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대웅전 편액(扁額) 이야기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 전각은 불국사의 수많은 전각 중에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4호(2011.12.30)로 지정되어 있다.
불국사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과연 누구의 글씨일까 ?
결론부터 도출하면 모사본인지 친필본인지 확인은 곤란하지만, 불국사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제19대 숙종임금의 글씨로 알려진 법주사의 대웅보전 편액과 같은 글씨체라는 결론이 나온다.
편액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문에서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불국사를 대표할 수 있는 다보탑 사진부터 한장 보고 불국사 편액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1910년경 불국사 정면 자하문(紫霞門) 사진
불국사 대웅전 현판에 대해 알아보면, 사찰이나 전통 건축물에는 나무판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문 위 또는 건물내부에 달아놓은 것을 현판(懸板)이라 한다
현판(懸板)은 편액(扁額), 주련(柱聯), 시판(詩板)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편액(扁額)은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이므로 건물의 정중앙 처마 아래에 부착을 하며, 주련(柱聯) 은 건물의 기둥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거나 새겨서 거는 것을 말한다.
정자나 누각 건물의 마루 위에 보면 시(詩)나 예찬하는 글을 나무에 새겨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시판(詩板), 문판(文板)이라고 한다.
현판 중에는 특별히 왕이 써서 내리는 경우도있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한다.
숭례문, 토함산 불국사 처럼 건물의 가운데 달아놓은 것은 편액(扁額)이라고 부른다.
'편(扁)'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고 '액(額)'은 '건물 앞부분 높은 곳'이란 뜻으로,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한 곳 밖에 없기 때문에 편액(扁額)은 건물마다 하나뿐이며 그 건물을 대표한다
편액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하고 거기에 글을 새기거나 무늬를 넣아 단청을 하고 조각을 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대부분이다.
편액을 역대 제왕(帝王)이나 당대의 명필·문인의 필적이 담긴 것을 건다는 것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화룡점정이기 때문에 건물을 지으면 좋은 편액을 달기 위해 애를 쓴다.
편액(扁額)은 시대별로 현판의 모양이나 장식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징을 잘 전해주고 있으며 특히 편액의 글씨는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글씨의 특별한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 소중한 문화재다.
현존하는 편액 중에는 고려 공민왕에서 부터 역대 임금들의 글씨, 추사 김정희, 이광사 등 당대 유명한 문필가들의 글씨가 많이 있으나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어 다른 문화재에 비해 홀대를 받고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청량사(淸凉寺)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했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공민왕이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편액(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 강변 영호루(映湖樓) 현판 고려 공민왕의 친필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에 피난하였던 고려 공민왕의 친필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원교 이광사의 친필 편액
이광사(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이다.
원교 이광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때문에 불태워져 사라질 뻔 했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놓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추사 김정희이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오랜 지기였던 초의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들린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 유배를 살았다.
귀향 가는 처지였지만 대웅전에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망친 이가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결국 초의선사는 추사의 극성에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9년 뒤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려서 초의선사에게 예전에 잘못 보았다며 떼어놓은 이광사의 현판이 있으면 다시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오랜 귀향 살이 동안 호기가 누그러진 것도 있겠지만 세상과 글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위> 유배 떠나기 전 대흥사에 남긴 추사 현판 글씨, 예서체에 한껏 멋을 부려 획이 기름지고 굵다.
<아래> 유배 후 예산 화암사에 남긴 추사글씨. 기름기를 제거하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완성했다.
대흥사에 있는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편액)은 추사가 귀향 갈 때 쓴 글이다.
가로획이 반복되는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무(無)자를 간단한 무(无)자로 대체하고, 한 획 한 획 무게감 있게 쓴 글씨는 큰 칼을 차고 성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장군의 위엄이 깃들어 있다.
한 자 한 자에 세상을 내려다보는 호기로운 기상이 배어 있다.
참고로 원교 이광사는 향토색이 짙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로 동쪽나라의 진짜 글씨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국진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조선사회가 자성의 움직임,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찾자는 자주적 운동에서 탄생한 글씨체이다.
