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인연방/사찰순례

봉은사(奉恩寺) - 서울 강남구 삼성동

by 연송 김환수 2015. 11. 25.

봉은사 (奉恩寺) 둘러보기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의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절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794(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봉은사의 맥을 이었다고 전한다.

 

1498(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하여 능의 동편에 있던 견성사(見性寺)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개칭하였다. 1501(연산군 7) 나라에서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하였다.

 

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3월 17일 을축 1번째기사 1501년 명 홍치(弘治) 14년
봉은사에 봉선사의 전례대로 전답 문서를 준 것은 자순 왕대비의 명에 따랐다고 하다
 
전교하기를,
"봉은사(奉恩寺)에 봉선사(奉先寺)의 전례를 따라 왕패(王牌)061) 를 준 것은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의 명에 의한 것이요, 나의 본디의 뜻은 아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4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41 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사상-불교(佛敎)
 
[註 061]
왕패(王牌) : 임금이 궁가·공신·사찰 등에 논밭·노비 따위를 줄 때에 내려 주던 문서.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 수선종(首禪宗) (청남 오제봉 글씨) 편액

 

1551(명종 6)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貞王后)이 절을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 광릉의 봉선사(奉先寺)는 교종의 수사찰로 삼았으며, 보우(普雨)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이 되게 하였다.

 

보우는 1562년에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宣陵) 동쪽으로 옮기고 절을 현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1563(명종 18) 절에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사패(祠牌)를 봉안하기 위하여 강선전(降仙殿)을 세웠다.

 

고려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던 승과(僧科)를 실시하여 그 중 선과(禪科)를 봉은사 앞 벌판에서 실시한다이 벌판은 승과평(僧科坪)이라 불리게 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무역센터 빌딩이 들어서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던 유명한 서산대사 휴정이 선과 제1회의 급제자였고, 그의 제자로 역시 승병을 이끌었던 사명당 유정이 제4회 급제자였다 한다.

 

그 후 1559(명종 14) 문정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굳히기 위해 중종의 능을 옮기려하자, 봉은사 주지 보우는 절터를 다시 한 번 왕릉자리로 제공하고 지금의 자리로 절집을 옮긴다.

 

보우는 지금의 절집자리로 옮기면서 절집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회암사를 거대하게 짓는 등 봉권왕조와 결탁한 불교중흥을 꾀한다. 그러나 사월 초파일을 기해 가지려던 봉은사 낙성회 전날에 후원자 문정왕후가 급작스레 사망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불교부흥정책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유림 관료들에 의해 보우는 역적으로 지목당해 제주도로 귀양가고(그는 결국 제주도에서 장살을 당했다) 회암사는 불태워졌다. 봉은사는 왕릉 원찰이었기에 파괴는 모면하였으나 사세가 현저하게 기울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사찰은 병화로 소실되었고, 1637(인조 15)에 경림(敬林)과 벽암(碧巖)이 모연(募緣)하여 중건하였다. 1665(현종 6)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692(숙종 18)에 왕실에서 시주하여 석가모니불·아미타여래·약사여래 등의 삼존불상을 안치하였고, 1702(숙종 28) 왕이 절에 전백(錢帛)을 하사하여 중건을 완료하였다.

 

1747(영조 23)에는 순찰사 남태저(南泰著)의 주청으로 조정에서 쌀과 돈, 목재 등을 내리고, 1757(영조 33)에 상헌(尙軒영옥(穎玉선욱(善旭) 등이 힘을 모아 중수하였다.

 

1789(정조 13) 조정의 지시에 따라 선욱·포념(抱念) 등이 세자각(世子閣대웅전·명부전·향각전·관응당(管應堂) 및 각 방사를 보수하였고, 1790년에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와 경기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였다.

 

1824(순조 24)에는 경성(鏡星한영(漢映승준(勝俊) 등이 세자각을 비롯하여 모든 당우들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당시의 가람으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대향각(大香閣화엄경판전(華嚴經板殿선원(禪院영산전(靈山殿심검당(尋劒堂관응당·천왕전(天王殿강선전(降仙殿독성각(獨聖閣) 등이 있었다.

 

1939년 실화로 대웅전, 동서의 승당과 진여문, 만세루, 창고 등이 소실되었으며, 1941년 주지 도평(道平)이 대웅전과 동서의 양 승당을, 1942년 영산전·북극전(北極殿만세루(萬歲樓천왕문(天王門) 등을 새로 세웠다.

 

1943년 절의 서쪽에 있던 종남산(終南山) 명성암(明性庵)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였고, 1972년 동국역경원의 역장(譯場경전번역소)이 이곳에 들어왔다.

1975년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였으며, 1982년에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1996년에 미륵대불을 조성하였으며, 1997년 천왕문과 법왕루(法王樓)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절에 소장되어 있는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321호로 지정된 지정4년명고려청동누은향로가 있다. 이 향로에는 고려 충혜왕 5(1344)의 명문(銘文)이 있는 고려청동누은향로(高麗靑銅縷銀香爐), 일명 오동향로(烏銅香爐)라고도 한다. 사명당(四溟堂)이 쓰던 것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며, ‘판전(板殿)’ 편액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절의 판전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총 161,480매에 달한다.

 

 

대웅전 (추사 김정희 글씨)

대웅전은 중앙 연화단(상단)에 계신 석가모니불, 그 좌우측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과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약사여래불, 세 부처님(삼존불)이 모셔져 있어 대웅보전이라 해야 하지만 "대웅전"이라 했습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모셔져 있으니

오른쪽으로 세번 돌고나서(우요삼잡) 예경()을 드리는 것이 예의입니다.

 

 

 

 

 

 

 

판전 주련

佛智廣大同虛空(불지광대동허공)부처님 지혜는 허공같이 크고 넓어

一切衆生心(보편일체중생심)모든 중생의 마음 두루 아시고

 

悉了世間諸妄想(실료세간제망상)세간의 헛된 망상 모두 알고 계시나

不起種種異分別(불기종종이분별)여러 가지 다른 분별을 내지 않으시네

 

一念悉知三世法(일념실지삼세법)한 생각에 삼세의 법을 다 아시고

亦了一切衆生根(역료일체중생근) 일체 중생의 근기도 모두 아신다네

 

  

 

  

 

 

 

  

 

  

 

 

 

 

 





누구나 느끼겠지만 판전의 글씨가 추사(완당) 김정희 선생의 글이라고 하면 충격을 받는다.


부부 건축가 임형남과 노은주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봉은사 판전의 현판을 처음 본 느낌을 이렇게 전한다.


봉은사 판전의 현판을 처음 봤을 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의 서예 작품이 가진 장중하고 기품 있는 필선이 아닌 듯 보였다. 무언가 어눌하면서도 거칠고 무척 큰, 마치 예전에 할아버지가 달력을 찢어 그 위에 볼펜으로 빠르게 메모한 듯한 그 글씨, 모든 획이 낱낱이 분해되어 획 간의 유기성은 전혀 찾을 수 없던 그 글씨. 서예의 최고 대가가 최후로 썼다는 절필이 어째 저 지경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붓글씨 공부를 열심히 한 후 다시 판전의 글씨에 마주 선 이들은 "추사가 평생을 돌고 돌아서 어린 시절 처음 글씨를 쓰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마치 우리에게 최후통첩을 하듯이 써 내린 글씨"였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 또한 봉은사 강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마치 어린애 글씨 같은 분위기가 있다. 본래 어린애의 글씨는 아무 꾸밈없는 그저 천진한 것인데, 추사가 추구한 이 천진무구함이란 단련된 천진성이라는데 중요한 미덕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천연스럽게 나온 것이 추사체의 내공이고 판전글씨의 미학인 것이다.”
 
사실 판전뿐만 아니라 집자해서 만들었다는 추사선생의 대웅전 글씨도 판전의 글씨체와 비슷하게 닮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많이 알려진 판전 글씨에만 집착을 하고 있다.

