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밝혀진 사실들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어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야 되겠습니다.
신라김씨는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고 이때 탄생하신 분이 바로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 이시다.
김씨의 시조 계림대보공(김알지) 위패
김알지(성한왕星漢王)의 윗대 선조에 대해 이제는 인정하고 각 문종의 홈페이지에 김알지의 윗대 선조에 대해 바르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무대왕릉비 원형의 복원 모습
신라(新羅) 문무왕비(文武王碑, 681년)의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김알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 묘비(金仁問 墓碑, 701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太祖漢王啓千齡之 聖臨百谷之」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
김인문 묘비
그렇다면 성한왕 김알지의 윗대 선조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일까? 존재하고 있다면 과연 누구인가 ?
문무왕비에는 성한왕은 신라의 태조이며 신라의 태조는 김알지다. 선조에 대한 기록인 문제의 단어는 ‘투후(秺侯)’였다. <한서>에 이 말이 등장한다.
´김일제전´에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封金日磾爲秺侯)"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 敎撰」
通三▨兵殊▨▨▨匡▨配天統物畵野經積德 匡時濟難應神 靈命」
派鯨津氏映三山之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承白武仰」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侯祭天之胤傳七葉以」
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 方卷跡停烽罷候萬里澄氣克勤開」
簡▨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功盛 於將來疊粹凝貞垂裕於後裔」
▨▨舍誨乃聖哲之奇容恩以憮人寬以御物 知其際承德者咸識其隣聲溢閒河」
▨▨▨峯而▨幹契半千而誕命居得一以 照惟幾於丹府義符性興洞精鑒」
恬▨輔質情源湛湛呑納▨於襟▨ 握話言成範容止加觀學綜古」
詩禮之訓姬室拜橋梓之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宮車晏駕遏密在辰以」
舜海而霑有截懸堯景以燭無垠」
著▨▨▨而光九列掌天府以」
感通天使息其眚蘋安然利涉」
▨違鄰好頻行首鼠之謀外信」
熊津道行軍大總管以 君王」
列陣黃山蝟聚張欲申距」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三年而已至龍朔元年」
所寶惟賢爲善最樂▨仁」
朝野懽娛縱以無爲▨」
貺更興秦伯之基德」
之風北接挹婁蜂▨」
詔君王使持節」
軍落於天上旌」
之謀出如反手巧」
문무왕비 앞면 판독문
김일제(B.C 135년에서~85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 무제의 포로가 되었다가 흉노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서한에 귀화한 인물이다. 이른바 김성한은 김일제의 7대 후손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성한은 김알지다.
진철대사비(眞澈大師碑, 937년)에는 계림김씨(雞林金氏) 시조는 성한왕(始祖 星漢王)이라고 기재(記載)되어 있다.
스님의 법위(法諱)는 이엄(利嚴)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鷄林)사람이었다.
스님의 모국(母國)과 조상을 상고해 보니 본래 성한(星漢)의 후손이었으나, 먼 조상 때부터 점점 세도(世道)가 쇠락하였다.
大師法諱利巖俗姓金氏其先雞林人也考其國史實星漢之苗遠祖世道凌夷斯廬多難偶隨萍梗流落熊川父章深愛雲泉因寓富城之野故 大師生於蘇泰相表多奇所以竹馬之年終無☐☐」
광조사 진철대사비(廣照寺 眞澈大師碑)
1954년에 출토된 864年 唐에서 사망한 신라 여성의 묘지명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신라 김씨가 흉노의 왕자 김일제의 후손임을 구체적으로 적은 재당 신라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중국 서안(장안)에서 최근 알려진‘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그것이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김유신 상편(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을 보면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이처럼 신라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윗대선조에 대해 확실하고 많은 금석문 기록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해득실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 하는 경우가 많다.
경주김씨를 비롯한 모든 신라김씨들이 최우선해서 풀어야 숙제임에도 밝혀봐야 이로울게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일부 문중에서는 사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신라김씨의 선조는 흉노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결과까지 전면 부정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진정 경주 계림의 김알지의 탄생 설화(흰빛 닭 울음 소리로 찾아간 숲 속에서 발견한 금궤 안에 사내아이가 있었다)만 중요하고 여러 금석문에 기록된 김알지의 부모(선조)는 없다고 할 것인지 이것이 진정 보학을 연구하는 분들의 자세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 자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제 (金日磾) 가계도
|
부친 : 휴도왕(休屠王) |
모친 : 알지(閼氏) 부인 |
|
1세 김일제 (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 음력 8월) |
|
아들 : 장남- 이름 불명 |
차남- 김상(金賞) |
2세 삼남- 김건(金建) |
|
김일제 동생 : 김윤(金胤)-자(字)는 소경(少卿), 황문랑(黃門郞)을 지냈으나 일찍 죽음. |
김일제 조카 : 김안상(金安上)-김윤 아들, 자(字)는 자후(子候) 사후에 경후(敬候)로 봉해짐. |
3세 실전( |
4세 김당(金當) - 김건(金建)의 손자(증손) 투후(秺侯)에 봉해짐.
5세 김성(金星) : 김당(金當)의 아들 마지막 투후였던 김일제의 5세 김성(金星)이 성한왕이고 그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김씨 시조 김알지라는 견해가 있는데 투후(秺侯)는 한나라때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 이며 제후국(諸侯國)이다. 그러므로 김성(金星) 의 이름과 한나라 왕이라는 뜻으로 성한왕(星漢王)을 표기하였다면, 성한왕은 문무왕의 15대조와 동일인물이 된다. 다만, 투후로 부터 5대이므로 문무왕비문의 투후로 부터 7대 라는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사라진 때는 왕망(BC45~서기23년)이 죽은 해인 서기 23년이고 김알지의 탄생은 서기 65년(乙丑)입니다. *** 왕망 : "신(新)나라" 왕조(8∼23) 건국자
신라 김씨의 족보해석을 혈통적 7대가 아니라, 한무제 이후의 황제 7대를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으니 혈통적 7대에 얽매어서 역사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한나라 임금 7대는 ①무제-②소제-③선제-④원제-⑤성제- ⑥애제-⑦평제 이다.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9대 선제(宣帝재위BC 73-49),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
김일제의 5세 김성(金星)을 성한왕(星漢王) 으로 해야 할지 7세까지 내려가야 할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문무왕비문에 15대조가 성한왕이라 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김알지가 성한왕이 된다. 문무왕비문에 김알지의 선조는 투후로 부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의 후손 7대를 내려왔다고 했으므로 과연 혈통의 7대냐 황제(임금) 7대인지 논란의 소지는 있다. (* 代와 世는 같은 뜻) "대당고김씨부인묘명"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는 내용이 맞는다면 혈통의 7대에 무게를 둔다. *** 성한왕과 김알지는 동일인이므로 김성(金星)이 성한왕이라면 이분이 곧 "김알지" 가 되고 혈통 7대가 맞다면 김성(金星)은 김알지의 조부가 되는 것이다.
