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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송광사 (松廣寺) - 순천시 송광면

by 연송 김환수 2019. 6. 29.

송광사 (松廣寺) -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 www.songgwangsa.org/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큰 절이다.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광사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 길상사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힌다.


 

대길상사·수선사라고 했으며, “송광이라는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태조 4) ((()의 전당(殿堂)을 중건하였고, 1399(정종 1)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綸旨)를 내렸다.

1395(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1420(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1420(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이 절에서 16명이나 되는 국사가 나와 승보 사찰로 유명해졌다. 불교도가 존경하고 섬기는 불··승을 삼보라 하는데,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현재 16국사의 영정이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빈 터만 남아 있고, 1842년 큰불이 나서 대웅전과 함께 많은 건물이 타기도 했다. 또 여순 반란 사건과 6.25 전쟁 등을 겪으며 절 주변의 숲이 못쓰게 되고 대웅전 등이 불타기도 했다.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 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국보인 '목조 삼존 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그 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조선 후기 이후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산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면서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불일암(佛日庵)은 법정스님이 세랍 43세 때인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 동안 홀로 수행하며 이곳 불일암에서 1976년 "무소유"를 집필했다.

이후 스님은 불일암에서 수행과 책읽기, 집필작업에 몰두했는데 "무소유" 이후 세간의 관심이 커지면서 방문객이 늘자 미련없이 강원도 산지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불일서적









송광사 보조국사의 고향수

 

송광사 일주문 앞에는 앙상한 나무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라고 전한다.

평소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 나무로 자라나게 하였는데, 스님이 세상을 떠나던 날 이 나무도 함께 시들해지더니 결국 죽고 말아 지금은 앙상하게 기둥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고향수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해 심었으며, 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찾을 때 소생하리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송광사 대웅보전 뒤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자리잡고 있는데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 아쉽습니다. 담 너머 옆에는 송광사 국사전(松廣寺國師殿)이 있습니다.


















승보전







자제원 송광사 종무소








송광사 전각 가운데 주목할 건물은 관음전이다.

 

1903년 건립된 이 건물은 축성전으로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왕실의 원당으로 관음전의 법당내부는 임금이 앉아서 정치를 보는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한다.

관음보살 뒷면에 임금의 자리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고, 벽면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향해 읍하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송광사 관음전에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이 고종황제를 대신해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1957년 관음전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관음보살좌상을 성수전(聖壽殿)으로 옮기고 관음전으로 현판을 바꿨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상은 원래 송광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오다가 1902년 고종 황제가 망육(望六, 51)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성수전(聖壽殿)으로 옮겨오게 된다.

 

지금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된 감실 속에는 원래 고종의 무병장수와 돌아가신 명성왕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모셔져 있었다. 전패를 치우고 관음보살상을 봉안하였기 때문에 관음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 전패(殿牌) : 조선시대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봉안한, ‘殿()’자를 새긴 나무 패, 왕을 상징하는 일종의 위패(位牌)였다. 이는 서울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여 봉안되어 있었던 궐패(闕牌)를 모방하여 지방에 왕권의 지배를 표방하던 의물(儀物)이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 공무(公務)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하였다.

왕을 상징하는 만큼 매우 엄하게 관리되었는데, 만약 이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혁파되고 수령은 파면되었다

*** 위패(位牌) : 돌아간 이의 영혼이 안정할 수 있도록 자리를 베푼 나무패를 말하며 신주(神主)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로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서 단(((절에 모시며, 목주(木柱영위(靈位위판(位版신주(神主)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음보살좌상을 이곳으로 옮길 때만 하더라도 이 상이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관련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200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면서 복장 속에서 유물이 나왔는데,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셋째 아들 경안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품이 나왔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청나라의 심양에서 와신상담하던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 인조의 질투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소현세자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관음전의 관음보살상은 나인(內人) 노예성(盧禮成)이 조선시대 1662년 정월에 경안군(慶安君, 1644-1665)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발원한 상이다.

*** 경안군이 허약하자 그의 부인 허씨가 1662년 경안군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기원하기 위하여 관음보살 좌상을 만들고 기원하였다고 밝혀졌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왕, 왕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치성을 부처님의 원력을 얻고자 원당을 지어 기도를 했지만 표면화 할 수 없어서 나인(상궁)을 보내어 비밀리에 시행하였다.


경안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인조의 장남)의 셋째 아들로 중국 선양(瀋陽)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에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였는데, 두 달만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강씨도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다.

경안군은 형 경선군(慶善君, 1636-1648), 경완군(慶完君, 1640-1648)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 가는데, 이듬해에 두 형마저 죽어 5살의 나이에 홀로 남게 된다.

 

효종이 즉위한 후, 남해현, 함양군,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효종 7(1656)에 드디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현종 2(1661)엔 허확(許確)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허씨와 두 아들 역시 이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관음보살상이 조성된 것은 경안군이 허씨와 결혼한 다음해인 1662년이다.

관음보살상 조성을 주도했던 노예성은 당시 62세로, 경안군과 관련이 없는 듯하며, 소현세자나 세자비 강씨와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주자 명단에 경안군 이씨, 허씨라고 적혀 있는데, 경안군 이씨는 경안군 이회(李檜)이며, 허씨는 부인 허씨다.