 

 

 

 

추사(秋史)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자(大字)로 ‘판전(板殿)’ 두 글자를 욕심 없는 필치(筆致)로 완성(完成)하였고, 그 옆에 낙관(落款)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 하였는데, “71살된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 라고 하였다.

 

'과(果)'자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당시의 별호인 '과로(果老). 과옹(果翁)'을 의미한다.

 

추사체(秋史體)의 졸(拙)함이 극치(極致)에 달해 있어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하지만, 졸(拙)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天然)스럽게 살아 있어 불계공졸(不計工拙, 잘 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도 뛰어넘은 경지(境地)라고 한다.

 

졸(拙)의 의미는 서툴다, 곧 솜씨 없음을 뜻하는 글자다. 글자의 구조를 보면 ‘재주[才] 부림을 내보낸다[出]’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니 기교를 부리지 않는 볼 품 없는 상태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라고 해석함이 좋다.

 

옹졸하다는 뜻으로 ‘졸렬(拙劣)’이나 ‘졸장부(拙丈夫)’ 같은 말에 쓰인다. 전(轉)하여 자신이나 자신에게 딸린 물건을 겸손히 이르는 경우에 쓰기도 한다. 승려가 스스로를 낮추어 ‘졸승(拙僧)’이라 칭한다든지, 자신의 글을 낮추어 ‘졸문(拙文)’ 혹은 ‘졸고(拙稿)’라고 이르는 것 등이 그런 예다.

 

봉은사 판전 현판 이야기 - 추사 김정희

http://blog.daum.net/yescheers/8599021

 

 

 

소장된 경판은 다음과 같다.

 

1) 대방광불화엄경소초 大方廣佛華嚴經疏抄》:1856( 철종 7)에 개간한 것인데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3,133매로 결판(缺板)4589판이다. 

2) 유마힐소설경직소 維摩詰所說經直疏》:125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이 3매 있다. 간기에는 함풍(咸豐) 4(1854)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성주장판(聖住藏板)으로 되어 있다.

3) 천로금강경 川老金剛經》:1869(고종 6) 개판되었으며 한문으로 된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모두 21판이나 1매의 결판이 있다.

4) 불설천지팔양신주경 佛說天地八陽神呪經》: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한글로도 음석(音釋)되어 있다. 3672판의 완본으로서 의정(義淨)이 번역한 것을 경화(敬和)가 주석하였다. ()와 발문 역시 경화가 적었으며, 간기에는 도광(道光) 19(1839) 철원 보개산 석대암장판(石臺庵藏板)이라고 되어 있다.

5) 불설아미타경 佛說阿彌陀經》:1915년 개간본으로 한글로 되어 있으며, 832판의 완본으로 추정된다.

6) 심경 心經》: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4판이다.

7) 초발심자경문 初發心自警文》:9판으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으로는 발심 發心1매가 있다.

8) 한산시 寒山詩》:51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은 2매이다.

9)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한문 16매의 완본으로 간기에 함풍 7(1857) 광주 수도산 봉은사장판으로 되어 있다.

10) 준제경 准提經》:한문으로 된 12매의 완본이다.

11) 육조법보단경 六祖法寶壇經》: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19매로 결판이 다수 있다.

12) 고왕경 高王經》:1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은 다수이다.

13)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1528(중종 23)에 개판하였다.

14)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소 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1856(철종 7)에 개판하였다.

15) 불설칠구지불모준제다라니병염송관행법 佛說七俱胝佛母准提陀羅尼竝念誦觀行法》:1587(철종 8)에 개판하였다.

16)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1861(철종 12)에 개판하였다.

 

 

봉은사의 법왕루는 1997년 완공되었고 처마아래에 걸려 있는 편액은 모두 2개인데,

정면에는 '법왕루(法王樓)'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법왕루 뒷쪽에는 "선종종찰대도량(禪宗宗刹大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근대의 대표적 명필가였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전서체 글씨이다.

 

많은 분들이 대도량(大道場)으로 읽어야 하는데 대도장(場 마당장)으로 잘못 읽고 있다.

불교에서는 한자로 ‘도장(道場)’이라 쓰고 ‘도량(道場)’으로 읽는다. 부처님이 머무는 신성한 곳을 의미하므로 도량(道場)의 량(場)은 제단량(場)이나 장소량(場)으로 읽으면 된다.

 

*** 도량(道場) : 불교 부처나 보살이 도를 얻는 곳. 또는,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 불도를 수행하는 절이나 승려들이 모인 곳을 말한다.

 

 

 
도량(道場), 대도량(大道場)의 량(場)자에 대하여
 
도량(道場)이란 불교에서 불도(佛道)를 닦기 위해서 설정한 일정한 구역이거나 그곳에서 진행되는 법회(法會)를 말한다.
 
場(마당장)으로 많이 읽어 도장이나 대도장으로 읽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도량(道場)이나 대도량(大道場)으로 읽어야 하며 형성문자을 볼 때 흙을 쌓아 높이고 위를 평평(平平)하게 하여 신(부처님)을 모시는 곳을 가르키는 제단량이나, 장소량(場)으로 읽는 것이 옳다.
 
형성문자 =土(흙, 땅 토)+昜(빛날 양, 햇빛이 땅에 비칠 양)
 
뜻을 나타내는 흙토(土)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昜(양→장)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昜(양→장)은 해가 솟아오르다→오르다→밝다, 흙을 쌓아 높이고 위를 평평(平平)하게 하여 신을 모시는 곳→제단(祭壇), 나중에 그러한 넓은 마당→장소(場所)의 뜻으로 씀.
마당, 자리 장(場)의 자원한자는 흙, 땅 토(土)자와 빛날 양, 햇빛이 땅에 비칠 양(昜)자로 구성되었다.
양지바르고, 뒤쪽에는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는 곳에 광장(廣場)을 만들어 운동장(運動場)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만든 글자이다.
 
도량(道場) : 불교에서 불도(佛道)를 닦기 위해서 설정한 일정한 구역, 또는 그곳에서 진행되는 법회(法會)를 말한다.
 
사찰의 법당 안에서 진행되는 법회는 물론, 법당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곳에서 진행되는 법회를 도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고도의 신비화된 종교의식을 지칭하여 도량이라고 한 경우가 많았다. 즉 질병을 낫게 하거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없도록 하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번영을 이룩하고 도둑이나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불교 주술을 조직적으로 의식화한 것을 도량이라고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고려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신라시대의 도량의식은 보다 순수한 일면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인왕도량(仁王道場)·미타도량(彌陀道場)·관음도량(觀音道場)·백좌도량(百座道場) 등의 이름이 보인다. 613년(진평왕 35) 나라에서 황룡사(皇龍寺)에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백좌도량을 열었을 때 원광(圓光)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 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 잡혀가서 옥에 갇힌 김인문(金仁問)을 위하여 신라인들은 인용사(仁容寺)를 창건하여 그의 석방을 기원하는 관음도량을 개설하였고, 김인문이 귀국하다가 바다에서 죽자 인용사를 미타도량으로 바꾸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또, 33대 성덕왕은 태종무열왕을 위하여 봉덕사(奉德寺)를 창건하고 7일 동안 인왕도량을 베푸는 한편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신라 말 시중 제안(齊顔)이 경주 남산 천룡사(天龍寺)를 중수하고 석가만일도량을 열어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도량은 고려의 밀교도량과는 달리 개인이나 나라를 위한 순수한 기도의식, 법회 등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불교는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식과 행사가 많았다. 의식의 종류만도 83종에 이르고 있으며, 『고려사』 세가(世家)에 나타난 기록에만 총 1,083회의 행사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실제로 개설된 횟수의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의식은 크게 법회·설재(設齋)·법석(法席)·대회(大會)·도량의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83종류 중 50종이 도량의식으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도량의식은 대부분이 특유의 소의경전(所依經典)과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사상적인 공통점은 호국(護國)에 있었다. 호국은 외호(外護)와 내호(內護)가 있다. 내호는 번뇌를 소멸하는 반야(般若)의 지혜를 그 본질로 삼고 있고, 외호는 외적의 침략이나 천재지변 등의 각종 재난을 제거시키는 각종 불보살과 신중(神衆)을 본질로 삼고 있다.
 
