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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부채, 합죽선, 장식품 선추

by 연송 김환수 2012. 6. 7.

부채 


• 개요

 

부채란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구는 기구로서 가는 대오리로 살을 만들어 넓적하게 벌려서 그 위에 종이나 헝겊을 바른 것이다.

 

부채란 말은 ‘부치는 채’라는 말을 줄여서 한 말이고, 한자로는 ‘선자(扇子)’라고 한다.


 

 

《계림유사 鷄林類事》, 《박통사언해 朴通事諺解》 등 문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 이미 부채라고 불렀었다.


우리나라에는 10세기(고려초)에 견훤이 태조에게 공작선(孔雀扇)을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때의 공작선은 공작의 깃으로 둥근부채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보인다.

 

또한 송나라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 圖畵見聞志》에 의하면 고려사신 최사훈(崔思訓)이 접는 부채를 사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1세기 중엽에는 접는 부채가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국교품과 부채


우리나라 부채는 국교품(國交品)으로서 일찍이 사절편에 중국을 비롯하여 몽고·일본 등 여러 나라에 많이 진출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2년(고종 19) 4월에 원나라로 보낸 사신들이 화입선(畵入扇)을 헌물(獻物)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해동집 張海東集》에 의하면 중국에는 접부채가 없었는데 원나라 초에 우리나라 사신들이 접부채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 후 중국에서도 접부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유원경의 《현혁편 賢奕編》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가 조선국의 접부채를 좋아하여 왕궁에서 이를 모방하여 만들게 하고 그 이름을 고려선(高麗扇)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 사신들에게 부채를 선물하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광해군 14년(1622) 4월에는 명나라 사신과 그 수행원들에게 무려 흰부채(白扇) 224자루, 기름 먹인 부채(油扇) 1,830자루와 흰부채 1,800자루, 기름 먹인 부채 9천자루를 여러차례에 걸쳐 선물하였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접부채는 중국 송나라 때로부터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국교품으로서 많이 수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부채가 일본으로도 많이 나갔다. 일본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는 우리나라의 부채를 모방하여 만들어 소위 ‘조선골선(朝鮮骨扇)’이라는 것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일본이 왜선(倭扇)을 우리나라 국왕과 사신들에게 많이 상당한 수량을 보내 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 종류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와 접부채의 두 가지가 있다. 방구부채란 부채살에 깁이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의 부채로서 일명 둥근 부채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단선(團扇) 혹은 원선(圓扇)이라고 한다. 접부채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만든 것인데 한자로는 접선(摺扇) 또는 접첩선(摺疊扇)이라고 한다.

 

방구부채에는 부채살의 모양과 부채바탕의 꾸밈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와 명칭이 있는데 오엽선(梧葉扇)·연엽선(蓮葉扇)·파초선(芭蕉扇)·태극선(太極扇)·오색선(五色扇)·진주선(眞珠扇)·공작선(孔雀扇)·세미선(細尾扇)·백우선(白羽扇)·대원선(大圓扇) 등이 있다.

 

접부채는 부채살의 수와 부채꼭지의 모양과 부속품 그리고 부채바탕의 꾸밈에 따라 그 명칭이 부쳐 지는데 주로 백선(白扇)·칠선(漆扇)·유선(油扇)·복선(服扇)·승두선(僧頭扇)·어두선(魚頭扇)·사두선(蛇頭扇)·반죽선(班竹扇)·외각선(外角扇)·삼대선(三臺扇)·채각선(彩角扇)·광변선(廣邊扇)·합죽선(合竹扇)·화선(花扇)·윤선(輪扇)·표정선(杓庭扇)·무선(舞扇)·무당부채 등이 있다.


