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법정스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건과 인연을 맺는다.
물건 없이 우리들이 일상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것도
물건과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적인 욕구가 물건과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사람들은 느긋한 기지개를 켠다.
동시에 우리들이 겪는 어떤 성질의 고통은
이 물건으로 인해서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중에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물건 자체에서보다도 그것에 대한 소유 관념 때문인 것이다.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버렸을 때
그는 괴로워한다.
소유관념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잃으면
마음까지 잃는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다.
이런 경우 집착의 얽힘에서 벗어나
한 생각 돌이키는 회심(回心)의 작업은
정신위생상 마땅히 있음직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리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 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에서는 가끔 도둑을 맞는다.
어느 날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했다.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정랑(淨廊 변소)엘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놓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일어나려다 말고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뒤주에서 쌀을 한 가마 잔뜩 퍼내긴 했지만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노스님은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었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은
선가(禪家)에서 차원을 달리해 쓰이지만
물건에 대한 소유관념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그 후로 그 밤손님은
암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1970)
《무소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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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불교용어로, 모든 것은 본디부터 實在(실재)하지 않고 빈 것이라는 말이다. < 밑본 (本), 올래 (來), 없을무 (無), 한일 (一), 만물물 (物) >
본래무일물은 육조 혜능대사(六祖 慧能大師) 게송(揭頌 : 불교적 교리의 한시)에 나온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坮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보리(菩提)에 본래 나무가 없고 /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었는데 / 어느 곳에 끼일 티끌은 있겠는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중국 선종 6대조인 혜능의 일화에서 온 말이다.
혜능(慧能: 638~713)스님은 당나라(618~907) 시대의 선승이며 선종(禪宗)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이며, 일반적으로 6조대사 또는 조계대사(曹溪大師)라고 한다. 대감선사(大鑑禪師)라고 시호되었다.
혜능스님은 원래 나뭇꾼으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팔고 그것으로 늙은 어머님과 연명하였는데 하루는 손님이 나무를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객점으로 가져오라 하였다.
나무를 객점으로 인도하고 나올려고 하는데 금강경 읽는 소리에 문득 깨친바가 있어서 경을 읽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 경이 온 곳을 물었더니 "황매현에 있는 동선사"라는 절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절에 거주하시는 오조 홍인대사를 찾아가 법을 배웠고 배우는 과정에서 많은 설화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자신의 사형인 신수대사를 게송으로서 이겼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혜능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출가한 뒤 제5대조인 홍인을 찾아가 그 절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불도를 닦았습니다.
홍인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의발을 전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좌(上座)인 신수를 제쳐놓고 밥짓고 빨래나 하는 혜능에게 의발을 전하였다가는 다른 승려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홍인은 모든 승려들을 모이게 한 뒤, 의발을 전해줄 마땅한 인물을 가리고자 하니 각자 게를 한 수씩 지어 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수는 다음과 같이 게를 지었습니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로다.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부지런히 털어내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할지니
이에 대하여 혜능은 다음의 게를 지었습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 또한 대(臺)가 아니다.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는 것이니,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오
홍인이 두 사람의 게를 보고 혜능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써, 혜능은 선종의 제6대조가 되었다.
육조혜능은 달마대사만큼 유명했던 인물로,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라 불리우는 스님으로 육조대사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선불교의 대표적 계통으로 발전한 남종선을 창시하였고 설법을 기록한 것을 육조단경이라 합니다.
육조(六祖)의 개념을 설명하면 중국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네들의 사상으로 융화시키려고 한 것으로서 부처님을 교주(敎主)로 삼아 부처님의 십대 제자중의 한 사람인 마하가섭존자를 초조(初祖)로 삼고 이조(二祖)는 부처님의 제자이며 다문제일(多聞第一)인 아난존자로부터 중국에서 초조(初祖)로 삼고 마하가섭존자로부터 이십팔대(二十八代) 보리달마대사 로 이어 졌는데 중국의 선종(禪宗)은 보리달마대사를 그 근본으로 하여 초조(初祖)에 해당한다.
김명국(안산김씨)의 달마도(達磨圖) / 지본수묵, 83 x 58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즉 불교선종조사도(佛敎禪宗祖師圖)는 달마(達磨)는 인도에서는 제이십팔조(第二十八祖)에 해당하고 중국 선종(禪宗)에서는 초조(初祖)에 해당하며, 이조(二祖) 혜가대사, 삼조 승찬대사, 사조 도신스님, 오조 홍인대사, 육조 혜능대사로 이어진다.