6세 실전(
7세 金閼智(김알지) 출생년도 : AD65년(乙丑) 삼국사기 탈해왕 9년, AD65년(乙丑), 3월달 출생 삼국유사 탈해왕 4년, AD60년(庚申), 8월 4일 출생 사망년도는 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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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다른 후손 김선(金旋 ? ~209년) 김위(金褘 ? ~218년) : 김선(金旋)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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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세계도(世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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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황금제왕국》(삼희출판/고증.편찬:인류태고사학회)의 495p「경주김씨족보」를 보면 역시 앞의 많은 학자들의 주장을 고스란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붉은 글은 본인이 추기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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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비석 상단부 (2009년 발견)
비석 하단부 (1961년 발견)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681년(신문왕1년) / 682년(신문왕2년) |
유형/재질 |
비문 / 화성암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55cm, 너비 94cm, 두께 28cm |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부동 |
소재지 |
(한국)국립경주박물관-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김□□(金□□) / 한눌유(韓訥儒) / 미상 |
판독문
(앞 면)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 敎撰」
通三▨兵殊▨▨▨匡▨配天統物畵野經積德 匡時濟難應神 靈命」
派鯨津氏映三山之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承白武仰」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侯祭天之胤傳七葉以」
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 方卷跡停烽罷候萬里澄氣克勤開」
簡▨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功盛 於將來疊粹凝貞垂裕於後裔」
▨▨舍誨乃聖哲之奇容恩以憮人寬以御物 知其際承德者咸識其隣聲溢閒河」
▨▨▨峯而▨幹契半千而誕命居得一以 照惟幾於丹府義符性興洞精鑒」
恬▨輔質情源湛湛呑納▨於襟▨ 握話言成範容止加觀學綜古」
詩禮之訓姬室拜橋梓之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宮車晏駕遏密在辰以」
舜海而霑有截懸堯景以燭無垠」
著▨▨▨而光九列掌天府以」
感通天使息其眚蘋安然利涉」
▨違鄰好頻行首鼠之謀外信」
熊津道行軍大總管以 君王」
列陣黃山蝟聚張欲申距」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三年而已至龍朔元年」
所寶惟賢爲善最樂▨仁」
朝野懽娛縱以無爲▨」
貺更興秦伯之基德」
之風北接挹婁蜂▨」
詔君王使持節」
軍落於天上旌」
之謀出如反手巧」
(뒷 면)
丸山有紀功之將以」
直九合一匡東征西」
▨宮前寢時年五十六」
牧哥其上狐ꟙ穴其傍」
燒葬卽以其月十日火」
妣 天皇大帝」
王禮也 君王局量」
國之方勤恤同於八政」
實歸乃百代之賢王寔千」
淸徽如士不假三言識駿」
而開沼髣髴濠梁延錦石以」
之聆嘉聲而霧集爲是朝多」
卽入昴忘歸射熊莫返太子雞」
丹靑洽於麟閣竹帛毀於芸臺」
餘下拜之碣迺爲銘曰」
侍星精 域千枝延照三山表色盛德遙傳」
道德棲梧 允武允文多才多藝憂入呑蛭尊」
九伐親命三軍 ▨威恩赫奕茫茫沮穢聿來充役蠢」
欽風丹甑屢出黃▨鎭空 雄赤烏呈灾黃熊表崇俄隨風燭忽」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典葬以積薪 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
鴻名與天長兮地久」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韓訥儒奉」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해석문
[前面]
<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後面]
<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4행> …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
<10행>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들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雞)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문무대왕 능비 기단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 귀부
경주박물관에 있는 사천왕사지 귀부 머리부분 비석 하단부 (1961년 발견)
비석 상단부 (2009. 9. 3 발견)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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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 묘비 (金仁問 墓碑)
시대 : 통일신라
연대 : 701년(효소왕 10년) 추정
유형/재질 : 비문 / 화강암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폭 4자, 높이 6자 추정, 현재 길이 75.8cm,
넓이 100cm 정도, 두께 18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리 서악서원 누문하(樓門下)
소재지 : 국립경주박물관-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김인문묘비는 1931년 12월 일본인 학자가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의 누문(樓門) 아래에서 발견하였다. 묘비는 발견될 당시 이미 깨어진 상태였고, 남아있는 비편은 높이 75.8cm, 너비 1m 정도, 두께 18cm로 비의 아랫부분에 해당한다.
현재 묘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김인문(金仁問)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정복에 큰 공을 세웠으며 통일 후에 중국 당나라에 머물다가 694년(효소왕(孝昭王) 3)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듬해에 유해가 신라에 송환되어 현재의 경주시 서악동에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치렀다. 묘비는 이 무렵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비편의 내용은 김인문(金仁問)의 시조와 선조들의 행적, 김인문(金仁問)의 행적을 기술한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 김인문열전에 전하는 내용과 일치하거나 보완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마도 나머지 부분에는 김인문(金仁問)의 죽음과 장례, 비의 건립에 관한 사실, 비명(碑銘)을 기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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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행수라든가 각 행의 글자수를 전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비문의 앞과 뒤로도 상당한 부분이 더 있었다고 짐작된다.
<1행> …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을 만한 재목이라…
<2행> … 병부(兵符)는 ▨조(▨爪)를 만들고, ▨룡훈고(▨龍薰孤)의 경사(經史)는 …
<3행> … ▨오지군(▨五之君)이라,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
<4행> …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
<5행> … 한(漢)나라 장수 손책(孫策)은 삼강(三江)을 근거지로 하여 …
<6행> … 할아버지 문흥대왕(文興大王)께서는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림이 신과 같은 분으로 …
<7행> … ▨호(▨號)의 험(驗)을 … 하니, 본지(本枝)가 다 ▨성(▨盛)하여지고, 여유로움이 후손에게 드리웠다. …
<8행> …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관(貞觀) 21년 황제께서 (김춘추에게) 특진(特進)을 내리시니 그 영예는 … 만큼 높은 것이라 …
<9행> … 의장(儀裝)은 좌초우선(左貂右蟬)의 예를 따라, 중국의 예법대로 정하여 아뢰었다. …
<10행> … 고종황제도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김특진(金特進)은 도량이 깊으니 …
<11행> … 신라왕으로 삼노라” 하였다. 김인문 공께서는 이에 월▨(月▨)를 지켜서 따로 성하(星河)를 간발(幹發)하고 원척(原戚)을 파견하였다. …
<12행> … (황제께서는)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 궁궐에 조회하여 제후의 직분을 이지러뜨리지 않음을 가상히 여겼다. …
<13행> … (신라에 돌아와) 천▨(千▨)의 치첩(雉堞)을 (쌓으니), 높은 담들이 비단 물결치듯 하였다. …
<14행> … 태종대왕께서 그 공적에 대해 감탄하여 아름답게 여기고는 특별히 식읍(食邑) 300호를 내렸다.
<15행> … 공께서 모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8진(八陳)을 열어서 …
<16행> … (백제가) 황제의 명을 어기자, 크나큰 병력들이 황제의 노여움에 의지하여 … 수레를 모니, 공은 의로움과 용감함에서 당시에 으뜸이었다. …
<17행> … 백제를 … 하여 ▨호(▨豪)를 … 하니, (백제 의자왕은) 군영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흉악한 무리들은 흙이 무너지듯 무너졌다. …
<18행> … (고구려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거스리자, 황제께서 발끈 성을 내어 …
<19행> … (문무왕은) 공에게 부대총관(副大總管)의 직위를 주고 성대하게 군사들을 모아 군량미를 옮기게 하였다. …
<20행> … 병사들은 적의 땅을 가로질러 … 하여 호로수(瓠盧水)로 되돌아갔다.
<21행> … 물가 언덕에 이르렀다. 공은 곧 …
<22행> … 만여 명을 (목베었다). 이때에 이르러 구름같이 많은 용맹한 장수들이 공의 뛰어난 병법 운용을 우러러 보았으며, 비같이 많은 모▨(謀▨)들이 …
<23행> … 황제께서 명을 내리기를, “ … 충성스럽고 과감하게 힘을 다하였으므므로, 그대에게 법식에 따라 상을 내려 … 하노라”라고 하였다. …
<24행> … ▨▨의 ▨를 ▨▨하고, 여섯 ▨의 계를 ▨▨하며, 덕을 기록하여 등촌(登村)의 예를 벌리니, 이는 … 을 아는 것이라. …
<25행> … 천인(天人)의 ▨를 접하였다. …
<26행> … 건봉(乾封) 원년(元年 ; 666년) (右繞衛大將軍) 개국▨(開國▨)을 더해 주었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則▨▨▨▨▨▨棟梁之材存」
▨▨師之兵符作其爪▨龍薰孤之經史」
五之君少墟分星于而超碧海金天命」
▨太祖漢王啓千齡之 聖臨百谷之」
▨▨彊漢將孫策限三江而則土」
其日 祖文興大王知機其神多」
▨▨号之驗本枝▨盛垂裕後昆」
▨駭目貞觀卄一年 詔授特進榮高」
用儀左貂右蟬定中國之行禮奏聞」
高宗大皇大帝遣派▨曰惟金特進而量沖」
羅王公乃遵月▨而別幹發星河以派原戚」
標志尙遠涉滄澤▨朝絳闕無虧藩職載未」
▨▨▨鴻河▨以千▨之雉堞高墉似錦越夫」
太宗大王歡美其功特授食邑三百戶」
之所▨被▨就之▨公乃聚不成圖以開八陳」
▨背詔大軍憑怒▨肯陵以載駈公義勇冠時」
百濟而辶擊▨豪▨▨面縛於轅門兇黨土崩」
▨阝▨途違事大之禮 大帝赫然發憤」
▨ 王授公爲副大捴管盛發師徙運粮」
▨▨其本國兵軍▨虜境以橫行返于瓠盧水」
三之糧擧三▨之▨▨之▨日至于河岸公乃」
萬餘及此時如雲猛將仰公龍豹之韜若雨謀」
在國 詔曰▨讓忠果幹力公强式遵賞」
▨之▨▨▨六▨之禊紀德刺登村之禮是知」
▨▨▨▨▨順動▨▨▨▨▨▨▨接天人之」
乾封元年加授▨▨▨▨▨▨衛▨▨開國▨」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대당고김씨 묘명에서 보이는 금천(金天)이 보인다.