그러나 불보살과 신중 또한 인간 심식(心識)의 기능적인 표현으로서 일심에 근거한 반야의 지혜를 통하여 각종 외환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근본입장이다. 이와 같이, 도량을 개설한 근본목적이 반야의 호국적 본질을 선양하려는 데 있었지만, 고려시대는 그와 더불어 불교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행사 그 자체에만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외적의 침입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도량을 개설하는 목적은 이를 통하여 국론통일의 이론적·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화합단결하는 국민정신을 계도하여 국민의 마음을 모으고 호국의 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는 것이다.
 
고려의 도량의식도 이와 같은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너무 잦은 행사는 형식화로 흐르는 경향을 띠게 되고 불교의 타락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의 50종 도량 중 비중이 있는 것은 25종에 이른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축수도량(祝壽道場):국왕의 생일을 맞아 만수무강을 비는 법회이다. 중앙의 관원은 물론, 지방의 관원들까지 상경하여 궁중에서 왕에게 하례한 뒤 수일 동안 특정한 사찰에서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며, 이 때 왕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반승(飯僧)을 행하였다.
 
② 기신도량(忌辰道場):매년 부왕과 모후의 기일(忌日)에 그 명복을 비는 법회로서 성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매년 기일을 맞아 3일 또는 5일 동안 사찰에서 불공(佛供)을 올리고 기일이 있는 달에는 도살을 금하였다. 기신도량 때 불공을 드리는 사찰로는 선왕이나 모후와 인연이 깊은 원찰(願刹)에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③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이는 국사(國師)·왕사(王師)를 비롯한 고승 대덕들이 주재하는 가운데 보살계를 받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고려 왕실에서는 매년 6월 15일 궁중에서 개최하였는데, 국왕이 보살계를 받는다는 것은 국왕이 보살의 자격을 새로 얻거나 보살의 자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도량의식은 국왕이 그 스스로 불제자임을 다짐하고 널리 선언하는 동시에 마음과 몸가짐을 바르게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는 행사이다.
 
④ 장경도량(藏經道場):1029년(현종 20)에 시작되어 1041년(정종 7)부터 정기적으로 거행된 행사이다. 봄·가을 두 차례씩 7일에서 10일 동안 개최되었으며, 그 의식의 절차에 따라 대장경을 공양하는 한편, 대장경에 포함된 경전의 앞과 끝부분을 대여섯 줄만 읽고 나머지는 그냥 눈으로 스치거나 경전의 중요한 대목을 골라 읽었다.
 
⑤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신라시대부터 성행하였던 호국도량으로서,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개설되었다. 궁중에 100개의 사자좌(獅子座)를 갖추고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외우며 읽는 의식을 가졌는데, 특히 거란의 침입 등 외침이 있을 때 많이 개설되었다. 이 도량에도 많은 승려들을 공양하는 반승의 의식이 따랐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⑥ 경찬도량(慶讚道場):사찰을 새로 낙성하거나 중수하였을 때, 또는 불상을 새로 만들어 모시거나 사경(寫經)을 마쳤을 때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행하였다. 1097년(숙종 2) 2월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하를 위하여 개설한 경찬도량이 있었음은 무수한 고려의 경찬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⑦ 법화도량(法華道場):『법화경』을 외우면서 참회하는 의식을 닦는 법회이다. 특히, 법화신앙이 백련사(白蓮社)·연화원(蓮華院)·보암사(寶巖社) 등을 중심으로 일어남에 따라 왕실 및 민중에서는 『법화경』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토론하며 참회하는 법화도량이 많이 개설되었다.
 
⑧ 소재도량(消災道場):재앙소멸을 위한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외우면서 질병과 천재지변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도량이다. 고려 때 열린 도량 가운데 그 횟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 이 도량이다. 1143년(인종 21) 6월 대관전(大觀殿)에서 5일 동안 열렸던 소재도량은 왕비 임씨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고, 1179년(명종 9) 9월 광암사(光巖寺)에서 열린 소재도량은 천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⑨ 불정도량(佛頂道場):『불정존승다라니경 佛頂尊勝陀羅尼經』을 외우면서 재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이다. 여러 번의 개최 중 1122년(예종 17) 7월 회경전(會慶殿)에서 열린 불정도량은 개경 주변의 산에 송충이가 들끓어 나무가 거의 죽어갔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⑩ 용왕도량(龍王道場):『대운륜청우경(大雲輪淸雨經)』과 『용왕운우경 龍王雲雨經』 등을 외우면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반드시 이 도량을 개설하였는데, 1121년 윤5월에는 왕사 덕연(德緣)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
 
⑪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금광명경』을 외우면서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호국도량의식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이 도량이 비가 오기를 빌기 위하여 개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⑫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금강경』을 외우면서 수명장수와 기우(祈雨), 병을 고치거나 외적을 막기 위한 의미에서 많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052년(문종 6)·1087년(선종 4)·1096년(숙종 1) 궁중에서 열렸던 금강경도량은 다 같이 기우를 위한 것이었다.
 
⑬ 반야경도량(般若經道場):『반야경』을 읽는 도량으로 1102년 6월 송충이를 막기 위해서 승려 2,000명이 개경 주변의 산을 돌면서 열었고, 1106년(예종 1)과 1109년·1120년 전염병을 막기 위하여 이 도량을 열었다.
 
⑭ 화엄도량(華嚴道場):『화엄경』을 강독하고 외우면서 보현보살의 10대원을 마음에 되새기며 참회하는 한편,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재난을 없애기 위해서 행하는 법회이다. 대체로 5일 이상의 오랜 기간 동안 행하며, 흥국사(興國寺) 등 화엄종 사찰에서 많이 개설되었다.
 
⑮ 관정도량(灌頂道場):『관정경』과 그 다라니를 외며, 재난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이다. 국왕이 즉위할 때나 송충이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개설되었다.
 
⑯ 제석도량(帝釋道場):국내의 변란이 있거나 외적의 침범이 있을 때 불교의 수호신이자 전투의 신인 제석천왕을 모시고 행하는 의식이다. 이 도량은 문종 때 가장 많이 열렸고, 고종 때도 두 차례 개설되었다.
 
⑰ 신중도량(神衆道場):불교의 수호신인 신장(神將)들을 한 곳에 모시고 각종 재액을 없애고자 기원하는 의식이다. 특히, 고종 이후 그 명칭도 천병신중도량과 화엄신중도량 등으로 세분되면서 더욱 빈번히 열리게 되었다.
 
⑱ 약사도량(藥師道場):약사여래를 모시고 『약사경』을 읽으면서 각종 재액을 없애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법회이다. 특히, 『약사경』에는 이 경을 받들어 모시고 정성껏 읽으면 국내의 병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진족과의 교전이 전개되었던 예종 초 여러 차례 이 도량이 개설되었다.
 
⑲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행해졌던, 문두루비법을 시행하는 도량이다. 이는 오방신(五方神)을 모시고 주문을 외우면서 각종 재액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으로,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태를 가져온다고 하여 고려에 외침이 있을 때는 반드시 행하여졌다.
 
⑳ 인왕도량(仁王道場):인왕백고좌도량과는 별도로 각종 재액을 없애고 만복을 빌며 도둑과 외적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하여 자주 개설되었다. 평화시에는 대체로 천재지변이 없기를 비는 의식으로, 전란이 일어나면 외침을 격퇴하여 줄 것을 비는 의식으로 개설되었다.
 
