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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법정스님 말씀 등

혜국스님이 걸어 오신 길

by 연송 김환수 2015. 3. 29.

금아 혜국(金牙 慧國) 스님은 여섯 살 때 신동으로 신문에도 나고, 13세에 일타(日陀)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성철, 구산 스님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금아(金牙)는 영원히 부러지지 않는 황금 어금니(불교지칭)의 뜻이 있고

     혜국(慧國)의 () : 사리를 밝게 분별하는 지혜를 담아서

     () : 불교국을 지향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법호로 해석하여 봅니다.

 

금아 혜국(金牙 慧國) 스님

일타(日陀)스님과 혜국(慧國)스님

 

혜국 스님이 걸어오신  길

 

큰스님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13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에 1등으로 합격되지 못함을 알고 당시 제주도에 와 계신 "일타큰스님" 뵙고 출가(동진)을 결심 일타큰스님을 은사로 경남 합천 해인사 지족암에 공부하였다.

 

제주도, 서울 등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해인사로 내려와 당시 "성철큰스님"로 부터 다시 발심하여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말씀드리고

 

22살때 큰뜻을 품고 해인사 "장경각"(팔만사천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전각)에서 매일 5천배를 하였으며 원하는 10만배의 절을 마치는 날,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명세로 소신공양(오른손을 천으로 칭칭감아 알코올을 묻혀 손가락 3개를 부처님전에 불태움)을 올렸다.

 

불탄 손을 벙어리 장갑을 끼고 부산으로 내려와 인연있는 불자님의 소개로 병원에서 응급치료 후 의사가 3개월은 입원 해야한다는 소견이 나왔으나 무시하고,

 

그날 밤 기차로 스승이신 일타 큰스님이 수행 하시던 경북 봉화군 소천면 고신리 태백산 "도솔암"(원효대사가 기도하고 창건한 암자)에서 3년 동안 "동구불출"(밖을나가지 않음) "봉두난발"(머리를 깍지 않음)하며 "장좌불와"(등을 바닦에 눕지않은)로 깨우침 얻었다.

 

 

혜국 큰스님 행장

 

1948 : 제주도에서 출생

1961 : 13세 해인사로 출가,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9 :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70 : 22세 반드시 성불할것을 다짐하며, 오른손 손가락 3개 부처님께 연비함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7개월 동안 생식 및 장좌불와 정진

1973 : 경봉스님, 성철스님, 구산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

1984 :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칠불사, 수도암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안거 성만

1994 : 제국 남국선원 '무문관' 및 남국선원 개원

1997 : 부산 홍제사 창건

2004 : 충주 석종사 창건

현재 :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주석), 제주 남국선원장

 

석종사  http://www.sukjong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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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사 (釋宗寺)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149[직동길 271-56]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개설]

금봉산(金鳳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석종사는 1983년에 세워졌다. 석종사는 옛 죽장사 터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죽장사란 사찰명은 조선시대의 지리지 및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석종사의 불사 이전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석탑이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사찰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건립경위 및 변천]

석종사는 약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폐사지로 남아 있던 곳에 승려 혜국이 주석하게 되면서 다시 사찰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혜국이 봉암사에서 수행 중일 때 하얀 옷을 입은 승려가 나타나 아이고, 중노릇이 시원찮으니 전생에 살았던 데도 모르는구먼!”이라고 하자, 이에 놀란 혜국이 거기가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죽장사도 몰라?”라고 대답하는 순간 눈앞에 사찰의 모습과 작은 탑이 보였다고 한다. 혜국이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중원 땅 어딘가라면서 인연을 따라 아침에 떠나라고 하였다.

 

다음날 봉암사를 떠나 길을 걷던 도중 버스를 잡아타고 보니 충주로 향하던 버스였다. 충주에 닿아 이곳저곳 땅을 알아보는 가운데 꿈속의 승려가 보여준 모습과 비슷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곳은 3년 전에 매물로 나왔으나 아직까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혜국은 비구든 비구니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갈 곳이 없는 노인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이들이 외로워하자 부모 없는 아이들을 모아 학교 공부를 시키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석종사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석종사의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었다. 이전에는 공원 지역으로 묶여 크게 중창할 수 없었으나 당시에 공원 지역 지정이 해제되었던 것이다. 대웅전 창건을 시작으로 여러 불사가 진행되었는데, 불사는 혜국의 상좌들이 직접 중장비를 운전하고, 신도들이 힘을 합치는 등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활동사항]

석종사는 출가한 승려만을 위한 공간을 지양하고, 재가자(在家者) 역시 사찰에서 머물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매달 넷째 주에 큰스님의 정기 법회가 있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불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현황]

석종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정면 3, 측면 2칸의 오화각 및 범종각, 소소원(선방), 안양원, 금봉암, 조종육엽(조실채), 금봉선원, 감로각, 천척루(누각), 회명당(후원), 원흥료(종무소), 보월당(시민선원) 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표는 혜국이고, 신도 수는 100여 명이다.

