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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노벨상

작업복 입은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16. 3. 30.


작업복 입은 노벨상 수상자 / 다나카고이치 (田中耕一)

 

 

다나카 고이치 (たなかこういち, Tanaka Koichi) 화학자

출생 : 1959년 8월 3일,

소속 : 일본 소속시마즈제작소

 

 

학력사항

2002 도호쿠(東北)대학교 명예박사

~ 1983 도호쿠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수상내역

2002 문화훈장

2002 문화공로자

2002 노벨 화학상

 

경력사항

2009.06 도쿄대학의과학연구소 객원교수

2004 ~ 2008 교토대학교 객원교수

2004 도호쿠대학교 객원교수

2004 쓰쿠바대학교 객원교수

2004 에히메대학교 객원교수

2003 다나카고이치기념질량분석연구소 소장

1987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 개발 / 연구센터 분석계측사업부 연구소 주임

1983 시마즈제작소 선임연구원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현재(2015년기준) 24(미국 국적 취득자 2명 포함)으로 물리학상 11, 화학상 7, 생리의학상 3, 문학상 2, 평화상 1명이다.

이 가운데 과학분야가 21명으로 일본은 자연과학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다.

수상자중 2002년에 12번째 노벨 화학상을 안겨준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 회사 연구원에 대해 다시한번 기록을 정리해 본다.


2002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는 박사 학위를 지니지 않은 일반 기업의 사원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일본 과학이 지니고 있는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스타일로 갑자기 대중 매체의 스타가 된 다나카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나 화학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며, 그는 노벨상 수상 기자회견을 작업복 차림으로 행했다. 또한 그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에 있는 자회사에서 5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에는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렇듯 다나카는 흔히 노벨상 수상자에 대해 연상하기 쉬운,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힘든 천재'나 '근엄한 학자'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회사원이었던 까닭에 대중적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나카가 큰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끈기 있게 손발을 움직이는 훈련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1959년에 도야마(富山)현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톱을 비롯하여 목수들이 사용하는 여러 공구를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이러한 아버지를 보면서 어릴 때부터 여러 도구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다나카는 초등학교 시절의 실험을 회상하면서 "과학이란 교과서에 씌어 있는 대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일이라는 교훈을 얻었다."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다나카는 어린 시절부터 연구란 정답이 적힌 교과서를 넘어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59년에 도야마 현 도야마 시에서 태어났다. 출생 1개월 만에 친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숙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그 후 숙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형제는 형 두 명과 누나가 있다. 도야마 시립 하치닌마치 초등학교(현재의 도야마 시립 시바조노 초등학교)에서 4 ~ 6년차의 담임인 사와가키 교조로부터 장래의 기초를 키우는 이과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도야마 시립 시바조노 중학교와 도야마 현립 도야마추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도호쿠 대학 공학부에 진학했는데 다나카는 명문 도호쿠(東北) 대학에 입학했는데, 대학 입학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대학 입학 절차를 밟던 중 그는, 입학 시에 받아본 호적 초본을 통해 자신을 키워 준 부모가 자신을 낳아 준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이 양자인 것을 알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서 교양 과정 재학 시에 성적 미달로 약 1년간의 유급 생활을 보냈다.

졸업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주변을 놀라게 하는 천재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급이후 전문 과정의 공부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졸업 시에는 학과에서 상위 10%의 성적(3위)을 남겼다. 당시 지도 교수는 아다치 사부로(현 도호쿠 대학 명예교수)이며, 전자파와 안테나 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소니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첫 면접 실패 후에 다나카와 함께 상담한 아다치의 권유로 교토 부 교토 시 나카교 구에 있는 시마즈 제작소 입사 시험에 응시한 끝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에 대해서는 1학년 때부터 도호쿠 대학 생활협동조합 학생조직위원회에 소속됐고 조합원의 조직 활동이나 정보 선전, 문화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실시했는데 그 당시 다나카가 활동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

 

1983년에 도호쿠 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다나카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취직을 선택했으나 면접에서 긴장하는 등 계속해서 실패가 이어졌고, 이러한 때에 지도교수로부터 과학기기 등을 제작하는 시마즈(島津) 제작소를 소개받아 입사하게 된다. 당시 시마즈에서는 생명공학 및 의료 관련 기기를 제작하고 있었고 다나카도 의료사업부를 지망했으나, 그가 배속된 자리는 중앙연구소였다.