대흥사 침계루 편액 이광사 글씨로 물 흐르듯 유려하다.
백련사 만경루 편액 이광사 글씨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으로 쓴 글씨처럼 꿈틀댄다.
대흥사 해탈문 이광사 편액, 글씨가 미끈하면서 힘차다.
지리산 천은사 편액 이광사 편액, 불의 기운을 다스려야한다며 물 흐르듯 수체(水體)로 썼다.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와 친분이 두터웠던 옥동 이서에 의해 탄생되었고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 글씨체이다.
추사 이전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가 이룩한 개성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동국진체가 크게 유행을 한다.
그러나 추사는 중국 한나라 때의 비문글씨체야 말로 진짜 글씨라는 주장을 했는데, 추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교의 글씨는 정말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는 해괴한 글씨로 보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추사 김정희가 별세하기 3일 전에 남겼다는 서울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라는 편액이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불국사 대웅전 편액
불국사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큼직한 편액이 달려있는데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이 느껴지는 글씨가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대웅전 편액에 낙관(落款)이나 글쓴 이의 이름이 없어 누가 썼는지, 또 이 편액 글씨가 언제 어떻게 걸리게 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하다.
통상적으로 편액에는 글쓴 이의 호와 이름, 날짜가 적혀 있고 낙관이 찍혀 있어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기 마련인데 불국사 대웅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불국사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과연 누구의 글씨일까 ?
이에 대한 결론부터 도출하면 모사본인지 친필본인지 확인이 곤란하지만, 불국사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제19대 숙종임금의 글씨로 법주사의 대웅보전 편액과 같은 글씨라는 결론이 나온다.
송림사 대웅전
대구 팔공산의 서쪽 기슭에 송림사(松林寺)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 진흥왕 때 진(陳)나라의 사신 유사(劉使)가 신라에 오면서 가지고 온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대구 송림사 대웅전 현판
송림사의 대웅전 현판은 조선 제19대 숙종임금이 쓴 글씨로 전해 내려오는데, 대웅전 건물이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탄 후 숙종 재위 때인 1686년 기성대사에 의해 중창됐다는 기록이 있다.
중창 당시에 숙종이 ‘대웅전’ 편액 글씨를 직접 써서 내린 것으로 사찰 안내문에 소개하고 있다.
가로 366㎝, 세로 160㎝나 되는 큰 편액으로 4개의 판자를 붙여 만들었고 검은색 바탕에 양각의 글씨 부분은 흰색이 칠해진 통상적인 형태다.
편액 틀도 단순하고 소박한 편인데, 내면을 꽉 채운 글씨는 방정하면서도 획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명필이다.
송림사 대웅전 편액 불국사 대웅전 편액
송림사의 대웅전 편액과 불국사의 ‘대웅전’ 편액은 획 하나 어긋남이 없이 똑같은 모양의 글씨이고 차이점이라면 불국사 편액은 테두리 부분에 화려한 문양이 있고, 아래 양쪽에 구름 무늬로 조각한 장식이 있으나 송림사의 편액은 아무 장식이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불국사 대웅전도 숙종 3년(1677)에 기와를 새로 바꾸고 숙종 34년(1708)에는 서쪽 기둥을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당시에 숙종의 글씨를 하사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니면 송림사 편액의 글씨를 모사해와서 편액을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676년에는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칙명으로 자수 비로자나불탱을 만들어 불국사에 봉안케 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쩌면 이 때 불국사의 편액을 하사받은 후 송림사에서 모사해 갔는지 알 수 없다.
같은 글자를 똑같이 다시 쓰기는 어려우니 어느 쪽이 먼저이던 한쪽은 모사된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肅宗)의 어필이라고 전해지는 속리산 법주사의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의 현판속리산 법주사의 대웅보전을 모사한 청도 운문사의 대웅보전
이 편액의 글씨는 석봉체를 바탕으로 그 위에 안진경의 필의(筆意-어떤 글씨체를 염두에 둔 것)를 조화시킨 활달한 운필의 해서이다.
