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평창_평창이씨의 행불행
평창군.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대관령을 경계로 하고, 북으로는 오대산(1563m)을 기점으로 양평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한강기맥의 능선이 경계이다.
백두대간에 붙어 있는 고장은 대부분 오지일 가능성이 크지만, 평창군은 영동고속도로 IC가 네 개가 있을 만큼 교통 길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키장이 발달하여 매우 밝고 활발한 지역이다.
선진국에서만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평창군은 지형적 우수성과 지리적 편리함으로 대한민국 국운의 최대수혜 고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5천년 역사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평창을 간다.
글 사진 : 김 규 순 (서울동인학회원장, www.locationart.co.kr)
오대산 비로봉과 적멸보궁 오대산의 부드러운 산 정상은 평창의 기운을 상징한다. 1180미터 높이에 있는 적멸보궁은 오대산과 하나가 되어 있다. 적멸보궁의 기운으로 평창이 2018년을 성대하게 맞이할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탑 속에 안치되는 것이 상례인데, 상원사 적멸보궁 뒤에 무덤 형식으로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형을 보면 무덤이 있을 자리로 풍수적인 명당에 해당된다. 입수에 박힌 돌이 그러하고 널직하게 퍼진 자리하며 전순 또한 모양새가 보기 좋다. 전체덕으로 산봉우리들이 감싸 안아서 장풍국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오대산비로봉의 중출맥으로써 적멸보궁의 자리는 용의 이마에 해당된다.
도가적인 취향의 땅
오대산이야 말로 평창군의 진산이다. 오대산은 한강기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평창군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오대산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불교성지라 일컫는 월정사가 있고, 세조의 기원사찰인 상원사와 함께 적멸보궁이 있다.
평창군이 보유하고 있는 국보 4개는 모두 월정사와 상원사에 있다. 국보36호 상원사동종, 국보48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 국보221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292호 상원사 중창권선문-.
오대산은 신라시대부터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알려진 지혜의 산이다. 오대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평창군은 지혜의 땅이다. 평창을 선택한 사람은 명예와 부를 멀리하고 심산유곡에서 자연을 벗 삼아 평범한 나날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으로 도가적인 취향을 가진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입신양명을 선택하는 유가적인 인간, 자연과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즐기는 도가적인 사람, 인생이고 나발이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려는 불가적인 성향이 그것이다.
이 성향들이 뚜렷이 구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간적인 차이를 두며 나타나기도 하고, 이 세 가지가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예로부터 <명산名山에 명당明堂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백두대간에 기댄 고장에서 큰 인물이 드물었다. 큰 인물이란 세상에 나아가서 정치를 일삼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것은 도가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은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효석문학관 봉평 출신의 소설가. 봉평蓬坪은 쑥이 자라는 들판이라는 뜻이지만, 예로부터 동음동의라는 말이 있듯이 봉평은 봉우리가 평평하여 부드러운 동네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이효석이가 일제의 압박에도 변절하지 않은 것은 도가적인 오대산의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도 모른다.
=================================================================================================
평창이씨의 행운과 불행
평창이씨는 경주이씨나 전주이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다. 토착민 성씨란 삼한이전부터 이 땅에 정착해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성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성을 가지지 않았다가 고려 중기에 성씨를 가진 가문을 말한다.
고려의 왕실조차도 왕건의 아버지가 용건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작제건이다. 즉, 성이 없었다. 왕건이가 왕이 되면서 개성왕씨를 만든 장본인이 된 것이다. 작제건 이전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기록될만한 에너지를 가지지 못한 가문이었다는 반증이다. 성이 만들어지고부터 가문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대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광종(재위:949-975)이 960년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1055년 문종(재위:1046-1083)이 성이 없는 자에게 과거를 볼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평창이씨는 명종(재위:1170-1197) 때에 태사(정1품)를 지낸 이광李匡을 시조로 한다. 평창이씨는 이광에서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광이 명종으로부터 백오군白烏君으로 봉군封君된다. 봉군이란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군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백오는 평창의 신라시대 때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봉군의 명칭은 자기 고향이 된다. 그러므로 이광은 평창출신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광의 5세손 이숙李肅의 딸이 목조비穆祖妃이다. 목조란 이성계의 고조高祖 이안사이며, 그의 부인이 평창이씨 효공왕후孝恭王后이다.