㉑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무능승대명왕다라니경』을 외우는 의식으로 고종 때 세 번 개설되었는데 모두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㉒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이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넷인 마리지천신에게 재난이 없기를 기원하면 그 신이 재난을 없애어 만복을 준다고 하여 자주 개설되었다. 이 신은 승리의 신이요 군인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으며, 다른 도량과는 달리 오직 묘통사(妙通寺)에서만 개설되었다.
 
㉓ 아타파구신도량(阿陀婆拘神道場):얼굴이 넷이고 팔이 여덟인 아타파구신을 대상으로 하여 국토를 수호하고 백성을 옹호해 줄 것을 기원하는 법회이다.
 
㉔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공작명왕경』을 외우면서 모든 나쁜 병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고 수명의 장수를 비는 의식이다. 1110년(예종 5) 문덕전에서 개최된 일이 있으며, 다른 도량에 비하여 그리 빈번히 열리지는 않았다.
 
㉕ 연생경도량(延生經道場):연명보살의 공덕을 설하여 놓은 『연명지장경 延命地藏經』을 외우면서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으로서, 1212년(강종 1) 1월 3일 동안 궁중에서 열린 바가 있다. 이 도량은 불교와 도교사상이 혼합된 도량의식이다.
 
고려시대 성행하였던 각종 도량들은 조선의 배불정책과 함께 조선 초기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계속된 것의 명칭도 도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법회 또는 법석, 재(齋)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법회 또는 불사(佛事)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화엄도량을 화엄회·화엄법회·화엄산림법회·화엄불사 등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며, 도량의식법회의 수도 고려시대에 비해서는 크게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 고려사
• 한국불교사연구 (안계현, 동화출판공사, 1982)
•「호국법회와 도장」 ( 서윤길 ,『불교학보』14,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1978)
•「고려불교의 신앙의례」 ( 홍윤식 ,『한국불교사상사』 3편,원광대학교,1974)
 
집필(1997년) 이종익
 

 

 

 

그리고 편액의 禪宗宗刹大道場(선종종찰대도량)이라는 글을 禪宗甲刹大道場(선종갑찰대도량) 으로 읽는 분들이 있는데 쓰여진 전서는 ()이 아닌 ()입니다. 禪宗다음에 宗刹()이 연속해서 나오므로 글의 멋스러움을 더하기 위하여 다른 유형의 전서체 ()을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 참고로 봉은사를 선종갑찰 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봉은사 편액의 글씨는 종찰이다.

선종종찰(禪宗宗刹)은 선종갑찰(禪宗甲刹)과 같은 말로 봉은사가 조선 선종의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宗(종) 전서 종류

 

甲(갑) 전서 종류

 

대도량 현판의 불기 2970년은 북방불기로 서기 1943년입니다. (서기년도 + 1027)

 

불기(佛紀)를 사용하는 방식은 두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남방불교로 하면 서기 2011년은 불기(불멸) 2555년이고 북방불교로 하면 세존응화(응화북전) 3037년이며 초파일(음력 48)이후는 세존응화 3038년이 됩니다.

* 남방불교 불기(남전열반) = 서기년도 + 544년으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 북방불교 불기(세존응화) = 서기년도 + 1027년으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남방불교 불기(남전열반)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래된 불교의 건축물에 표기된 불기는 대부분 북방불기로 세존응화입니다.

 

자세한 것은 제블로그 연호대조표를 참고하세요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02

 

 



조선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2년만에 세상을 뜨자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소생의 명종이 12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자 문정왕후가 명종이 스무살이 될 때까지 섭정에 들어간다.
명종 6(1551) 문정왕후(文貞王后)가 봉은사를 선종수찰(禪宗首刹), 봉선사(奉先寺)는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하는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재흥정책을 폈다. 봉은사는 禪宗甲刹(선종갑찰)이라 할 수 있고,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雲岳山 奉先寺)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교종갑찰(敎宗甲刹)이라 칭할 수 있다.
참고로 갑찰(甲刹)은 나라 안이나 한 도() 안에서 제일 큰 절을 말한다.

 

 

봉은사 부속시설로 역경원(譯經院)이 설치되어 있으며 판전 서쪽의 명성암(明性庵)과 승방 등에서 대장경의 한글 번역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봉은사 일대 18000여 평이 사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민간인 유료공원으로 개설허가가 나자 최초로 봉은사가 신청한 것인데, 이 계획에 의하면 18000여 평의 부지에 기존의 종교시설과 주민 휴식시설, 산책로 등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식수사업을 하여 도시 속의 녹지대로 만드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봉은사 주변은 서울을 대표하는 최첨단 시설이 밀집한 곳으로 한국과 교역하려는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전초기지로 삼는 무역센터가 봉은사 승과평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규모 컨벤션센터인 코엑스와 테헤란밸리로 불리는 IT업종 밀집지역도 옛 봉은사 자리에 있다.

 

2009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의 왕릉 가운데 선릉과 정릉이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 그 능침사찰이었던 봉은사와 더불어 강남의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강남역이나 압구정, 88서울 올림픽을 치른 종합운동장 등 세계적인 명소이자 강남을 대표하는 번화가들이 모두 봉은사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산재해 있다.

 

근대까지 서울경기 일원의 본사 역할을 수행했던 봉은사에는 많은 두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19점의 지방문화재가 남아 있고, 1996년 1월 7일에 봉안된 미륵대불이 유명하다. 봉은사의 10년 숙원사업이었던 이 미륵대불은 높이 23m로서 충청남도 논산에 위치한 관촉사의 은진미륵보다 5m 정도 높다.

 

 

미륵대불 뒤로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고려 충혜왕 5년(1344년)에 만들어진 청동은입사 향완(보물 321호)은 공예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표면에 제작연대와 만든 사람들을 기술한 103자의 명문이 남아 있어 형태미와 더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1819호)은 조선 효종 2년(1651년)에 당대 최고의 조각승인 승일(勝一)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불상들이다.

 

이외에도 앞서 소개한 추사의 판전 현판 글씨와 조선시대 승과고시 장소로 사용되었던 선불당, 판전 내부에 보관중인 화엄경 경판과 사천왕상, 영산전 십육나한상 등의 조각상과 대웅전 삼장보살도를 비롯한 10여 점의 불화 등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조선후기 조각과 회화의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클릭하시면 큰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봉은사 입구

 

 

 

 

 

 

 

 

 

 

 

 

 

사천왕상

 

 

 

 

공덕비

 

 

 "봉은사주지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

1925년 한강을 범람케 한 을축년 대홍수는 유례없이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봉은사의 주지로 있던 나청호스님은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무려 708명이나 구해냈다. 당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스님의 공덕을 기려 세운 비석이 바로 이 수해구제공덕비이다. 비문의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성당 김돈희(1871~1936)의 필적이다.

 

 

부도탑

 

 

 

 

 

 

 

 

판전

 

 

 

 

 

 

 

 

 

 

지장전

지장전(명부전)-지장보살을 봉안.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사바세계에 미륵불이 출세할때까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토록 하는 부촉을 받았다. 지장보살의 하화중생에 대한 서원은 지옥문에까지 이르러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인간을 구하는데 까지 이루고 있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일반 불상과는 약간 다르다. 머리는 두건을 쓰거나 삭발했고 한손에는 석장을 짚고 있다.