그 외에 우리나라에는 보통 부채보다 특별히 잘 만들었다 하여 별선이라는 특별한 부채가 있는데 대개 지방에 따라, 수요자의 요청에 의하여 또는 창의력을 가진 선장(扇匠)에 따라 간혹 나오기 때문에 극히 소량이고 일시적이며 매우 희귀하여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였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그 유래가 분명한 별선을 몇 가지 들어 본다면 조선시대 전라도 남원의 수령이었던 오재문이 만든 오골선, 조선 말기 외척의 세도가 민태호가 고안한 표정선, 조선시대 전라도 옥과현(玉果縣)의 선장 김희옥이 만든 옥선, 황해도의 재령·신천 등지에서 풀잎으로써 엮어 만든 팔덕선이라고 불리우는 둥근 부채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선(紗扇)·포선(布扇)·피선(皮扇) 등 부채 선자가 든 물명이 있으나 이것들은 실제로 부채가 아닌 기물의 이름으로서 대개 조선 말기까지 주로 양반들의 낯가리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부채와 풍속


우리 나라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는 말이 있다. 단오가 가까워오면 곧 여름철이 되므로 친지와 웃어른들께 부채를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가까워오면 새해 책력으로써 선물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 해마다 공조에서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은 그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전라도와 경상도 관찰사 및 절도사의 외관(外官)도 각기 그곳의 특산품으로서 부채를 궁중에 진상하고, 또 조관들과 친지에게 선물하였다.

 

부채를 생산하는 각 고을의 수령들도 이와 같이 궁중으로 진상하고 서울 각처로 선사하는 풍속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쳐주었다.


단오절에 부채를 하사하고 진선하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조와 세종조 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종 및 세종 때부터 이러한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단오진선은 관가의 명에 의하여 하는 것이어서 당시 민간에 많은 피해를 준 것으로 나타나 조선 말기의 고종은 남도 백성들의 기근을 염려하여 단오진선을 일시 정지하기도 하였다.


• 부채에 글씨.그림을 써넣는 풍속


우리 민간에는 흔히 부채를 선사받은 사람은 그 부채에다 금강산의 만물상을 그려 가지기도 하고, 또 버들가지·복숭아꽃·나비·벌·백로·부용 등을 그려 가지기를 좋아하며, 유명한 시문을 써넣기도 한다.

 

이규경(李圭景)의 〈동국선제변증설 東國扇制辨證說〉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때에는 주로 방구부채에 시구를 써넣었고 명나라 때부터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런 풍속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사》에 이미 화입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역시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채에 이름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그려 받고, 또 이름 있는 명필가의 글씨를 써 받아 가지는 풍습은 지금도 여전하며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잘 그려주지도 않기에 그것은 뒷날 친구간의 하나의 정표가 되고 기념물이 되기도 한다.


• 부채 사용의 풍속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방구부채는 황색을, 접부채는 백색과 흑색 두 빛깔의 것과 기름먹인 것을 좋아한다. 방구부채는 대개 남녀가 집안에서 다같이 사용하였고 남자가 외출할 때는 접부채를 가지고 나가며, 여러 빛깔이 있는 색선은 젊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사용한다.

 

그리고 무당이나 기생을 제외한 일반 부녀자들은 외출할 때에 부채를 휴대하지 못하게 되었은데 이는 조선 태종때(1400∼1418) 부녀자의 부채휴대외출을 금지한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부채는 여름철이 아니라도 일상생활에서 숯불을 피우거나 할 때 사용하며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겨울철에도 휴대하고 다녔다. 혼례 때에는 얼굴의 눈 아래 부위를 가리우기 위하여 신랑은 청색, 신부는 홍색의 부채를 사용하였고 무당, 창우(倡優), 재인(才人)들이 춤을 추거나 소리 등을 할 때도 늘 부채를 사용하였다.


• 부채에 관한 일화


부채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거의 필수품이었으므로 부채에 관한 일화도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면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할 때에 흰 부채에다가 부친에게 보낼 글을 사언절구로 써보냈었고, 선조때 시인인 임제(林悌)는 사랑하는 기생에게 칠언절구의 시를 흰 부채에다 써 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천한 신분의 여자가 그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양반 부녀자의 행세를 하다가 탄로되어 장형(杖刑)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종때 글씨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가 자기의 집에서 하루밤 묵고 가는 부채장사의 부채에 글씨를 써 주어 그 부채장사에게 이득을 보게 한 이야기도 있다.