 

[관련문화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5호인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6호인 인천안목(人天眼目), 충주시 유형문화재 제267호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을 소장하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위치한 석종사는 예로부터 삼태육성 이십팔수 남극성 북극성이 모두 법당앞에 모이는 아름다운 곳이라 합니다.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되어 천년넘게 이어져 오던 사찰이었는데 조선말 억불정책때 조병로 충주목사가 사찰을 헐어 충주목사관 집무실인 청량헌(충주관헌)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일제시대때는 완전 폐사가 되어 과수원인 사과밭을 하던 곳이었는데 25년전 지금의 석종사 석원장이신 혜국선사께서 그 터를 처음 800여평을 매입한후  조금씩 사들여 10만 평 가까운 터를 확보하고 폐사지에 절을 다시 세워 선원을 열었다.

 

석종사는 근대에 지어진 사찰중 가장 아름답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선사로 손꼽히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혜국스님은 오른쪽 검지와 중지, 무명지 세 손가락을 소지공양(燒指供養)하고 지독한 참선 끝에 견성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혜국스님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해인사 장경각에서 손가락을 연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혜국스님은 "이번 생에 못 깨달으면 다음 생, 그다음 생에도 다시 스님이 돼 부처님의 법을 받들고 싶다"며 해인사 장경각에서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불태웠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성철 스님은 "장경각을 태웠으면 어찌할 뻔했느냐"며 되레 호통을 쳤다고 한다.

 

"196931일 밤 1230분에 연비를 시작해 다 태우고 나니 새벽 1시였습니다. 제 은사 일타스님도 연비를 하셨는데 살은 타고 뼈만 남을 때 고통이 크다고 하셨었죠. 제가 연비를 끝내고 내려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비에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좋았는데 그다음에는 어찌나 아픈지"

 

스님은 오른손 세 마디와 함께 왼손 집게손가락 한마디도 없다. "이 손가락은 연비를 한 것은 아니고 일하다가 톱에 베어서 떨어진 것을 붙이려고 병원에 갔는데 마침 한 청년이 같은 마디가 떨어졌기에 주었다고 하는데 그 손가락은 현재 그 청년과 함께 있습니다.

 

스님의 정진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2살의 혜국 스님이 묵언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혜국 스님이 목욕을 하자 성철 스님이 옷을 감췄다.

 

혜국 스님의 묵언을 깨기 위한 묘책이었는데 그러나 이미 연비 원력까지 세웠던 스님이었으므로 흔들릴 리 만무하였다.

 

벌거벗은 채 고개만 숙이고 법당 앞을 지나갔다고 전한다.

 

일화 하나가 더 있다.

 

성철 스님의 10만 배 권유에 혜국 스님은 이렇게 혼자 되뇌었다고 한다. “진실한 절 한 번이 중요하지 극기훈련도 아니고 10만 배를 왜 하라 하시는가?”

 

그래도 성철 스님의 일언이니 믿고 하루 5천배씩 해 나갔다. 거의 10만 배에 이르렀을 즈음, 생전 처음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굳이 말로 하자면, 나는 없고 절만 있어. 그 순간 환희, 광명 속에 휩싸인듯한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진실한 절 한 번을 위해 헛 절 10만 번을 하는 것이구나. 성철 스님 고맙습니다.”

 

성철 스님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성철 스님은 오래 간만에 절 제대로 하는 놈 봤네하며 박장대소 했다고 한다. 혜국 스님은 이제 부터가 진짜라며 10만 배를 다시 했다. 그러니 거의 20만 배를 한 셈이다. “근데 말입니다. 다시 10만 배를 하는데, 그 절이 안 나와요.”

 

성철 스님께 가 여쭈어보니 간단명료한 답이 떨어졌다. “한 번 지나간 물에 손을 다시 씻을 수 있느냐!”