 

지장전 주련

(혜안관시지옥공) 지혜의 눈길 이르는 곳에 지옥이 없어라

(이익인천무량사) 인천을 이롭게 함이 끝이 없다

 

(자광조처연화출) 자비광명 비추는 곳 연꽃이 피고

(지장대성위신력)지장대성의 위신은

 

(항하사겁설난진)항하사겁을 말해도 다히기 어렵다

(견문첨예일념간)견문하고 첨예하기를 한 순간만 하여도

 

 

 

 

 

 

 

 

 

 

 

 

 

 

 

영각

영각에는 봉은사 개산조인 연희국사 ,허응당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당대사,남호 영기율사, 영암당 임성대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6.25때 순국한 호국영령의 극락왕생을 비는 영단이 있고 국가 통치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원패가 있습니다

 

조사선지문(영각) 석주스님

(아인망처초삼계)나와 남을 잊는 자리에 삼계를 벗어나고

(대오진공증법신) 진정한 공을 크게 깨달아 법신을 증득하네

 

(청산의구겁전춘) 청산은 의구하여 겁 이전의 봄이고

(무영수두화란만) 그림자 없는 나무 꼭대기에 꽃이 현란하게 만발했네

 

 

 

 

 

북극보전

北極寶殿(북극보전) 편액은 가는 예서체 글씨로 제법 멋을 부린 솜씨입니다.

북극보전은 토속신앙인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칠성각의 다른 이름으로 전서체의 현판은 고종의 이종동생인 심상훈이 썼다.

 

 

 

 

 

 

 

 

 

 

 

영산전

영산전 주련은 추사 김정희 글씨입니다.

 

(청련좌상월여생) 푸른 연좌 위에 달처럼 앉으신 분

(삼천계주석가존) 삼천계의 주인이신 석가세존일세

(자감궁중성약력) 자감궁 한가운데 별들이 벌려선듯 

(십육대아라한중)열여섯 큰 제자들이 모여 있구나

 

봉은사에서 눈여겨볼 글씨는 靈山殿(영산전) 편액으로 굵은 획에 예서체로 쓴 현판으로 글자의 구성이나 배치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하여 ()’자에서는 가운데의 자 하나를 빼버려 복잡함을 피했고, ‘자는 위로 바짝 올려붙여 굵은 글자 셋이 나란히 놓일 때의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극복하려고 위쪽으로 올려 쓴 글씨가 멋을 더한다.

 

靈山殿(영산전) 이 글의 주인공은 백련 지운영(1852~1935)으로, 종두법을 실시했던 지석영의 형으로 문인화가입니다.

 

 

 

 

 

 

 

 

 

 

 

 

 

 

 

 

 

 

 

미륵전(彌勒殿) :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시는 당우(堂宇).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자씨전(慈氏殿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도 한다.

 

 

 

 

 

 

 

 

법왕루

법왕루에서 바라본  봉은사 입구 둥근 접시 모양의 코엑스 건물

 

 

 

 

 

 

 

 

향적원

 

----------------------------------------------------------------------------------- 

2019.10.20 봉은사 모습

 

 

 

 

 

 

 

 

 

 

 

 

 

 

 

 

 

 

 

 

 

 

 

------------------------------------------------------------------------------------------------------------------------------

 

2021년 11월 21일 봉은사

==========================================================================

 

봉은사에 대하여 부기하자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는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명찰은 세 곳이 있다. 각각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불교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들이다.

 

신라 시대의 봉은사는 혜공왕대에 시작하여 원성왕대에 완성한 성전사원으로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원성왕 10년 서기 794년 창건(創建)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며 보현행을 닦았던 신라 원성왕대의 고승이다. 또한「삼국사기」권38<잡지(雜誌)> 제7에는 봉은사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실려 있다. 이른바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곱사찰은 사천왕사ㆍ봉선사ㆍ감은사ㆍ봉덕사ㆍ영모사ㆍ영흥사 그리고 봉은사다.

 

고려시대의 봉은사는 수도 개성에 위치했던 사찰로 태조 이래 역대 왕실에서 매우 중시하였던 곳으로 태조의 영정을 모시고 연등회를 개최한 봉은사는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절이었다.

대봉은사를 성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의 원당을 삼고 또 불일사를 동교에 창건하여 선비 유씨의 원당을 삼았다. ; 創大奉恩寺于城南 爲太祖願堂 又創佛日寺于東郊 爲先妣劉氏願堂 [고려사 권제2, 27장 앞쪽, 세가 2 광종 2]

 

이곳은 선종 계통 사찰로 유명하였고, 대대로 국사ㆍ왕사의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문집에 보이는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절로, 고려 태조의 영정을 모셨기에 고려의 왕들이 지속적으로 그곳을 방문하였다.

강화도의 봉은사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 개성의 것을 대신한 사찰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시대의 수도산(修道山) 봉은사는 조선시대 초 견성사(見性寺)에서 비롯된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연산군 4년(1498) 정현왕후가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고 사찰 이름을 봉은사로 고쳤다고 나와 있으며 현재 견성사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바로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발원으로 명종 6년(1551년) 문정왕후(文貞王后)가 봉은사를 선종수찰(禪宗首刹)로, 봉선사(奉先寺)는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하는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재흥정책을 폈다. 서울시 강남구 강남구 삼성동 소재의 현존하는 봉은사이다.

 

현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의 봉은사 창건시기는 삼국사기의 봉은사 란 사찰기록에 의한 것인데 조선시대의 견성사(見性寺,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변경)가 신라시대의 봉은사의 맥을 이었는지 아니면 고려때의 봉은사와도 연관이 있는 사찰인지 확실한 기록이 없어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봉은사의 창건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없다. 신라 시대 말기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와 있으나,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봉은사"와 현재의 봉은사 간에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실질적인 봉은사의 시작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선릉 옆에 있던 견성사(見性寺)를 중창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562년 명종 1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참고로 봉은사의 고려시대 대표적 유물인 지정4년명고려청동누은향로(至正四年銘高麗靑銅縷銀香爐)는 구연부 테두리 밑에 100여 자의 은입사로 새긴 명문(銘文)이 있는데, 그 일부 내용을 보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獻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지정4년5월일경조청동누은향로1좌봉헌우삼각산중흥사대전불전)’이라 하여 고려 충선왕 4년(1312)에 제작되었고, 본래 삼각산 중흥사에 봉헌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봉은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보물 제32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4년명고려청동누은향로는 다른 이름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奉恩寺 靑銅 銀入絲 香垸)으로 불리기도 하며,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소유로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봉은사 청동은입사향완(奉恩寺 靑銅銀入絲香垸)은 입사(入絲)기법을 써서 청동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향완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21호이다. 고려시대에 중흥사(重興寺)에 봉안되었던 향로로, 현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소장이며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중흥사는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있던 절로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은 뒤 그곳을 관할하던 도총섭(都摠攝)이 있던 큰절이었는데, 1915년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 봉은사가 중창되던 조선 명종 이후에 봉은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하는 기구를 총칭하는 말로, 향완(香垸)이라고도 한다. 향로는 모양에 관계없이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이고, 향완은 밥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형태를 가리킨다.
 
형태
이 향로는 높이 37㎝, 지름 51㎝로 크기로 본다면 43.4㎝ 높이의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향완 다음으로 꼽히는 대형이다. 완형(垸形)의 노신(爐身)과 나팔형의 받침을 노신 안 바닥에서 고정시킨 전형적인 고려시대 향로인데, 노신에 비하여 받침이 약간 작은 느낌을 준다.
 
몸체
노신의 표면 전체에 가는 은사(銀絲)로 여러 가지 무늬가 상감(象嵌)되어 있다. 주둥이에 있는 넓은 테인 전의 표면에는 연화당초문(蓮華唐草紋)이 가득히 장식되었고, 옆면에는 뇌문(雷紋)이 각각 입사(入絲)되어 있다. 특히 노신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는 네 곳에 굵고 가는 두 줄의 선으로 원을 돌려 그 안에는 범자(梵字) 한 자씩을 새겼으며, 원 둘레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을 새겨서 장식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당초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노신 하단에는 두 줄기 윤곽선으로 된 앙련(仰蓮)이 기다랗게 돌려져 있다.
 