어필편액(御筆扁額)은 서명이나 낙관을 하지않는 것이 관례라고 하니 이 편액 역시 확실하다고 고증할 수는 없으나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肅宗)의 어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법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글씨를 보면, ‘대웅보전’ 에서 ‘보’ 자를 뺀 나머지 세 글자를 비교해 보면 불국사와 송림사의 ‘대웅전(大雄寶)’ 글씨는 똑같다.
그렇다면 법주사 '대웅보전'의 편액에서 '보'자를 빼고 모사해서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웅전과 대웅보전 편액의 차이점 대웅전(大雄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차이는 한 글자가 더 추가(寶)되어 그 건물의 격이 더 높아진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에 협시불로써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신 경우에 사용하고 대웅보전은 삼존불, 삼세불, 삼신불을 각각 모신 경우에 그 격을 높여서 부른다. - 삼존불(三尊佛) :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 삼세불(三世佛) : 연등불(과거), 석가모니불(현세), 미륵불(미래) - 삼신불(三身佛) : 비로자나불(법신불;法身佛), 석가모니불(화신불;化身佛), 노사나불(보신불;報身佛) ---------------------------------------------------------------------------------------------------------------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법주사 대웅보전의 편액은 흰 바탕에 쓴 글씨이다. 어필은 통상적으로 흰바탕에 검은 글씨이거나 금물로 쓴 금니(金泥)로 되어있는데 법주사 대웅보전과 편액을 보수할 때 검은 바탕에 금니 글씨로 보수했다. |
청도 운문사의 대웅보전
대웅보전에서 '보'자를 빼고 집자한 편액
송림사 불국사 법주사의'보'자를 뺀 집자
위의 편액 3개를 비교하면 법주사, 송림사, 불국사의 대웅전 필적이 모두 동일하다.
이와 관련하여 동방불교대학 김일두박사는 '한국사찰의 편액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법주사의 대웅보전 편액이 먼저 쓴 것이고 불국사와 송림사의 대웅전 현판은 이를 모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보면 모사본이던 친필본이던 불국사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제19대 숙종임금의 글씨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법주사의 편액이나 법주사의 것을 모사한 운문사의 편액은 불국사 ‘대웅전’ 편액과는 달리 금니(金泥)로 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어필(御筆)의 경우 금니로 하는 관례가 많았다고 한다.
사찰에 어필(御筆)이 있는 경우는, 임금님의 편액 글씨가 뛰어나 선호했다기 보다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에서 왕의 글씨 편액을 걸어 관리나 양반들의 횡포를 최소화하려는 측면도 있어 법주사에서도 숙종 재위 중에 불사를 하면서 어필편액(御筆扁額)을 걸고자 노력 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토함산불국사 (서쪽 출입문 불이문)
불이문의 '토함산불국사(吐含山 佛國寺)' 편액
불국사 안내판에는 이 문을 불이문(不二門)이라고 표시해놓고 편액에는 '토함산 불국사(吐含山佛國寺)'라고 적혀 있다.
이 편액은 1973년도에 고(故)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이 쓴 글씨이다.
불국사 복원 후 '토함산불국사' 편액 제막 박정희대통령
1973년 7월3일 불국사 복원 불사 회향식에 참석한 박대통령은 불이문(不二門) 앞에서 자신이 쓴 ‘토함산 불국사’ 현판을 주지 범행스님과 함께 제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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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불국사에 걸려있는 편액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면
일주문 불국사
일주문에 있는 '불국사(佛國寺)'라는 편액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글씨이다.
극락전의 편액은 구하 천보(九河 天輔, 1872∼1965) 스님의 글씨이다.
낙관 아래 김창진(金暢鎭) 이라는 이름은 구하 천보스님의 속명으로 보인다. 구하는 법호이며, 법명은 천보(天輔), 자호는 취산(鷲山). 김취산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관음전의 편액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1903∼1981)의 글씨이다 .
금색을 입힌 무설전(無說殿) 편액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중 한 명인 경봉
(鏡峰·1892~1982) 스님의 글씨이다.
안양문(安養門) 편액은 무설전 편액을 쓰신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범종각(梵鍾閣)의 편액은 만당(晩堂)이라는 분의 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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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굴암(吐含山 石窟庵) 편액은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이다.