 

수마는 어떻게 조복 받았을까? “제일 어려웠어요. 할 수 있나.” 성철 스님에게 달려갔다. “스님은 장좌불와 하실 때 안 조셨습니까?” “내가 목석이냐?” 순간 반가웠다. 큰 스님도 조셨구나! 어찌해야 안 졸수 있을까? “천장밧줄을 목에 걸고 앉아라.” 도솔암으로 달려와 즉각 시행에 옮겼다. 결과는 실패. 목의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다.

 

다시 성철 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밧줄 걸고 해 보셨습니까?” “아니.” “?” “이건 내가 해 봤다. 발우에 물 담아 머리에 이고 앉아봐라. 얼마나 조는지 알 수 있을게다.” 성철 스님은 자신이 쓰던 발우를 건넸다.

 

한 시간이 멀다하고 떨어져요. 바닥에 흐른 물을 치우고는 다시 앉는데 또 떨어지고.” 절망에 이르렀다. 죽을 각오를 다지며 유서를 썼다. ‘부처님. 이번 생엔 근기가 부족해 안 되니 다음 생에 다시 하겠습니다.’

 

도반에게 간청했다. 도반이라 하면 언제나 스님과 함께 했던 차()를 이른다. ‘도반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힘을 한 번 더 주시게.’ 그리고는 물 담은 철발우를 머리에 얹었다. 찰나의 순간인 듯 했지만 사실은 하루가 지났다. 분명하게 체득된 게 있었다. (그 경지의 일편을 들었지만 표현할 수 없다.)

 

성철 스님을 만났다. 법거량이 오고갔다. 거침없는 대답을 쏟아냈다. “덕산탁발화를 일러라!” 앞에선 줄줄 대답했는데 여기서 막혔다. 백련암 영각에서 3년 더 정진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도솔암 나온 게 엊그제인데 어찌 3년을 더 할 수 있는가. 도망치듯 나왔다.

 

경봉 스님에게 달려갔다. “여사미거 마사도래를 일러라!” 막혔다. “혜국 수좌 여기서 1000일만 더 살아라.” 또 다시 도망치듯 나와 구산 스님을 찾았다.

 

구산 스님이 물었다. “여사미거 마사도래를 일러라!” 답답했다. “왜 똑 같은걸 물으십니까?” 구산 스님이 잠깐 주춤했다. “스님 귀를 빌려 주십시오.” 구산 스님이 귀를 내밀자 그대로 올려 부쳤다.

구산 스님이 미친 놈!”하는 순간 달음박질쳤다. 혜국 스님이 구산 스님을 다시 찾은 건 비승비속으로 산천을 주유한 후였다.

 

 

덕산탁발(德山托鉢)

 

하루는 덕산 선사가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향했다. 공양주 소임을 보던 설봉이 말했다. “스님,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십니까?” 덕산 선사는 말없이 조실채로 들어갔다. 설봉이 이 사실을 선방에 있던 암두에게 전했다. 암두가 말했다 말후구(末後句)를 모르면 조실 자격이 없다.”

 

덕산 선사가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렀다. “노승이 펼친 불법의 궁극(말후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암두는 덕산 화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에 덕산 선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튿날 덕산 선사는 법좌에 올라 설법했는데 평상시의 교화방법과는 달랐다. 암두가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다행스럽다. 덕산 어른이 궁극적인 한 마디의 교화를 제시할 줄 알았다. 이제부터 천하의 누구도 덕산화상의 교화에 대해 허물이 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영운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나귀의 일이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다.”

 

 

 

선지식이 고마울 뿐입니다. 그 때 저를 인정했다면 지금의 혜국은 없을 겁니다. 연비? 자신은 바꾸지 않고 옷만 바꿔 입은 것일 뿐입니다.”

 

큰 가르침이다. 연비는 분명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수행이 저절로 익어가는 것은 아니다. ‘씨앗은 심지 않고 과실만 바랐다는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희망은 멀리가고 절망만 다가온다는 말도 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자신을 바꾸려는, 내 벽을 무너뜨리려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두가 들린다. 남국선원과 석종사를 창건 한 이유 중 하나도 이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스님의 연비는 그래서 더 값지다.

 

우리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믿고 정진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여래의 씨앗을 심으라!’는 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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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인연 61.