받침
받침은 아래ㆍ위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단에는 굵은 선이 들어간 테두리가 있는 폭이 좁은 앙련을 돌렸고, 하단에는 당초문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맨 아래의 굽에는 가는 선으로 여의두문이 장식되었다.
 
명문
이 향로는 외형에서 각부가 좋은 비례를 보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장식된 여러 가지 무늬가 아름다우며, 은사의 상감도 매우 세련된 방법으로 베풀어졌다. 주둥이에 달린 전의 뒷면에 총 103자의 글씨가 역시 은사로 다음과 같이 입사되어 있다. “至正四年五月 日 敬造靑銅鏤銀香爐一座奉獻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 將此功德用祝皇帝万歲國王千秋天下太平同願僉議政丞蔡河中午山郡夫人梁氏徹明勸善比丘悟如眞悟戒瑚鏤手中郞將金卿願以此功德普及於一切我等與群生皆共成佛道” 이 명문을 통하여 이 향로가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만들어져 삼각산 중흥사 대웅전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것을 일러 '향로(香爐)'라고 지칭한 점인데, 향로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예가 된다. 이전에는 향로라는 말 대신에 향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이 향로를 시주한 사람으로 채하중(蔡河中, ?∼1357)과 그의 부인 양철명(梁徹明)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채하중의 주된 행적은 《고려사》에 보이는데, 중국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결국 나라를 어지럽혔던 인물이다. 충숙왕 6년(1319) 호군(護軍)이 되었고 충혜왕 3년(1342) 일등공신이 되었다가 충목왕 1년(1344)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이 되기도 하였으나, 1356년에 순천에 유배된 뒤 1357년에 자결하였다. 명문 가운데 또한 이 향로를 만든 누수(鏤手), 곧 장인(匠人)인 김경(金卿)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자료적 가치가 있다.
 

 

 

-------------------------------------------------------------------

 

봉은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주장과, 조선시대 중기에 견성사를 중창하여 봉은사로 하였다는 주장이다.

 

794년 창건설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현재의 봉은사와 연관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원성왕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794년에 봉은사를 창건하였고, 대궐 서쪽에 세운 망은루도 봉은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현재 봉은사에 있는 「봉은사사적비명(奉恩寺事蹟碑銘)」도 이에 근거해서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사적비는 1932년 권상로(權相老) 선생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서 봉은사는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창건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봉은사와 현재의 봉은사는 같은 사찰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라 때의 이 봉은사는 신라의 7개 성전사원(成典寺院) 가운데 하나로 경주 지역 어딘가에 진지왕(眞智王, 576∼579 재위)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조선시대에 성종 임금의 능침사찰로 중창된 것이 실질적 창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주요 근거로 다음의 내용을 들고 있다.

 

- 견성사(見性寺)를 지금 유자광(柳子光)과 박안성(朴安性)의 말을 들어 옮겨지으려고 하시는데, 유자광 등은 대비(大妃)의 뜻을 받들어 말한 것이오니 만일 철거하지 못한다면 예전대로 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 사사(寺社)에서 세(稅)를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

 

위의 두 자료는 모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번째 자료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견성사에 관계된 것으로, 견성사를 이건하려는 왕의 의도에 대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두 번째 자료는 견성사가 중창된 후 봉은사로 사찰이름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선릉의 능침사찰이던 견성사는 중창과 함께 봉은사라는 사찰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자료의 시기는 각각 1498년(연산군 4)과 1499년(연산군 5)에 해당하므로 견성사가 봉은사로 개창된 때는 1498∼1499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창건설에 대해서 지금 당장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봉은사에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창건과 연혁을 구성하고 있다. 봉은사에서 펴낸 안내책자 등에는 794년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498년 중건하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바뀌었고, 1562년(명종 17)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 

 

봉은사 홈페이지

http://www.bongeunsa.org:90/user/main.do

 

봉은사 연표

 

신라시대

미확인 시기

•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은사의 전신인 견성사(見性寺)가 창건됨

조선시대

1498(연산군 4)

•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전각을 크게 조영하고 봉은사라 개칭함.

1550(명종 5)

•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교양종의 부활과 승과고시 부활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힘.

1551(명종 6)

• 선교양종과 승과고시를 부활하고 스님들에게 다시 도첩을 지급함, 이때 봉은사를 선종수사(禪宗首寺)로 지정. 보우대사가 도대선사판선종사(都大禪師判禪宗師)의 직위를 맡음.

1552(명종 7)

• 1월, 도첩을 부여하는 시험을 실시하니 400여명이 선종에 합격함.

• 4월 12일, 양종 승과를 실시하여 선종 21명과 교종 12명을 뽑으니, 이 시험에서 청허휴정(淸虛休靜)이 합격.

1565(명종 20)

• 4월 6일, 봉은사 중창의 주인공이었던 문정왕후 별세함.

• 4월 25일 보우대사 다시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로 유배 갔다가 목사(牧使) 변협(邊協)에 의해 살해됨.

1636(인조 14)

• 병자호란으로 당우가 소실됨.

1637(인조 15)

• 남호영기(南湖永奇)대사가 발원하여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시작함.

1855(철종 6)

• 선화(禪華)·경림(敬林)스님 등이 모연하여 절을 중건함.

1856(철종 7)

• 「화엄경」81권, 「별행경」1권, 「불족적도」, 「천수경」, 「준제경」, 「야부송금강경(冶父頌金剛經)」, 「삼은시집」, 「유마경」 등의 경판을 완성하고 9월, 화엄판전을 새로 지어 경판을 안치함봉은사 신도회 창립

1900 ~ 1999

1902

• 대한사찰령을 제정하여 사사관리소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봉은사 등 전국의 14개 사찰이 수사찰로 지정됨.

1911

• 7월 8일,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시행규칙이 반포되어 전국에 30 본산을 두게 되었는데, 봉은사는 이 때 30 본산의 하나가 되어 서울·광주·고양·양주·여주·이천·수원·시흥·양평 등의 80여 사암을 관할함.

1925

• 7월 17일,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여 1천여 명의 주민이 강물에 빠지자, 나청호화상이 감무 강성인(姜性仁), 감사 박심월(朴心月), 이보인(李輔仁) 등과 함께 사중(寺衆)을 지휘, 인명 708명을 구제함.

1929

• 4월, 지난 을축년 수재 때 도움을 받은 선리·부리·잠실·신장리 주민들이 절 앞에 수해구제공적비를 세움.

1941

• 8월, 만일회공덕주 임돈향, 허광명심 및 백성욱 비를 세움.

• 대웅전과 동서 양승당을 세움. 선불당의 상량식을 봉행함.

1942

• 영산전·북극전·천왕문 및 산문을 세움.

1943

• 1월, <봉은본말사지>의 편찬을 안진호(安震湖) 강백에게 위촉함.

• 본사 서쪽 기슭에 선암(禪庵)을 세워 대방 및 요사 4동을 새로 짓고 광주군 종남면 명성암(明星庵)을 옮겨와 산내암자로 함.

1972

• 동국역경원의 역장(譯場)이 들어섬.

1974

• 청동 500관, 지은 1관으로 범종을 조성함.

1975

•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3층 석탑과 석등을 조성함.

1980

• 영암(暎岩)스님이 사사지 2만평을 매입함.

1982

•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함.

1983

• 추사 김정희 탄신 200주기를 맞이하여 기적비를 세움.

1990

• 서울에 대홍수를 맞아 수재민 구호사업 전개 후 구역법회 설립.

1995

• 봉은불교대학 14기와 야간 6기 이후 졸업생과 봉은불교대학 동문회 창립.

1996

• 미륵대불 조성 불사를 회향함.

1997

• 봉은사 신도회 창립.

1998

• 법왕루를 새롭게 중창하여 낙성식을 가짐.

2000 ~ 현재

2000

• 보우당을 새롭게 건립 낙성식을 가짐.