이에 이숙은 노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노산魯山은 평창의 다른 이름이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어머니 정씨(鄭氏)의 무덤이 군(郡) 서산(西山) 서쪽 4리쯤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평창읍의 노산魯山 노산은 평창읍의 우측 뒷동산으로 평창천을 밀어내어 평창읍의 공간을 널직하게 만든 산이다. 목조의 국구, 노산부원군 이숙李肅의 군호가 된 지역명칭이기도 하다. 명칭이외에는 평창이씨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시조가 살았던 유허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국구사우國舅祠宇가 있었다 하나 일제시대에 헐려서 유적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숙과 그의 처 정씨의 묘가 평창군에 있어서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호장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서각대만 남아 전해질뿐이니, 정조는 군청 옆에 따로 한 채의 원우(院宇)를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본군 호장으로 하여금 제례를 행하게 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평창이씨는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가진다. 평창이씨 시조 이광李匡의 7세손 이천기는 위화도회군에 반대한 이원계 휘하의 장군이었다. 이원계는 이성계의 이복형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직전에 이원계를 따르는 장군들의 목은 모조리 베었다. 그 후 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천기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이천기가 귀국할 때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한 뒤라서, 자식들과 함께 장단에 숨어들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창군으로 봉해진다. 고려의 권문세도가로,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키면서도 조선의 대접을 받은 가문이 평창이씨이다. 그 당시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고려의 충신들은 자살을 택하거나 죽임을 당한 것이 비하면 엄청난 배려였다.
그 배려는 100년전의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로 임명되어온 지방관과의 갈등과 불화로 충돌이 일어나자 일가와 무리를 이끌고 피신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외가(삼척이씨)와 처가(평창이씨)가 있는 강원도로 이주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듯이 이주를 하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양식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평창이씨 12대 이계의의 무덤_평창읍 주진리 평창에 있는 평창이씨의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시조의 무덤은 강원도 이천면에 있다. 이래서 무덤은 건물과 달리 타임캡슐이라 한다. 이계남과 3남 이창이 중종반정 공신이 되고, 평창이씨가문에 중흥기가 찾아온다. 이계남은 평창이씨의 이광의 11세손으로 평원군이 되고, 이계남의 사촌동생 이계의는 이조판서에 이른다. 이계의의 21세 종손 이욱환(평창문화원장)씨가 평창을 지키고 있다.
평창이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천기의 현손 이계남이 중종반정 공신이 된 후 이다. 그는 이조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이창)도 공조판서가 된다.
그의 손자 이희문의 가계에서 13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지만, 조선 말기에 이희문의 후손인 이승훈이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세례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조선천주교회를 세우고 활약하다가 조정의 천주교 탄압으로 평창이씨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져오게 하였다. 도가적인 성향의 땅에 불교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고, 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진 아이러니가 있는 곳이 평창이다.
평창군에는 평창, 봉평, 용평, 방림, 진부, 대화 등 평・방・부・화자가 들어간 지명은 평평하거나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고지대의 특색을 살린다면 동계올림픽 이후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의 선자령에 포진한 풍력발전기
지리와 생리를 확보한 평창군의 변모
명종 16년 2월. 평창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의 상소를 보면, 민호가 40호에 불과하니 고을을 없애자고 청원하고 있다.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은 지리地利가 우선이고 생리生理가 좋아야 한다고 택리지는 적고 있다. 평창은 첩첩산중이라 지리적 이점도 없고, 논밭이 적어서 농작물 생산도 풍족하지 못하니 생리도 부족한 지역이다. 군계일학이라고 사람이 많아야 그 중에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는데, 평창은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한 만큼, 다산多産도 기대할 수 없고 물도 부족하고 들이 좁아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기에는 어렵다.
지리적 접근성이 용이하지 못하거나 작물의 소출이 적은 지역에 살면 그 지역의 지기의 영향으로 가구수가 줄고, 가계의 인구수도 적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진다. 백두대간이 가까울수록 가지가 급한 경사를 이루는 곳이 많아서 성격이 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산중에는 고향을 떠난다는 이향사도 자주 발견되므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평창은 산이 부드럽고 능선이 잘 발달되어 있어 깊은 산중임에도 산의 기운이 순하다. 다만 불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 하겠다. 평창사람은 성장하면서 타지로 나가서 물의 기운을 보충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
동계올림픽경기장-스키점프대 평창이 세계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상징물이다.
평창군의 2018년 동계올림픽. 5천년간 조용했던 평창군이 대한민국을 흥분하게하고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평창의 기운이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산 높고 물 좋은 곳이 살기 좋은 고을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도로의 발달로 평창군이 지리地利적인 면모를 갖추었고 21세기산업의 총아인 레저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2018년을 기하여 평창의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성기면서 우리에게 색다른 미래를 열어줄 인재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명리학(사주학) > 풍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북바위가 건져낸 땅 - 대구 앞산과 고령박씨의 대통령 (0) | 2014.08.02 |
---|---|
화장과 매장 (0) | 2014.08.02 |
임금도 막을 수 없다 조선의 묘지 소송 (0) | 2013.08.03 |
[돈 버는 풍수] 땅도 풍수로 '팔자' 고친다 (0) | 2013.07.28 |
[돈 버는 풍수] 풍수와 도굴 (0) | 2013.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