• 부채 고예


(1) 부채제조공정


부채를 만들려면 먼저 대(竹)를 골라야 하는데, 음력 7월 15일 전후 일개월 동안과 9월 그믐께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에 벤 대가 벌레가 슬지 않고 질이 좋다고 한다. 잘 말린 대를 길이로 끊어서 숯불에 구어 진을 빼어 대빛을 곱게 한다.

 

그 다음 칼로 목살과 끝살을 깎고 부레풀로 맞붙여 합죽(合竹)을 한다. 이어서 낫칼로 곱게 질을 내어 갓대를 만든다. 처음 쇠뼈를 양잿물에 넣고 삶아 표백을 하고 그 다음, 쇠뼈를 부레풀로 붙이고 또 단절(短節)을 붙인다.

 

그 뒤 가피(加皮)하고 등을 얹고 끝이 뾰족한 인두로 낙죽(烙竹)을 한다. 낙죽을 끝내면 속살과 갓대를 다시 칼로 다듬어 윤을 내고, 그 다음에 곧은 갓대를 구부정하게 휘는데 이것을 변을 잡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부챗살에 맞도록 종이를 접고 살에 종이를 풀로 붙인다.

 

그 다음 목살을 동여서 사복을 하는데, 보통 은이나 백동으로 한다. 칠부채나 기름부채를 만들자면 선면(扇面)에 칠을 입히고 들기름을 먹이어 3일 동안을 말린다. 이와 같이 부채를 만드는데 약 3개월 이상의 시일이 걸리게 되는데 대체로 분업으로 세분하여 이루어 진다.


(2) 부채 제조의 변천


우리 나라 부채는 시속(時俗)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다. 접부채만 하더라도 큰 것을 좋아하던 것이 점점 작은 것을 좋아하게 되고, 빛깔도 한동안 방구부채에 흰색과 검은 색을 비롯하여 청색·홍색·황색·녹색·자주색의 부채를 좋아하였으나 통속적으로는 흰색·검은 색·황색칠을 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접부채는 기름을 칠한 유선을 좋아하였고 요즈음은 흰색 부채를 좋아하는가 하면 그림부채를 또한 좋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부채도 시속에 따라 그 모양이 새로 만들어지고 얼마간 계속되다가는 폐하여 없어지고 하면서 변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3) 부채장식품


부채고리에 메다는 선추(扇墜)라고 하는 장식품이 있다. 〈동국선제변증설>에 의하면 선추는 중국 송나라때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며 우리나라에는 조선초부터 있었는데 아마 명나라로부터 전해 들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선추는 본래 부채의 분실을 막기 위하여 부채고리에 갈색 명주끈을 매달던 것으로부터 비롯되어 후대에 와서는 점차 하나의 사치품으로 되기도 하였다.

 

선추로서는 비취 또는 호박 등 보석과 나무·뿔, 또는 금속물도 사용되었으며 금·은·주옥 등을 사용한 것은 오히려 축재의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 외에 옥추단(玉樞丹)을 끈에 꿰어 선추로 사용하여 토사나 곽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깎거나 또는 물에 갈아 마시는 휴대용 구급약으로도 사용되었다.

 

선추는 보통 직경 3∼4㎝ 둘레로 다듬어 양면에 십장생(十長生)을 조각하는데, 인각(印刻)과 통각 두가지가 있다. 십장생 중에서도 송학의 조각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송학을 제일로 쳐준다.

* 선추(扇錘), 선초(扇貂) 라고도 한다.