기사등록일 [20071218일 화요일]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너는 어디서 주워 왔노.”

저를 속이지 말고 스님 살림살이를 내보이십시오.”

이놈 보그래이.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일러라.”

 

13장 회향

 

고명인은 송광사 일주문 밖에 차를 세웠다. 혜국은 자신을 송광사까지 태워다 준 고명인에게 미안했던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왔으니 제가 송광사를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스님, 저는 송광사를 보러 온 것은 아닙니다.”

 

고명인은 송광사보다는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도솔암으로 가서 단 며칠만이라도 참선을 해본 뒤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고 선생, 그렇다 하더라도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입니다.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십시오.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것도 좋은 인연을 맺는 일입니다. 복 짓는 일입니다.”

 

고명인은 혜국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것도 좋은 인연을 맺는 일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꾸었다. 더구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자, 그런 망설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승을 떠돌고 있을 어머니의 혼과 이승에서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맺고 싶었다.

 

고명인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혜국을 따라 매표소를 통과했다. 매표소 직원은 혜국을 보더니 합장을 했다. 한 발 앞서 걷던 혜국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해인사 포교국장 소임을 보았던 혜각스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만 어머니 보살님 기도를 위해 해인사에 들렀다가 우리 스님이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요.”

사실은 저도 대학생 시절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에 갔다가 일타 큰스님을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그리 된 것 같습니다.”

 

혜국도 자신의 속가 어머니가 생각이 난 듯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풀잎 하나를 뜯더니 말했다.

 

이 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풀 초()에 까마귀 오() 자를 쓰는 초오라는 독초입니다. 제가 도솔암 살 때 어느 날 봄 아침이었습니다. 나물인 줄 알고 뜯어 먹었지요. 파란 잎을 씹어서 넘기자마자 혀가 따끔따끔하고 똑 쏘더군요. 잠시 후에는 목이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소리쳤지요. 그러고는 다리가 뒤로 휘청하면서 앞으로 거꾸러졌어요.”

 

혜국이 의식을 잃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거기까지만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나타났다. 혜국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제주도로 어머니를 찾아가 있었습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을 찾는 것이 도리인데 좀 뭐했습니다. 어찌됐건 아주 생생했어요. 어머니를 뵙자마자 어머니, 저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지요.”

 

그런데 살아생전에 보던 어머니와 태도가 달랐다. 혜국을 쳐다보지도 않고 키에 얹힌 쌀을 고르고 있기만 했다. 아들이 행방불명 됐다고 중얼거리더니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간다며 불공쌀을 추리고 있기만 했다.

 

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이상했어요. 별 일이 다 있네, 싶었지요.”

고명인은 초오 잎을 한 잎 따 코끝에 대면서 말했다.

 

스님, 외람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이상한 꿈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가 바로 부처님이니까 어머니를 찾으셨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속가의 어머니 역시 아들이 행방불명 됐다고 불공쌀을 고르는 일 또한 이치에 맞습니다.

 

스님이 부처를 이뤘으니 속가의 아들은 행방불명 된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혜국은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고 선생, 돌아가신 어머니 보살님을 그리워한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독초를 씹어 삼키지는 마십시오.”

 

실제로 혜국은 도솔암에서 부처의 경지를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졸음을 이기려고 철발우를 머리에 이고 가부좌를 틀었다. 졸면 철발우가 머리에서 떨어져 무릎을 찧었다.

 

철발우에 담긴 물이 엎질러져 옷을 적셨다. 그래도 혜국은 낙담하지 하지 않고 철발우를 머리에 이고 어째서, 어째서……하고 화두를 붙잡고 앉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8시 반쯤이었다. 그날도 물을 가득 담은 철발우를 머리에 얹고 가부좌를 틀었는데,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고 오롯이 화두를 든 마음만 남은 있는 경지를 체험했다.

 

순식간에 하룻밤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눈부시게 뜨고 있었다. 장엄한 일출의 풍광이었었다. 혜국은 환희심이 들어 벌떡 일어나 사자처럼 포효했다. 그러자 철발우가 굴러 떨어져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발우가 떨어지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화두를 든 자신이 찰나 간에 풍비박산 나는 소리였다.