2002

• 봉은문화센터를 건립 준공식을 가짐.

2004

• 종루중창불사.

• 지장전을 새롭게 증축 낙성식을 가짐.

 

---------------------------------------------------------------------------

 

봉은사 (奉恩寺)

 

출처 : http://gangn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am&dataType=01&contents_id=GC04801205

집필자 강호선

 

[건립 경위 및 변천]

「봉은사사적비명」이나 『봉은사본말사지』 등에 의하면 『삼국사기』 원성왕조의 기사에 근거하여 봉은사(奉恩寺)가 신라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였으나 이는 사료를 오독한 것에서 연유한 잘못된 인식이다. 봉은사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조선 전기부터 등장하는데 이에 의하면 조선 성종(成宗)의 비인 정현 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이 죽은 뒤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선릉(宣陵) 근처에 전부터 있던 견성사(見性寺)를 왕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봉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견성사가 언제 봉은사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의하면 1499년경 공사가 끝나고 이름을 봉은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후 봉은사는 왕실 원찰이자 선릉의 조포사(造包寺)로서 왕실로부터 전답을 비롯한 경제적 후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首寺刹)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명종대 문정 왕후(文定王后)와 보우의 활동부터였다. 1550년(명종 5)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복립되면서 봉은사는 선종본사로, 봉선사(奉先寺)는 교종본사로 지정되었고, 1507년(중종 2) 완전히 폐지했던 승과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해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1552년(명종 7) 봉은사에서는 보우(普雨)가 주도하는 선종승과가 시행되어 휴정을 비롯한 승과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이때 승과가 열렸던 봉은사 앞 너른 들을 승과평(僧科坪)이라 부른다. 1562년(명종 17) 9월 선릉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貞陵)이 천장되면서 봉은사는 수도산의 지금의 위치에 대규모로 확장 이전되었다. 1562년(명종 20) 문정왕후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보우가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장살되면서 선교양종과 승과가 차례로 폐지되었고 봉은사의 사세 역시 침체된 가운데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봉은사도 피해를 입었으나 1612년(광해군 4) 왕명으로 봉은사에 주석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에 의해 사찰이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당우 몇 칸만 남기고 전소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경림(敬林)을 중심으로 사찰을 중창하여 옛 형세를 다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665년(현종 6) 다시 가람의 일부가 손실되었고 이후 절의 중창 중수는 계속되었다. 1700년경 월저도안(月渚道安)[1638~1715]은 법당의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권선문(勸善文)을 썼고, 1765년(영조 41)에는 영파성규(影波聖奎)[1728~1812]가 봉은사 판사선생안(判事先生案)을 개로 정리했는데, 삼세여래의 개금불사도 이때 이루어졌다. 1777년(정조 원년)에는 삼장탱, 시왕탱, 사자상을 조성하고 석가와 미타상을 개금했다. 1790년(정조 14) 봉은사는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5규정소(糾正所)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1856년(철종 7)에는 남호영기(南湖永奇)[1820~1872]의 주도 아래 왕실의 내탕금과 중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華嚴經)』 80권 등 불서를 간행하고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지었다. 당시 봉은사에 있던 당대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판전 현판을 써 걸었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이후 조선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1911년 일제가 반포한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조선 불교는 30본산제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봉은사는 경기도 선종 대본산이 되어 광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여주, 이천, 양평, 파주 등 8개 군 78개 말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2년 주지로 부임한 나청호(羅晴湖)[1875~1934] 강백은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20만 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하고 사원을 중영했다.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이 범람하여 떠내려가던 사람들 708명을 구제하고 절의 재물을 내어 이재민을 구호했다. 인근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인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도심포교를 위해 1922년 마포포교당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924년 안변, 1926년 인천, 1932년 서울 관동, 1933년 서울 현저동, 1934년 서울 옥천동 등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39년 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전소되었고, 1941년 태욱(泰旭)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절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전쟁 후 중창불사가 이어졌고 1960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면서 봉은사도 새로 출발하였다. 1964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으로 대학생 수도원이 봉은사에 건립되었고,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대장경 조성의 초석이 되었다. 1975년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새로 조성했고, 1982년에는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했으며 10년이 넘는 불사 끝에 1996년 높이 23m의 미륵대불을 조성하였다. 

 

 

 
랜드마크 Top 10 - 대한민국 리스트 6위에 오른 봉은사
 
글로벌 여행 사이트 “트립 어드바이저(TripAdvisor)”에서 세계인이 선정한 랜드마크
(2015 Travelers' Choice)
https://www.tripadvisor.co.kr/TravelersChoice-Landmarks-cTop-g294196
 
1위 한국 전쟁 기념관
서울, 대한민국 “한국 전쟁은 참혹했지만, 이후 건립된 전쟁기념관에서는 모든 전쟁 참전국과 희생한 군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립니다.
 
2위 경복궁
서울, 대한민국 “고즈넉한 고궁에서 산책을”
 
3위 창덕궁
서울, 대한민국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궁”
 
4위 동화사
대구, 대한민국 “대구와 함께 성장하는 불교문화~”
 
5위 판문점
파주, 대한민국 “북한과 남한의 중간에 서서 창문 밖의 병사들이 서로를 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6위 봉은사
서울, 대한민국 “도심속의 사찰”
 
7위 UN 기념 공원
부산, 대한민국 “조용하고 경건한곳”
 
8위 N 서울 타워
서울, 대한민국 “지방에서 오신 분들 신기해 하십니다.”
 
9위 창경궁
서울, 대한민국 “4대궁 중에 하나..”
 
10위 광안대교
부산, 대한민국 “모던함과 올드함이 공존하는 바다♡
 

 

 

===================================================================================

 

1. 曹溪寺 조계사 大雄殿

 

世尊座道場 淸淨大光明 세존께서 도량에 앉으시니 청정한 대광명이比如千日出 照耀大千界 마치 천 개의 해가 뜬 듯 대천세계를 비추시네劫火燒海底 風鼓山相擊 겁화는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산을 부딪치도록 서로 때려도直常寂滅樂 涅槃相如是 항상 고요하고 즐거워라 열반의 모습이 그러하니라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만일 누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거든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모든 법계의 성품이 전부 마음으로 이루어졌음을 관하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모습이니佛者行道已 來世得作佛 불자가 이 도리를 깨닫고 행하면 내세에 성불하리라

 

이 대웅전은 1910년에 건립되었다.

주련의 출처와 내용은

제1,2구는 華嚴經 毘盧遮那品 에서 大威德太子가 讚佛한 것이고,

제3,4구는 출처는 미상이나 열반을 노래한 것이다.

제5,6구는 華嚴經 夜摩天宮偈讚品 에서 覺林菩薩의 讚頌이고,

제7,8구는 法華經 方便品第二 에서 열반을 노래한 게송이다.

 

2. 奉恩寺 大雄殿

 

淸淨法身毘盧遮那佛 청정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圓滿報身盧舍那佛 원만한 보신 노사나 부처님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천백 억의 화신 석가모니 부처님九品導師阿彌陀佛 구품의 중생을 이끄시는 아미타 부처님當來下生彌勒佛 내세에 오실 미륵 부처님十方三世一切諸佛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

 

이 “대웅전 주련에는 ‘

佛紀二五二六年壬戌重陽 蘭谷 金應燮 焚香謹書’라는 관지가 마지막 구에 있으며,

그 끝에 2과의 도서가 찍혀 있어 蘭谷이 1982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蘭谷은 서화가로 추사체연구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屈折이 심한 秋史體 서풍으로 쓴 행서이다.”주련의 내용은 法?報?化의 三身佛과 서방정토, 미래의 부처,

그리고 시방 삼세의 일체제불 명호로 이루어져 있어 아주 특이하다.

