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산김씨 족보

경주김씨 계림군파 정통계보약사 - 안산김씨 관련

by 연송 김환수 2013. 7. 13.

경주김씨 계림군파 정통계보약사

(慶州金氏 鷄林君派 正統系譜略史)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慶州金氏 鷄林君派 大宗會)

http://www.gyeongkim.co.kr/

 

PDF 파일 책자형태로 등재되어 있어 읽기 좋도록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등재였으나 다른 자료를 보고 싶다면 아래 목록을 참고하시어 경주김씨 계림군파 홈페이지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경주김씨 족보(1772년) 계림군파 창시 임진보에는 안산김씨(安山金氏)가 경순왕 이후 12세 계림군 예하에서 시적(始籍) 했다는 이전 족보 기록들에 대한 족보서문도 파악해 보고 월성가승(月城家乘), 공신회맹자손록(功臣會盟子孫錄)과 순웅장군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자료를 옮겨 왔습니다.

 

*** 월성(月城)은 경주의 고호(옛지명) 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경순왕 이후 계대는 경순왕부터  평장사(인위) 까지  3대이고,  평장사 인위부터 계림군(균)까지는 12대 입니다.

 

경순왕 부터 평장사(인위) 까지 5세대가 있었다고 경주김씨 집안에 전해오는 것은 여러 변수(연령)를 적용해 보아도 은열공 후손 계대로는 최대 2세대를 초과할 수 없다.

 

따라서 경순왕 부터 평장사(인위) 까지 3세대가 되기 위해  최소 연령을 감안하면  경순왕의 넷째아들 은열의 후손이 아닌 첫째 마의태자의 아들이 되어야 가능한 부분이다.

 

이 부분도 최근에 김지우 묘지명의 계대를 근거로 상계를 새롭게 편성한다면  경순왕 후손이 아닌 원성왕의 후손이 되면서 천년전 부터 전해 내려온 경주김씨 인위계 후손의 가승과 가첩  이후 족보기록 등이 모두 잘못된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이 기록이 맞다면 약 천년을 내려온 기록이지만 조속한 시일내에 수정을 해야 한다. 현재 김지우 묘지명은 일부 사학자들의 부분적인 검증을 거쳤고 인위 후손 하계는 계대편성에 문제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김인위 상계는 여러모로 좀 더 검토해 보고 검증해 보아야 할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위 계대는 여러대수가 누락되어 있는데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직접 표기를 해서 계대누락이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록이 부실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계대누락이 있으면 원성대왕 후손으로 누가 누구를 낳고 이렇게 기록 해야하는데 대왕이 예를 낳고, 예는 인윤을 낳고, 윤은 신웅을 낳았다고 되어 있고 후대의 벼슬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중간 계대정도에 누구 후손으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기록하는 것이 예전 기록물의 특징이다.

 

이 기록은 할아버지가 5대손이나 9대손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이나 다름없고, 아니면 중간 중간 계대에서 실전된 부분을 기록하지 못하고 계대를 직접 승계했다고 기록하여 최소 5대에서 9대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김인위 상계에 대한 신뢰도가 적은 것이다. 

 

금석문 기록은 적혀진 문구대로 해석을 해서 진위여부나 계대 누락 등을 논해야 하는데 의역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기본이다.

 

묘지명에 김지우는 원성대왕의 후손(元聖大王之後) 이며,  대왕이 "예"를 낳았다고 되어 있으면 "예"를 낳았다고 해석해야 한다.

 "예"를 대왕의 후손이라고 의역해서는 안된다.

(大王生大匡金 禮, 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 允)

"예"가 원성대왕의 후손이었으면 당연히 후손이라는 후(後)를 썼을 것이다.

 

김지우는 원성대왕의 후손(元聖大王之)이라고 묘지명에도 기록되어 있고 원성왕은 "예"를 낳았다고(生)기록되어 있다.

 

았다(生)를 후손(後)으로 해석한다면 이후 계대도 후손이라고 해석함이 옳다.

동일한 글자(生)를 앞문장 해석은 후손이고 뒷문장 해석은  낳았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상식을 벗어난다.

 

 

김지우 묘지명에서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들(生)로 되어 있는 김예(金禮)의 관직 대광(大匡)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데 대광 관직에 대해 현재 전해지는 것은 궁예(弓裔, 901918)가 세운 태봉의 관계(官階, 官號)이기 때문이다.

 

후대에 잘못(誤記)된 관직을 세겨서 제작된 묘지명이거나 아니면 김예는 원성대왕의 아들(生)이 아닌 후손(後)으로 고려초기의 벼슬인 대광이란 정식 관직을 썼을 수도 있겠지만, 후손이란 후()를 쓰지 않고, 낳았다고() 세긴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지우는 원성대왕의 후손(元聖大王之)이라고 묘지명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원성왕은 ""를 낳았다고()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예의 아들(生)은 고려초기 삼한공신 삼중대광 인윤이라고 세겨져 있다.

 

원성왕의 아들 예영(禮英)은 각간(角干,孝眞효진)을 지내고 이찬(伊飡, 법흥왕때 上大等으로 명칭 변경)에 추봉(追封)되신 분으로 고려초기의 대광(大匡, 1품) 관직과 비슷한 벼슬(총리급)이다.

 

김예(金禮)의 관직명을 후대 관직명으로 기록했다고 본다면 김예는 원성왕의 아들인 예영(禮英)이고 이후 계대는 실전되었다가 고려초기에 삼한공신 인윤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니라면 김예는 인윤의 부친(父親)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해석에 논란이 되는 김지우 묘지명은 계대누락이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부실한 기록이거나 계대를 오기(誤記)하여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있다.