 

 

 

 

 

 

(4) 부채 제조의 현황


우리나라 부채제조업자들은 민족항일기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 당시 값이 싸고 다소 편리한 일본부채가 많이 들어와 판을 치자 자연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따라서 우리나라 부채제조업자들은 점차 쇠퇴 일로에 들어섰다. 광복 후 일본부채가 자취를 감추고, 우리나라 부채의 수요량이 부쩍 늘어나게 되어 부채업계는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접부채는 현재 주로 전주에서 만든 것이 전국 소모량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으며 이리에서도 약간 만들어지고 있다. 방구부채는 남원을 비롯하여 전주·강경·밀양·서울 등지에서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8할은 남원에서 생산되고 있다.

 

전주에서 생산되는 접부채는 연평균 2만자루 정도이고, 이에 종사하는 기술자는 15명 정도로서 한 사람이 평균 2천자루 정도를 만든다.

 

남원에서 생산되는 방구부채는 연평균 400만자루 정도이며, 한 가호당 생산량은 3천자루에서 1만자루씩인데, 이것이 중개상을 거쳐 전국시장으로 팔리고 있다.


부채의 수요량은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근래에 들어서서 관광공예품의 하나로서 각광을 받게 되어 특산물로서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채는 형태와 표상이 특이한 것이 많아서 외국 관광객들이 좋아 한다.

 

우리나라 부채의 특징은 그 재료가 대와 한지가 주가 되어 만들어 진 것이고 선면에다 옻칠을 하거나 들기름을 먹인 것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무려 80여종이나 되어 그 양태가 매우 다채로운 것이었다.

출처:박성수(한국민족문화사전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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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죽선(合竹扇) 

 

 

손잡이가 따로 없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 부챗살을 끝은 퍼지게 하고 밑은 금속 장식으로 끼워서 가지런히 죄어 부칠 때는 펴고 쓰지 않을 때는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방구부채 혹은 단선이라 하는 자루 달린 부채와 비교하여 접선은 손에 쥘 수 있기에 '쥘부채', 또는 폈다 접었다 할 수 있어 '접부채'라 하며 혹은 '합죽선'이라고도 부른다.


부챗살의 손잡이 부분은 맨몸으로 두고 끝부분에만 종이나 깁 또는 비단으로 도배하는데 살이 많을수록 고급으로 치며, 주로 양반층에서 사용하였다.


종이나 천을 바른 선면에는 취향에 따라 시나 그림을 그려 넣어 장식하기도 한다.


상주(喪主)일 경우는 아무런 그림이나 장식을 하지 않은 '소선(素扇)'이라 불리는 흰 바탕의 부채만을 썼다.

 

부챗살을 모아 움직이지 않도록 아랫머리 부분에 구멍을 뚫고 밖는 금속으로 된 장식을 '사북'이라 하는데 주로 은이나 백동을 사용한다.


사북에 고리가 있으면 '유환(有環)', 없으면 '무환(無環)'이라 하며 이것은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즉 유환은 '선초(扇貂) 혹은 '선추(扇錘)'라 하여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장식을 다는데 벼슬아치라야만 쓸 수 있었다. 그것도 과거에 급제한 자라야만 허용되었고, 조상들의 음덕으로 벼슬을 하거나 당상관에 미치지 못하는 무관은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합죽선과 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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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어원

 


사람이 땅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였다. 그 가운데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바람을 이용하였다. 손바닥이나 종이 등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키면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도구가 부채이다.


이렇게 시작된 부채의 순수한 우리말은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자와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라는 뜻인 '채'자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말로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뜻이다.


부채를 한자로는 '선(扇)'이라 한다. 이 글자가 부채를 의미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지만 대강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집이나 문을 뜻하는 호(戶)자에 날개를 뜻하는 '깃 우(羽)'를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가 바로 '부채 선(扇)'자이다. 곧 하늘을 나는 날개가 아니고 집안에 있는 날개라는 뜻이기도 하고, 날개로 엮은 문짝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종이나 비단이 아직 사용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새의 깃털로 부채를 만들었음을 통해 확인된다. 곧 고분 벽화나 문헌에 깃털로 만든 부채의 현상이나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부채를 뜻하는 글자 가운데는 '큰부채 삽'자가 있다. 옛날의 국상이나 전통 장례식에 사용되던 '운삽'이라는 장신구는 높이가 2자 4치 정도로 면에는 흰 베를 입힌 뒤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을 그린 것이다.