대당고김씨 묘명에서 신라 김씨의 始祖가 中國 古代 傳說 속의 帝王인 소호 금천(金天)이라고 했다.
소호(少昊) 또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은 중국 고대의 신화상에 등장 하는 전설적 군주인 삼황오제 중 오제(五帝)의 한 명이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또는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고 부른다. ---------------------
소호금천씨의 김씨조상설
소호금천씨는 중국과 한국의 김씨들의 조상으로 많이 언급된다. 특히 한국의 주요 김씨인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언급한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1145년)》에는 가야 출신인 김유신 장군의 묘비명에 가야 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족보 상에는 김씨가 한국 고유의 성씨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국통일을 달성한 신라의 김씨 왕족이 자신의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전설상의 인물을 시조로 간주한 것으로서,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견해이다.
참고로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에서 신라 김씨의 세조를 언급한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라는 명문과 직접 조상을 언급한 다음내용과는 다른 것인데 동일하게 인식하고 부정하는 일부 역사학자들도 있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김알지 선조에 대한 기록인 문무왕비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된 다른 금석문의 내용을 부정하면서 일반 개인의 묘지명 등 금석문은 믿을수 있다고 하는지 궁금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은 후대의 기록으로 승자의 입장이 반영되어 기록된 것으로 어느 문장은 믿고 어느것은 허구라고 배척할 것인지 그 기준의 잣대는 누가 정하고 있는지 학자 개개인의 양심에 맡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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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 上 (김유신 상) - 삼국사기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김유신(金庾信)은 경주 사람이다. 그의 12대 할아버지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아홉 촌을 살펴보고, 드디어 그 땅에 가서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加耶)라 했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仇亥)[혹은 구차휴(仇次休)라 한다.]에 이르렀는데, 유신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 同姓也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유신의 비문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舒玄)’이 고친 이름인지 아니면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알 수 없다. 확실치 않아서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가 되자 만명과 함께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숙흘종이 그제야 자신의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딸을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던 갑자기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지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는 틈에, 만명은 구멍으로 빠져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赴萬弩郡
서현은 경진일 밤에 형혹(熒惑, 화성)과 진(鎭,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도 역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여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인 을묘(서기 595)였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에 좋은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당연히 이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예법에는 날짜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오. 그러하나 이제 생각해보니 경(庚)은 유(庾)와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발음이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의 현인 중에도 유신(庾信)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이를 이름으로 삼지 않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만노군(萬弩郡)은 지금의 진주(鎭州, 충북 진천)인데, 애초에 유신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고 한다.]
舒玄庚辰之夜 夢熒惑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況古之賢人有名庾信 盍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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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당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新羅 王族인 金氏의 祖上을 匈奴 出身인 김일제(BC 134 - BC 86)라고 기록한 在唐 新羅人의 墓地名(墓地에 기록한 글)이 나왔다.
864年 唐에서 사망한 신라 여성의 묘지명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서 이 같은 내용을 찾았다.
묘지명에는 함통 5년(서기 864년) 5월 29일 향년 32세로 사망한 김씨 부인에 관한 자세한 사항, 즉 김씨의 유래와 김씨 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등이 기록되어 있이 새겨져 있다. 김씨 부인은 재당 신라인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金公亮)의 딸이며 증조부는 김원득(金原得)이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로 西漢(前漢)에 투항한 뒤에 황제의 고문인 侍中에 올랐으며 제후인 투정후가 됐다.
이 묘지명은 또 또 신라 김씨의 始祖가 中國 古代 傳說 속의 帝王인 소호씨 금(김)천(少昊氏 金天)이라고 적었다.
이 묘지명은 1954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서 출토돼 시안시 비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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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당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 전문 2009.4.22 >
김태식 기자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찾아낸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신라 김씨, 그것도 신라에서 당으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한 지 4대 가량이나 지난 재당 신라인이 여전히 그 가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다.
김씨는 흉노 김일제 후손 (서울=연합뉴스) 신라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된 이 묘지명에서 신라김씨는 소호금천씨에서 비롯되어 한 무제 때 투항한 흉노 왕자 김일제로 혈통이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2009.4.22 << 문화부 기사참조,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 제공 >>
권 교수가 번역한 이 묘지명 전체는 다음과 같다.
『전 지계양감이자 장사랑이며 시어사와 내봉공인 이구의 부인인 경조 김씨 묘지명과 그 서문.
향공진사 최희고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 승봉랑이자 수건주장사인 동함이 묘지문과 전액을 쓰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시니 한림대조 검교좌산기상시 소부감 내중상사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 충내작판관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를 궁구하여 관상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김씨는 흉노 김일제 후손 (서울=연합뉴스) 신라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덮개돌.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된 이 묘지명에서 신라김씨는 소호금천씨에서 비롯되어 한 무제 때 투항한 흉노 왕자 김일제로 혈통이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2009.4.22 << 문화부 기사참조,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 제공 >>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 5년 5월29일 영표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과 둘째 아들 경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 산천현 상부촌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병병조참군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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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唐故金氏夫人墓銘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
鄕貢進士崔希古撰 翰林待詔承奉郞守建州長史董咸書篆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
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
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
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
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文宣王立言言
忠信行篤敬雖之蠻貌其道亦行今復昌熾吾宗於遼東 夫人曾祖
諱原得皇贈工部尙書祖諱忠義皇翰林待詔檢校左散騎常侍少府
監內中尙使 父諱公亮皇翰林待詔將作監承充內作判官祖父文
武餘刃究平子觀象規模運公輸如神機技乃貢藝 金門共事六朝
有祿有位善始令終先夫人隴西李氏搢紳厚族夫人卽 判官次女
柔順利貞稟受自然女工婦道服勤求舊及歸李氏中外戚眷咸號賢
婦夫人無嗣撫訓前夫人男三人過人己子將期積善豊報豈謂天命
有筭脩短定分綿遘疾瘵巫扁不攻咸通五年五月貳拾玖日終于嶺
表享年卅三端公追昔平生尙存同體經山河視若平川不避艱儉堅
心臨 柩遂歸世域嗣子敬玄次子敬謨次子敬元並哀毁形容遠侍
靈櫬追號网極敬玄等支殘扶喘謹備禮文以咸通五年十二月七日
遷神于萬年縣滻川鄕上傅村歸世塋域夫人 親叔翰林待詔前昭
王傅 親兄守石淸道率府兵曹參軍聯仕 金門丞家嗣業希古與
夫人兄世舊追惻有作因以請銘 銘曰 天地不仁 先死陶鈞
孰是孰非 無踈無親 不饗積行 不永大命 豈伊令淑 亦罹
賢聖 遘此短辰 遊岱絶秦 大道已矣 萬化同塵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전(前) 지계양감(知桂陽監)이자 장사랑(將仕郞)이며 시어사(侍御史)와 내봉공(內供奉)인 이구(李구<謬에서 言 대신 王>)의 부인(夫人)인 경조(京兆.지명) 김씨(金氏) 묘지명(墓誌銘)과 그 서문.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이자 수건주장사(守建州長史)인 동함(董咸)이 묘지문(誌文)과 전액(篆額.묘지명 제목)을 쓰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中外)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咸通) 5년(864) 5월29일 영표(嶺表.지명)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端公. 시어사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김씨 부인의 남편)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과 둘째 아들 경모(敬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현(산<삼수변에 産>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先塋)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昭王傅)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병병조참군(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부모)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大命)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秦嶺)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大道)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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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조사 진철대사비(廣照寺 眞澈大師碑)
시대 : 고려
연대 : 937년(태조20년)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228.8cm, 폭 115.1cm, 글자크기 2.8cm
출토지 :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소재지 :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최언위(崔彦撝) / 이환상(李奐相) / 상신(常信)
고려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이 광조사 진철대사탑비는 937년(청태4년)에 죽은 진철대사(이엄)의 부도비로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에 위치하고 있다.