 

3. 奉先寺 大雄殿

 

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큰 바다물을 모두 마시고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부처님공덕 다 말 못하고

 

주련의 글씨는 雲峰 琴仁錫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주련이라는 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출전은 미상이고 내용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 것이다.

 

4. 龍珠寺 大雄殿

 

報化非眞了妄緣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니라 허망한 인연인 줄 알면法身淸淨廣無邊 법신은 청정하여 광대무변하리라千江有水千江月 천 강에 물 있으면 천 강에 달 비치고萬里無雲萬里天 만 리에 구름 없으면 만 리가 하늘일세라

 

이 주련의 출전은 金剛經五家解 如理實見分 第五, 宗鏡禪師의 頌이다.

뜻은 품의 이름 그대로 眞如와 實相이 같은 진리임을 여실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5. 痲谷寺 大雄殿

 

古佛未生前 옛 부처님 나기 전에도凝然一相圓 뚜렷하게 한 모습 둥글었지釋迦猶未會 석가도 몰랐는데迦葉豈能傳 가섭이 어찌 전했으랴.本來非黑白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않으며無短亦無長 모든 곳에 인연따라 나타나시네.

 

이 주련은 禪家龜鑑과 金剛經五家解에서 인용하여 조합한 것이다.

즉 앞의 4구는 선가귀감의 첫 구절인 ‘一物’을 설명하는 가운데

古人의 頌을 인용한 것이고,

뒤의 2구는 금강경오가해 六祖大師解義 중 冶父禪師頌의 일부이다.

즉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黑白隨處現靑黃”에서

중간에 있는 두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주련의 뜻은 一物에 있다.

그런데 뒤의 2구에서 이 일물을 설명하고 있다.

곧 本來非黑白이면서 隨處現靑黃하는 것,

즉 “相없이 相을 나타내는” 주체라는 것이다.

그런 주체는 다름 아닌 摩訶大法王이다.

그렇다면 마하대법왕은 누구인가? 바로 부처님이다.

따라서 이 주련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6. 法住寺 大雄殿

佛身普遍十方中 부처님 법신은 시방에 두루하여三世如來一體同 삼세 여래도 한결 같으시네廣大願雲恒不盡 광대한 성원의 구름은 항상 다함이 없으시고汪洋覺海妙難窮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도다.威光遍照十方中 위광은 시방세계에 가득하시고月印千江一體同 천 강에 비친 달은 한 몸 인듯 같으니四智圓明諸聖士 사지에 모두 통달한 많은 성인들賁臨法會利群生 법회에 임해서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네.

 

이 주련도 조합형으로 전반 4구와 후반 4구가 별개의 것이나

출전은 다같이 釋門儀範?이다.

전반 4구는 佛供篇(제3장) 三寶通請의 香華請 歌詠이고,

후반 4구 역시 佛供篇 七星請의 香華請 歌詠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모두 부처님을 찬탄하는 歌詠이다.

7. 白羊寺 大雄殿 

 

佛放光明?世間 부처님은 세간에 두루 광명을 놓아照耀十方諸國土 시방의 모든 국토를 비추시네演不思議廣大法 불사의 하고도 넓은 법을 연설하시어永破衆生痴惑暗 중생의 어리석고 미혹한 번뇌를 영원히 깨뜨리시네佛身普遍諸大會 부처님의 몸은 모든 회중에 두루 계시고充滿法界無窮盡 법계에 충만하여 다함이 없으시네寂滅無性不可取 적멸은 체성이 없어 취할 수 없지만爲求世間而出現 세간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하셨네其中衆生不可量 세간의 중생들 헤아릴 수 없지만現大神通悉調伏 큰 신통 나타내어 다 조복하시네

 

이 주련은 대웅전 동쪽 면에 4구, 전면에 6구로 모두 10구이다.

동쪽 면 주련의 출처는 미상이고, 나머지는 ?華嚴經? ?世主妙嚴品?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전반 4구는 妙焰海天王이 부처님의 덕을 찬탄한 게송이고, 뒤의 2구는 迦樓羅王이 佛眼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8. 桐華寺 大雄殿

 

天上天下無如佛 하늘과 땅 사이에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고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도 또한 비할 이 없네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것 내가 다 보았지만一切無有如佛者 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 없네

 

출전은 緇門警訓 卷10, 禪林妙記前序에 나오는 讚弗沙佛偈를 비롯하여

大智度論 卷4, 佛本行集經 등이다.

내용은 게송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讚佛 찬불이다.

 

9. 通度寺大雄殿

 

月磨銀漢轉成圓 달이 은하수에 갈려 차츰 둥글어지니素面舒光照大千 맑은 얼굴에서 빛을 내어 大千世界를 비추네連臂山山空捉影 원숭이들 팔을 이어 달그림자 잡으려 하지만孤輪本不落靑天 달은 본래 푸른 하늘에서 떨어진 적 없네黙契菩提大道心 묵묵히 보리의 대도심에 계합하리라

통도사의 대웅전은 좀 특이하다.

동쪽에는 대웅전, 남쪽에는 金剛戒壇,

서쪽에는 大方廣殿,

북쪽에는 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걸어 佛寶宗刹임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편액이 걸려있는 동쪽 벽의 주련은 5구인데 전반 4구와 후반 1구가 별개이나

이를 조합하였다.이 주련의 전반 4구는 ?釋門儀範? 禮敬篇

(제2장) 제1 大雄殿 觀音禮文禮에 나오는 香華請 歌詠이고,

뒤의 1구는 ?金剛經五家解? ?善現起請分?에 있는 冶父의 頌에서 취한 것이다.

그 내용은 報身 석가모니를 찬탄한 것이다.

 

10. 月精寺 大雄殿

 

南無大方廣佛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萬代輪王三界主 만대의 륜왕이요 삼계의 주인이신 석가모니부처님雙林示滅幾千秋 쌍림에서 열반하신 지 몇 해 이런가眞身舍利今猶在 진신사리는 지금도 그대로 있어普化群生禮不休 널리 중생을 교화하시니 예배가 끊이지 않네南無實相妙法蓮華經 실상묘법연화경에 귀의합니다

 

이 주련은 모두 5구절로 구성되어 있으나

제1구와 맨 마지막 구는 歸敬이므로 그 핵심은 2-5구에 있다.

‘萬代輪王 ~ 普化群生禮佛休’은 慈藏律師의 佛塔偈를 변용한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佛塔偈> <月精寺 柱聯>

 

示寂雙林問幾秋 ⇒ 萬代輪王三界主文殊留寶待時求 ⇒ 雙林示滅幾千秋全身舍利今猶在 ⇒ 眞身舍利今猶在普化群生禮不休 ⇒ 普化群生禮不休 

 

제1구는 제2구가 되면서 示寂雙林이 雙林示滅로 순서와 글자가 조금 바뀌고

동시에 問幾秋를 幾千秋로 바뀌었다.

제2구는 慈藏이 石南院에서 文殊大聖을 기다리던 것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므로 월정사와 관련짓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제2구는 취하지 않은 듯하다.

제3구는 全身舍利를 眞身舍利로 바꾸고 제4구는 그대로 활용하였다.이 주련의 내용은 월정사 역시 자장율사가 모시고 온 불사리의 일부를

월정사가 위치해 있는 오대산 中臺의 寂滅寶宮에 安置하고 있어

사리의 신앙이라는 측면에서는 통도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 전통사찰의 대웅전 주련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먼저 주련의 출처를 보면 華嚴經과 法華經이 눈에 띈다.

화엄경은 釋尊이 成道한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고,

법화경은 會三歸一과 久遠成佛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 경전이다.

이들 두 경전은 敎學이나 思想적인 측면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며

대승불교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한국의 불교가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옛 고승들과 선지식의 부처님을 향한 서원이 아름다운 문구로 표현된 주련을 보며 이시대 불자들의 마음가짐이 불국토로 향한 수행정진이되어 성불하기를 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