 

혜국은 사지(死地)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이제 됐구나!’ 하고 도솔암 방문을 박차고 나가 온 산을 헤매고 다녔다. 빈 산중을 낄낄거리며 달리던 혜국은 산토끼와 다람쥐는 물론 살아있는 유정물(有情物)을 향해서 이놈들아, 바로 너희도 부처가 될 수 있다.’ 하고 소리쳤다.

 

그 길로 혜국은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다. 성철에게 자신이 깨친 경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1973년도의 일이었다. 도솔암으로 들어가 한 번도 머리를 깎아본 적이 없는 봉두난발의 혜국은 성철에게 삼배를 올리고 난 뒤 말했다.

 

큰스님, 약속한 일을 마치고 왔습니다.”

뭐라꼬, 니가 깨달았다 이 말이가. 그래, 그렇다면 어흥!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왔노.”

스님, 그 소리 가지고 몇 명이나 속여 먹었습니까. 그 말에 제가 속을 줄 압니까. 속지 않습니다.”

성철이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

 

()도 아니고 무()도 아닌 너는 어디서 주워 왔노.”

스님, 그런 거로 저를 속이지 말고 스님 살림살이를 내보이십시오.”

이놈 보그래이.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일러라.”

 

이 말에 혜국은 대답을 못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멍해졌다. 덕산탁발화를 들이미는데 도망갈 길이 꽉 막혀버렸다. ‘덕산탁발화를 알음알이로는 설명할 수 있는데, 성철이 요구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산탁발화.

 

그것이 공안(公案)이 된 내력은 이러했다. 하루는 덕산이 공양시간이 아닌데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향했다. 공양주 소임을 보던 설봉이 말했다.

조실스님,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십니까.”

덕산은 대답하지 않고 조실채로 갔다. 설봉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실스님이 말후구(末後句; 선의 마지막 관문)를 모르시다니. 말후구를 모르면서 어떻게 조실스님이란 말인가.”

설봉의 말을 들은 선방의 암두가 말했다.

 

예로부터 말후구를 모르면 조실 될 자격이 없다.”

설봉과 덕산의 얘기를 전해들은 산중 대중들이 웅성거렸다. 그러자 시자가 덕산에게 고자질을 했다. 덕산은 불같이 화를 내며 두 스님을 불러들였다. 이에 설봉과 암두가 조실채로 들어가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조실스님, 저희들을 불렀습니까.”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설봉이 덕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이에 덕산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맞다. 맞다.”

도대체 설봉이 덕산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기에 덕산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라고 했을까, 라는 것이 덕산탁발화가 던지는 물음이었다.

어쨌든 혜국은 말문이 막혀 당황했다. 성철은 또 다시 다그쳤다.

 

덕산스님이 왜 손뼉을 쳤는지 일러 보그래이!”

스님, 환한데 모르겠습니다.”

짜슥이 양심은 있구마. 환한데 모른다꼬. 환하다는 소리는 빼라! 너 태백산 가지 말고 여기 백련암 영각에 있그래이. 3년은 더 해야 되는기라.”

 

그러나 혜국은 백련암을 떠났다. 다른 선지식을 만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점검받고 싶었고, 성철의 배려와 상관없이 스승의 눈치를 보는 백련암 수좌들 사정도 고려해서였다. 그래서 혜국은 백련암을 내려와 바로 통도사 극락암으로 가 경봉 앞에 꿇어앉았다.

 

극락암은 바닷물이 빠진 백사장처럼 조용했다. 선방 대중들이 모두 영축산 정상으로 산행 나가고 없었다. 혜국은 시자 송암을 따라 삼소굴로 들어가 82세의 경봉에게 절을 했다. 경봉은 누운 채 머리를 산적처럼 기른 혜국의 인사를 받고는 말했다.

 

혜국이 깨달았다고. 손 내봐라.”

잠시 후 경봉이 혜국의 손을 때리며 물었다.

 

이 소리가 네 손에서 났는가. 내 손에서 났는가.”

아이고, 스님. 어린애 달래는 소리 마시고 스님 살림살이나 내놓으십시오. 무자 소식을 일러보십시오.”

무자 소식 말이냐.”

경봉이 벌떡 일어나 혜국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여사미거(驪事未去)에 마사도래(馬事到來). 일러라.”

혜국은 또 막혔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했다는 공안에 또 다시 심장이 멈출 듯했고 숨이 턱에 걸렸다. 그러자 경봉이 타일렀다.

 

혜국수좌! 내가 오 처사 나가라고 할기다. 그러니 극락암에 1천일만, 3년만 살기구마.”