비는 귀부(거북받침), 비신, 이수(용틀임)로 이루어졌다.
거북이의 네 발은 바닥돌을 힘있게 딛고 있고, 잔등의 6각 구갑무늬는 세겹으로 새겨 안에 왕(王)자를 새겼다.
거북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겨, 부릅뜬 눈과 사납게 벌린 큰 입 등은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비의 앞면에 만 해서체로 된 비문이 새겨졌다. 이수는 네 모서리 쪽으로 머리를 둔 네 마리의 용이 운동감이 넘치게 새겨졌며, 그 앞면 방형의 구획 안에 비명을 새겼다.
빗머리의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작은 연꽃잎들을 새겼다.
귀부를 비롯한 비의 조각은 전반적으로 힘차고 기백있어 고려 초기의 비 형식과 발전된 돌 조각기술을 잘 보여준다. (높이 3.7m) ---------------------------------------------
북한의 황해도 해주시 학현동에 있는 국보 문화유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고승이자 광조사의 주지였던 진철대사 이엄(利嚴)의 부도비로, 937년(고려 태조 20)에 조성했다. 높이 2m, 너비 1m, 받침돌 높이는 1m이다.
고려 건국에 숨은 공이 컸던 진철대사가 죽은 다음해에 태조 왕건이 진철(眞澈)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월승공(寶月乘空)이란 탑비명(塔碑名)을 짓고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대사의 도학과 생애를 적은 비문을 지어 새긴 것이다. 귀부(거북받침), 비신, 이수(용틀임)로 이루어졌다. 거북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으며, 두 눈은 부릅뜨고 입은 크게 벌린 상태이다. 거북 등 가운데에 직사각형의 비좌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비문은 비의 앞면에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광조사의 건립 배경과 진철대사의 일대기가 주 내용이다. 이수(螭首)는 낮은 구름과 힘찬 용무늬를 새긴 신라 말의 양식이다. 구조 전체가 당시 고려 건국기의 강건한 기백을 여실히 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의 석비로, 신라말~고려초의 역사와 언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금석문이다. 비의 찬자는 최언위(崔彦撝)이며 이환상(李奐相)이 썼다. 최언위는 최인연(崔仁渷)과 동일인으로 고려에 귀순한 후 개명하였으며, 이환상은 이환추(李桓樞)라고도 했는데, 『해동금석존고』에서 이오상(李吳相)이라 한 것은 이환상의 오기로 보인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로, 대체로 구양순(歐陽詢)계통의 서풍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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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廣照寺) 터에 현존하는 비이다. 신라 말의 선사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 마지막으로 형성된 산문인 수미산문(須彌山門)의 문호를 연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 경문왕 10, 870~ 태조 19, 936)의 생애를 기리는 탑과 함께 세운 비이다.
비문은 여말선초에 활동한 대표적 문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이환상(李奐相)이 썼으며, 상신(常信)이 새겨서 진철대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937년(고려 태조 20)에 세웠다. 현재 35행에 1행 77자의 비문 구성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가계와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출가와 수행 및 중국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어 귀국하고 귀국 후에 교화한 활동을 서술하였으며 입적과 비를 세우는 과정에 이은 명(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말 선사들의 출가와 수계 그리고 입당 수학과 귀국 및 당시 호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개경에 가까운 해주 수미산에 산문이 설립되는 과정을 통해 본 고려 태조의 불교계 정책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부터 금석 관련 문헌에 실려 알려졌고 탁본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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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 고(故) 교익진철(敎謚眞澈) (결락).
문인(門人) 원보(元輔)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권지(權知) (결락)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결락) 신(臣) 이환상(李奐相) (결락) 이 비문을 쓰고 전액(篆額)까지 쓰다.
옛날 육신보살인 혜가선사(惠可禪師)는 노자(老子)가 기회 있을 때마다 항상 천축(天竺)에서 탄생한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말하였으며, 공자(孔子)도 제자들로부터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성인이냐고 물음에 대하여 서방(西方)의 석가(釋迦)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화가 되는 대성인(大聖人)이라고 찬양하였다라고 들었다.
달마대사는 총지(總持)의 임완(林菀)이요, 불이(不二)의 천택(川澤)이다. 그는 멀리 중국에 선법(禪法)을 전파하고자 양(梁)나라로 건너와서 양무제를 만났으나 기록(機緣)이 투합(投合)하지 못하였다. 다시 위(魏)나라로 가서 효무제(孝武帝)를 만나고는, 아직 선법(禪法)을 펼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숭악(嵩岳)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였다.
법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법인(法印)을 전수(傳授)하지 않다가 비로소 대홍(大弘)인 혜가(慧可)를 만나 심법(心法)을 주고 겸하여 가사를 줌으로써 신표(信表)를 삼았으니, 이 또한 우담발화(優曇鉢花)가 세상에 한 번 핀 것과 같았다.
그 후 5조(祖) 홍인대사(弘忍大師)에 이르기까지 사자상승(師資相承)하면서 그 도가 더욱 존중되어 끊어지지 않았다.
6조 대감(大鑑)에 이르러서는 모든 종파가 함께 존숭(尊崇)하였으나, 그 후부터는 많은 영납(英衲)이 출세하여 분파대립(分派對立) 수견(殊見)이 심하게 되자 이때부터 신의전수(信衣傳授)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계혜능(曹溪惠能)을 존조(尊祖)로 삼아 법수(法水)가 길이 흘러 (결락) 하늘에까지 넘쳐 흘렀으니, 마치 노공(魯公)이 국정을 행함에 먼저 문왕(文王)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강숙(康叔)의 가풍 즉 국정지표는 주실(周室)의 제도를 존숭(尊崇)하였던 것과 같다. 인(仁)을 감당할 만한 그의 뛰어난 제자는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두 사람이었고, 그 휘하에 많은 도제(徒弟)가 배출되어 퍼져 나감이 끝이 없었다.
회양을 계승한 스님은 마조(馬祖)인 대적(大寂)이고, 행사(行思)를 사법(嗣法)한 이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다. 이어 석두는 약산유엄(藥山惟儼)에게 전하고, 약산은 운암담성(雲岩曇晟)에게, 운암(雲岩)은 동산양개(洞山良价)에게, 동산(洞山)은 운거도응(雲居道膺)에게, 운거(雲居)는 대사(大師)인 진철이엄(眞澈利嚴)에게 각각 전하였으니, 이와 같이 진리의 등불을 전하여 광명(光明)을 계승함으로써 사법존조(嗣法尊祖)의 사자상승(師資相承)한 본적에 더욱 빛나게 하였다.
스님의 법위(法諱)는 이엄(利嚴)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鷄林)사람이었다. 스님의 모국(母國)과 조상을 상고해 보니 본래 성한(星漢)의 후손이었으나, 먼 조상 때부터 점점 세도(世道)가 쇠락하였다. 사로(斯盧 : 신라)가 여러 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 가세(家勢)가 몰락하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웅천(熊川)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장(章)이니 깊이 운천(雲泉)을 사랑하여 부성(富城)의 들판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사는 소태(蘇泰)에서 탄생하였으니 신상(身相)에 많은 기이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죽마(竹馬)의 나이에도 마침내 (결락) 함이 없었다.