선종 제이십팔조 보리달마 존자 (禪宗 第二十八祖 菩提達摩 尊者)
선종 제이십구조 혜가 존자 (禪宗 第二十九祖 慧可 尊者)
선종 제삼십조 승찬 대사 (禪宗 第三十祖 僧璨 大師)
선종 제삼십일조 도신 대사 (禪宗 第三十一祖 道信 大師)
선종 제삼십이조 홍인 대사 (禪宗 第三十二祖 弘忍 大師)
선종 제삼십삼조 혜능 대사 (禪宗 第三十三祖 慧能 大師)
게송(揭頌) : 불교적 시의 한 형식.
불교계에서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를 게송이라 한다. 선가(禪家)의 시게(詩偈)·송고(頌古)·가송(歌頌) 등을 통칭한다.
게는 범어(梵語)인 가타(Gatha) 또는 기야(Geya)의 음역(音譯)인 가타(伽陀)·게타(偈陀) 또 는 기야(祇夜)를 약칭하여 게(偈)라 하였다. 한시(漢詩)의 송(頌)의 일종이기 때문에 합하여 게송이라 하게 되었다. 게송은 범어와 한자어가 합성된 명칭인 셈이다.
게송은 인도의 가타가 운(韻)이 있는 시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한시의 형식에 맞추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게송이 시의 한 형태로 독립되었다. 그러나 원래는 불교경전의 산문 내용을 시의 형태로 되풀이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을 중송(重頌)이라 하였다.
불경의 문체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 또는 계경(契經)이라 하여 경의 뜻을 풀어 쓰는 산문이다. 둘째는 중송(重頌) 또는 응송(應頌)이라 하여 경의 산문을 요약 서술하는 시가의 형태이다.
셋째는 가타 또는 게송이라 하여 불경의 산문과는 관계없이 불교적 교리를 시가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게송이라 함은 둘째와 셋째의 중송과 가타를 함께 일컫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성게(法性偈)로 알려져 있는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가장 오래된 게송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화엄사상을 7언 30구로 구성한 것이다. 고려 말에 운묵(雲默)의 「석가여래행적송 (釋迦如來行蹟頌)」은 「석가보(釋迦譜)」를 5언 776구로 구성한 장편의 게송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분류하면 중송에 해당한다. 고려 말에 나옹 혜근(懶翁 慧勤)의 시집을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이라 하여 송(頌)이라 한 것도 이 게송의 분류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적 교리의 시가로서의 가타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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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혜능의 성은 노씨(盧氏)로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俯) 신흥(新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나뭇꾼 소년이었다.
어느날 안도성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안도성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안도성이 말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대사님을 예배하였는데 그곳의 문하생이 천 명이 넘는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이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혜능은 안도성에게 은 100냥을 보시받아 어머니께 드리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대사를 예배하였다.
홍인대사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느냐? 또 내게서 새삼스레 구하려는게 무엇이냐?" 하니 혜능이 말했다.
"제자는 영남사람인데 지금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하려 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요,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혜능은 한 행자승이 이끄는대로 방앗간에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하루는 홍인대사께서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반야의 지혜를 써서 게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 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신수(神秀) 화상은 우리들 중의 대사형이므로 굳이 우리들이 게송을 지어 큰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 사형이 법을 얻은 후에 육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신수는 혜능보다 먼저 오조 홍인의 문하로 들어와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혜능에게는 대선배라 할 수 있다.
신수는 이것을 알고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이 다 잠이 든 삼경(三更)에 남쪽의 복도에 몰래 게송을 적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오조 홍인대사는 아침에 게송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所見)은 당도했으나 다만 문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삼악도에 떨어짐은 면하리라."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혜능이 그것을 들었다. 혜능은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게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은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게송을 복도에 쓰게 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오조 대사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흡족하셨지만 대중들이 시기를 할까 염려하여,
“이것도 견성구(見性句)가 아니다.” 하면서 그 게송을 지워 버렸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는 곳을 찾아가서,
“방아는 다 찧었느냐?” 하고 한 마디 말을 거니,
“방아는 찧은 지가 오래됩니다만 아직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
라고 혜능이 답을 했다. 그래서 오조 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돌아와 버렸다. 삼경(三更)이 되면 아무도 몰래 찾아오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밤중에 혜능이 방으로 찾아 들어오니, 오조 대사께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사(袈裟)를 가지고 휘장을 쳐서 은밀하게 금강경을 설하는데,
‘응당히 주(住)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하는 여기에 여지없이 대오(大悟)를 했다.