 

다나카가 시마즈 중앙연구소에서 개발을 담당한 것은 단백질 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기법이었다.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질량을 측정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단백질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이온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개발 과정에는 물질의 농도나 조합을 아주 조금씩 변화시켜 가면서 분석해야 하는 등 끈기와 집중력이 필요한데, 그는 추운 지방 출신에 자영업을 하는 부모를 도운 경험 덕택에 묵묵히 작업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시라카와나 시모무라 등 앞서 살펴본 여러 과학자의 경우와 비슷하게 다나카의 경우에도 커다란 발견에 이르는 과정에 실수가 놓여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1985년 2월, 비타민 B12(분자량 1,350)의 질량 측정을 준비하고 있던 다나카는 늘 사용하던 아세톤 대신 실수로 글리세린을 시료에 섞어 버렸다. 그는 실수를 금세 알아챘지만,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시험 삼아 이 시료에 레이저를 쏘아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타민 B12가 이온화되었던 것이다. 다나카는 실수에서 얻어진 결과를 놓치지 않고 실험을 거듭했고, 결국 레이저를 이용하여 고분자 단백질의 종류와 양을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결과를 1987년에 발표했고, 이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로버트 코터(Robert J. Cotter)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평범한 회사원의 연구가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한편 시마즈 제작소는 이 기술의 제품화를 시도했으나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나카는 스스로가 연구 개발에서 대량생산, 그리고 영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경험한 것이 유익했다고 이야기하면서, 특히 사용자와 직접 이야기를 해 본 경험이 중요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업에 속한 연구자로서, 기술이나 지식을 설계하고 생산해 내는 '상류'뿐만 아니라 이를 소비하고 사용하는 '하류'의 관점에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나카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제품을 개발하는 기술자였으며, 그의 업적은 이론을 통해 얻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연 기술자는 과학자에 비해 덜 존경받아야만 하는 존재일까? 다나카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연구자들을 존중해 주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 일본의 경우 연구개발비의 절반 이상을 기업이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 그는 관리직에 오르면 현장을 벗어나게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적극적으로 승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고도 이야기한 바 있는데, 다나카가 2002년 10월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자 부랴부랴 그에게 '펠로우'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은 시마즈 제작소였다. 그리고 다나카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여 설립된 '다나카 고이치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에 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노벨상 받는 다나카고이치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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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을 요약해 보면 일본 열도가 새로운 신데렐라의 등장으로 온통 들끓고 있다. 學士 출신의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외견상 ‘성공한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다나카 고이치의 ‘성공 개척담’이어서 일본인들을 더욱 감동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루 아침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어 일본사회에서 ‘보통사람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다나카 고이치의 인생사를 추적한다.

  


  

­일본 열도 뒤덮은 다나카 고이치의 ‘성공개척담’

 

지금 일본 열도에서는 ‘다나카 고이치 신드롬’이 한창이다.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43)는 교토(東京)의 중견 기업 시마즈(島津)제작소의 말단 주임연구원에서 어느날 갑자기 신데렐라와 같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샐러리맨’ ‘일본의 스타’로 떠오른 주인공이다.

그의 인생 행로를 보면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 그대로다.

 

다나카는 지난 10월9일 저녁 6시쯤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전만 해도 이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했다. 많은 화학자들이 “다나카 고이치가 도대체 누구냐”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과학기술정책을 담당하는 문부과학성마저 시마즈제작소에 다나카의 신상자료를 요청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일본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상자 결정후 한 달이 지나도록 연일 일본 언론에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상세히 실린다. 인기 연예인을 뺨칠 정도다. 다나카는 “어디를 가든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통사람의 인간 승리’에 더 많은 박수

 

한 달 사이 그의 신분도 수직상승했다. 회사에서는 주임연구원에서 부장급 연구원으로 승진했다. 연봉도 800만엔(약 8,000만원)에서 1,000만엔 이상으로 올랐다. 모교인 도호쿠(東北)대와 교토(京都)대의 객원교수도 됐다. 두 대학은 이공계에서는 도쿄(東京)대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학이다.

