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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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인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 김씨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으로 경원 이씨(慶源李氏) 또는 인주 이씨(仁州李氏)로도 불렸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허황후(許皇后)의 23세손인 아찬(阿飡ㆍ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허기(許奇)가 신라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현종(玄宗)이 756년 촉(蜀)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허기(許奇)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종(扈從)하였으며, 757년 난이 평정되어 현종이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詩書)와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다. 758年 허기(許奇)가 신라로 환국하자 신라 경덕왕은 그 공을 기려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하였으며, 이로서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으므로 인천 이씨 문중에서는 이허기(李許奇)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허기(許奇)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ㆍ양천 허씨의 시조)과 허사문(許士文ㆍ태인 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 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다.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ㆍ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ㆍ이허겸)을 낳았는데, 형인 허즙(許楫)은 태인 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許棹)는 이허겸(李許謙)으로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에 자리한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묘.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가서 세 딸을 낳았고, 이 세 딸이 모두 현종(顯宗)의 비(妃)가 되었다. 김은부(金殷傅)가 외척이 되면서 이허겸(李許謙) 또한 그의 인척인 관계로 왕실과의 인척이 되었고, 현종 15년(1024년) 왕의 처외조부인 이허겸(李許謙)은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尙書右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九百五十戶)’에 증직되었다
▲ 이허겸(李許謙)의 묘 앞에 세운 묘려(墓閭)인 원인재(源仁齋ㆍ인천문화재자료 제5호). 묘려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 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 이씨가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李許謙)의 손자인 자연(子淵)이다. 자연(子淵ㆍ1003∼1061)은 자는 약충(若沖)으로 상서좌복야(尙書右僕射) 한(翰)의 아들이다. 현종 15년(1024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종 즉위년(1031년) 우보궐(右補闕)ㆍ이부낭중(吏部郞中)ㆍ어사잡단(御史雜端)ㆍ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정종(靖宗) 때 급사중(給事中)ㆍ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거쳐 문종 1년(1047년) 이부상서(吏部尙書)ㆍ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052년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 인예태후(仁睿太后)ㆍ인경현비(仁敬賢妃)ㆍ인절현비(仁節賢妃)가 되었으며, 특히 인예태후가 순종(純宗)ㆍ선종(宣宗)ㆍ숙종(肅宗)을 낳음으로써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인천 이씨가 고려의 최고 문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를 거쳐 그 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해졌으며, 개부의동삼사수태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겸 중서령감수국사상주국경원군개국공(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에 이르렀다.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장화(章和).
자연(子淵)의 장남 호(顥)의 딸이 12대 순종(純宗)의 비(妃)가 되었고, 2남 정(?ㆍ1024~1077)의 딸이 13대 선종(宣宗)의 비(元禧宮妃)가 되었다. 그리고 호(顥)의 아들인 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척연(戚緣)을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자겸(資謙)이 인종(仁宗)의 장인으로 권세를 전횡한 끝에 난을 일으켰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함으로써 이들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자겸(資謙ㆍ?~1126)은 음서(蔭敍)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나 누이동생인 순종비의 부정사건과 관련하여 면직되었다. 예종 3년(1108년) 둘째 딸이 예종(睿宗)의 비가 되자 개부의 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고, 곧 이어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연소한 외손자인 인종(仁宗)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守太師中書令邵城侯)에 책봉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같은 해 왕의 숙부인 대방공(帶方公) 보(?)와 한안인(韓安仁)ㆍ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하였다 하여 50여 명을 처형 또는 유배하였다. 그리고 인종(仁宗)을 강요하여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만들어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며,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인종 4년(1126년)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으며, 이에 상장군 최탁(崔卓)ㆍ오탁(吳卓)ㆍ대장군 권수(權秀) 등이 거사하여 그를 잡으려 하자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때부터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다가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拓俊京)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의 거사로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었다.
▲ (左上)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탄연(坦然)의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비편(碑片). (右)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탁본. (左下)개인 소장의 탁첩.