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불생멸 (何期自性本不生滅)
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무동요 (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능생만법 (何期自性能生萬法)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만법이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동요도 없는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을 좇아 만법이 나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렇게 게송을 지어 바치니 여기에서 오조(五祖) 선사께서는 혜능이 크게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의발(衣鉢)을 전(傳)하여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셨다.
법을 전해 받은 육조 혜능대사께서는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어느날 법문을 하시기를.
“나에게 가사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고 밝기로는 일월(日月)보다도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검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되 일상 동용(日常動用) 중에,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 쓰고 있으면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 무엇인고?”
이렇게 물으니 하택 신회(荷澤神會) 스님이 일어나서 답을 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라고 답하니, 육조 대사께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했는데 함부로 제불(諸佛)의 본성이며 신회의 불성이라 하느냐! 너는 장차 출세(出世)를 하더라도 지해(知解)의 종도(宗徒)밖에는 못 되리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후 7년 만에 회양(懷讓) 선사가 찾아와서 답하기를,
“설사 일물(一物)[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육조 선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證得)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아니하나 오염될 순 없습니다.”
육조혜능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도 또한 이러하니라.” 하니, 흡족하시어 제자로 봉(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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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흐름도
살아 생전시에 마하가섭에게 전해진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 받은 것을 조사라고 호칭한다.
전래된 조사님의 이름만 열거해보면
가섭 제1대 조사(祖師)
제2조 아난, 제3조 상나화수, 제4조 우바국다, 제5조 제다가, 제6조 미차가, 제7조 파수밀,
제8조 불타난제, 제9조 복수밀다, 제10조 협존, 제11조 부나야사, 제12조 마조대사, 제13조 가비마라, 제14조 용수보살, 제15조 가나제파, 제16조 나후라다, 제17조 승가난제, 제18조 가야다사, 제19조 구마라다, 제20조 사야다, 제21조 파수만두, 제22조 마노라, 제23조 학륵나, 제24조 사자비구, 제25조 비사다마, 제26조 불여밀다, 제27조 반야다라, 제28조 보리달마
이렇게 인도에서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음의 마음은 천년동안을 스승과 제자에게로 한사람과 한사람에게로 아슬아슬하게 끊어질듯 하게 28대를 이여져 내려오다가 27대조사 반야다라존자가 제자인 보리달마를 자신이 죽은 후 67년뒤에 중국으로 가라고 법을 전하게 됩니다.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남천축국의 향지왕의 셋째 아들로서 성은 찰제리요, 본래의 이름은 보리다라 였는데 제27조 반야다라로 부터 법을 이어 받은 후 스승 반야다라로 부터 그대는 법을 다 깨달았으니 대저 달마라함은 통달하고 크다는 듯이니 달마라 하라 하여 보리달마로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후 중국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서 9년을 면벽하던중 중국에서의 제자 혜가를 만나 법을 전하고
이조(二祖) 혜가대사, 삼조 승찬대사. 사조 도신스님, 오조 홍인대사, 육조 혜능대사로 이어진다.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받은 마하가섭을 시작으로 28대 달마가 중국에서의 1대 조사가 되며
6조 혜능 까지 합하여 33조사가 천년을 이어 오다가 중국에서의 6조 혜능 이후부터 한명이아닌 여러명의 제자들이 법을 이으면서 많은 선승들이 배출되었다.
선종5가해(禪宗五家解)로써 선을 참구하는 승려의 집단이 커지면서 선종(禪宗)도 가섯 종파로 생겨나는 선의 오종가풍(誤宗家風)을 알아보자면 무릇 조사의 종파가 다섯이 있으니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이다.
1) 임제종 혈맥(臨濟宗血脈)
본사 부처님으로부터 33세 조사에 이르러 6조 혜능대사 아래로 전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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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동종 혈맥(曹洞宗血脈)
6조 혜능대사 밑으로 전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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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문종 혈맥(雲門宗血脈)
임제종의 마조도일 선사로 부터 전함이니
천왕도오ㅡ>용담숭신ㅡ>덕산 선감ㅡ>설봉의존ㅡ>운문문언ㅡ>설두중현ㅡ>천의의회ㅡ>선사등이라...
4) 위앙종 혈맥(爲仰宗血脈)
운문종의 설봉 선사로 부터 전함이니
현사사비ㅡ>지장계침 ㅡ>법안 문익 ㅡ>천태덕소ㅡ>영명연수ㅡ>용제소수ㅡ>남대수안 선사 등입니다
5) 법안종 혈맥(法眼宗血脈)
위산영우ㅡ>앙산혜적ㅡ>향엄지한ㅡ>남탑과용ㅡ>파초혜정ㅡ>곽산경통ㅡ>무착문희ㅡ>선사등이라...