12살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 가서 덕양법사(德良法師)에게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품은 뜻을 피력하고 은사(恩師)스님이 되어 주길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로부터 반년 이내에 경·률·론 삼장(三藏)을 두루 통달하였다. 스님이 이엄(利嚴)에게 이르되 “너는 마치 유실(儒室)의 안생(顔生)이요, 석문(釋門)이 환희(歡喜)와 같으니 옛말에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을 자네에게서 증험하겠다” 하였다.
오랜 숙세(宿世)로부터 인(因)을 심은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할 때 어느 날 밤 꿈에 신승(神僧)이 와서 푸른 연꽃을 전해 주고는 이것으로써 영원히 징신(徵信)을 삼는다하였다.
이것은 곧 세간(世間)의 진로(塵勞)를 끊고 진리와 계합함을 상징함이니, 회임(懷妊)할 때 푸른 연꽃을 받은 것이 곧 이 뜻이라 하겠다. 중화(中和) 6년 본사인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도견율사(道堅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부터는, 유발(油鉢)이 조금도 기울어짐이 없었고 부낭(浮囊)이 조금도 새지 않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삼보(三寶) 중 하나인 사문(沙門)의 위(位)에 참여하여 오직 안거(安居)중에만 부지런히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지율정신(持律精神)을 마음에 새겼으니, 어찌 평생에 간절히 지키는데만 그쳤으랴.
그 후 돈독한 마음으로 도를 묻기 위해 서방(西方)으로 스승 찾기를 결심하고는 행장(行裝)을 꾸려 하산하였다.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건녕(乾寧) 3년에 이르러 마침 절강성(浙江省)인 전당(錢塘)으로 가는 사신 최예희(崔藝熙) 대부(大夫)를 만나 그 배에 편승(便乘)하게 되었다. 돛을 높이 내걸고 문득 파도를 넘어 얼마 되지 않아 은강(鄞江)에 이르렀다.
당시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가 선문(禪門)의 법윤(法胤)임을 듣고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바로 그의 문하에 나아가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서로 이별한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남이 그리 빠른가?”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일찍부터 친히 모신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다시 왔다고 말씀하십니까?”하였다. 대사가 묵묵히 입방(入榜)을 허락하시니 그윽이 서로 통함이 있었다.
그 후 6년 동안 수행하면서 혹한의 고통을 이겨 신심이 더욱 견고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시되 “도(道)는 본래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므로, 동산(東山)의 종지(宗旨)가 타인의 손에 있지 아니하며 불법(佛法)의 중흥이 나와 너에게 달려 있으니, 나의 도(道)가 동국(東國)으로 흘러가리니 이것을 생각하며 또한 이 뜻을 놓치지 말라”하였다. 스님은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을 이상(圯上)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고생을 하지 아니하고도 쉽게 법왕(法王)의 심인(心印)을 받았다. 그 후 영남(嶺南)과 하북(河北)으로 돌아다니면서 스투파(窣堵波)인 명찰(名刹)과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호외(湖外)와 강서(江西)를 행각(行脚)하면서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견(叅見)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항산(恒山)과 대산(岱山) 등을 답사하여 두루 순유(巡遊)하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며, 남쪽으로는 형산(衡山)과 려산(廬山) 등 발이 닿지 않은 산이 없었다. 그 후 여러 제후(諸侯)를 알현(謁見)하고는 목민(牧民)의 헌칙(獻勅)을 베풀고, 열국(列國)으로 다니면서 그 나라마다의 풍속을 살피기도 하며, 서방(四方)으로 선지식을 참방하여 오(吳)와 한(漢)나라까지 유력하였다.
천우(天祐) 8년에 이르러 뗏목으로큰 파도를 무사히 헤치고는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도달하였다. 이 때 스님은 부두의 한 구석에 배를 매어둔 채로 모든 것을 던져버리면서 잘 있으라 인사하고 이어 풍신(風神)인 병예(屛翳)에게 감사하고 동쪽으로 정처 없이 지나다가 김해(金海)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 김해부(金海府) 지군사(知軍事) 소공(蘇公) 율희(律熙)의 귀의(歸依)를 받게 되었으니, 승광산(勝光山)중 연하(煙霞)의 절경(絶景)에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정성스러운 큰 뜻을 경주하여 이 절에 계시도록 청하였다. 마치 도리(桃李)나무는 구경꾼에게 찾아 오라고 불러들이지 아니하나 저절로 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또는 벼와 삼밭처럼 대중이 열을 지어 모여들었다.
이 진경(眞境)에 주석한 지 어언 네 번의 성상(星霜)이 지나갔다. 스님은 마음으로 선림(禪林)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세상을 등지고 수도함에 답답하거나 불편해 하지는 않았으나, 지리적으로 적굴(賊窟)과 인접되어 수도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위험하거나 시끄러운 곳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곳에 머문 지 12년 만에 이석(移錫)하여 사화(沙火)를 거쳐 준잠(遵岑)에 도착하여서는 영동군(永同郡) 남쪽이며 영각산(靈覺山) 북쪽인 곳에 토굴을 짓고 잠깐 머물자 스님과 신도들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찾아와 귀심(歸心)하는 이가 많았다.
그 때 태조(太祖) 임금이 스님의 도덕(道德)이 천하에 으뜸이며 명성(名聲)이 해동(海東)을 뒤덮었음을 듣고, 스님을 직접 뵙고자 하여 자주 학판(鶴版)을 보냈다. 스님이 대중에 이르되 “임금이 다스리는 땅에 거주하는 자가 감히 왕명(王命)을 거역할 수 있으리요”하고는 “내가 임금을 보고자하는 것은 왕의 국사를 돕고 나아가 부처님께서도 왕에게 불법의 외호를 맡기신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서울에 가려 한다”하고, 곧바로 서울인 제양(帝壤)을 향했다.
임금은 거듭 대업(大業)을 빛나게 하였으니, 우러러 그 성덕(聖德)이 고산(高山)과 같음을 알고 태흥사(泰興寺)를 수축하여 스님이 계시도록 청하였다.
다음 해 2월 중에 특사인 전(前) 시중(侍中) 권설(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다시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맞이하여 주지(住持)하기를 청하였다.
곧 이어 예궁(蘂宮)에 처소를 꾸며 모시고 높이 연화좌(蓮華座)를 펴고 사자(師資)의 예로써 대우하여 공손히 찬앙의 예의를 바치니, 마치 서역의 마등(摩謄)스님이 일찍이 한(漢)나라 명제(明帝) 임금의 궁전에 오르고, 강승회대사(康僧會大師)가 비로소 오(吳)나라 임금 손권(孫權)의 수레를 탄 것과 같았다.
드디어 스님은 법상에 올라 불자(拂子)를 떨치면서 설법하니 임금(龍顔 : 용안)은 크게 기꺼워서 우러르는 마음이 신금(宸襟)을 감동케 하였다. 이 때 임금과 스님이 만나 서로 반가워한 것이 마치 물과 고기가 서로 좋아하는 듯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후 임금이 한가한 틈을 타서 스님이 있는 선비(禪扉)로 찾아가 묻기를, “제자는 공손히 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대하여 진솔한 간청을 드리고자 합니다”하고는 “지금은 나라의 역적들이 점점 시끄럽게 하고 인근의 적들이 서로 침범하는 것이 마치 초(楚)의 항우(項羽)와 한(漢)의 유방(劉邦)이 서로 버티는 것과 같아서 아직 그 승부(勝負)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기(三紀), 약 36여 년 동안 항상 이흉(二兇 : 궁예와 견훤)이 있어 마음에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점점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
과인(寡人)이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윽이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으나, 만약 살생을 주저하거나 적을 업신여겨 마치 구경하듯 방치해 두면, 나라는 물론 자신까지 위태롭게 하는 앙화(殃禍)를 부를까 두렵습니다.