도호쿠대학은 “전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큰 희망을 준 공적을 평가한다”며 학사 출신인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일본 정부가 문화·과학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도 받았다. 역대 문화훈장 수상자 가운데 세번째 연소자다. 시마즈연구소는 다나카노벨상연구소도 설립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것이다.

 

올해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다나카뿐만이 아니다.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76) 도쿄대 명예교수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고시바 교수의 이야기는 다나카에 묻혀버렸다. 사실 고시바 교수 탓이 아니다. 시라카와 히데키(白川英樹)쓰쿠바(筑波)대 명예교수와 노요리 료지(野依良治) 나고야(名古屋)대 교수가 2000년과 지난해에 각각 노벨화학상을 받았을 때도 후일담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나카의 경우가 비정상적이다.


       코시바 마사토시,  고이즈미 총리,  다나카 고이치

 

2002 노벨물리학상

코시바 마사토시 小柴昌俊  (왼쪽 사진)

동경(東京, 도쿄)대학 이학부 졸업 이학박사(동경대학)

천체물리학, 우주 뉴트리노 검출에 대한 선구적 공헌

 

2002 노벨화학상

다나카 고이치 田中耕一   (오른쪽 사진)

도호쿠(東北)대학 공학부 졸업

도호쿠(東北) 대학 명예박사

생체고분자의 상태와 구조해석을 위한 방법 개발


왜 그런가. 이는 과거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교수·박사에다 노벨상 수상 이전부터 유명했던 반면 일본 최초의 학사 출신 수상자인 다나카는 그야말로 ‘평범한 샐러리맨’이기 때문이다.

세파에 때묻지 않은 어리숙한 표정에 어눌한 말투로 진솔하게 세상을 대하는 다나카를 보면서 일본의 평범한 국민들은 ‘보통사람의 인간승리’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외견상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는 다나카의 인생사가 밝혀지면서 일본인들은 잔잔한 감동 속에 빠져들고 있다.

 

그의 인생을 보면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가 더 많았다는 인상마저 준다. 도야마(富山) 현 출신으로 그곳에서 고교를 졸업한 다나카는 1978년 도호쿠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화학이 아닌 전기공학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자연과학 수업 시간에 하루 종일 실험을 하는 선생님 덕분에 과학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그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한 해를 유급해 입학 동기생들보다 늦은 1983년 졸업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 기자들이 그의 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다나카에 대해 묻자, 지도교수는 “굉장히 기쁘다. 그런데 그의 전공이 뭐였더라. 자료를 보지 않으면 모르겠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나카는 지도교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제자였던 것이다.

 

당시 친구들도 “다나카가 진지하게 공부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뛰어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원래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졸업후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원래 일하고 싶은 기업은 소니였다. 그러나 면접에서 떨어진 후 시마즈제작소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1875년 설립된 계측·분석기구회사로 지난해 1,920억엔의 매출을 올렸다. 여기서 다나카는 전공과는 동떨어진 화학연구원으로 새출발했다. 입사후 그는 기본적인 화학 지식을 제대로 몰라 꽤 고생했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일본은 과거 경력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다. 과거에 무엇을 했든 새로운 일을 하면 초년생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하물며 신입사원인 다나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나카는 그러나 연구에 대한 정열과 진지함으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갔다.