이렇게 부처님으로 부터 33조사에 이르고 선5종으로 생겨진 법맥이 우리나라는 임제종의 혈맥으로 수년전에 해인사에서 입적하신 성철스님과 백양사에서 좌탈입망을 보이시고 오방수로서 사리를 습득하여 세상을 놀라게하신 서옹선사 등이 부처님으로 부터 70대 조사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성철 큰스님의 사리는
性徹(성철) 종정예하 장의위원회 집행위원장 日陀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다비식에서 수습된 사리는 총 1백10 頁果라고 공식 발표했다.
日陀스님은 또 정골속에 박혀있는 60~70과는 분류 공개하지 않고 사리탑에 봉안할 예정이며, 재속에 묻혀있는 수십개의 좁쌀크기만한 사리도 일일이 가려내지 않고 사리탑에 안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개된 것 이외의 사리를 더이상 분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日陀스님은 "스님의 法力은 이미 입증됐고 총사리수에 대한 관심은 불교의 참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성철큰스님의 사리는 1차발표된 38과, 2차발표된 72과,그리고 분류하지 않은 精骨과 재속의 80~90과까지 합쳐 모두 2백과가 넘을것으로 보인다.
수습된 사리 1백10과는 은빛,옥색,赤.紅.黑색등 오색영롱하며 국내에서 발견된 것중 가장 큰 콩알크기의 4과를 비롯, 팥알, 녹두알.좁쌀크기등 다양하다고 日陀스님이 밝혔다.
서옹스님은 21세 때에 백양사로 출가하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시고 백양사 조실이셨는데 스님이 입적하고 다비식이 끝난 후 연화대 위에 수백여 과의 사리가 출현했습니다.
사리의 종류
사리 라는 단어는 유골(遺骨) 또는 유체(遺體)를 의미하는 싼스끄리뜨 샤리라(śarira)의 음역. 본래 의미는 단지 ‘육체’의 의미로 사체(死體)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불교에서 불보살이나 성자의 유골(遺骨)을 의미하게 되며, 불사리(佛舍利)ㆍ신골(身骨)ㆍ유신(遺身)ㆍ영골(靈骨)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 입멸 후 다비(茶毘)했을 때 구슬과 같은 모양의 것이 나온 것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는다.
전신사리(全身舍利)ㆍ쇄신사리(碎身舍利)ㆍ생신사리(生身舍利)ㆍ법신사리(法身舍利)의 구별이 있다.
전신사리는 다보불과 같이 전신이 그대로 사리인 것이고, 쇄신사리는 석가불의 사리와 같이 몸에서 나온 낱알로 된 것이며, 생신사리는 여래가 멸도(滅度)한 뒤에 전신사리나, 쇄신사리를 남겨 두어 인(人)과 천(天)이 공양케 하는 것이며, 법신사리는 대승ㆍ소승의 일체 경전이다. 본래는 신골이나, 주검을 모두 사리라 하였는데, 후세에는 화장한 뒤에 나온 작은 구슬 모양으로 된 것만을 사리라 한다.
법신사리(法身舍理) : 부처님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팔만사천 대장경 불타가 깨우친 진리를 설법한 경전은 그 자체로 법신(法身)이기 때문에 사리와 동등한 의미를 지닌다.
쇄신사리(碎身) : 아주 미세한 구슬로 되여진 특히 붉은 색의 혈사리 형태에 따라 전신사리(全身舍利)와 쇄신사리(碎身舍利)를 말하는데 신체 자체로 볼 때는 전신사리이고 다비(茶毘)한 뒤의 신골은 쇄신사리라 할 수 있다. 신골사리 외에 부처님의 교설인 불경이 법사리(法舍利)로서 신봉되어 신골사리와 함께 불탑(佛塔) 속에 봉안된다. 부처님의 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불경을 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구분하고, 승사리를 봉안하는 곳은 부도(浮屠)라고 하여 뒤에 와서는 불탑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생신사리(生身) : 살아 있을때 몸에서 나오는 사리 특히 치사리라고 하여 독립운동 33인의 대표이셨던 우리나라 제일의 전통종단 조계종을 창종 하신 백용성 대종사님은 범어사 극락암에서 경전을 보시던 중 이빨 사이에서 팥알 만한 사리두과가 나와 대수롭지 않게 극락암 뜨락에 내던져 버렸는데 한밤중에 방광을(빛을 발함) 하여 제자들이 줒어 소란을 피워 그런 쓸데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공부에 전염하라고 타일렀으나 스승의 몸에서 나온 사리인지라 생전에는 조용히 있다가 열반에 드신 후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셔놓았다.
