾸김살 없는 사군자와 군더더기 없는 전각은 작품성으로서도 빼어난다.
 
그의 전승계보가 독특한 서예경지와 전각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 이상적, 이상적의 제자 오경석,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 오세창의 제자 안광석 그리고 안정환으로 이어졌으니 서예에서와 전각에 있어서 한국 정통맥의 일가를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안정환에게 전각은 새기는 것이 아니라 찢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각칼은 칼이 아니라 철필이어서 돌을 찢어야 글을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서예에서 붓을 바로 세우듯이(中峯) 칼끝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붓에도 중봉과 측봉(側峯)이 있는 것처럼 칼에도 중봉과 측봉이 있어서 칼 쓰는 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칼을 잡는데(刀法)도 집도(執刀)와 칼을 움직여 나가는 운도(運刀)를 적절히 운용해야 한다. 오른손에 나무망치 들고 왼손의 칼 각도를 맞추어 조심스레 새겨 나가는 안정환 장인의 꼭 다문 입술은 순간 모든 기운에서 벗어나 오로지 판각을 응시하는 시선의 촛점으로만 집중하고 있다.
 
안정환은 증조부대로부터 진사집안으로, 영남의 이름난 한학자였던 조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추사의 맥을 잇는 부친으로부터 서예와 전각의 도를 깨쳤다. 그의 안광에서 예기(藝氣)가 흘러 넘친다. 붓을 쥔 손이 화선지 위에서 춤을 추면 붓따라 글이 기운차게 뻗고, 칼끝으로 새겨내는 전서는 새로운 서법을 탄생시킨다. 전각장으로서 스승들께 부끄럽지 않는 경지의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