 

大王生大匡金禮 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允 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생략--

대왕은 대광 김예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인윤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 신웅을 낳고,--생략--

 

대광(大匡) 이란 벼슬은 태봉(泰封)과 고려 초기의 관계(官階).

태광(太匡)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태조가 고려를 세운 직후 태봉(泰封, 신라 말기 궁예(弓裔)가 세운 나라 901918)의 관계(官階)를 이어받아 919(태조 2)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문관·무관에게 수여된 관계 중 실질적으로 최고위에 해당되었다.

 

936(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뒤 관계를 재정비할 때 16관계 중 제3위에 해당되었으며 품계는 종1품이었다

 

나중에는 고려의 향직(鄕職)이 되었다. 995(성종 14) 고려 초의 관계가 중국식의 문산계로 대치되자 종래의 관계는 향직으로 변하였다. 이 때 16위계 중 제3위에 해당되었다.

 

 


경주김씨에서 정립한 원성왕이후 김원정까지 계대는 무려 14대 이고, 예전 수명을 생각한다면 264년동안 최소 10대수는 되어야 하겠다.

 

원성왕 졸년이 798년이며 이후 김원황 졸년이 1062년이면 원성왕에서 김원황까지 264년동안 5대만 내려 왔다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원황(졸년1062)이후 경용, 인규, 김지우(졸년1141)까지 80년동안 3대가 내려왔다.

  

김지우 묘지명의 인위부터 상계 계대를 100%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신뢰한다면 김인위가 경순왕 후손으로 되어 있는 경주김씨 태자파나 계림군파 등 모든 계파의 상계 계보는 묘지명에 언급된 계보로 수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대적으로 앞선 김지우 묘지명 기록은 경순왕 후손이라는 내용이 없고 후대의 수많은 기록물은 경순왕 후손으로 되어 있어 앞으로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

 

김인위 상계 계대에 대한 당시(천년전)의 기록물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김지우 묘지명과 연관있는 다른 묘지명이나 금석문이 추가로 많이 발견되고 정사 기록과 일치되는 검증을 거쳐 확실한 계대가 정립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김지우 : 1108(예종 3)1151(의종 5)

묘지명 연대 : 1152(의종6, () 제량(帝亮) 천덕(天德) 4)

-------------------

閤門祗侯 金君 墓誌銘

합문지후 김군 묘지명

 

君諱之祐 字福基 其先新羅國元聖大王之後

군의 이름은 지우이고, 자는 복기로, 선조는 신라국 원성대왕의 후손이다.

 

大王生大匡金 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

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

대왕은 대광 김예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인윤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 신웅을 낳고,

 

雄生司徒內史侍郎平章事因

謂生兵部尙書中樞使元晃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 인위를 낳고,    김인위 (955?)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 원황을 낳고,

 

晃生中書令樂浪公景庸庸生

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工部事仁揆 揆生之祐

황은 중서령 낙랑공 경용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 인규를 낳고, 규가 지우를 낳았다.

 

初功臣仁允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金氏之族世世衣冠顯達金姓自此始矣至今稱爲

貴姓母開州郡夫人左僕射叅知政事王嘏之女也君爲人寬

厚有節少好文學以祖蔭入仕爲良醞令同正初受寫經院判

官遷大樂署丞遷禮賓注簿至善慶府舍人天德三年戊辰二

月日超拜閤門祗侯出安西都護府判官爲郡淸直臨事善決

三年以聞辛未年七月二十六日因病卒于京城享年四十

四歲娶金氏女王大妃延壽宮主之兄也追封戶部尙書金

之女也生子二人長衛尉丞同正忠彦一男最幼女三人長適

禮賓主夫黃文富餘並幼壬申年十月十九日葬于松林縣白古

浦銘曰天難測命靡常世素貴壽不長銘於石永以藏

 

처음 공신 인윤이 대조(大祖, 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 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씨 집안이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으니, 김씨 성이 이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귀성(貴姓)으로 불리운다.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 왕하(王嘏)의 딸이다.

 

군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너그럽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조음(祖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다.

 

처음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가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오르고, 예빈주부(禮賓注簿)로 바뀌었다가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에 이르렀다.

 

천덕(天德) 3년 무진년 2월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나갔다.

 

()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3년이 되자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미년(의종 5, 1151) 7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김씨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으니, 큰아들은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지냈다.

 

()하여 이른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람의 목숨도 항상 같을 수는 없네.

대대로 본래 귀한 가문이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네.

돌에 명()을 새겼으니 영원토록 간직되리라.

 


남당유고 기록을 보면 안산김씨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系子) 볼 수 있는데 김지우 묘지명은 친부계보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인위 윗대 여러대수가 누락되어 있다.

김지우 묘지명에 신웅이 인위를 낳고, 인위가 원황을 낳고 라고 되어 있는데 남당유고 안산계에는 이궁(갑신984년, 은동)의 아들이 원황(임인 1002년)이다. 따라서, 원황의 친부는 인위일 수 있고, 은동의 양자로 갔다가, 충찬의 양자가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 일궁<인위>, 이궁<은동>은 친형제) 


22page

 

? - 억렴 [경순왕의 큰 아버지] -

                    신성[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안종대왕

? - - 태기 - 긍필 - 은부

                            [김은부는 ? -1017. 현종의 장인]

                      ② 태부 [925년생]

                      ③ 태교 [928년생]

 

㉠억렴 - 유렴 - 태기(경진 920) - 긍필(무신 946) - 은부(?-1017) -

                                충찬(?1036) - 약운(계묘 1003) (원황)[임인 1002

                                ∼1062] - 준국(계해 1023) -

                                경용(10411125) - 인규(?~1142)



시조

1

시조

계대

 

시조(始祖) 긍필 (肯弼,兢)

상서좌복야, 안산현개국후

2

1대손

은부 (殷傅) 호부상서, 상호군, 안산군개국후

3

2대손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4

3대손

系子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 남당 박창화 선생의 안산계 계보가 맞다면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

    (系子) 볼수 있겠다.