스님께서는 만리(萬里)의 먼 길을 사양하지 마시고 오셔서 삼한(三韓)을 교화하고, 온 나라 강산(江山)의 곳곳마다 전쟁에 휩싸여 불타고 있음을 구제하시길 바라오니, 좋은 말씀이 있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시길 “대저 도(道)란 마음에 있고 밖에 있지 않으며, 나를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요, 결코 타인으로 말미암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제왕과 필부(匹夫)의 닦을 바가 각각 다르지만, 임금께서는 비록 군사를 동원하여 적과 싸우더라도 항상백성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왕이란 본래 사해(四海)로써 집을 삼고 만민을 아들로 여겨 무고한 사람은 죽이지 말고 죄가 있는 무리만을 엄선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곧 널리 중생을 제도함이라고 합니다”하니, 법문(法門)을 들은 임금이 책상을 어루만지면서 찬탄하되 “우리 속인들은 심원한 진리가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아서 미리 염라대왕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참으로 천상과 인간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하였다.
스님은 다시 당부하기를 “가능한 한 사형할 죄인의 죽이는 시기를 완화하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연민히 여겨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라”하였으니, 이것은 곧 스님의 덕화(德化)였다.
그 후 스님은 서울인 경련(京輦)에 머물러 여러 해를 지났는데 항상 산천에 마음이 끌리고 열반(涅槃)할 곳을 선택하여 안개 속에 숨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임금이 스님의 도정(道情)을 막지 못하여 그윽이 서로 이별함을 아쉬워 하다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마침내 허락하였다.
스님께서 임금과 작별하는 때에 슬픈 소감을 피력하여 “어진 임금의 크나 큰 서원(誓願)은 불법(佛法)을 지켜나가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멀리까지 외호(外護)하는 은혜(恩惠)를 드리워 창생(蒼生)이 영원히 복(福)을 쌓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후 장흥(長興) 3년에 개경(開京)의 서북이며 해주(海州)의 남쪽에 신령스런 봉우리를 택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광조사(廣照寺)라 이름하고는 이곳에 스님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약간의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이 절에 주석하니 배우려는 학도가 방을 채우고 참선하는 무리들이 당(堂)에 가득하였다. 마치 법융선사(法融禪師)가 북해(北海)에 돌아가서 머문 것과 같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가진 것과 같다고 하겠다.
스님은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느니, 마치 거울이 사람의 얼굴을 비추되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하였다. 문하의 대중은 삼밭 같고 그의 뜰은 저자거리와 같았다.
그런 까닭에 분위(分衛)인 걸식(乞食)을 하지 않아도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진 것과 같은 사정은 면하였다.
이에 관장(官㽵)은 삼장(三㽵)으로 나누었고, 공양(供養)은 사사(四事)로 구분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당군(當郡)과 주변의 인주(鄰州)가 모두 깊은 신심(信心)을 내었다.
아울러 청청한 행을 닦았으니 곧 담복화(薝蔔花)가 보배나무 수풀 속에 의지한 것과 같았으며, 전단향 나무가 암마라과수의 무리에 섞인 것과 같았다.
스님이 먼저 와서 둘러본 다음 여러 대중이 함께 산을 살펴 터를 골랐다. 스님이 어느 날 혼교(魂交)에 이르러 신(神)이 와서 예배하고 공양하니 마치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옥천사(玉泉寺)에 있는 천태지자(天台智者)에게 공양을 올리던 것과 같았으며, 정성을 표함에 있어서는 왕이 광조사(廣照寺)를 지어드린 것이 마치 혜원법사(惠遠法師)에게 려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올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 신령스러운 일이어서 귀의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류라고 하겠다.
어느 날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되 “나 이제 법연(法緣)이 다하였으니 반드시 죽어 타방(他方)으로 떠나리라. 내가 임금과는 옛부터 인연이 있었으니 이제 마땅히 마지막으로 왕을 만나 결별(訣別)의 인사를 하려 한다”하고는 행장(行裝)을 꾸려 하산하여 서울에 이르렀다. 때마침 왕은 잠깐 용패(龍旆)를 앞세우고 마진현(馬津縣)에서 죄인을 문책하고 있었다.
스님은 병이 심하고 매우 허약함에도 특별히 왕을 만날 기회를 내어 찾아갔으나, 왕이 있는 리두(螭頭)인 마진(馬津)까지는 갈 수가 없어 입적(入寂)을 미리 알리려는 마지막의 기회는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아난(阿難 : 迦葉이라 함은 잘못된 것)이 열반(涅槃)에 들기 전에 아사세왕과 약속하기를, 서로 누구든 먼저 죽게 되면 찾아가서 고별(告別)하기로 한 언약을 지키기 위해 왕을 찾아갔으나, 문지기가 왕이 주무시고 있다 하여 만나지 못하였던 유한(遺恨)과 화하(華夏)의 백양(伯陽)이 임종전(臨終前)에 관윤(關尹)인 윤희(尹喜)를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한 슬픔과 같을 뿐이겠는가.
그 다음날 가마를 타고 오룡산(五龍山) 중턱에 이르러 모든 제자를 불러 모으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엄한 훈계를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는 유훈(遺訓)을 남기었다.
청태(淸泰) 3년 8월 17일 중야(中夜)에 당사(當寺)의 법당(法堂)에서 엄연(儼然)히 입적하니, 속세 나이는 67세요, 승랍은 48이었다. 이 때에 태양은 처참하고 바람도 처참하였으며, 구름은 수심에 잠긴 듯하였고, 시냇물은 울음을 머금은 듯하였다.
문하(門下)의 스님들도 흠모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창자를 오려내는 듯 슬퍼하였다.
그 달 20일에 신좌(神座)인 영구를 본산(本山)으로 옮겨 절의 서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백보(百步)쯤 되었으며 이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장사지낼 때 사서(士庶)는 계곡을 메웠고, 향화(香華)는 골짜기에 가득하였으니, 마지막을 보내는 의례의 성대함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임금이 사방(四方)으로 순행(巡行)하다가 문득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전해 듣고, 대들보가 부러지는 듯한 아픔으로 간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안광(眼光)을 잃은 슬픔이 한층 더하였다. 특명으로 친관(親官)을 보내어 멀리서 조의(吊儀)을 표하였다.
스님의 풍모와 정신은 하늘로부터 품 받았으며, 지혜는 날로 새로웠다. 날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잘 알아서 뭇 묘리를 마음에 지녔고, 숙세(宿世)부터 많은 선근(善根)을 심어서 뛰어난 기틀에는 순수함을 간직하였다.
그러므로 살아감에 오직 착하게 살도록 인도하고, 미묘(微妙)한 법문(法門)으로 몽매한 중생(衆生)들을 제도하여, 자성(自性)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마치 산이 빛나고 물이 아름다우면 그 수려(秀麗)한 기운을 감추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승광산(勝光山)에서 수미산(須彌山)에 이르기까지이 두 곳에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깊이 감추어 두었던 소중한 보배를 나누어 주었고 중국 삼하지방(三河地方)으로 순례(巡禮)할 때에는 모두에게 마니(摩尼)의 보배를 보여주었다. 전업제자(傳業弟子)인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비(貞朏), 경숭(慶崇) 등과 아울러 상족(上足)에 오른 이들은 모두 전심(傳心)을 감당하였고, 어떤 스님은 니부(尼父)의 인비(仁悲)를 행하기도 하고, 어떤 제자는 복상(卜商)처럼 일생동안 가르침을 의무로 하기도 하였건만, 한탄스러운 것은 보탑(寶塔)은 비록 높이 솟아있으나 스님의 크신 덕을 홍명(洪銘)에 새기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후(不朽)의 연(緣)인 비를 세우기 위하여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좌승상(左丞相)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전왕자태상(前王子太相)인 왕유(王儒)와 전시중(前侍中) 태상(太相) 이척량(李陟良)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정승휴(鄭承休) 등은 모두 하(夏)나라 우(禹)임금과 같은 선정(善政)을 본받았으며 항상 은(殷)나라의 이윤(伊尹)과 같은 충신들이 있어 진실로 인국(仁國)의 금성(金城)과 탕지(湯池)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법성(法城) 방벽이며 요새였다.