 

이 종류로는 불삽과 운삽의 두 가지가 있는데, 상여의 앞에 서고 또 뒤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부채의 모양과 비슷하고 햇볕을 가리는 의장 도구와도 비슷한데 「세본(世本)」에는 "주의 무왕이 처음으로 운삽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적혀 있다.


곧 삽자와 선(扇)자가 부채를 일컫는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후세에 와서는 '삽'자가 부채의 뜻으로 사용되는 예는 매우 드물게 되었다. 그러나 '삽'자나 '선'자가 모두 날개를 뜻하는 '깃 우(羽)'가 들어 있는 것은 이 부채의 기원과 연관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사용하는 '부채'라는 말의 연원은 고려 때 송나라의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에 "선왈패채(扇曰 采)"라 한 데서 살필 수 있다. 또 조선 성종 때에 발간된 「두시언해」에는 '고추화선(高秋畵扇)' 이란 말을 "노판 가" 또 「박통사언해」에서도 '타선자(打扇子)'를 "부채질 하였노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종 때 최세진(?∼1542년)이 언해한 「훈몽자회」와 한호(1543∼1605년)의「천자문」에도 '扇'자를 "부채 션"이라 하였음을 보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부채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APWINC, Sookmyung Women's U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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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 (扇錘, Fan Ornament) : 선초(扇貂), 선추(扇墜) 라고도 한다


화각홍선(華角紅扇), 합죽선 등 부채종류의 장식에 백통이나 은으로 된 자그마한 고리는 선추를 꿰는 끈을 매달기 위한 것이다.


선추는 유관자(有官者)만이 할 수 있는 치레였다고 하지만 여성용도 더러 눈에 뜨인다. 백옥, 비취, 호박, 상아나 묵은 대추나무 등에 송학, 일월, 산수, 불로초, 사슴누각 등의 무늬를 음, 양각 혹은 투각한 것과 은세공품에 칠보를 올린 것 등 여러 종류의 선추가 있다.

 

              선추술

 

단오에 왕이 공신들에게 부채를 내려 이를 단오선(端午扇)이라고 하였으며 내의원에서 지은 옥추단을 함께 내리면 끈에 꿰어 부채 끝에 매달아 지니다가 구급약으로 쓰던 특수한 선추와 또 작은 붓, 귀이개, 이쑤시개 등을 손쉽게 꺼내 쓸 수 있도록 꾸민 것도 있다. 특히 목각선추에는 그 속에 나침판을 넣어 만든 것이 있어 먼길을 떠났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종류의 선추는 모두 빳빳하고 가느다란 원다회에 꿰어 중간에 동심결(양옆에 고를 시원히 뺀다)을 맺고 술을 달아 부채고리에 매달아 썼다.


선추끈의 색조는 쪽빛, 진보라, 회색, 금향색, 옥색 등(남자용)과 다홍, 분홍 등(여자용)이며 선추의 위아래에 구슬이나 가락지를 맺어 끼웠다. 남자용에는 선추끝에 방울술 딸기술을 하나씩 달고 여자용에는 딸기술, 봉술을 쌍으로 늘어뜨리거나 하나만 달기도 했으며 작은 매듭을 맺어 곁들인 것도 있다.

 

부채와 선추

 

출처 : http://cont3.edunet4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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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扇錘) : 선초(扇貂), 선추(扇墜) 라고도 한다


부채 밑 고리에 중심을 잡기 위하여 매단 일종의 노리개이다.


이것의 재료로는 온갖 보물인 호박, 은, 비취 등을 비롯하여 정교한 조각을 한 나무, 매듭 등이 사용된다. 이 선추는 원래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은 달 수 없었다.


