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방/부자분석, 상업

나이 들어 철이 든 김경재 뒤늦게 성공 / 시세파악형 사건

by 연송 김환수 2015. 2. 28.

상인과 상업활동

나이가 들어서야 철이 든 김경재가 뒤늦게 성공을 바라보다

 

분류

정치/경제/생업 > 스토리 상황설정 > 사건 > 시세파악형 사건

개성상인 김경재(金景載)가 단천포(端川布) 13()1,0722전에 구입하였다.

 

활동지역 - 개성

취급품목 - 포목(단천포)

사건시기 - 순조13(1813)

전거 - 19c 초 개성상인의 사개문서(四介文書)

 

개성 상인 김경재는 본래 양반의 자손이었다.

하지만 김경재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낮은 벼슬자리 하나 앉아보지 못한 소위 이름만 양반인 집안이었던 것이다.

막말로 벼슬도 재산이 없는 사람이 무슨 수로 양반 노릇을 한단 말인가? 동네 아이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노는 김경재를 누가 양반의 자식이라고 알아본단 말인가.

 

김경재가 자신이 양반의 자손임을 안 것도, 그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가 공자왈 맹자왈 책을 읽어주며 억지로 글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막상 김경재 본인에겐 양반인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한 게 못 되었다.

다만 책상머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능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답답하고, 그나마 품을 팔던 어머니가 일거리를 얻지 못하는 날이면 밥을 굶어야 하는 것이 더 슬프고 짜증나는 일일 뿐이었다.

 

-------------------------------------------------------

 

할아버지, 아버지를 먼저 여읜 김경재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어머니마저 잃고 혼자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 여덟이었다.

 

28세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부전자전이라고, 어렸을 적 무능력했던 아버지에 대한 갑갑함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 것은 김경재도 매 한가지였다. 그런 연유로 생활을 돌봐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김경재는 살 길이 막막했다.

남겨진 재산이 있을 리 없고 딱히 별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닌 김경재가 스스로 의식(衣食)을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바람을 막아줄 집이 있어서 잘 곳 만은 걱정 않아도 된다는 것 뿐이었다.

 

'내 주제에 벼슬은 꿈도 못 꿀 일이고, 갈아먹을 밭도 없으니 어떻게 한다? 그래도 차마 비럭질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단 말씀이야!'

 

김경재는 궁리 끝에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만만한 일이란 게 있던가? 김경재가 그냥 물건을 팔아먹기만 하면 되려니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뛰어든 장사판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처음엔 남의 가게 사환으로 취직을 했으나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얼마 못 가 쫓겨났기 일쑤였다. 종내에는 김경재의 게으름이 소문이 나, 어느 곳에서도 그를 쓰려 들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제 장사를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닌데 당장에 팔 물건이 어디서 생긴단 말인가?

김경재는 장사 밑천을 구하기 위해 집에 있는 쓸만한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팔아치웠다. 또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돈을 꾸었는데, 심지어 체면불구하고 이름만 알뿐 생면부지인 먼 친척에게까지 찾아가 손을 벌렸다.

그러고도 모자라자 김경재는 별 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집을 내 놓았다. 오래되고 낡은 집이라 사실 별 기대도 않았는데, 기실 그 집의 기둥이며 처마 등의 재목과 장식이 가치 있는 것이라 뜻밖에도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덕분에 김경재는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본이 생겼으나 김경재의 근심은 그치질 않았다.

장사도 그 종류가 너무 많아 김경재는 눈이 빙그빙글 돌 지경이었다. 무엇을 할 까 고민하느라 머리까지 아파오자 김경재는 잠시 쉴 겸 사태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집을 팔고나니 지낼 곳이 없어진 김경재는 시장에서 가까운 객주에 구석 방을 잡아 머물렀다. 매일 일정한 돈을 치르고 밥도 먹고 잠도 잤다.

이렇게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느긋해진 김경재는 다시 방안에서 뒹굴며 놀고 먹기를 일삼았다.

제 딴에는 장사를 구상 중이라고 말해놓았으나 객주 주인이 보기엔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본래 머무는 손님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 정상인 객주에 한 손님이 제 집 마냥 오래도록 머무니 주인으로선 의아할 수 밖에.

결국 한 달이 넘자 보다 못한 주인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손님은 장사 안 하시오? 내 살다, 살다 손님 같은 사람은 처음 보우. 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주인의 말에 내심 켕긴 김경재는 도리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 이사 뭘 하든 댁이 무슨 상관이오? 내 언제 밥값을 떼어먹었소? 아니면 방값을 밀렸소? , 내가 한 날 돈 없어서 그냥 내뺄까 봐 그러오? 그리 걱정되면 오늘부터 셈 해서 한 달치를 미리 내리다!"

 

무안해진 주인은 이미 손을 휘저으며 김경재의 방 앞을 떠난 뒤였으나, 있는대로 큰 소리를 친 김경재는 제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며 짐을 풀었다.

돈 꾸러미를 찾아 풀어 젖히던 김경재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돈이 눈에 띄게 부쩍 줄어있었던 것이다. 어느 샌가 너무 쉽게 야금야금 써 버린 것이다. 김경재가 떨리는 손으로 아무리 다시 세어보아도 줄어든 돈이 다시 늘어날 리 만무했다.

김경재는 더럭 겁이 났다. 이대로 가다간 가진 돈을 모두 날리는 건 순식간이지 싶었다.

빚도 져 있는 상황인데 그리 되었다간! 상상만으로도 김경재의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음 날부터 김경재는 부지런히 시장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 장이 파할 때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귀동냥으로 정보를 모았다. 어떤 땐 귀찮다는 타박까지 받아가며 궁금한 것을 물어 대답을 얻곤 했다.