자현(資玄ㆍ1061~1125)은 자연(子淵)의 손자이며 재상(宰相) 의(?)의 아들로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다. 선종 6년(1089년) 문과에 급제,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이어 전국의 명산을 유람중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아버지 의(?)가 세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이곳에서 당(堂)과 암자를 지어 선학(禪學)에 몰두하였다. 예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고, 예종 12년(1117년) 예종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을 때 왕과 만나 우대를 받고 왕후와 공주로부터 의복을 받았으며, 인종에게서도 총애를 받았다.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로 평생 보냈으며, 청평산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4자의 대해서(大楷書)를 썼다. 시호는 진락(眞樂).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자리한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부도탑.
공수(公壽ㆍ?~1137)는 자는 원로(元老), 초명은 수(壽), 자연(子淵)의 동생인 우복야(右僕射) 자상(子祥)의 손자로 아버지는 평장사를 지낸 예(預)이다. 어려서부터 외조부 최유선(崔惟善)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음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선종 3년(1086년) 다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궁전고판관(弓箭庫判官)ㆍ직한림원(直翰林院) 등을 역임하다 예종이 태자가 되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 뽑혔다.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이 되었을 때 예종이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백성에게 고통을 끼치지 않으면서 왕에 대한 접대를 원만하게 수행하여 임금이 칭찬하였다. 이에 임금이 가마의 수행을 명하였으나, 관례를 들어 사양하였다. 뒤에 예부원외랑ㆍ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어 14년간 선군(選軍)의 임무를 맡았는데, 공평무사하여 군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인종 2년(1124년) 검교사도 사수공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당시 이공수의 6촌 형제인 이자겸(李資謙)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는데, 인종 4년(1126년) 2월 인종이 내시 김안(金安) 등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려 하였으나, 그가 적극 제지하였다. 5월에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인종 6년(1128년) 3월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듬해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어 판이부사 감수국사(判吏府事監修國史)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묘청(妙淸)을 총애하자 이를 비판하였고, 4번이나 치사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가 1131년 검교태사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師守太傅門下侍中判吏部事)가 되고 동덕공신(同德功臣)의 칭호를 더 받고 치사하였다. 시호 문충(文忠).
공수(公壽)의 아들 지저(之低ㆍ1092∼1145)는 자는 자고(子固)로 예종 15년(112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초에 우정언(右正言)으로 공정한 지론이 재상의 비위에 거슬려 서해도 안찰사로 나갔다. 당시 자겸(資謙)이 국정을 전횡하며 지방관청의 뇌물을 받아들이는 등 악폐가 심하므로 이를 금지시키려다 자겸의 미움을 받아 지평주군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인종 4년(1126년) 자겸이 제거되자 기거주(起居注)가 되고 도참설로써 인종을 현혹하는 묘청(妙淸)ㆍ백수한(白壽翰) 등을 배척하고, 그들의 서경천도를 적극 반대했다. 1135년 묘청의 난 때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조정안에 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음을 인종에게 건의하여 문공인(文公仁)ㆍ임경청(林景淸) 등을 파면시켰다. 이듬해 좌승선(左承宣)을 지냈고 1138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l使)를 거쳐 어사대부ㆍ동지추밀원사로 승진, 그 뒤 예부상서ㆍ정당문학ㆍ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등을 지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파조인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파조(派祖) 인로(仁老ㆍ1152~1220)는 자는 미수(眉?), 호는 쌍명재(雙明齋), 초명은 득옥(得玉)으로 고아가 되어 숙부인 화엄승통 요일(寥一)의 밑에서 유교전적ㆍ제자백가서 등을 배우며 자랐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관을 배척하자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 뒤에 환속하여 명종 10년(1180년) 진사과에 장원급제, 계양관기(桂陽管記)에 보직되었다.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14년간 한림원(翰林院)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조칙(詔勅)을 지으면서도 시작(詩作)을 계속하였으며, 예부원외랑ㆍ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지냈다.