조선시대 발원문에서 왕족을 "이씨"라고 기록한 예는 거의 없는데, "경안군 이씨"라는 표현은 경안군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최고의 불상 조각가였던 혜희가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는데 나인 노예성이 관음보살상의 조성에 얼마나 정성을 기우렸는지 알 수 있다.

 

나인 노예성이 보살상을 조성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경안군의 만수무강을 기원했건만, 관음보살의 원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는지 보살상을 만든 후 3년 뒤인 1665년에 경안군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고종의 전패(위패) 자리에 대신 놓인 관세음보살상이 고종황제의 7대조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안군을 위해 조성한 불상인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고종이 지은 건물에 경안군의 불상이 모셔지게 되고, 벽화에 그려진 조정대신들은 고종황제가 아닌 경안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게 됐는데 우연치고는 꽤나 재미있는 우연이다.

 

소현세자와 효종의 운명이 400여년 전에 뒤바뀌지 않았더라면 불상의 조성자와 건물의 창건주가 지금과는 정반대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관음전은 1903년에 고종황제가 51세로 성수망육(聖壽望六:60을 바라보는 51세)을 맞이하여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함을 기념하는 기로소 원당 및 황실 기도처로 성수전(聖壽殿, 閣)을 지었는데, 1957년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상을 성수전에 이안하고 관음전이라 하였다.

 

성수전에는 궁궐 정전에 그리는 일월오병도(日月五屛圖)의 태양은 고종황제, 달(月)은 명성황후를 나타내고 좌우 벽에는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한 14명의 2품이상 고관 문신들이 홀(笏)을 들고 조회에서 국왕에게 국궁배례하는 품계도(品階圖)를 그리고, 옆에는 산수화와 화조도를 그려 품격을 높이고, 성수전 외벽에는 십장생 벽화를 그려 황제의 장수무병을 기원하였다.

 

외부 기둥에 용두(龍頭)를 달고, 내부 기둥에는 용미(龍尾,용꼬리)를 달아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나타냈으며, 섬세하며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닫집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돋보이게 하고, 관음전 내부 전체를 용궁(龍宮)으로 형상화 하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송광사의 관음전은 일반 사찰의 관음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 1660호로 2009년 11월 개금불사를 하면서 복장유물(腹藏遺物)에 의하여 조성 내력이 세상에 드러났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34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책임을 세자빈 강씨에 물어 사사(賜死)하고, 세자의 아들 3형제를 귀양 보냈는데, 위로 형제는 죽고, 셋째 경안군만 살아 귀양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3년 후 경안군은 22살로 서거하였고, 경안군의 손자 밀풍군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죽는다.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고,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 고종이 26대 왕이 되었으니, 경안군과 고종은 계촌(計寸)할 수 있는(7촌) 가까운 사이다. 즉 고종황제를 향하여 국궁배례를 하던 문신고관들이 경안군을 위하여 조성된 관음보살좌상에게 국궁배례를 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로 ‘기(耆)’는 연고후덕(年高厚德)의 뜻을 지녀 나이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기소(耆所)’ 또는 ‘기사(耆社)’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경로당과 같은 친목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부터 독립관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왕도 참여했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태조는 60세에 , 숙종은 59세에, 영조는 51세에 입사하였으며, 고종 또한 51세에 기로소에 입사하고 이를 기념하여 송광사에 성수전(聖壽殿)을 짓고 사액(賜額)하면서 명성황후를 달님으로 형상화하고 황후의 명복도 빌었으나, 훗날 관음전으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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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패(殿牌)와 궐패(闕牌)


전패(殿牌)는 ‘전’ 자를 새긴 위패(位牌)로, 궁궐의 정전에 모신 전패는 중국 황제를, 지방 객사에 보관된 것은 조선의 왕을 상징하였다.

1월 1일이나 동지. 각종 명절에 전패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함으로써 하례(賀禮)를 표시하였다.

유사한 것으로는 ‘궐(闕)’ 자가 새겨진 궐패(闕牌)가 있는데, 궐패와 전패 모두 왕을 상징하였다.


전패, 궐패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동지날과 설날이나 국왕의 탄생일 또는 기타 하례 의식 때 고을의 수령과 백성들이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경배하였다.

지방의 객사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이를 왕처럼 섬기면서 왕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대구 동화사 전패(殿牌)

주상전하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든 전패이다.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의식을 행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 삼전(三殿 : 왕,왕비,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전패 세 점을 불단에 모셔둔다.

 

    

국립경주박물관, 조선 임금의 상징 전패

 

 

영취사(폐사) 영산회상도 전패

영취사는 현재의 경남 함양군에 해당하는 안음현에 있었던 사찰이다. 사찰이 쇠락하자 1736년(丙辰) 가을, 주지 승려 보안(普眼)에 의해 사찰 중흥이 시작되었다. 사찰의 퇴락이 땅의 기운이 길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당시 극락암이 있었던 옛 터의 남쪽으로 옮겨 영취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재건의 목적은 위로는 왕실의 수명을 기원하고 복을 빌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듯 불화에는 전패(殿牌)가 놓여 있다. 상단에는 구름 사이로 용이 모습을 드러내고, 붉은 바탕에 금 글씨로 주상, 왕비, 세자의 장수와 강녕을 비는 문구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가 기록되었다. 지방 관청에서 왕의 어진(御眞)을 대신해 왕의 상징물로 사용되던 전패는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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