 

시마즈제작소 사람들은 그에게 ‘이상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외모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 양복 두 벌을 번갈아 입고 다녔다. 어떤 때는 머리를 아주 짧게 깎고 나타나 동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동료들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연구하고 생각하는 데 방해가 돼 깎았다”는 답변이 나왔다. 동료들은 “함께 출장가도 다나카는 연구 이야기 밖에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입사 동기 70명 가운데 과장이 즐비한데도 그가 주임연구원인 것도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관리직 승진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엉뚱한’ 실험도 많이 했다. 그는 “화학 지식에 어두웠던 탓인지는 몰라도 안 될 것이라고 미리 재단하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 했다”고 말했다. 일본 재계에서는 ‘대학보다 더 학구적인 연구 풍토를 가진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마즈제작소의 기업문화도 큰 힘이 됐다.

그는 노벨상 수상이 결정된 후 “나는 실험을 거듭하면서 많은 실패를 했다. 만약 연구비를 낭비한다고 질책하는 회사였다면 벌써 해고됐을 것이다. 다행히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하던 1985년쯤 회사 형편이 매우 좋아 경영진이 ‘3∼5년후 활용할 만한 신기술이라면 아무 것이나 연구해도 좋다’며 연구예산을 쉽게 배정해 줬다”며 회사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28세 때인 1987년, 다나카는 이런저런 실험을 하던 중 실수로 두 용액을 잘못 섞었다가 ‘단백질 구조 해석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으로 다나카는 존 펜(85·미국 버지니아주립대 교수)·쿠르트 뷔트리히(64·스위스 연방공대 및 미국 샌디에이고 스크립스연구소 교수) 등 2명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게 된다. 스위스 왕립과학원은 3명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생체분자의 획기적인 분석 기법을 개발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단백질 등 생물학적 고분자의 입체 구조를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해 정밀한 단백질 분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약 개발과 유방암·전립선암의 조기진단 등 생명공학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다나카가 수상자로 결정된 후 한동안 화제가 된 말이 ‘실수로 발견’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잘못된 것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발견을 했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이라며 솔직하게 ‘실수에 의한 발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하면 ‘우연’이 ‘대복’(大福)을 가져다준 셈이다. 그러나 미지의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실패와 실수, 그리고 우연은 때때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세계의 획기적인 발명품이나 발견 중에는 이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 적지 않다.

    


다나카의 대학·학과 선배이자 교수 출신인 니시자와 준이치(西澤潤一·76) 일본 공학아카데미 회장은 “다나카는 대학 시절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매우 정밀하게 실험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실험 도중 실수로 발견한 현상을 집요하게 탐구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은 그가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엔지니어가 갖춰야 할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과 끝없는 도전정신”이라며 “다나카 고이치가 이를 잘 증명해 줬다”고 말했다.

다나카도 수상자로 결정된 후 교토에서 열린 일본생화학회대회에서의 강연에서 “실패는 성공의 뿌리”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발명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이다.

 

다나카의 신기술 해외 기업에서 먼저 주목

 

그러나 다나카의 신기술이 빛을 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일본 내에서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나카의 신기법을 주목한 것은 해외 기업들이었다. 특히 다나카의 발견을 응용해 단백질 분석 방법을 개발한 독일학자가 논문을 쓸 때마다 ‘다나카의 원리’라고 소개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이 덕분에 연구성과가 점차 세계에 알려졌고, 1990년대 후반부터 바이오 기술을 이용한 신약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다나카의 발견은 ‘핵심 신기술’로 자리잡게 됐다.

 

그래도 다나카는 물론 주변사람들도 이로 인해 노벨상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나카는 “노벨재단이 전화로 수상 소식을 알려왔을 때 ‘스웨덴에 비슷한 이름의 상이 또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기자들이 연락해올 때는 ‘기자들이 잘못 알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가족들은 방송에서 다나카의 이름이 나왔을 때 “동명이인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고, 회사측도 기자들의 문의전화에 처음에는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수상자가 결정된 날 회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다나카는 작업복 차림으로 나왔다.


    


다나카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펜 교수조차 “모든 화학자들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가는 꿈을 꾸는데 실현될지는 몰랐다”며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말했을 정도로 노벨상은 하늘의 별보다 멀리 있다. 하물며 다나카의 과거 경력으로 볼 때 본인과 주변사람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나카가 국민적 인기를 받는 것은 이같은 그의 인생 스토리와 함께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 그가 보여준 소탈하고도 진솔한 면 때문이다.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 도중 어디선가 걸려온 휴대폰 전화를 들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머쓱한 표정으로 “미안합니다. 아내와 통화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다나카를 보고 수많은 일본 아줌마들은 감동 속에 빠져들었다.