당대의 학자 오세재(吳世才)ㆍ임춘(林椿)ㆍ조통(趙通)ㆍ황보항(皇甫抗)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와 망년우(忘年友)를 맺고 시와 술을 즐겨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에 대해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는 고려의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나 한유(韓愈)의 고문을 따랐으며 시는 소식(蘇軾)을 사숙했고 초서ㆍ예서에 능했다. 저서로 ‘파한집(破閑集)’만 전한다.
▲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에 자리한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의 재사인 쌍명재(雙明齋)와 추모비 및 단소.
인천 이씨는 고려조에서의 성세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인 문화(文和)가 유명하다.
▲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광복후 서울시에 편입됨에 따라 도시개발에 밀려 1971년 충남 천안시 구성동으로 이장한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의 묘와 오천재(烏川齋).
공도공파(恭度公派) 파조(派祖) 문화(文和ㆍ1358~1414)는 자는 백중(伯仲), 호는 오천(烏川)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 심(深)의 아들이다. 율정(栗亭) 윤택(尹澤)에게 수학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 왕래하면서 권근(權近)ㆍ이숭인(李崇仁)ㆍ김자술(金自粹) 등과 교유하여 문장과 경학(經學)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우왕 6년(138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우정언ㆍ응교 등을 거쳐 경상도 안렴사를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등용되었으며, 1397년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 겸 상서윤(都承旨兼尙瑞尹)을 지냈다. 정종 1년(1399년)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해에는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를 제향하는 전남 장흥군 부산면 유양리 금계사(金溪祠).
태종 2년(1402년) 경상도 관찰출척사ㆍ참찬의정부사ㆍ대사헌을 지내고,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 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였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閔無疾)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1411년 복직되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413년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귀국하여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태종 14년(1414년) 향년 57세로 서거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간 조회(朝會)마저 중지하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였다. 장흥(長興) 금계사(金溪祠)와 대구(大邱) 서계서원(西溪書院), 함안(咸安)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
▲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자리한 대제학 이효례(李孝禮)의 묘와 재사인 임수재.
문화(文和)는 슬하에 6남3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으며,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인천 이문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장남 효인(孝仁)은 한성부윤ㆍ호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대구에 터를 잡아 대구 종중을 이루게 되었고, 차남 효의(孝義)는 공조판서ㆍ삼군 진무사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경남 함안에 터를 잡아 함안 종중을 이뤘으며, 삼남 효례(孝禮)는 예조판서ㆍ대제학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충남 청양에 터를 잡고 청양 종중을 이루었고, 사남 효지(孝智)는 동지영부사ㆍ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전남 장흥에 장흥 종중을 이뤘으며, 오남 효신(孝信)은 판돈영부사와 호조ㆍ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경북 김천에 터를 잡아 금산 종중을 이뤘으며, 육남 효상(孝常)은 지돈령부사와 자헌지동영부사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경주에 터를 잡아 경주 종중을 이루게 되었으며, 장녀는 윤번에 출가하여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이며 세조(世祖) 왕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를 탄생시킨 흥영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이다.
▲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이휴복(李休復)에게 내린 공신교서인 단서죽백(丹書竹帛ㆍ경남유형문화재 제56호).
휴복(休復ㆍ1568~1624)은 자는 사장(士長). 호는 양졸정(養拙亭)으로 좌참찬 문화(文和)의 8세손이며, 판서 인(寅)의 아들이다. 박제인(朴齊仁)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고, 선조 39년(1606년)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ㆍ순천군수를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관군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안현(鞍峴)에서 반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인원군(仁原君)에 봉해졌다. 이해에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죽자 인조의 명으로 백이산(伯夷山)에 반장(返葬)되고, 단서죽백(丹書竹帛)과 제문(祭文)을 하사받았다.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咸安) 도천사(道川祠)와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양졸정(養拙亭) 이휴복(李休復)을 제향하는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도천사(道川祠)와 묘 입구에 자리한 난간이 옥돌로 된 신도비.