혜국은 다시 극락암을 뛰어 나와 송광사로 갔다. 이번에는 조계산의 선지식 구산을 찾아가 절을 했다. 구산은 대뜸 혜국이 자신에게 온 의도를 알고 말했다.

 

저 앞산에 바위가 눈이 열렸구나. 눈 열린 소식을 일러라.”

눈 열린 소식을 이르라고 한 사람에게 물으십시오.”

이에 구산이 원을 그려놓고 대답하라 했고, 혜국은 즉시 답을 했다. 다시 구산이 경봉처럼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란 화두를 물어와 혜국이 말했다.

 

노장님, 왜 똑같은 말을 묻습니까.”

혜국은 구산의 다그침이 시원치 않다고 여긴 나머지 또 물었다.

 

노장님, 귀 좀 빌려 주십시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말합니까.”

구산이 대답 대신에 혜국에게 자신의 귀를 내밀었다. 그 순간 혜국은 구산의 귀를 올려붙였고, 구산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미친놈!”

 

성철, 경봉, 구산 등 세 사람의 선지식을 만나 자신의 경계를 점검한 혜국은 전국을 만행했다.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를 긴 채 아무 데서나 자고 먹고 했다. 그러다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갔다가 구산의 부름을 받고 송광사 선방으로 갔다. 이후 몇 번을 더 송광사 선방을 들락거리다 나중에는 3년 결사를 마쳤다.

 

혜국은 구산을 얘기하면서 참 놀라운 분이란 말을 반복했다. 경내의 풍경소리가 들리자 구산이 더욱 간절하게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고 산길가의 유무정물에 합장하곤 했다. 그늘 진 산길 옆으로는 큰 개울이 얌전하게 흐르고 있었다. 해인사 초입의 홍류동 계곡의 거친 물살과는 대조적이었다. 구산이 제자를 사랑하는 듯한 모습처럼 계곡물은 동글동글한 바위를 적시며 흐르고 있었다.

 

구산 노장님과의 인연은 지금 생각해 봐도 특별합니다. 노장님께서는 입적하실 때까지 사람을 시키거나 편지를 보내 저를 부르시곤 했습니다. 노장님께서 저를 직접 찾아오실 때도 있었고요. 함양 용추사 은신암으로 도망쳐 숨어 있을 때나, 소백산 토굴, 제주도 남국선원의 토굴에 있을 때도 당신이 직접 오시어 송광사 선방에 함께 살기를 원했어요.

 

3년 결사를 마치고 나서 조계산 상봉 밑 인월정사에서 겨울 한 철을 살 때였지요. 어느 날 치과를 가려고 나서는데 노장님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길래 하도 잠이 많아서 속이 상한 김에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고 울다가 부러졌습니다.’ 하고 대답했지요. 뒷날 노장님께서 조용히 불러 갔더니 영원히 부러지지 않을 황금 어금니란 뜻의 금아(金牙)란 법호를 주시더군요.”

 

고명인은 세속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신뢰를 주고받고 살아온 혜국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세속에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선가에서는 법(진리)이 피보다 진하지 않나 싶었다.

 

“1977년도였을 겁니다.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도 불러서 갔더니 뭘 써놓고 저더러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입던 누더기를 저한테 물려주시면서 이건 네가 입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구산스님께서 무슨 글을 써 주었다는 것입니까.”

우리 선가에서는 밀계(密啓)라고 합니다. 발설하면 온갖 시비가 생기지요.”

혜국은 고명인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곤란한 듯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도 저는 구산 노장님 제삿날에는 송광사에 오지 않더라도 노장님 계신 곳을 향해서 혼자서 향을 사르고 조촐한 의식을 치릅니다.”

 

그제야 고명인은 송광사에 온 혜국을 이해했다. 혜국은 자신을 이끌어준 여러 선지식들 중에서도 특히 구산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혜국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삼배를 하고 나오더니 바로 한 요사로 갔다. 3년 결사하면서 혜국 자신이 묵은 방인 모양이었다. 혜국은 마루턱에 걸터앉은 뒤 감개무량한 듯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뼈를 부수고 몸을 태우는 것이 정법이니

금아선자가 삼계의 사람들을 다 씹어 죽였구나

서쪽에서 온 소식을 나에게 전했으니

푸른 숲속 새벽 꾀꼬리 소리가 노파의 선일세.