 

주일 스웨덴 대사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을 때는 “시상식에서 춤을 춰야 한다는데 못 춰서 걱정이다. 사실 아내도 입고 갈 옷이 없다”고 말해 보통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그는 돈과는 멀리 있던 사람이다. 일본의 신칸센은 요금이 비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노조미’는 더욱 비싸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초청을 받아 도쿄로 오면서 생전 처음 ‘노조미’열차를 타봤다.

 

총리 관저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점심을 먹은 후 기자들이 점심 메뉴를 묻자 “생선구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식탁에 올라온 생선은 ‘졸임요리’로 밝혀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국민들의 반응은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했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다나카”라고 평가했다.

많은 국민들은 그의 겸손함을 사랑한다. 시마즈제작소는 당초 그를 이사대우로 승진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고 싶다”며 사양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식석상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는 나 혼자의 작품이 아니다. 5명이 함께 연구했는데 나만 받아 미안하다”고 강조했다. 도쿄의 외신기자클럽에서 외국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한 명이라도 실패하면 성공할 수 없는 기술이었으므로 5명이 공동수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다나카가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 도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함께 연구했던 회사 선배가 영어 논문에 공동연구자들의 이름을 올릴 때 다나카의 이름을 제일 위에 적은 덕분에 다나카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다나카의 6년 입사선배인 요시다 게이치(吉田佳一)다. 요시다와 다나카는 이번에 노벨상 수상한 연구논문으로 1989년 일본 질량분석학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당시 이 논문에는 요시다의 이름과 이력이 가장 위에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해외에 발표된 영어 논문에는 다나카의 이름이 가장 위에 올랐고, 요시다의 이름은 5명 가운데 네번째에 있었다. 논문은 다나카가 썼지만 요시다가 인정하지 않았으면 다나카의 이름은 제일 위에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다나카는 1992년부터 1년간, 1997년부터 올 5월까지 영국의 관련회사에서 근무해 비교적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이 영어 논문이 결과적으로 노벨상 수상의 계기가 됐다. 공동연구논문에서는 이름이 최초에 적히느냐(主저자)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주저자는 연구에 가장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공동연구의 경우 연구실의 교수나 상사의 이름을 적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종종 교수나 선배가 후배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이름을 제일 먼저 적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이름 순서를 놓고 공동연구자 간에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어 요즘은 영어 알파벳 순서대로 적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국민들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다나카에게 반한 상태다. 다나카는 “요시다 선배의 힌트로 논문을 썼는데 나만 상을 받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실 요시다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장기 불황과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등 온통 우울한 뉴스 속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런 다나카를 보면서 모처럼 신선한 청량제와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시마즈제작소도 ‘다나카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도쿄증시의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시마즈제작소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다나카가 개발한 질량분석기뿐만 아니라 시마즈사의 분석기기 전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제약회사 등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다나카의 기술을 활용해 2000년 시판된 질량분석기는 대당 3,000만엔(약 3억원)으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80대가 팔렸다. 세계시장 점유율 3위다. 시마즈는 지난해 바이오사업에서 50억엔의 매출을 올렸으나 2004년에는 200억엔을 목표로 정했다. 야지마 히데토시 시마즈제작소 사장은 “요즘 불황으로 회사 제품 매출이 주춤해 걱정이었는데 다나카 덕분에 회생하게 됐다”며 싱글벙글하고 있다.

 

광고효과 조사회사인 데스크원에 따르면 다나카의 노벨상 수상 결정 이후 2주 동안 5대 전국 일간지가 다룬 다나카 관련 기사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8억3,000만엔의 광고효과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시마즈제작소의 연간 광고선전비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5개 신문이 올 9월에 보도한 기업 관련 기사의 광고효과를 금액으로 분석한 결과 1위였던 도요타자동차의 2배였다.