시중공파(侍中公派) 파조(派祖)는 8세 작신(作臣)으로 아버지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유실(惟實)이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딸이 공민왕(恭愍王)의 왕비(王妃)가 되었다. 이 당시 공민왕(恭愍王)이 요승(妖僧) 편조(遍照)에게 고혹되어 스승으로 섬기거늘, 그가 원로대신으로서 그 간사함을 통렬히 진달하고 바른말로서 간했으며, 왕비(王妃)도 또한 수시로 간하여 마침내 왕의 뜻을 거스리니 그와 왕비(王妃)가 함께 폄출(貶黜)되어 기양(岐陽ㆍ지금의 삼가현)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의 큰 아들 점(漸)도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로 근무하다가 해임당하였다. 조정에서 연덕궁(延德宮) 100간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배소(配所)에서 세상을 떠나고 이 일로 인하여 후손들이 계속 삼가현(三嘉縣)의 남쪽 토동(兎洞)에서 세거했다.
▲ 1957년 세워진 경남 합천군 삼가면 금리 이작신(李作臣)의 신도비.
작신(作臣)의 손자 온(?ㆍ?~1379)은 자는 직경(直卿), 호는 영모재(永慕齋),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점(漸)이 아버지다. 중현대부(中顯大夫)ㆍ전의감정(典醫監正)을 지냈으며, 정몽주(鄭夢周)ㆍ이존오(李存吾)ㆍ이집(李集) 등과 도학(道學)을 강론하였고 유학의 연원을 정립하였다.
▲ 이작신(李作臣)의 손자 이온(李?) 부부의 효행을 기려 세운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효자 쌍비각(경남유형문화재 제291호).
충강공파(忠剛公派) 파조(派祖) 징옥(澄玉ㆍ?∼1453)은 호는 원봉(圓峯)으로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전생(全生)이며, 징석(澄石)의 아우로 어려서부터 순직하고 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다고 하자 형 징석(澄石)과 같이 사냥을 나갔는데, 징석은 그날로 멧돼지를 활로 쏘아 죽여서 잡아왔지만 징옥은 이틀이나 힘들게 몰이를 해서 기진맥진한 멧돼지를 산채로 끌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태종 16년(1416년) 친시무과(親試武科)에 장원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에 임명되었고, 세종 5년(1423년)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 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구(侵寇)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공을 크게 세우자, 세종이 9년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 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판경흥도호부사(判慶興都護府事)로 전직하면서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만에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해 우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한다. 1435년을 고비로 4진이 안정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져 1438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났다.
그 뒤 100일만에 기복되어 다시 경상도ㆍ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1449년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ㆍ회유ㆍ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문종 즉위년(1450년) 야선(也先)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 10년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그러다가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집권하면서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되자, 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서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鄭鐘)ㆍ이행검(李行儉) 등의 습격을 받아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으며, 정조 15년(1791년) 신원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上)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의 3형제가 태어난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삼장수(三將帥) 생가터와 이징옥을 제향하는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상신사(上薪祠) 및 단소.
양산 이씨(梁山李氏)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에서 분적되었다. 양산 이씨(梁山李氏)의 시조 이만영(李萬英)의 아들 전생(全生ㆍ?~1450)은 징석(澄石)ㆍ징옥(澄玉)ㆍ징규(澄圭) 3형제 장수를 둔 탓으로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증봉군(增封君)하였으며, 이때부터 양산 이씨의 관향(貫鄕)이 생겼다. 이후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차남인 징옥(澄玉)의 후손들은 근대에 양산 이씨(梁山李氏)에서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환관(還貫)하여 충강공파(忠剛公派)를 이루고 있다.
근대 시인인 장희(章熙ㆍ1900∼1929)는 본명은 양희(樑熙), 아호는 고월(古月)로 1920년에 장희(樟熙)로 개명하였으나 필명으로 장희(章熙)를 사용한 것이 본명처럼 되었다. 일본 교토중학[京都中學]을 졸업하였고, 1924년 시 ‘봄은 고양이로다’,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마리’ 등을 ‘금성(金星)’ 5월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특히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의 시적 특징인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가 잘 표출된 시로 당시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어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하일소경(夏日小景)’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자택에서 음독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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