碎骨焚身爲正法

金牙嚼殺三界人

西來消息固余囑

綠樹曉鶯老婆禪

 

순간, 고명인은 바로 이 계송이 구산으로부터 받은 밀계가 아닌가 싶어 물었다.

 

스님, 지금 읊조린 계송을 전법계라고 하는 것입니까.”

쓸데없는 소립니다. 일타스님이 저의 어머니 같았던 분이라면 구산스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제게 무슨 말씀인들 못하셨겠습니까.”

 

계속

929[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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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性徹, 1912년-1993년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은 이영주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선불교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이다.

경상남도산청에서 출생했다.

1936년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67년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성철스님 딸

* 본 명 : 이수경

* 법 명 : 불필(不必) -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무소유를 뜻함.

                  성철스님이 직접 지었다고 함.

                   ‘필요 없는 딸이라는 의미로도 전해진다.

* 출 가 : 1961년 3월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정식 비구니계를 받았음.

* 학 력 : 진주사범학교 졸업

* 현재 머무는 절 : 석남사

 

 

[ 그 아버지에 그 딸 ]

아버지 성철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딸 수경(불필스님)이

이후 어떻게 불교에 빠져 들었는가를 듣다보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란 생각이 절로난다.

 

당시 경남일대 영재들만 입학하던 진주사범에 입학한

수경은 틈만나면 화두(삼서근)를 들었다.

교생실습을 위해 진주인근 초등학교로 출근해야 하는데.

학교로 가는대신 월명암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부산사범을 졸업하고 수행차 머물고 있던

이옥자(백졸스님,부산 옥천사주지)를 만났다.

 

성철스님의 출가이후 20년만에 다시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재원(才媛)이란 소리 들어가며 교사의 길을 잘 걸어가던

처녀가 교사발령을 받고서도 "부임하지 않겠다"

"참선 공부하러 절에 가겠다"고 하니 집안 어른들의

야단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버지 성철스님이 그랬듯이 딸 수경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족회의가 열렸다. 어른들의 설득에 수경이 조건을 내세웠다.

"내 소원을 들어줄수 있으면 절에 안가겠습니다."

 

모두들 긴장하며 수경을 쳐다봤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내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어른들이 모두 침묵했다."출가 않으면 죽을 팔자"라며

출가했던 아버지 성철스님의 단호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수경이 용기를 내 결론을 내렸다.

 

"부처님은 6년만에 대도를 깨쳤다 하지만,

나는 더 열심히 해서 3년만에 공부를 마치고

도를 깨치고 오겠습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한평생 꼿꼿하고 도도하게 살아온

할아버지가눈물까지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집안 다 망한데이"

 

이무렵 이런 집안사정을 알바없는 성철스님은

경남 통영 안정사옆 천제국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의 산내 암자인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출가를 결심한 수경은 가족들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수소문끝에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위해 참선 공부를 하러 가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딸의 출가결심을 듣던 성철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급할수록 둘러가야 한데이."

 

이렇게 해서 딸의 출가를 인정하고

법명을 "불필(不必)"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성철스님 생가

 

性徹(성철)스님. 俗名(속명) : 李英柱(이영주). 本貫(본관) : 陜川(합천).

() : 退翁(퇴옹). 法名(법명) : 性徹(성철)

 

성철스님 공식사이트

http://sungchol.org/home/bbs/board.php?bo_table=01_1

 

성철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이씨 가문인 아버지 이상인씨와 어머니 진양(晋陽) () 씨 강상봉씨 사이에서 8남매중(44)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의 부농이었고, 매사에 다망하여 굽힐줄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성철스님의 외고집과 당당함도 그의 부친을 빼다꽂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명석하여 3세에 글자를 알고, 읽기 시작했으며, 5세때에는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났으므로, 인근 사람들은 신동의 출현에 칭송이 자자했다. 이미 10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 인근(隣近)에는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그의 두뇌는 더이상 낡은 세계에만 머물지않고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당시 물밀듯이 들어오던 신학문과 철학과 종교등 제학문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열정을 가지고 관심을 쏟았으나 모두가 참다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구도의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후 참구도의 길은 수행정진에 있음을 알고 거사의 몸으로 입산, 불철주야 용맹정진, 승려이상의 진척을 보여 주위에서 출가를 권유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스스로 출가를 결심 모든 세속의 인연을 끊고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가시를 짓고 승문(僧門)에 들었다.