소현대통(昭玄大統) 교훈(敎訓)과는 쇠도 끊을 정도의 굳은 우정으로 의기가 투합하여 진리의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함을 느끼고, 선(禪)과 교(敎)를 빛내신 큰 이름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왕이 조칙(詔勅)으로 그러리라 하였다. 그리고 익호(謚號)를 진철대사(眞澈大師), 탑명(塔名)을 보월승공지탑(寶月乘空之塔)이라고 추증하고, 하신인 나에게 명하였다.
“스님의 고상하고 위대하신 행적(行跡)을 영원히 선양토록 하라”하였다. 언휘(彦撝)는 재주가 연석(鷰石)에 부끄럽고, 학문 또한 형설(螢雪)의 공을 쌓음이 없으므로 사양하였다. 유한(有限)의 미재(微才)로써 스님의 무위법(無爲法)에 통철하신 위대하고 빛나는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과 같이 아득하고, 산을 붙잡는 것처럼 어려워서 묵묵히 그 높고 깊음을 헤아려 보았으나,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도(門徒)인 현조(玄照)스님이 일찍 금구(金口)인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고, 또 한편 스님의 옥음(玉音)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에도 귀문(龜文)을 재촉하여 여러 번 누추한 나의 집을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초상(抄狀)에 없는 일을 얻어 듣게 되었으니, 마치 밝은 달이 허공에 떠 있고, 맹풍(猛風)이 노을을 쓸어버린 것과 같이 확연하였다.
오직 두터운 뜻을 진술하여 스님의 공적(功跡)을 찬양하게 되었으니, 끝으로 임금께서는 이 비문(碑文)을 읽어보시고 돌아가신 스님에 대한 유한(遺恨)을 잊으시길 바라며 아울러 크고 우뚝한 이 비(碑)가 문인(門人)들의 절학(絶學)의 근심과 슬픔을 위로하길 바라노라. 사실을 가장(假裝)하지 아니하고 있었던 일을 진실하게 적었다.
다시 명(銘)하여 가로되
스님은 선종의 적윤적손(嫡胤嫡孫)으로써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당당한 그 모습.
번뇌를 파(破)해주는 인중(人中)의 사자(師子)이며
우주를 비추는 세상의 법왕(法王)이로다.
깊고도 오묘한 현관(玄關)의 문턱이요
성불(成佛)의 길로 찾아가는 나루터일세.
천축(天竺)에서 전해온 부처님 법(法)을
해동의 곳곳에 전파하였네.
위대하신 우리의 진철대사님!
요동의 왼쪽에서 태어났지만
어찌 국사가 협루(狹陋)하다고 하여
동이(東夷)니 중하(中夏)이니 논할 수 있겠는가.
얼음같은 자태에 눈빛 같은 피부여!
언설(言說)을 봄바람처럼 온화하시고,
입당(入唐)의 구법(求法)에 배를 탔음이여!
노도 같은 설랑(雪浪)을 헤쳐 가면서
서래밀지(西來密旨)의 도를 배우기 위해
운거도응(雲居道膺)의 회하(會下)를 찾아갔도다.
소견(所見)을 인가하고 입실을 허락받아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는
이름난 명승고적 샅샅이 찾아가서
명안종사(明眼宗師) 남김없이 친견하였네.
험난한 바닷길로 본국에 와서는
홀연히 태조 임금 귀의(歸依)를 받았도다.
임금의 초청으로 궁중에서 설법하니
군신상하의 숭앙함이 비길 데 없네.
해주(海州)의 수미산에 총림(叢林)을 열었으니
조계종(曹溪宗)의 정통법맥(正統法脈) 이어 받았네.
높고도 거룩하신 진철 대종사(大宗師)님!
모두가 합장하고 자부(慈父)라 일컬었네.
예고 없이 갑자기 열반에 드시니
하늘도 슬퍼하여 비눈물을 뿌렸도다.
임금이 흠앙하여 시호를 내리시니
위대하신 스님의 법은에 보답함이라.
넓고도 깊은 큰 자비 드리우시어
광조사(廣照寺)의 선우(禪宇)를 길이 비추어 주소서.
청태(淸泰) 4년(937) 12월 20일에 세우고,
각자(刻字)는 군윤(軍尹)인 상신(常信)이 글자를 새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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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李」
奐相 ☐☐☐書幷篆額」
昔者肉身菩薩惠可禪師每聞老生談天竺吾師夫子說西☐☐☐☐☐☐☐☐☐☐☐☐☐☐☐☐☐☐☐☐☐☐☐☐☐☐☐☐☐☐達摩大師乃總持之林菀不二之川澤也於是遠賷祖法☐☐」
梁而又遊北魏朝往尋嵩岳非人不授始遇大弘因物表心付衣爲信猶亦優曇一現洎于五葉相承其道彌尊不令斷絶格於大鑒玄學咸宗殊見所生信衣斯止是故曹溪爲祖法水長流波☐☐☐」
滔天浩浩猶魯公之政先奉文王康叔之風以尊周室則知當仁秀出者唯二曰讓曰思寔繁有徒蕃衍無極承其讓者大叔嗣其思者石頭石頭傳于藥山藥山傳于雲巖雲巖傳于洞山洞山傳于雲」
居雲居傳于大師傳法繼明煥乎本籍且曰」
大師法諱利巖俗姓金氏其先雞林人也考其國史實星漢之苗遠祖世道凌夷斯廬多難偶隨萍梗流落熊川父章深愛雲泉因寓富城之野故 大師生於蘇泰相表多奇所以竹馬之年終無☐☐」
年十二往迦耶岬寺投德良法師懇露所懷求爲師事自此半年之內三藏脩探師謂曰儒室之顔生釋門之歡喜是知後生可畏於子驗之者矣則非久植宿因其孰能至於此然則母氏初於有娠」
夢神僧來奇靑蓮永爲徵信則知絶塵合契懷日同符中和六年受具足戒於本寺道堅律師旣而油鉢無傾浮囊不漏桑門託位不唯守夏之勤草繫懸心寧止終年之懇其後情深問道志在觀方結」
甁下山飛錫㳂海乾寧三年忽遇入浙使崔藝熈大夫方將西泛伌跡而西所以高掛雲颿遽超雪浪不銷數日得抵鄞江于時企聞雲居 道膺大師禪門之法胤也不遠千里直詣玄關大師謂曰曾」
別匪遙再逢何早 師對云未曾親侍寧噵復來大師默而許之潜愜元契所以服勤六戴寒苦彌堅大師謂曰道不遠人人能弘道東山之旨不在他人法之中興唯我與汝吾道東矣念玆在玆」
師不勞圮上之期潛受法王之印以後嶺南河北巡禮其六窣堵波湖外江西遍叅其諸善知識遂乃北遊恒岱無處不遊南抵衡廬無山不抵謁諸侯而獻勑投列國以觀風四遠叅尋遍於吳漢迺於」
天祐八年乘槎巨寖達於羅州之會津此際 大師一自維舟偏宜捨筏珎重屛翳邐迤東征爰有金海府知軍府事蘇公律熈選勝光山仍修堂宇傾誠願海請住煙霞桃李無言稻麻成列一栖眞境」
四換周星大師雖心愛禪林遁世無悶而地連賊窟圖身莫安所以亂邦不居於是乎在十二秊途出沙火得到遵岑永同郡南靈覺山北尋謀駐足乍此踟蹰緇素聞風歸心者衆矣」
今上聞 大師道高天下聲盖海東相對 龍頤頻飛鶴版 大師謂衆曰居於率土者敢拒 綸音儻遂朝天者須霑顧問付囑之故吾將赴 都所以便遂 皇華來儀帝壤 上重光大業仰止」
高山所以脩葺泰興請停慈盖粵二明年二月中特遣前侍中權說太相朴守文迎入舍郡內院虔請住持無何逈飭 藥宮高敷蓮座待以師資之禮恭被鑚仰之儀猶如西域摩騰先陟漢皇之殿康」
居僧會始昇吳主之車遂以摩尼發揮 龍顔欣悅其於瞻仰偏動 宸襟此時魚水增歡不可同年而語哉他時乘閒之夕略詣禪扉門曰弟子恭對 慈顔直申素懇今則國讐稍擾隣敵交侵猶似」
楚漢相持雄雌未决至於三紀常備二凶雖切好生漸深相殺 寡人曾蒙佛誡暗發慈心恐遺玩寇之仍致危身之禍 大師不辭萬里來化三韓救爇崑崗昌言有待對曰夫道在心不在事法由」
己不由人且 帝王與匹夫所修各異雖行軍旅且慜黎元何則王者以四海爲家萬民爲子不殺無辜之軰焉論有罪之徒所以諸善奉行是爲弘濟 上乃撫機歎曰夫俗人迷於遠理預懼閻摩至」
如 大師所言可與言天人之際矣所以救其死罪時緩虔劉憐我生靈出于塗炭此則 大師之化也其後 大師自栖京輦頻改歲時每以注目山川欲擇終焉之地隱霧之志懇到聞☐天 上莫」
阻道情潛憂生別思惟良久久乃許焉 大師臨別之間特披悲感云仁王弘誓護法爲心遙垂外護之恩永蓄蒼生之福所以長興三年下 敎於開京西北海州之陽遽擇靈峯爲搆精舍寺名廣照」
請以居之是日 大師略領門徒就栖院宇學流盈室禪客滿堂若融歸北海之居疑惠結東林之社所以誨人不倦如鏡忘疲其衆如麻其門如市然則不資分衛唯免在陳此乃官㽵則分錫三㽵供」
事則具頒四事况復近從當郡傍及鄰州咸發深心並修淨行則知花惟薝蔔如投寶樹之園林是栴檀似赴菴蘿之會 大師先來於踏地脩自餘山師至魂交神來頂謁獻粲輸玉泉之供披誠指廬阜」
之居其爲神理歸依皆如此類 大師謂衆曰今歲法緣當盡必往他方吾與 大王曩有因緣今當際會須爲面訣以副心期便挈山裝旋臻 輦下此時 上蹔駈龍斾問罪馬津 大師病甚虛羸」
任特不得詣螎頭留語人雞足有期豈惟昔在竺乾迦葉別闍王之憾曾於華夏伯陽辭關令之嗟而已矣哉明日肩輿到五龍山頤使招諸弟子云佛有嚴誡汝曹勉旃淸泰三年八月十七日中夜順」
化於當寺法堂俗年六十有七僧臘四十有八于時日慘風悲雲愁水咽門下僧等不勝感慕俱切攀號以其月二十日奉遷神座於本山窆于寺之西嶺去寺三百步雅奉遺敎也士庶闐川香華溢谷」
送終之盛前古所無者矣」
上乃旋在省方忽聞僊化爰切折梁之慟亦增亡鏡之悲自此特命親官遙申吊祭 大師風神天假智惠日新生知而衆妙會心宿植而玄機藏粹所以事惟善誘譚以微言引彼蒙泉歸於性海其奈」
山輝川媚秀氣難逃故始自光山終於彌嶺可謂栖遲兩地各分韞匵之珍戾止三河俱示摩尼之寶者矣 傳業弟子處光道忍貞朏慶崇並昇上足皆保傳心或早牽尼父之悲或堅護卜商之業所」
恨寶塔雖聳洪銘未刊然則扣不朽之緣於在家弟子左丞相皇甫悌恭前王子太相王儒前侍中太相李陟良廣評侍郎鄭承休俱早調夏鼎常艤殷舟誠仁國之金湯亦法城之墻壍與昭玄大統敎」