 

참고로 남당선생은 재야 사학자로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신  분으로 우리 집안과 아무 연고도 없고 고려사 현종의 내용을 필사하면서 현종의 국부(장인 김은부)인 안산계 계보를

허위로 작성할 이유는 없다.

 

남당 선생이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신뢰도는 아주 높은 것이다. 


안김 상계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여 검증된 자료를 더 찾아 보아야 하고, 다른 문중(경주김씨)에서도 자신들의 직계 조상에 대한 계보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계보연구 - 경주김씨계보연구회편에 실린 신라김씨 분관 선원도의 계보에는 무열왕계로 되어 있지만 남당유고를 보면 원성왕계 문성왕의 후손이고, 가승계보나 족보를 보면 경순왕 후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이 1933년~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남당유고의 내용을 보면,

 
안김의 상계는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유렴-태기(경진 920년)-안산김씨 시조 긍필(무신 946년)-은부(?-1017년)-약운(계묘 1003년)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문성왕의 후손이 됩니다.


경덕국사의 묘지명을 보면 김은부의 아들은 김충찬(金忠贊 998년이전∼1036), 충찬의 동생은 경덕국사(景德國師) 김난원(999~1066)입니다.

다시 남당유고 안산계를 보게 되면 약운(계묘 1003년) 계보다음에 원황(임인 1002년∼1062년)-준국(계해 1023년)으로 나와 있어 김충찬의 아들 준국이 후손이 없어 김원황을 양자(계자)로 삼아 계대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원황-경용(1041∼1125년) - 인규(?~1142년)로 계대가 이어졌습니다.

남당유고 안산계는 김억렴-유렴-김태부(을유925년)-황산(신사921년)- 황도(안종, 을묘955년) - 일궁(인위, 신사 981년)-원충(갑오 994년,(설낭)-연흥궁(정묘1027년. 연흥궁주는 1102년 몰) *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용절덕비다.

김원황 안산계는 김억렴-유렴-김태부(을유925년)-황산(신사921년)- 황도(안종, 을묘955년) -이궁(갑신984년, 은동)-원황(임인 1002년] 입니다.
* 일궁(인위)의 동생 이궁(은동)은 형제이며, 원황과 원충은 4촌간이 됩니다.

김억렴(金億廉)은 경순왕의 큰아버지(백부) 이며.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아버지로 관등은 잡간(匝干)이었고,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를 지내고 고려 태조 때에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개국공신이나 태조공신을 가리키는 삼한공신이 된 사람이다.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王建)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郁)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되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욱을 안종(安宗)으로 추봉하였다. 이후 모든 고려왕이 현종 계통이니 모두 김억렴의 혈통인 셈이다.

김유렴(金裕廉)은 김억렴의 아들이며, 917년(경명왕 1) 대아찬으로 시중에 올라 919년까지 재임하고, 931년 2월 왕건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방문하여 경순왕을 위로하고 돌아갈때 볼모가 되어 고려로 들어갔다. 김억렴과 그의 아들 김유렴은 경주인으로 삼한공신이 된 사람이다.


=========================================================================


남당유고 - 安山系 - 안산김씨의 초기 가계도

 



 

安山系

 

金台父(乙酉)(黃山(辛巳))[을유는 925년, 신사는 921년] - 黃稻(乙卯)(安宗)[을묘는 955년] - 一宮(辛巳)(因渭)[신사는 981년] - 元冲(甲午[994년])(雪娘) - 延興宮(丁卯)[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容節德妃다. 정묘년은 1027년. 연흥궁주는 1102년 沒]

 

... 元冲(甲午)(雪娘) - 崇化宮(己巳)[기사는 1029년. 숭화궁주는 1094년 沒]

 

...黃稻(을묘)(安宗) - 二宮(甲申)(殷同)[갑신은 984년] - 元晃(壬寅)[임인은 1002년]

 

...黃稻(을묘)(安宗) - 三宮(己丑)(玄龍)[기축은 989년]- 元弘(戊申)(俊金)[무신은 1008년]

                           - 三宮(己丑)(可道) - 元質(乙巳) [을사는 1005년]

 

黃歸(戊午)(林復) - 林肅(丙子)(梁皐) - 林福

 

黃歸(戊午)(林復) - 波蘭(辛巳)(殷同) - ① 若蓮(丁酉)(玄甲) ② 若松(庚子)(玄世) ③ 若雲(癸卯) (元晃)

 

若雲(癸卯) (元晃) - 俊極(癸亥)

 

可道 - 仙愛(己丑)(玄涉) - 俊今(丁未)

 

? - ㉠ 億廉 [경순왕의 큰 아버지] - 神成[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安宗大王

 

?- ㉡ 裕(?)廉 - ① 台夔(?)- 肯弼 - 殷傅 [김은부는 ? -1017년. 현종의 장인]

                      ② 台父 [925년생]

                      ③ 台交 [928년생]

 

※ 1975년 세상에 알려진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1072년?)에 의하면,

경덕국사 김난원(金爛圓. 999 - 1066.10.8)의 조부는 兢弼, 아버지는 殷, 어머니는 李氏다.

