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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연원 

재령 이씨(載寧李氏) 시조 이우칭(李禹?)은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ㆍ경주 이씨의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때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황해도 재령(載寧)을 녹읍(綠邑)으로 받고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재령(載寧)으로 하고 그 세계(世系)을 이어오고 있다.

 

▲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경남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명성마을 경덕사(慶德祠)와 시조의 묘산도.


 

우칭(禹?)은 사간공(司諫公) 주복(周復)의 둘째 아들로 일설에는 우(?)라고도 하는데, 문하시랑(門下侍郞) 칭(?)의 아우라 한다. 경술보(庚戌譜ㆍ1850년)의 범례에 “일리가 있다고는 하나 명백한 근거가 없고, 경외의 모든 족보에는 우칭(禹?)으로 행용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른다”고 밝히고 있다.


재령(載寧)은 일명 안릉(安陵) 또는 한홀(漢忽)ㆍ안반(安盤)ㆍ식성(息城)으로 부른다. 특히 안릉(安陵)은 재령과 함께 오늘날까지 많이 병용하고 있으며, 시조로부터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부마(駙馬)로 알려진 상장군(上將軍) 소봉(小鳳)까지의 약 400년의 상계는 확실치 않다.

‘식성군가보(息城君家譜)’에 기록되기를, 우칭(禹?)의 후손 상장군(上將軍) 소봉(小鳳)의 형에 안릉군(安陵君)에 봉해진 대봉(大鳳)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후사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원래 두 아들은 종강(宗綱)과 사강(嗣綱)이고, 종강(宗綱)은 영산으로 봉군되었고 아들이 일명(日明)이며, 사강(嗣綱)은 정승 유경(柳璥)의 사위가 된다고 한다.(병신보 범례)


 

▲ 1850년 발간된 경술보(庚戌譜).

 

그러나 현재 재령 이씨 족보 대부분은 상장군 소봉(小鳳)만 기록하고 있다. 소봉(小鳳)은 공민왕(恭愍王)의 따님을 맞아 일상(日祥)과 일선(日善)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이들의 후손이 현재 재령 이씨의 전부가 된다. 중시조에 해당되는 상장군 소봉(小鳳)은 시조 우칭(禹?)의 15세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증이 안되고 있지만,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세계도(世系圖)와 비교하면 계대(繼代)가 거의 일치한다.


공민왕의 외손(外孫)으로 출생한 일선(日善)은 고려 말에 사재령(司宰令)을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가족과 더불어 향리로 돌아가 은거하였고, 슬하에 아들 6형제가 모두 고려에 마지막 충성을 다했던 절신들이었다. 일선(日善)의 맏아들 신(申)은 고려 말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시사(司憲府時事))를 거쳐 공양왕 때 지평(持平)에 올라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ㆍ조준(趙浚) 등의 전횡을 탄핵했으며, 이성계의 추대를 극론하다가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숨졌다.

 

▲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만든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고려동(高麗洞ㆍ경남기념물 제56호).


 

일선(日善)의 둘째 아들인 술(戌)은 사정(司正)을 역임했고, 셋째 축(丑)은 고려의 국운이 쇠망하자 신조(新朝)의 벼슬을 마다 하고 아우 모은(茅隱) 오(午)와 함께 절의를 지켰다. 오(午)는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개탄하여 개성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해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로 내려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특히 모곡리에 은거하면서 집 주변에 담장을 쌓고 담 밖은 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안은 고려왕조의 유민이 거주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고려동(高麗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종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내가 죽은 후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신주(神主)도 이곳 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된다”고 유명을 남겼다. 또한 담 안에 주거를 만들고 우물을 파 전답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후손들의 터를 만들었다. 선생의 유언을 받든 종손들은 19대 600년에 이르는 동안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왔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表碑), 고려동(考慮洞)담장, 고려종택(高麗宗宅), 자미단(紫微壇), 고려전(高麗田) 30,000여 평,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보정(鰒井) 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들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이후 재건된 것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있는 청백리(靑白吏) 이맹현(李孟賢)의 묘.

맹현(孟賢ㆍ1456~1487)은 자는 사성(師聲), 호는 근재(覲齋)로 오(午)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개지(介智)이다. 세조 2년(1456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60년에는 춘당시(春塘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를 거쳐, 1464년에는 수찬낭관(修撰郎官)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성종 6년(1475년) 경회루를 중수하자는 논의가 있자, 백성들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공사(公私)의 영선(營繕)은 일절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어 여러 읍의 전적(田籍)을 살펴보고 전안(田案)에 모람(冒濫)과 결수(結數)의 착오가 많음을 지적하여 그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후 이조와 병조 및 예조의 참의(參議)를 지내고 1483년에 나주목사로 나가 원성이 자자했던 민심을 수습했으며, 고령(70세)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다.


 

 

▲ (上)1691년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에게 내려진 사령교지. (下)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자리한 문경공(文敬公)의 묘 및 태실인 자운정(紫雲亭).

숙종(肅宗) 때 ‘백의판서(白衣判書)’로 정치와 학문에 위업을 남긴 현일(玄逸ㆍ1627∼1704)은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으로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인조 24년(1646년)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숙종 5년(1679년) 허목(許穆)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1689년 대사헌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伸救)하다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유배된 뒤 다시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서 종성(鍾城)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04년(78세) 풀려 나왔으나 유배의 여독으로 곧 죽었으며, 1710년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복관과 환수를 거쳐 1909년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그는 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고, 이이(李珥)의 이무위설(理無爲說)을 논박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재(栽)에게 전해졌고 다시 이상정(李象靖)ㆍ이광정(李光靖)에게 이어졌다. 시호는 문경(文敬).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1676년 초가 2칸으로 지은 남악초당(南嶽草堂). 1822년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개축했다.

 

▲ 1910년 후손들이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로 이건된 갈암종택(葛庵宗宅ㆍ경북기념물 제84호)

 

현일(玄逸)의 형 휘일(徽逸ㆍ1619∼1672)도 예문(禮文)에 밝고 학문이 깊었으며,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로 승의랑(承議郎) 시성(時成)에게 입양되었다. 외할아버지 장흥효(張興孝)에게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설을 배우고 일찍이 성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나, 병자호란을 겪은 뒤 성리학을 중단하고 병서를 읽어 산천의 지형과 주변국가의 정황을 조사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효종이 죽은 뒤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성리설과 경학(經學) 외에도 천문ㆍ지리ㆍ역법(曆法)ㆍ역학(易學)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예(禮)를 존중하여 상제의례(喪祭儀禮)의 제도와 절목(節目)을 상세히 연구하여 습속(習俗)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뒤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영해(寧海)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존재(存齋) 이휘일(徽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757년 유림들이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경북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로 이건된 백호서당(栢湖書堂).

 

 

 

▲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에게 내려진 선무공신교서(1604년)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임명 교지(1596년)는 보물 제1212호로 지정되었다.

운룡(雲龍ㆍ1562∼1610)은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로 남해현령(南海縣令) 몽상(夢祥)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년) 무과에 급제, 1587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 22년(1589년) 1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도망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하여, 내원(來援)한 수군과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 50여 척을 격침시켜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 선조 29년(1596년) 이순신이 천거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의 영정과 그의 수적(手蹟)인 계본등록(啓本騰綠).

 

선조 37년(1604년)에 선무3등공신(宣撫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선조 38년(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ㆍ포도대장 겸 화기제조(捕盜大將兼火器提調)ㆍ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다. 선조 40년(1607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서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청도(淸道)의 금호서원(琴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의 위패를 봉안한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기강서원(岐江書院)과 그 뒤쪽에 자리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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