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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법정스님 말씀 등

먹는 일이 큰일 - 산방한담 / 법정스님

by 연송 김환수 2016. 1. 8.

“산방한담(山房閑談)”이란

“산사(山寺)의 방에서 나누는 한가로운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법정스님이 "산방한담"이란 책 이름으로 글을 쓰신 것은

스님 자신의 구도(求道)와 사색을 겸허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 구도(求道) : <불교>불법의 정도(正道)를 구함. /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함.

먹는 일이 큰일  /  법정스님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밖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부엌에 들어가는 일이 새삼스럽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끓여 먹으러

주방에 들어가기가 아주아주 머리 무겁다.

버릇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요 며칠 밖으로 나돌아다니면서

남이 해준 밥을 얻어먹다 보니,

마땅히 손수 해야 할 일인데도

남의 일처럼 머리 무거워진 것이다.

 

남이 해 놓은 밥을 먹을 때는 그저 고마울 뿐.

밥이 질거나 되거나 혹은 찬이 있거나 없거나,

어쩌다 돌이 한두 개 섞였다 할지라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그게 조금도 문제 될 수 없다.

남이 차려준 식탁을 대할 때의 그 고마움이란,

자취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놓고 투정을 부리는 것은

결코 복 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런 사람은 남의 수고와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절에서는 음식을 받을 때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

이를 오관게(五觀偈)라고 하는데,

대충 그 뜻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德行)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

이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道業)을 이루려고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밖에서 돌아올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낮에 닿으려고 일찍부터 서두른다.

그래야 먼지도 털어내고 군불도 지피고

뜰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낙엽을 치울 수 있다.

간혹 차 시간이 맞지 않아 어두워서 빈집을 돌아오면

썰렁해서 영 어설프다.

서둘러 돌아온 자신의 거처인데도 마음이 붙지 않는다.

 

이따금 느끼는 일인데, 부엌에 들어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하지?’

그러나 순간. 아니지,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미리부터 걱정을 앞당길 건 없어.

수행자는 그날그날을 최대한으로 살면 그뿐이니까.

홀로 있기를 원했으니 또한 홀로 자신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즐겁게 살 것.

이 세상이 즐겁지만은 않으니까

내 자신이라도 즐거움을 만들어가면서 유쾌하게 살 것.

며칠 동안 보다가 보니 배추와 무가 많이 자랐다.

아욱과 상추도 이제는 뜯어먹을 만하게 컸다.

씨앗이 나올 만하면 꿩들이 와서 헤집는 바람에 속이 상했는데,

올가을에 전에 없이 밤이면 산토끼들이 내려와

배추와 무를 여남은 두렁이나 뜯어먹었다.

채소를 가꾸는 것은 사실 먹는 것보다 가꾸는 재미가 더 큰데,

크기도 전에 미리 뜯어먹으니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람이 먹이를 가지고 짐승과 다툴 수야 없지 않은가.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살 수밖에.

먹을 만큼 먹으면 자기들도 염치가 있겠지.

 

이곳 조계산으로 옮겨온 지 오늘로서 꼬박 7년이 된다.

어느덧 7년! 짧지 않은 이 기간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때 심은 나무들은 몇 길이나 자라

이제는 앞산 마루를 가릴 만큼 컸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렇다 하게 해놓은 일도 없이

시은(施恩)만 지면서 세월을 보냈는가 싶으니,

인간사가 새삼스레 덧없고 부끄러워질 뿐이다.

이 산으로 처음 옮겨올 때는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기개와 꿈이 대단했었다.

그때의 상량문(上樑門)에는 이렇게 써놓았다.

 

왕사성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세워진 이래

출가 수행자들은 적정처(寂靜處)에 집을 지어 도량을 삼았다.

이 암자는 주추가 금강보좌(金剛寶座, 석가모니가 성도한 자리)에

뿌리 내리고 벽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둘러싸였으며

지붕은 무색계천(無色界天)으로 덮였다.

이런 집이므로 밤에 꿈이 있는 자는 들어올 수 없고,

입에 혀가 없는 자만이 가히 머무를 수 있다.

수십 년 전 비어 있는 자정암(慈靜庵) 터에 이제 새로 집을 지어

그 이름을 불일암(佛日庵)이라 고쳐 부른다.

이곳에 머무는 본분납자(本分衲子,참으로 발심한 수행승)는

오늘같이 흐리고 막막한 세상에

불일(佛日)을 더욱 빛나게 하라는 뜻에서다.