따라서 위의 기존에 알려진 肯弼은 兢弼의 잘못이다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同(辛酉)(奇璧) [신유는 961년] - ①玄涉(壬午)(柳潤)[임오는 982년]

        ②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漢忠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 俊達(丁巳) [1017년] ㉡ 俊京(庚申) [1020년] ㉢ 俊仙(癸亥)(玄濟) [1023년]

 

俊仙(癸亥)(玄濟) [1023년] - 漢忠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况(甲子)(丁緊(?))[갑자는 964년] - 玄器 (甲 申)(仙甜) [갑신은 984년]- 俊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平(丁卯)(辛召)[정묘는 967년] - 玄世(庚寅)(若 松)[990년] - 俊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黃甜(己巳)(含順)[기사는 969년] - 王錫(乙酉)(紫 羅) [을유는 985년]- 巨福(丁巳) [정사는 1017년]

 

金台交(秦裙) - ①殷錫(壬戌)(羅紬)[임술은 962년] - 玄甲(乙酉)(若蓮) [을유는 985년]

 

②殷吉(乙丑)(白祥)[을축은 965년] - 玄龍(己丑) [기축은 989년]

 

③秦甛(己巳)(可道) [기사는 969년]- 仙甜(戊子)[무자는 988년]

 

金台交(秦仙) -殷京(奇璧) - 玄禮(乙酉)(梁珍)[을유는 985년] - 元述(辛酉) [신유는 1021년]

 

玄禮(乙酉)(柳潤) - 俊德(丁卯) [정묘는 1027년]

 

■■(庚辰= 920년)(■■)(甲申 = 924년) - 金肯弼(戊申)(秦仙)[무신은 946년] - ① 殷悅(黃塞) ②殷傅(李山)

 

①殷悅(黃塞) - 玄同(丁酉)(若雲)[정유는 997년] - 俊福(庚申 = 1020년)

 

②殷傅(李山) - ⒜ 安山(李杉) - 公叶

 

元成(顯) - 德宗, 靖宗, 仁平, 景肅

 

元惠(顯) - 文宗, 平壤, 孝思

 

元平(顯) - 孝敬

 

■■(庚辰)(■■)(甲申) - 常夫人(文保能) - 因渭, 尙琴, 尙融

 

※ 위의 가계도를 기초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표를 정리하면,

金元冲(994년 출생)

容節德妃(1027년 출생)

崇化宮主(1029년 출생)

金肯弼(946년 출생)...

 

이어서 24쪽 좌측부터 33쪽까지 고려의 관제에 대한 정리글이 이어진다.


-----------------------------------------------------------------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원성왕 이후 경순왕 12대 후손인 계림군 균이후 안산김씨가 분적되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

 

이분 김균의 생몰시(?-1398)안산김씨 연성군 김정경{1345(충목왕 1)1419(세종 1)}이 생존하고 있었고 연성군의 증조부까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김성경 (金星慶) ? ?

조부 : 김원상 (金元祥) ? ~ 1339(충숙왕 복위 8)

증조부 : 김위 (金渭) ? ?

 

김균(金稛, ? ~ 139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 경주. 시호 제숙(齊肅). 문하부지사 지윤(智允)의 아들이며, 군호는 계림군(鷄林君),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360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과거를 준비하다가 조준(趙浚)을 알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조준이 국정을 맡을 때 여러 번 천거되었고, 전법판서(典法判書)까지 지냈다. 1392년 조준의 설득으로 717일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 3등공신에 책록되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가자되었다. 1398년 졸했고, 아들은 김맹성(金孟誠김중성(金仲誠김계성(金季誠) 셋을 두었다.

 

조선 개국 뒤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3등에 책록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아우 온(), 당숙 의() 또한 개국원종공신이었고, 통혼에 있어서도 태조가 각별히 우대한 노은(盧訔) ·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 등 공신의 딸을 맞이하였다. 이로 미루어 조선 전기 공신집단의 결속을 짐작할 수 있다.

-------------------------------------------------------------

김균 (金稛) : 출생-사망 1341 ~ 1398

 

본관 : 경주

시호 : 제숙

활동분야 : 행정

 

고려말 密直副使(밀직부사)를 하시었고, 本朝(조선)에서는 大光補國崇綠大夫 (대광보국숭록대부).議政府春秋館 左贊成(의정부춘추관 좌찬성)을 지내셨고 忠馱議佐 命開國功臣(충헌의좌명개국공신)으로 鷄林君(계림군)칭호를 받았다.

 

충헌의 좌명개국공신 115, 29, 315명중 제2차 좌목에 올라 있으며, 태종 대왕(太宗大王) 광주(廣州) 유릉신도비(猷陵神道碑) 뒷면에 공신범록 51명중 제28차에 올라있다. 시호는 재숙공(齋肅公)이다.

 

13세 장손인 휘 균()은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역임하다가 1392(공양왕 임신)7월 개성 수창궁에서 배극렴 등 중신들과 힘을 모아 이성계(조선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개국 공신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녹훈(錄勳)되고 보국숭록대부에 승계하여 문화찬성사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되고

 

태상사(太常寺)에서 집심극장왈제(執心克莊曰齊), 강덕극취왈숙(剛德克就曰肅)이라 제숙공(齊肅公)으로 시호가 선법되고, 1666(현종병오)에 후손인 시진(始振)이 예조참판 때에 공훈을 상소하여 계림부원군에 추봉되었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조선 개국 뒤 익대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계림군에 봉해지고, 중추원부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통혼에 있어서도 태조가 각별히 우대한 노은 · 문계종 · 이정간 등 공신의 딸을 맞이하였다.