그러나 구한말 개화가 되면서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금강산 관광 기념품으로 인기 품목이었다고 한다. 선추(扇墜), 선초(扇貂)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접는 부채 사복 고리에 매다는 장식품이다.


대개는 결이 고운 대추나무에 장생 문양인 사슴이나 학, 송학, 박쥐와 누각, 태극, 당초문, 버섯, 불로초, 거북, 잉어, 대나무, 인물 등을 정교히 조각하여 지금이 3.5센티미터 내지 4센티미터 되는 원형에 두께 1센티미터 정도가 주종이다. 또 사각형, 원통형, 팔각형, 꽃 모양인 것도 있다.

 

이들은 조각 기법도 여러 가지여서 통각, 민각, 입체 조각 등 다양하며 용도도 나침반을 넣는 패철 선추, 도장을 넣는 인장 선추, 침을 넣는 침통 선추, 이쑤시개나 귀후비개를 넣는 치통 선추, 거울 선추, 바늘집 선추, 향집 선추 등이 있다.

 

재료도 향을 먹처럼 응고시켜 만든 향 선추, 백말의 꼬리로 만든 마미 선추, 회양목, 대추나무, 대나무 뿌리, 대모, 옥, 비취, 호박, 금파, 은, 상아가 있는가 하면 매듭만으로 된 것도 있다. 따라서 선추도 신분이나 권력에 따라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단선에도 달고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선추의 사용에 대한 기록은 송나라 때 고종이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할 때 "장순왕(張循王)의 부채에 옥해아(玉孩兒)의 추자(墜子)가 있었다."고 했으니 당시에도 선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선제변증설(東國扇制辨證設)」에서도 "선추는 송나라 때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라 하였고, 전하는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동으로 된 것도 있으니, 선추의 사용도 접선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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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옛 장신구

조선시대(朝鮮時代) 선추(扇墜) (扇錘) 선초(扇貂),  라고도 한다.

 

상단이 둥글게 처리된 방형 주체 안과, 원형 주체 안에,해시계 겸용 지남철이

들어가 있는 형태의 선추(扇錘).

 

지남철에는 24방위를 표시하였으며, 북쪽을 나타내는 자(子)가 위로 새겨져 있다.

 ‘子午’즉 북남의 두 방위는 붉은색으로 강조하였다. 오(午) 위에는 해시계 영침(影針)을 부착했던 흔적만 남아있다.

 

주체 표면에는 전∙후∙측면에 산과 전각(殿閣)을 비롯하여,

장수를 상징하는 잉어와 대나무, 사슴, 불로초, 소나무등 길상문양이 양각(陽刻) 혹은 투각(透刻) 되어 있다.

상아 선추(扇錘)

여자용(女子用)  선추

선추(扇錘). 전(前) 후(後) 사진

 

 

 

 

원형의 조각된 선추(扇錘).속에 넣도록 되어 있는 나침반 겸용의 해시계

 

 

 

 

 

 

백동칠보(白銅 七寶) 선추

목각선추(扇錘).에는 그 속에 나침판을 넣어 만든 것이 있어 먼길을 떠났을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

선추는 모두 빳빳하고 가느다란 원다회에 꿰어 중간에 동심결(양옆에 고를 시원히 뺀다)을 맺고

술을 달아 부채고리에 매달아 썼다.

 

선추끈의 색조는 쪽빛, 진보라, 회색, 금향색, 옥색 등(남자용)과 다홍, 분홍 등(여자용)

이며 선추의 위아래에 구슬이나 가락지를 맺어 끼웠다.

 

남자용에는 선추끝에 방울술 딸기술을 하나씩 달고 여자용에는 딸기술, 봉술을 쌍으로 늘어뜨리거나

하나만 달기도 했으며 작은 매듭을 맺어 곁들인 것도 있다.

 

            

 

 

 

     

 

 

 

 

묵은 대추나무 선추(扇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