그 소임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정진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고,

하늘 찌를 대장부의 기상으로써

불토(佛土)를 장엄(莊嚴)해야 할 것이다.

이 암자를 세우는 데에 뜻과 힘을 같이한 여러 이웃들이

이 인연으로 다 같이 성불하여지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은,

그 무렵 어째서 기를 써가면서

집을 하나 지으려고 했던가 하는 일이다.

더구나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주제에.

그때 집을 지으려는 생각이 일기 시작하자

이런 논리도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앞서 간 선인들이 지어 놓은 집에서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냈는데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하나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몸담아 살다가 인연이 다해 이 집을 비우고 떠나면

또 아무나 인연 있는 수행자가 와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지었다고 해서 결코 내 소유물은 아니다.

앞서 간 선사들이 다 그랬듯이…….

 

보이지 않는 법계(法界)의 어떤 뜻이

내 생각의 심지에 닿아 그렇게 연소작용을 일으켰을 것 같다.

그러니 우연히 떠오른 한 생각이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또한 그에 따른 결과를 낳는다.

그때 스스로 선택한 결단에 조금도 후회는 없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큰절 귀퉁이에 방이나 한 칸 얻어,

여럿, 속에 섞이면서 일없이 지내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수행승들은 입버릇처럼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말하지만,

허구한 날 손수 끓여 먹어야 하는 처지에서는

생사대사보다도 식사대사(食事大事)쪽이

현실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하루 한 끼를 먹건 두 끼를 먹건,

먹는 일을 엄숙한 일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밖의 다른 일과는

물을 것도 없이 구멍이 뚫리고 만다.

 

7년 세월!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타성의 늪에 갇힐 위험이 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가.

그저 부끄러울 뿐.

책상 앞에서 쓰는 안경의 도수가 조금 높아졌고,

쓰잘데기 없는 글과 말로 인해 헛이름만 드러내어

세상 살기가 그 전보다 부자유해졌다.

애초 이 산중에 들어올 때의 그 팔팔하던 서슬과 기상은

모성적인 조계산 덕분인지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면

홀로 마실 때의 향기롭고 그윽한 차 맛을 알게 됐고,

이제는 내 분수를 가늠할 수가 있다.

또 이곳에 들어와 거듭거듭 다진 뜻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큰스님만은 절대로 안 되어야겠다는 결심이다.

지금 숲에는 가을비가 적적하게 내리고 있다.

또 겨우살이 채비를 해야 하는가! 1982

 

-『산방한담』중에서-

 

 

 

 

 

법정스님의 의자

http://blog.daum.net/yescheers/8598233

 

이해인 수녀의 법정스님 추도시

http://blog.daum.net/yescheers/8597867

 

귀한 인연이길 / 법정스님

http://blog.daum.net/yescheers/8598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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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바람 속에

 

                       추도시 / 이 해 인

 

- 이해인 수녀의 법정스님 추도시-

 

차갑고도 따뜻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 속에 정토로 떠나신 스님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 하시더니

꽃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시라며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된 우리 곁을

냉정하게 떠나가신 야속한 스님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시키려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셨나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깨우치시고자

타고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신 것인가요

 

스님의 당부처럼 스님을 못 놓아 드리는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많이 사랑한 이별의 슬픔이 낳아준 눈물은

갈수록 맑고 영롱한 사리가 되고

 

스님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은 환희심 가득한

자비의 선행으로 더 넓게 이어질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한 끝없는 기도는 연꽃으로 피어나고

하늘까지 닿는 평화의 탑이 될 것입니다

 

하얀 연기 속에 침묵으로 잔기침하시는 스님

소나무 같으신 삶과 지혜의 가르침들 고맙습니다

 

청정한 삶 가꾸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며

3월의 바람 속에 길 떠나신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라도 3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해인 수녀님이 법정스님에게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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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명언

 

1.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2.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 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3.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 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4.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5.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6.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7.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 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8.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 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9.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10.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을 뜻한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법정스님-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 놓으면

쓸 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된다

옷깃을 한 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 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댓가로 받는

벌이다.

 

 

 

귀한 인연이길 (법정스님)

  

진심 어린 맘을 주었다고 해서

작은 정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거짓 없는 맘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깊은 정을 받았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한동안 이유 없이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아끼는 만큼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 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쉽게 포기하는 그런

가볍게 여기는 인연이 아니기를..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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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맑은 편지]

 

법정 스님께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이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 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 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 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테니까요.

 

 

[법정 스님 밝은편지]

 

이해인 수녀님께

 

...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