전신사리(全身舍利) : 육신 전체 옴몸이 통체로 하나로 사리로 변하는 경우. 부처님이후 선종에서 대표격인 6조 혜능대사가 있다. 10여년전 부터 각종 보도로 널리 알려진 신라왕자의 몸으로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 스님이 육신 보살로 화현하여 중국인들 모두가 지장보살의 화현이라고 하며 온몸전체가 사리가 된 것을 개금하여 국보로 지정하여 중국 구화산 에 보존되어 많은 중국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 통일신라 성덕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김교각 스님의 탑은 일명 육신보전이라고도 하며 구화산 신광령에 자리잡고 있는데 약 1천2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김교각 스님이 원적한지 3년째 되는 해에 건립되었다. 그의 유해는 항아리 속에 안치되었는데 뚜겅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다름이 없었고 뼈 마디를 움직이니 금사슬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승도들은 이것이 보살님의 강세응화한 조짐임을 알고 김교각스님의 마녀에 불경을 연구하던 남대의 영지에 3츨 석탑을 세우고 그의 육신을 모셨다. 그리고 그 탑의 밑부분에서 광기가 뿜어 나왔으므로 후세의 사람들이 이곳을 신광령이라 이름 지었다.
일반 다비하여 유골에서 나오는 사리외에 또 다른 수습의 하나로 오방수라고 하여 우리나라 많은 전통 사찰중 백양사와 범어사에서만 천여년 전부터 이여져 오고있는 특이한 사리수습의 방법이 있다. 열반에 드신 스님을 안치할 자리 밑을 1미터 이상의 땅을 파고 그 자리에 맑은 물을 담은 항아리를 놓고 한지로 몇겹을 덮고 항아리 뚜껑을 덮은후 그위에 기와로 덭씌우고 흙을 덮은 다음 화장할 때 위로부터 화기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공간을 30센치미터 둔다음에 두께 5센치정도의 가로 50센치세로 1미터정도의 돌로 덮고나서 다시 훍으로 덮은후 화장하기위한 숯등로 준비를하고 화장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사방 15~20여 미터 떨어진 동서남북 사방에도 1미터50센치의 땅을 파고 맑은 물을 담은 항아리를 한지와 뚜껑만을 덮고 뭍는다.
이렇게 준비된것을 오방수라고 하는데 이렇게 특이하게 준비된 다비장에 입적하신 스님의 육신을 운구하여 오후 한시부터 불을 당긴후 다음날 새벽6시경 불이 잦아진후 유골을 수습하여 사리를 분리하고 땅속의 항아리와 땅위의 동서남북사방의 오방수를 꺼내어 항아리 속에서 영롱히 빛나는 사리를 수습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처음 대하시는 분들은 의아하겠지만 바로 몇년전 조계종 방장을 지내셨던 서옹 대종사님을 백양사에서 다비를 모신 후 유골의 사리외에 오방수에서 6섯과의 사리를 수습을 하였고 30십여년전 동래 범어사에서 입적하신 동산 대종사님의 사리도 당시 참관 하였던 청담 큰스님게서 직접 오방수의 사리를 수습한 역사가 있다.
이외에도 서옹큰스님의스승이셨던 만암 스님등외 20세기들어서도 여러분의 스님들의 오방수 사리수습이 있었다.
고의로 사리를 안나오게 하시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세간에 많은 저서로 많이 알려진 법정 스님은 미리쓰는 유서에서 나는 사리를 남기지 않겠노라 하신 분도 계신다.
이런 오방수를 묻어서 유골과 상관없이 정신적인 결정체를 수습하는 특이한 사리의 특징외에도 모든 진신 사리의 특징중에 또 하나는 수천년, 수백년후에라도 때에 따라 방광(빛을 발함)을 하기도 하며 개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감소도 하는 것이다.
일반사회에 30여년 전 알려진 방광은 도리사에서 문화재 절도범이 후불탱화를 면도칼로 그림만 도려내고 들들 말아서 훔쳐 달아나던 중 도리사 일주문밖 개울을 건널 때 탱화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는데 놀라서 탱화를 개울가에 버려두고 도망을 쳤으나 한밤중에 마을에서 보니 도리사에 산불이 난 것 같이 불빛이 밝아서 소방대와 함께 와본즉 산불이 아니고 탱화에서 빛을 발하는지라 살펴본즉 탱화 하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라고 사리전래의 역사가 담긴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게 된 경우도 있고 여타 다른 스님들의 사리도 방광 하는 것을 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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