토함산 석굴암(吐含山 石窟庵) 수광전(壽光殿) 편액 / 임오중추 백악초부 신명희 필적이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인데 본존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는데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해우소 문짝이 토암산 석굴 중수 상동문 편액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선생이 문화재 전문위원 1호 정영호 박사와 나눈 대화 중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일화이다.
석굴암 내 유일한 전각인 수광전(壽光殿)에 걸렸던 ‘토함산 석굴 중수 상동문(吐含山石窟重修上棟文) 편액’ 발견 이야기이다.
1924년 일본 학자가 공개한 적이 있는 조선 후기 석굴암 전실(前室) 전각 중수기인 이 상동문은 석굴암 원형과 그 주존불 실체를 둘러싼 논쟁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자료지만 이후 어느 시점에서 사라졌다가 1963년 황수영 박사가 발견해 현재는 동국대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당시 우 씨라는 분이 딸 하나를 데리고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그 가게에 방이 두 개 있었죠. 하루는 제가 황수영 선생님을 모시고 그곳에서 묵게 되었어요.
다음 날 아침, 해우소에 간 선생님께 신문지를 말아서 갖다 드리려는 찰나, 저를 보신 선생님이 빨리 사진기를 가져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해우소 문짝이 바로 석굴암 중수 상동문이었어요. 그걸 떼어내 몇 번을 물로 씻었는지 몰라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게 배었는지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추후 어디에 보관하느냐에 따른 문제가 있어 동국대에 소장됐습니다.”
이 편액은 비록 조선 후기 때 사정을 담았지만 정 박사는 “거기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나와요. 그렇다면 뭐겠어요. (석굴암 주존불은) 아미타불이지 않겠어요?”라고 되물었다.
석굴암 본존불은 석가여래인가 아닌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발견된 이 자료는 그런 논쟁에 다시 불을 지른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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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吐含山石窟重修上棟文)의 목조 편액만큼 기구한 것도 없다.
총독부의 개축공사 도중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1891년과 1902년 사이의 지진 때 전각이 붕괴되면서 매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1960년대 공사(1961.9.13∼1964.6.30) 와중에 황수영이 겨우 찾아냈는데, 당시 목조편액은 톱질에 반 토막이 난 채 바람막이로 해우소 벽에 대못으로 꽝꽝 박혀 있었다.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전체가 아니라 절반만 남은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의 저명한 불교미술학자인 소야현묘가 그 원문을 채록해 『극동의 삼대예술』에 실어둔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891년도의 중창에 대한 소중한 정보가 유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야현묘의 극동의 삼대예술 중 상동문 채록 부분>
울산병사(蔚山兵使) 조순상(趙巡相)이 1891년에 석굴암의 전실 전각을 중창하고 남긴 것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제의 공사 중에 발굴되었으나 이후 행방을 모르다가 1960년대 보수공사 도중에 토막난 채 해우소 벽에 못 박혀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듣건대 미타굴과 금강대는 모두 다 거듭 새롭게 중수한 종토도량이요, 도솔궁과 은색계는 어느 것인들 면목을 일신한 기원정사가 아니랴. 그러나 이는 그저 완성에 가깝다는 것일 뿐,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하리라.
저 불국사의 석굴암은 실로 신라시대의 가람이다. 뛰어난 장인이 새기고 쪼았으니, 화려하기는 수정으로 쌓은 성 같고, 보배로운 모습은 단아하고 장엄하니, 엄연하기는 거룩한 사굴의 성역을 닮았다.
처음엔 깊디 깊은 인도의 불교로부터 나옸으나, 여기 넓디 넓게 전파된 범찰의 궁전을 본다. 고생스럽게 길러 주신 양세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어진 재상은 온 힘을 기울였고, 바다처럼 넓은 천불장엄의 세계를 열기 위하여 법 높은 신승이 협심협력하였다.
대천세계는 산호 봉우리로 표치를 세우고, 제일 산천은 극락 연대로 안을 삼았으니, 칠보향화는 탈해신전을 비치고, 팔법공수는 문무왕릉에 파도치며, 옥녀는 구천에서 공양 올리고, 금선은 삼계에 성스러움 보이도다.