 


 

원성대왕의 둘째아들 "영" - 손자 "정" 의  후손에서 분적되었다면 원성왕의 12세 안산김씨 시조 김긍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김지우 묘지명은 "예"는 "예영" 을 가르키고 이후 일정 계대는 실전인데 계보가 연속된 것처럼 기록된 것은

잘못(誤記)이고 이후 고려초기 인윤(仁允)계보로 넘어가게 된다. 

 

안산김씨 시조 이전 경순왕 상계 계보

비조(시조) : 대보공 김알지  → 2세 → 3세 → ....생략 .....

19세. 원성왕(元聖王) → 20세. 각간(角干) 예영(禮英)

21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 24세. 상대등(上大等) 안()

25세. 시중(侍中) 민공(敏恭)→ 26세. 角干(각간) 인경(仁慶=實虹(실홍)

27세. 시중(侍中, 伊飡이찬) 효종(孝宗) → 28세. 경순왕(敬順王)

29세.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은열(殷說)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 1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


남당유고 안산계

비조(시조) : 대보공 김알지  → 2세 → 3세 → ....생략 .....

19세. 원성왕(元聖王) → 20세. 각간(角干) 예영(禮英)

21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 24세. 상대등(上大等) 안()

25세. 시중(侍中) 민공(敏恭)→ 26세. 角干(각간) 인경(仁慶=實虹(실홍)

27세. 잡간(匝干) 억렴(億廉) → 28세. 시중(侍中) 유렴 裕廉 → 29세 태기(경진 920)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 1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신무왕(神武王)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는 문종 개성 4년이다.

名祐徵 元聖孫上大等均貞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문성왕(文聖王)

이름은 경응(慶膺)이니 신무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는 문종 개성 4년이다. 19년 정축(丁丑, 857)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유조(遺詔)를 내려 숙부인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전하게 하였다.

名慶膺 神武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十九年丁丑九月 王不豫 遺詔傳位於叔父誼 靖

 

출처 : 동경잡기(東京雜記) 신라기(新羅紀)

 



안산김씨가 경주김씨 족보(1772년) 계림군파 창시 임진보에 경순왕 이후 12세 계림군 예하에서 시적(始籍) 했다는 기록은

 

원성대왕의 둘째아들 "예영" - 손자 "" 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원성왕의 12세 후손에서 안산김씨가 분적되었다는 내용이 700여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다가 당시에 균의 12세에서 분적되었다는 기록

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명사들은 자(字) 호(號)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예영"은 "예"로  "균정"은 "균"으로 호칭하였을 것이다.

가승 기록으로  남겨진 자,호의 기록이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1772년 경주김씨 족보서문에 언급하여 남게된 것으로 추정한다.

 

안산김씨 시조는 균(균정)의 후손으로 원성왕의 12세 후손이라는 전제하에 하위 계보를 검토해 보면 딱 맞아 떨어진다.

 

안산김씨 시조 이전 상계 계보 (원성왕 부터 시조까지 12세)

1. 원성왕(元聖王) → 2. 각간(角干) 예영(禮英)

3.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4. 신무왕(神武王)

5. 문성왕(文聖王)  → 6. 상대등(上大等) 안()

7. 시중(侍中) 민공(敏恭) 8. 角干(각간) 인경(仁慶 = 實虹(실홍)

9. 시중(侍中, 伊飡이찬) 효종(孝宗) 10. 경순왕(敬順王)

11.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은열(殷說)

12.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참고로 찾아본 계보도

 

경순왕 김부 (897? ~ 978513)

김은열(金殷說, 936~ 1028년 음력 34)

  

 

 

1776년 족보 기록 (1766년 족보?)

1세 시조(始祖) 김긍필 (金肯弼) ? ?), 안산현 개국후 

2세 김은부 (金殷傅) ? 1017(고려 현종 8)

      고려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현종의

       국구(장인), 안산군 개국후  

       ※ 고려 성종(成宗, 960~997, 재위 981997)

 

 

근대 3세 계대추가 (1989년) : 경덕국사 묘지명

-----------------------------------------------------

3세 김충찬(金忠贊) ?(998년이전) 1036(정종 2).

      김난원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999) ~ 문종 20(1066)

 

근대 4세부터 7세까지 계대추가 (1978년) 

   가승(고려시대 기록) : 균의 12세 후손 안산김씨 시적(始籍) 

     *** 고려 인종이 김인규를 외삼촌으로 존대하고 신임

           (문종의 왕비 안산김씨 인평왕후) 

           1123(인종 1) 동지추밀원사로서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등을 접대한 기록

            http://an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500552

     ***경주김씨, 인천이씨, 삼성연원보, 안산김씨 계보  분석 

     *** 은열묘지명 해설, 균의 후손 고려시대 기록  : 경주김씨

           월성세승 [평장사공 23세손 덕운(1687-1767) 가승 기록]

     *** 1772년 경주김씨 계림군파 창시 임진보 서문 : 계림군

           균의 후손으로 언급은 맞지않는다. 이는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후손으로 원성왕 12세 후손으로 보면 맞아 떨어

           진다.  

-----------------------------------------------------

4세 김원황(金元晃) ?1062(문종 16)

5세 김경용(金景庸) 1041(정종 7)1125(인종 3)

6세 김인규 (金仁揆) ?~1142

7세 김지우(金之祐) 1108(예종 3)1151(의종 5)

 

근대 8세 계대추가 (1989년) : 김지우 묘지명

       (*** 참고로 묘지명에는 원황의 아버지는 인위로 되어 있다.