 

기업 연구원 홀대 풍토까지 바꿔

 

다나카가 일본사회에 가져온 영향은 더 크다. 묵묵히 연구하는 많은 연구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 것이다. 일본은 기술대국이지만 연구원들의 처우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니시자와 공학아카데미 회장은 “일본경제가 과거 10여년간 불황을 겪으면서 엔지니어의 위상이 떨어졌는데 다나카의 수상을 계기로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쿄의 한 결혼정보서비스회사측은 “‘다나카효과’덕분에 여성들 사이에 기술자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밝혔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던 에자키 레오나 시바우라대 총장은 “학생들의 이과 기피 현상이 다소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기업의 연구풍토나 교육제도 개선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다나카는 “일본기업은 지나치게 결과만 따지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나쁘면 인사고과에서 감점당한다. 서구에서는 연구자의 잠재력과 과정을 더 중시한다. 보상보다 평가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구자들이 보다 자신있게 활동할 수 있는 풍토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우연히 큰 상을 받았지만 일본에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외국의 연구자들은 자기 성과를 자신있게 발표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고이즈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는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연구원들이 많은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과학 엘리트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일본기업들은 연구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포상하는 데 인색했다. 다나카도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성과로 인해 회사에서 받은 상금은 1만1,000엔에 불과했다. 특허 신청 비용 등의 명목이었다.

다나카는 “나로 인해 회사가 많은 돈을 번 것도 아니다”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기업 연구원으로서는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특허취득보다 즐거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으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연구원에 대한 보상문제로 법적 분쟁이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카무라 슈지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의 중소기업이던 니치아화학에 근무하던 1993년 세계 최초로 청색 발광 다이오드(LED)를 개발했다. 회사는 이 제품으로 떼돈을 벌었지만 나카무라는 특허 출원료로 겨우 2만엔을 받았을 뿐이다. 나카무라는 결국 ‘능력을 보상하지 않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일본에서는 당시 ‘국부(國富)유출’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나카무라는 지난해 회사를 상대로 20억엔의 청구소송을 냈다. 올해도 조미료회사인 아지노모토에서 인공감미료를 발명했던 전 간부가 회사에 20억엔의 특허 개발보상금청구소송을 냈고, 히타치제작소의 전 사원도 광디스크 재생용 광헤드의 발명대가로 9억여엔의 청구소송을 내놓고 있다.

 

세계 과학계에서 높아진 일본의 이미지

 

이런 가운데 다나카가 노벨상을 수상하자 많은 기업 연구원들은 “기업문화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최근 기업 연구원이 신기술을 개발했을 때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나카 덕분에 세계 과학계에서 일본의 이미지도 크게 높아졌다. 일본은 1949년 유가와 히데키가 처음 물리학상을 받은 후 올해까지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물리(4명)·화학(4명)·의학(1명) 등 과학 8명, 문학 2명, 평화 1명이다. 경제분야에서만 없다.

 

그러나 1987년 도네가와 스스무가 노벨의학상을 받은 후 99년까지 과학분야 수상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일본은 응용과학에서는 강하지만 기초과학은 약하다” “일본인은 창의력이 떨어진다”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그러다 올해로 사상 처음 3년 연속 과학분야 수상자를 배출한 데다 학사 출신 기업 연구원이 노벨화학상을 받자 외국에서는 일본의 기초과학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일본 기초과학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며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다.

 

다나카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연말까지 강연·행사 등으로 스케줄이 꽉 차 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연구에 가 있다. “나는 탤런트가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빨리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인간의 건강증진 연구와 이미 개발한 ‘매트릭스지원 레이저이온화법’(MALDI)를 상업화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 단백질 해석에 사용되고 있는 당사슬이라는 고분자와 관련된 단백질의 응용연구도 시작했다. 새로운 타입의 분석장치도 개발했는데 곧 발표할 예정”이라며 이런저런 연구계획 보따리를 풀어놓는 그의 얼굴에서 일본의 미래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