누와 대를 장식하니 차거, 유리처럼 찬란하고, 섬돌과 기와에 꽃피니 파려 마노같이 빛난다. 수천 년을 예불인연으로 이어왔고, 오백 년 동안 버티었으니, 그 운명 또한 국운의 시종과 함께 하였다. 법의 구름이 포근히 드리우니 불붙는 집은 아침처럼 서늘해졌고, 슬기의 해가 밝게 비추니 칠흑의 어둠은 야광주 같이 환하도다.
조순상이 양식을 제공함은 금줄을 그어 깨달음의 길을 연 것이요, 모든 동원들이 계를 마련함은 보배의 뗏목을 띄워 자항을 대신함이다. 짧고 긴 서까래는 전각구도가 굉걸함을 보이고, 붉고 푸른 이끼는 돌의 모양새가 어긋져 가즈런함을 알린다.
허나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비바람에 흔들리고 씻기움을 어찌하랴. 구슬의 누대와 옥의 전각은 풀나무와 가시덤불에 파묻혔고, 학의 가전과 무지개 다리는 여우와 토끼의 자취로 얼룩졌다.
경영할 일이 엄청나지만 개미와 같이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재물을 내놓아 함께 용궁의 제도를 회복하고자 장인과 동량을 불러모았다. 이어 새로운 규모로 초창하여 아름다운 채색으로 단장하고 보니 이제야 겨우 옛 모습에 비길 만하다. 단지 전공을 가석하게 여길 뿐, 후규를 폐하지는 말지어다.
법다운 새가 법음을 읊조리니, 축하함이 더욱 깊고, 신령스러운 독수리가 안목을 점검하니 나래를 펴고 나는 듯하다. 시간의 시를 쓰니 도끼질이요 톱질이요, 대장의 송에 맞추니 둥글고 빛나도다. 쌍무지개 나란히 들어 모두 함께 육위가를 부르도다.
어여차. 들보를 동쪽에 걸어라.
우뚝하게 높이 솟아 하늘가에 반쯤 서니
산빛 풀빛 아스라이 외탑 밖에 아롱지고
태양빛은 제일 먼저소암 동쪽 비춰 댄다.
어여차. 들보를 서쪽에 걸어라.
상서안개 영롱하니 푸른 기와 정연하고
부처님께 예 올리니 향기로움 그윽한데
석양 노을 옮겨 와서 영지 서쪽 물들이네.
어여차. 들보를 남쪽에 걸어라.
연꽃 같은 천 사람이 푸르름에 잠겼는데
높다랗게 하늘 닿아 땅에 박힌 저 뿌리여
용 서리고 범 앉으니 남쪽 땅이 편하구려.
어여차. 들보를 북쪽에 걸어라.
메뿌리의 바위마다 회색빛이 찬연하고
드리워진 북두칠성 바위틈새 가경이니
국은 비는 어진 산승 북쪽 향해 엎드렸네.
어여차. 들보를 위쪽에 걸어라.
황금빛깔 옥호광명 만길이나 뻗치었고,
이끼 서린 옛 얼굴이 돌 모양새 완연하니
향과 꽃을 손에 잡고 위를 보며 공양한다.
어여차. 들보를 아래에 걸어라.
패엽 경전 독송함은 매일 하는 과업이라
여법하게 예불하는 저 경지를 살펴보오.건듯 부는 맑은 바람 탁자 아래 스며든다.
바라옵나니 상량 후에 불일은 더욱 살아 빛나고, 도량은 갈수록 무게를 더하소서. 낭원이 하늘 높이 우뚝함은 신중이 자비로써 보호한 것이요, 금강이 하늘악에 거꾸로 섬은 선려가지성으로 공양을 올렸기 때문이다.
경을 읽어 뜻을 보는 성사는 마음을 기울여 힘써 배우고, 열반을 찾아 진실을 구하는 원인은 읊조리며 흥겹도다. 법륜은 항상 구르고, 향해는 길이 맑으리라.