              묘지명에 기록된 가승 계대기록이 착오가 아니라

              안산김씨의 추가 계대편성은 잘못된 것으로 바로 잡아

              야 한다고 이전에 밝힌 적이 있다.

 

              계대추가시 위에서 언급한 고려시대 가승과 김인규를

              외삼촌으로 존대한 기록과 1700년대 분적 기록에

              대한 족보논쟁 등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와 고증을 거쳤

              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점이다.

              물론, 누락된 계보를 찾기 위해 애쓰신 그 분들의 노고

              는 후손 된 입장에서 진위 여부를 떠나 감사한 일이고,

              잊을수 없다.

 

              최선을 다한 기록이 확실한 증거와 검증으로 입증되어

              야 할 것이다.

 

              오래전 계대추가시 위와 같은 증거와 자료도 있었겠

              지만 종원인 내가 어렸을 적 일이라 알수 없는 일이다.

              추가 계대편성에 관여하셨던 분들이 연세가 많으셔서 

              대부분 작고하셨겠지만 검토한 관련자료는 보관 하셨을

              것으로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며 계보를 찾는 나로서는

              이 자료를 접하지 못하여 가슴 아픈 일이다.

----------------------------------------------------------

8세 김충언 (忠彦) ? ?

 

위 계보가 실려 있는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발간책자

- 계보연구 <2002 십주년기념> (경주김씨계보연구회, 2002. 8.20

   발행, 발행인 김창묵  

    * 신라김씨 분관연원계보도 (234page, 253page)

- 사단법인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계보연구 (2007. 추동계합본)

   (2008. 춘하계 합본 26page)  * 신라김씨 분관선원도 (계보)

   *** 이전연도 발간 자료는 미 확인 

 

-----------------------------------------------------

1776년 족보 기록

1726(崇禎紀元後 再丙午 3)에 작성된 이의현(李宜顯, 당시

대제학, 영의정)의 국조인물고 묘표(墓表) 기록

 9세 김위 (金渭) ? ?

10세 김원상 (金元祥) ? ~ 1339(충숙왕 복위 8)

11세 김성경 (金星慶) ? ?

12세 김정경 (金定卿) 1345(충목왕 1)1419(세종 1)

13세 김지 (金沚) ? ? 1

        김관 (金寬) ? ? 2

        김척 (金滌) ? ? 3

        김개 (金慨) 1405(태종 5)1484 4

        김한(金澣) ? 1485 5

 

국조인물고 묘표(墓表) 1726(崇禎紀元後 再丙午 3)에 작성된 이의현(李宜顯, 당시 대제학, 영의정)의 기록으로 위정공(김정경)이 돌아가신 지(1419) 이미 3백여 년이나 되어 묘비에 새긴 글자가 닳아서 없어졌으므로, 지금 김필(金珌)6대손 정랑(正郞) 김정오(金定五)와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이 다시 비석을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 이의현(李宜顯)에게 묘비의 글을 가지고 와서 그 뒤에다 추기(追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는 내용으로 보면 1726년 이전부터 묘표(墓表)가 있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김인규(金仁揆)

 

-[館伴金紫光祿大夫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동지추밀원사 상주국 김인규

金景融王顒世太傅守中書令仁揆卽其子也顒父徽嘗娶金氏女。▣于仁揆有元舅之尊韓繳如等叛李資謙挾王楷以誅羣惡而仁揆與有力焉位司空使樞府仁揆頎而美髥皃魁秀進止端重。▣爲所擇以接使華也

 

김경융(金景融)은 왕옹(王顒) 때의 태부 수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니, 인규는 곧 그의 아들이다. 옹(숙종)의 아버지 휘(문종)가 일찍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니, 왕해(王楷, 인종)가 인규를 원구(元舅 큰 외삼촌)로 존대할 분의가 있다.

한교여(韓繳如)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왕해를 도와 여러 반역 도당을 베었는데, 인규가 참여하여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司空)에 오르고 중추부(中樞府)에 있도록 했다. 인규는 키가 훤칠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빼어났으며,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선발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한 것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1124)에 김경용과 그 아들 김인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김경융(고려사에는 김인규의 부친이 김경용(金景庸)으로 되어 있다)은 숙종 때의 태보수중서령인데, 인규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숙종의 부친 문종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므로 인종은 김인규를 외숙으로 존대했다.

 

한교여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자겸이 인종을 보호하여 반역의 무리들을 베었다. 그때 김인규가 참여하여 공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司空)으로 승진시켜 중추부에 있도록 했다.

 

김인규는 풍채가 좋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모습은 특이하게 빼어났고 행동은 단정하였다”   서긍, 고려도경, p.141, 지평(2005)

 

문종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므로 숙종은 김인규를 외숙으로 존대했다

 


 

 

김인규 :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아버지는 중서령 김경용(金景庸), 처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서 좌복야참지정사 왕하(王嘏)의 딸이다. 아들로 김지효(金之孝), 김지우(金之祐)가 있으며,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을 사위로 두었다.

 

[활동사항]

김인규는 키가 훤칠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빼어났으며, 성품이 너그러웠고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꺼렸다. 또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권세를 믿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한다. 예종 때 문과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다. 1117(예종 12) 6월 급사중추밀원좌승선겸태자좌찬선(給事中樞密院左承宣兼太子左贊善)이 되었다. 11222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이어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 나경순(羅景純) 31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11224월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예종의 총애를 받았던 한안인(韓安仁)은 이자겸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 이자겸 일파는 인종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 한안인, 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를 꾀했다며 주모자와 그 일당 50여 명을 살해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김인규는 사돈 이자겸 편에 서서 한안인의 제거에 참여하였다. 그 공로로 사공(司空)에 오르고 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인종이 외삼촌으로 존대할 정도로 신임하였다.