이때 스님은 당시의 조혼풍습으로 일찍 장가를 들어 딸하나를 두었으나 정작 그 딸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했다.

 

성철스님의 아버지 이름은 이상언(李尙彦) , () 는 사문(士文) , 아호는 율은(栗隱) , 관향(貫鄕) 은 합천(陜川) 이다. 조선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81년 동짓달 초하루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대로 살던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았다. 진양(晋陽) () 씨 부인을 아내로 맞아 슬하게 44녀를 두었는데, 성철스님은 장남이다.

 

부친은 평생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성정이 당당하고 직설적이었다. 외모는 성철스님 보다 더 훤해 지팡이를 짚고 삿갓을 쓰고 길에 나서면 선풍도골(仙風道骨.신선이나 도인과 같은 풍모) 의 모습이었다고도 하고, 유림으로 향교에 가 좌정하면 향교가 다 훤할 정도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성철스님의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시원스런 외모는 이런 부친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성철스님이 부친과 관련돼 들려준 일화에 따르면 무서우면서도 자상한 면이 많았던 분이다.

 

"우리 집에 밤나무가 마이 있었거든. 그라이 온 동네 아이들이 우리집에 밤 훔치러 오는 게 일이라. 몰래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가는데, 선친은 보고도 아무 말을 안해. 가만 보다가 아이들이 나무에서 다 내려오면 그때 호통을 치는 기라. 나무 위에 있을 때 뭐라고 하면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다칠까봐 그런 거 아이가. "

 

부친은 매우 주도면밀하고 세심한 분이기도 했다. 집 우물가에 구기자 나무를 심어 놓고 매일 새벽 일어나 남보다 먼저 샘물을 떠마셨다고 한다. 우물가 구기자 뿌리가 땅 속 깊이 들어가 우물을 감싸면서 구기자의 좋은 성분이 물에 녹아들게 되는데, 그 물을 새벽 일찍 마시면 장수한다는 옛말에 따른 것이다.

 

고집스런 면모는 일제하 창씨개명을 거부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 관리들이 그토록 종용해도 꿈쩍도 않았다고 한다. 일제말 전쟁에 필요하다며 집에 있는 놋그릇 등을 모조리 거두어 가져갈 때도 끝까지 거부, 숟가락 하나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후 좌우대립이 극심한 와중에도 완고한 성격 그대로였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이라 공산주의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했고, 성철스님의 집은 지주 집안이라 당연히 질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인민군 병사가 집안에 들이닥쳐 소를 몰고가려던 참이었다. 성철스님의 부친이 이를 보고 호통을 쳤다.

 

"니는 소 도적질하는 놈 아이가. 니가 백성 위한다는 인민군이가. "

 

전해오는 말투나 행동이 영락 없는 성철스님이다. 그 인민군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부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는데, 동네 사람 누군가가 재빠르게 끼어들어 노인을 업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런 완고한 유학자인 아버지가 장남의 출가를 보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특히 산청 지역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유풍(遺風) 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곳으로 매우 보수적인 유교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 당시만 해도 조선조의 오랜 전통과 정책에 따라 스님이 천민(賤民)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그러니 성철스님의 출가는 온 집안, 아니 온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었다고 한다.

 

동료 유학자들이 "아들이 중이 된 가문과는 친교를 가질 수 없다" 며 외면할 정도였다니 완고하고 자존심 강한 부친의 낙담은 이루 다 말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부친은 그런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어느 날 하인들에게 집 앞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치라고 지시했다.

 

"내 아들이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응께, 나는 석가모니한테 복수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

 

부친은 살생을 금지했던 석가모니에게 복수한다는 차원에서 대규모 살생을 계획한 것이다. 하인들이 잡아오는 고기를 큰 통에 담아놓고 한동안 매운탕만 끓여 거의 매 끼니를 먹다시피 했다.

 

이때 몰래 물고기를 물동이에 담아 강물에 풀어준 사람은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이었다. 아버지 이상의 슬픔을 감추고, 아버지의 성격에 맞춰 살아가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더 찢어지는 듯했다고 한다.

 

                           "성철스님과 따님 불필스님"

다시 태어나면 큰스님(성철스님)의 상좌가 돼 시봉하고 싶다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한 소망인가 부녀관계는 속세를 떠난 출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