성상즉조 28년 신묘 4월 불탄일 조선국 영좌 경주부 동해상 구지산거사 손영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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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窟庵本尊 名號에 관한 考察 黃 壽 永 (황수영) 대한민국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3분과 회원,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논문집 (인문ㆍ사회과학편) 제45집(2006)115-128 논문집 일부 발췌분 Ⅳ. 석굴중수 상동문과 미타굴 현판 석굴암 본존의 명호가 석가여래라고 하는 것은 그 명호의 출처가 고기(古記)에 따르지 못하고 한말(1909)에 등굴(登窟)한 일본인 학자 關野 貞 동경대학 교수에 의하여 처음 발설되었다. 關野 貞 교수는 한말에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서 내한하였고 그의 임무는 전국을 돌면서 목조건물을 주로 하여 석물, 석탑도 포함된 고적조사(古蹟調査)였다. 동경대학 공학부 건축학 교실의 이름으로 출간된『한국고건축연구』는 이에 따르는 보고서였다. 그는 우리 석굴암본존에 대하여 석가여래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에 이어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또한 본존을 석가여래라고 하였으며 당시 불교미술연구의 대가라고 일컫던 일본인 小野玄妙씨 또한 그의 저서『극동의 3대 예술』중「토함산의 석가」에서 차굴(此窟)은 석가를 ‘본존 삼고’라고 하면서 “동양제일의 존상(尊像)’이라 칭하더라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듯하다” 고 기록하면서 이어서 매우 주목할 만한 글을 남기고 있다.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차상(此像) 최근에는 이것을 아미타의 상으로 신앙되고 있는 듯 보여서 지금부터 20여 년 전(서기 1891년)에 기록된「석굴중수상동문(石窟重修上棟文)」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 하면서 차행(次行)부터「석굴중수상동문」의 전문을 옮기고 있다. 그리하여 순한문으로 기록된 22행의 원문을 그의 저서에 옮겨 놓았다. 이 같은 장문의 한문 전문을 옮기면서 그 말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3행의 글을 달아서 그는 이 상동문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 3행의 글을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상이 확실히 석존의 상이라는 사실은 본존의 존용(尊容)에서 보아도 주변에 조각된 협시 기타의 보살, 비구, 제천상에서 생각 하더라도 결코 틀림이 없다.” 이 같이 저자는 단호하게 그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좀 더 자세하게 그의 주장을 기록하지는 않고 그의 주장을 첫째 ‘본존의 존용’이라 하였는데 본존의 존용이 어떠하여서 석가상이 틀림없다는 그 이유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존용만 보고 그 불상의 명호를 판별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니 설득력이 없다. 다음에 ‘주변에 조각된 협시 기타의 보살, 비구, 제천상을 들어 이들에서 생각하더라도 결코 잘못이 없다.’고 단호하게 방언하면서도 더 이상 아무런 설명이 없다. 자기가 본 ‘본존의 존용’만을 근거로 석가판정의 첫 번째이며 유일한 이유를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이 전하는 현판을 찾아서 석굴암 중수공사에 참가하였던 3년간(1961.9.13∼ 1964.6.30) 현장에서 전후 3차에 걸쳐 공사인부를 동원하여 석굴 경내를 수책한바 있었다. 그리하여 3차 동원 끝에 이르러 마침내 경내의 일가건물(一假建物) 문비(門扉)에 못질하여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뜯어 물에 넣었다가 서울로 옮겨 박물관 창고에 두었는데 매우 불만족하였던 일은 이 목조현판의 앞과 꼬리 두 부분이 절단되어 있어서 필자가 가장 궁금하였던 목판 제1행의 미타굴(彌陀窟) 3자와 말미의 연대 기록을 알 수가 없었던 사실이다. 이 석굴에서 절단된 상동문 두 곳의 문자는 바로 이 책『극동의 3대 예술』에서 찾아서 보완할 수가 있었는데 그 곳 제1행 초두에는 ‘미타굴’ 삼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상동문 현판은 경내의 작은 가변소문짝(假便所門扉)에 거두절미하여 전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으며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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