 

1123(인종 1) 동지추밀원사로서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등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1124년 검교사공이부상서지문하성사(檢校司空吏部尙書知門下省事)가 되고 이듬해 참지정사로 승진하였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위 이지언의 장인으로 연좌되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이때 누이의 남편인 이숙(李璹)이 김인규의 집을 차지하고 재산과 노비를 빼앗았는데, 김인규가 곧 복직되어 돌아오자 재산을 사이에 두고 다투게 되었다.

 

이숙은 아들 이온경(李溫卿)을 시켜 김인규의 모반을 무고하는 투서를 어사대(御史臺)에 넣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다. 11353월에 호부상서로서 예부낭중 왕창윤(王昌胤)과 함께 금나라에 가서 희종(熙宗)의 즉위를 축하하고 돌아왔다. 1141(인종 19) 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를 지내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도경(高麗圖經)

• 『안산김씨족보(安山金氏族譜)

•  김윤곤, 이자겸의 세력기반에 대하여(대구사학10, 대구사학회,

               1976)

•  신수정, 고려시대 경원이씨 가문의 정치적 변화에서의 혼인망

    (한국사학보21, 한국사학회, 2005)

 

출처 : http://an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500552

 

        여성구 (국민대학교 한국고대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김은부_가계도.xls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월성세승 [평장사공 23세손 덕운(1687-1767) 가승 기록중에서>

 

 

 

 

 

 

 

 

 

 

 

 

 

 

---------------------------------------------------------------------------------------

 

 

 

 

 

 

 66page 공백

 

 

 

 

 

 

 

 

 

 

 

------------------------------------------------------------------------------------------ 

 

 

 

 

 

 

 

 

 

 

 

 

 

 

 

 

 

 

 

 

 

 

 

 

 

 

 

 

 

 

 

 

 

 

 

 

 

 

 

 

 

 

 

 

 

-------------------------------------------------

경주김씨 족보입니다

 

이 책은 고려 홍무 을해년인 1395년 발행됐던 책인데 이 책을 계속 중판하다 1771년에 다시 발행한 책입니다.

 

1책에 홍무 을해년 처음 발행됐을 때 그 책에 붙었던 서문이 책머리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후 계속해서 중판된 책마다에 붙였던 책의 서문이 이 책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홍무 을해년이면 1395(홍무28)이며 이 해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 태조(이성계) 4년입니다.

 

 

 

 

신라김씨 시조 탄강도 계림

 

 

 

 

 

 시조 김알지 족보

 

------------------------------------------------------------------------------------------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동보

 

 

 

 

 

 

 

 

 

 

 

 

 

-----------------------------------------------------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高麗平章事 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

 

정조임금 8(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의 지석과 평장사공(=김황) 소보공(=김경보) 두 분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니 대개 남의 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석을 파묻어 숨겼더니 지금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여러 일가들이 모여서 그 지석의 글을 읽어보고 서로 의혹이 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이 지석 때문에 족보의 미비했던 계통을 참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조상의 혼령의 도움으로서 자손의 다행인 것이 아니겠는가

(=김사목)의 증고부 효간공께서 족보의 일을 시작하던 것을 부친께서 계속 물려주셨으니 내가 어찌 두려워만 하여서 사양하겠는가.

그 지석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

라고 하였다.

 

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세하게 참고 할 뜻이 있어 다시 묘소 위로부터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을 캐어내니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려평장사 김황을 아우 시중시랑 김은열의 묘소에 이어서 안장하였으며 경순왕의 둘째아들과 넷째아들이 고려태조의 외손이며 공신으로서 특별한 장지를 성 북쪽 10리 오룡산 남쪽기슭 30리 주위를 주었다."

고 하였다.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7세손 검교 태자 소보 김경보로서 부친은 공부시랑 휘한공이요, 조부는 추봉공부상서 휘계삼이요, 외조부는 예부원외랑 김태기이며,

(=김경보)의 나이 82세로 대금나라 황룡 10(경오년) 417(계해일)에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시어 717(을유일)로써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며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 비어대 휘작문이요,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 내금사 윤유연이요,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 유면이다."

라고 하였다.

 

또는 시중공(=김은열)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 1개를 캐내니, 그 지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평장사 보국대안군 은열의 묘이니 성 북쪽 10리 바깥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안은 형국)임좌병향이다."

라고 하였으니 앞의 지석 두면의 뒤에 얻은 지석 1개로써 증거한다면 시중시랑(=김은열)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그 형제 차례와 그 아들의 벼슬과 이름도 밝혀졌으며 ,

 

다음 한쪽으로 본다면 공부상서공(=김계삼)의 위와 강릉군(=김태화)의 아래에 다시 2대수가 의당 있어야 하겠는데 상서공의 휘자도 족보와는 같지 아니하며 또는 모든 지석에 작호가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니 대개 족보의 미비한 것은 의심할 수 있으되 지석의 문자는 실로 믿을 만한 일이므로 이제 바로 족보의 기록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서공 위 2대수가 증거할 문헌이 없고 경순왕과 평장사공 휘(인위)의 연대가 너무 가까운 것이 더욱 의심나는 것은 역시 모두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따로이 기록을 하여서 후대를 기다려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는 감히 경순왕 이하 세대차례를 가로로 쓰고 아울러 그 자손을 기록하여 한가지 예규를 만들어 미비한 족보 옛날기록 아래에 붙인 다음에야 지석과 족보가 서로 증거되어 신중성이 있을 것이니 의심과 신빈성이 각각 전해지면서 중복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여러 일가의 중론을 따른 것이로되 다만 옛날 기록이나 또는 어떤 족보에는 시중시랑(=김은열) 성과 이름위에 삼녀라는 글자가 있고 또는 공부상서(=김계삼) 휘자 위에 자를 썼으니 이것은 옳지 않으나 아직 옛 것대로 보존하였다.