얻은 정보가 모두 쓸만한 것은 아니어도 몇몇 알짜배기는 있어서, 김경재는 슬슬 감을 잡아갔다.

결국 김경재는 포목 장사를 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포물류는 최대 생산 품목이던 상품으로 운이든 어쨌든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김경재가 막상 포목점을 경영해보려고 했으나, 정작 포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포목의 씨가 마른 듯 하였다.

운 좋게,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포목을 팔겠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부르는 값이 너무 비싸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하였기에 김경재는 아쉬워도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갑갑해진 김경재가 다시 한 번 시장에 나가 연유를 알아보았는데 늙은 장사꾼이 말하길, 막대한 자본을 가진 사상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내려오는 포목들을 중간 길목인 원산에서 몽땅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당시엔 돈 많은 사상들이 다반사로 벌이는 도고 행위였으나, 이제 막 상인으로 첫 명함을 내민 김경재로선 원통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유난히 객주에 손님이 많았던 탓에, 주인의 부탁으로 김경재가 머물던 방에 도 다른 사람이 하나 같이 묵게 되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 지 오랜 장사로 성격이 닳아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함께 묵게 된 사람은 참으로 싹싹한 사람이었다. 김경재가 속이 몹시 상해, 방에 사람이 들어와도 본 체 만 체 하며 뚱하게 돌아앉았는데도 아랑 곳 않고 통성명이나 하자며 말을 붙여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이 송 씨고, 원산에서 차인 노릇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원산이라는 말에 김경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금새 태도를 바꾼 김경재는 송 씨가 사양하는데도 주인에게 부탁해 술상을 들였다.

혹여 쓸만한 이야기라도 들을까, 송 씨의 기분을 맞춰가며 극진히 대접하던 중에 김경재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송 씨의 말에 따르면, 작년 이맘때쯤 개성 시전에 박수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함경도 길주까지 가서 포목을 사와 가게에 물건을 대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치며 송 씨는 박수장더러 지독한 사내라며 웃었으나, 김경재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살 길을 드디어 찾은 듯 싶었다.

송 씨가 술에 곯아떨어진 뒤에도 김경재는 좋아 죽을 지경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음 날, 김경재는 개성 시내로 들어가, 시전 상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박경제의 예를 들며 그들을 설득했고, 반드시 물건을 가져오겠다는 약속은 물론 만일 실패할 경우 노비로 몸을 팔아서라도 그 손해를 물려줄 것을 각서로 써가며 돈을 모았다.

 

이리하여 총 1200냥의 자본을 가지고 김경재는 길을 떠났다.

초행길에 더군다나 안내하는 이도 없었기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간신히 넘기며 간 여정이었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드디어 단천에 도착했을 때 김경재는 이미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고진감래라고 김경재의 단천행이 헛걸음은 아니었다.

김경재는 단천에서 총 13동의 단천포를 1,0722전에 구입할 수 있었다. 본래 1,100냥을 부르는 것을 김경재가 깎고 또 깎은 결과였다.

 

여윳돈으로 노새 두 마리를 구해 짐을 싣고 개성으로 돌아오는 김경재의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였다.

 

 

포목 13동의 현재 가치를 쌀과 당시 포목값으로 계산해 봅니다.

 

포목 1동은 포로 50필이다. 1석이 4필 정도되니 포목 1동은 쌀 12석으로 본다.

1석은 현재 단위로 144kg이며 도정안한 벼는 200kg으로 무게단위로 1섬 또는 석이라 한다.

 

당시 포목 13(650)은 쌀로 약 132(144kg×132=19,008kg)으로 환산해 보면 쌀 20kg 950개로 약 4,750만원(950×5만원)에 해당한다. (20kg = 5만원)

 

조선후기의 경제사정을 감안해 본다면 엄청난 돈이다.

당시 시세를 쌀로 계산해 보면 포목 13동은 660(15× 132)으로 7간짜리 초가집 13채에 해당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데 이는 틀린 계산법이다.  당시 도매값으로 요구한 포목값이 1,100냥이고 구입한 가격이 1,072냥이기 때문이다.

 

당시 무명과 삼베의 시세는 1필당 2냥이므로 1,300(650필 × 2) 7간 초가집 26채(한채당 50냥)이며, 3간 초가집(15냥)으로는 87채에 해당한다. 현재 가치로 약 1억원정도 환산하지만 당시 물가사정을 감안한다면 그 가치는 초가집 수십채에 달하므로 이보다 더 크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값은 쌀값으로 계산한 가치의 약 2배정도에 이른다.

 

부연 설명하면 당시 도매값으로 요구한 포목값이 1,100냥이고 소매상에서 1,300냥 정도에 팔았다고 보면 당시의 무명과 삼베의 값을 적용하여 계산한 것이 정확하므로 쌀로 환산한 계산법은 잘못된 계산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품목 시세(19세기 초)

1= 5, 1= 2.5, 무명과 삼베 1= 2

 

서울의 집값(19세기 초)

초가 7= 50, 초가 3= 15, 토담집 2= 2.5

 

옛날 부자는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일 년에 쌀을 얼마만큼 수확하는지가 그 척도였다.

천석꾼과 만석꾼이란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는데, 현재기준으로 본다면 천석꾼은 현재의 중소기업 사장, 만석꾼은 현재의 대기업 회장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1948년 물가자료 

60년전_물가자료.pdf

 

60년전_물가자료.pdf
0.4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