 

지금에 지석을 씻어서 그 내용을 모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후손 사목은 삼가 기록함.

 

시중공(=김은열) 묘소 오른쪽에 또 큼직한 하나의 무덤이 있으니 그 둘러 쌓은 담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건데 뚜렷하게 특이한 무덤으로서 한 구역내에 똑같은 형체로써 그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은 모두 부녀자의 화장기구이므로 그의 부인인 것 같으나 지석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어서 아직 부록으로 뒤에 증거할 자료로 하였다.

 

가보를 살펴본다면 경순왕과 평장사공(=김황) 사이에 누락된 대수가 있다고 종중의 전해오는 말이 있으나 그 사이에 몇대인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지금에 청주족보에는 공부시랑 은열이 경순왕의 셋째아들로서 5대를 전하여 휘영고에 이르러서 직접 평장사로 전해 이은 차례를 삼았으니 어떤 근거에서 인지는 알 수 없으며 경순왕 이전 세대가 벌써 사기와 서로 부합되니 이 5대라는 것이 착오될 이치가 없는데 다만 의심할 곳은 경순왕이 본래에 고려태조와 같은 세대에서 경종임금 3(무인년)에 상사났으며 평장사공(=김황)이 현종 15(갑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더니 지금의 평장사공이 벼슬 그만둔 것이 비록 70년대인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개 벼슬 그만둔 것이 늙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년으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 간다면 광종 67년 을묘년 병진년 간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상사난 해에 평장사공의 나이 벌써 이십사오세가 되었을 것이니 비록 소목(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맨 위 첫째 중앙에 시조를 모시고 왼쪽은 소=2,4,6,8, 오른쪽 목=3,5,9])을 따져서 부자지간이거나 혹은 조손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대에 혹 나이 8~9045대 손자를 보게도 되나 여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족보에서 벌써 낙랑공주가 낳은 은열의 출생이 그 다음해인 정유, 무술년간 이라면 이때로부터 평장사공의 출생년도(을묘,병진년)가 불과 18,9년이니 그간에 어찌 45대가 될 수 있겠느냐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지금 평장사공에서 경순왕까지의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것을 알만한데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연대가 멀다고 하며 대수가 탈락되었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문서에 증거할 것이 없어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또는 고려가 열전을 참고하건데 명종 때에 영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등성 김인경의 부친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연대가 어긋나므로 혹시 두사람의 이름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족보계통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초에 신중하여야 하겠으되 족보에 기록된 것이 이렇게 모순되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며 나중에 족질 휘여의 가승(한 집안의 기록)을 보건데 휘순웅이 실로 평장사공의 부친이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순웅의 아들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여러 일가가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아울러 기록해 놓으니 평장사공 위에 이런 장군공의 1대수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경순왕년대에 소급해보면 더욱 가까운 것이니 여기에 5대수라는 것은 아직 부록으로 하여서 후일에 다시 참고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장사공 23세손 덕운은 삼가 기록함.

 

임진년 족보를 살피건대 경순왕 이하 족보 탈락한 것은 다만 여러 기록에 어긋나는 말을 증거로 의문점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정조임금 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 소보공(=김경보)의 지석을 발견하여 비로소 선대계통을 알았으므로 지금에 구족보의 기록을 수정하였으며 경헌공은 추가로 기록하며 구족보에서 일가 덕운이 기록한 것을 작은 글씨 두 줄로 아래에 써서 참고케 하였다.

. 원문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

上之八年甲辰偶得侍中公墓誌一面及平章公少

保公墓地銘一面蓋冒占山地者掘而秘之始乃因

事露見也諸宗聚首擎讀相興曠惑旦曰卽此誌文

而譜牒所缺先系昭穆可以參攷矣斯豈非先靈之

默想而雲仍之厚幸歟旣以思穆曾王考孝肝公實

始譜事而先人賓續成之(더할비)思穆繼而修述惟不能

是懼何敢辭謹按其一面曰新羅敬順王金傅第四

子侍中侍郞有高麗平章事殷說卒戊辰三月初

四日己丑葬于城北十里鐘巖下五龍山南麓雙龍

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종고소리굉)次鳴弟曰重錫曰鍵

曰鐥曰鐘子江陵君泰華後其子孫者或有昭考之

意採誌於自墓上正北五步之地其一面曰高麗平

章事金()繼葬于弟侍中侍郞金殷說之墓敬順王

第二子第四子以國甥之子有功之臣特腸葬地城

北十里之外五龍山南麓三十里周回(이하생략)

 

========================================== 

 

김은설묘지명의 추가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미술문화재연구실 2009-01-02

 

0.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사이트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추가 질의에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金鼎集<金殿設墓碑銘>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서고(28013)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2. 귀하께서 말씀하신대로 金鼎集開城留守로 부임하여 헌종 15(1849)에 세운 墓碑를 탁본한 <金殿設墓碑銘>의 내용에 따라 김은설의 지석에 경순왕이라는 시호가 사용되었다면 김은설의 졸년을 경순왕 졸년인 978년 이후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본 사이트에서는 이를 참고하여 차후 관련분야 전문가 등에게 의견을 검토 받아 추후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3. 감사합니다


김은부_가계도.xls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