訓斷金相應深感法恩請贈大名以光禪敎 詔曰可故追諡眞澈大師塔名寶月乘空之塔申 命下臣式揚 高躅彦撝才慙鷰石學謝螢光以有限微才記 無爲景行杳猶行海難甚緣山潛測」
高深莫知涯際爰有門徒玄照上人夙傳金口親奉玉音因趣龜文數臨蝸舍所以得於無得聞所未聞譬凉月之遊空如猛飊之掃靄唯以敷陳厚旨齊贊成功所冀翠碣披文感 國主亡師之憾豊」
碑相質嗟門人絶學之愁言莫愼諸直書其事銘曰」
禪宗之胤代代堂堂 人中師子世上法王 玄關閫閾覺路津梁 遠從天竺來化海鄕 偉矣吾師生於遼左 何陋之有豈論夷夏 氷姿雪膚言說溫雅 乘査兮雪浪中 問道兮雲居下」
命之入室仍以傳心 栖遲道樹偃仰禪林 鯨津近棹忽遇知音 便昇金殿欽仰殊深 卜地海壩曹溪接武 唯我導師謂之慈父 忽歎泥洹天收法雨 贈諡兮感法恩 流慈兮光禪宇」
淸泰四年十月二十日立 刻字軍尹常信」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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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金閼智(김알지)의 출생년은?
金閼智(김알지)의 사망년도는 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 7월입니다. 이에 출생년을 추정해 보면..
삼국유사 金閼智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己) 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庚申= AD60年生. (中元六年은 존재하지 않는다. 中元二年(중원2년)= AD57년. 후한 광무제 丁巳(정사)년)
삼국사기에서는 탈해왕 9년, AD65년(乙丑), 3월달 출생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탈해왕 4년, AD60년(庚申), 8월 4일로 나와 있어, 두 사서가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庚申(경신)년. *삼국사기는 乙丑(을축)년.
*庚申(경신)= AD60年生, 金閼智(김알지)는 96살 사망함. *乙丑(을축)= AD65년生, 金閼智(김알지)는 91살 사망함. *癸亥(계해)= AD63년生, 金閼智(김알지)는 93살 사망함.
AD55년 乙卯 建武三十一年 儒理尼師今三十二年 AD56년 丙辰 中元元年 儒理尼師今三十三年 AD57년 丁巳 中元二年 脫解尼師今元年 AD58년 戊午 永平一年 脫解尼師今二年 ㅣ AD60년 庚申 永平三年 脫解尼師今四年 ㅣ ㅣ AD63년 癸亥 永平六年 脫解尼師今七年 ㅣ AD65년 乙丑 永平八年 脫解尼師今九年 ㅣ AD69년 己巳 永平十二年 脫解尼師今十三年 AD70년 庚午 永平十三年 脫解尼師今十四年 AD71년 辛未 永平十四年 脫解尼師今十五年
삼국유사 주석을 다시 보면, 一云 中元六年誤矣 中元盡二年而己 = 한편, 中元6년은 잘못이다. 中元은 단지 2년뿐이다. (盡~ 而己= 단지 ~일 뿐.) *AD63년 癸亥 永平六年 AD63년을 출생시기로 보시는 분도 있습니다.. '中元六年'에서 '六年'만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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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득성 연원(金氏 得姓 淵源)
김알지 신화(金閼智 神話)
김알지 신화는 고려 인종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와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으며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脫解王代) 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다.
위 두 고서(古書)에서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금석원과 추사김정희의 해동비고에 있는 문무욍비문에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의 비문에도 태조는 성한왕이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손인 흥덕왕 비편에도 태조 성한왕이 흥덕왕의 24대조라 하였다.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묘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문정창(文定昌)씨는 그의 저서 <伽倻史>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磾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소호지윤 칙남가야시조 수로여신라 동성야(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지재생 - - - 후 제천지윤 전7엽(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후(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이 있는데 이 비문 중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侯 祭天之胤傳七葉」에서 (투)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金日磾를 가리킨다.
金日磾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전한서(前漢書)와 열전(列傳)에 있고 중국 서안(中國 西安)에 김일제(金日磾)의 무덤이 있는바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金日磾)를 문무왕의 비문에 『우리 조상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 김일제 일족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김왕망(金王莽)이 쿠테타로 한(漢)을 멸하고 신국(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유수(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다고 추찰된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태봉(胎峰)에는 태대(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화천(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신제국(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오수전(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청예(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청양(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존호(尊號)가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보주(普州)와 어떤 연관(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경(漢鏡),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은(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괘사(卦辭)를 얻은 점 등은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는 동이족(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소호(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근년에 발굴된 ‘대문구문명 당시에 이미 소호(少昊) 나라가 있었으며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고 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소호(少昊)다. 경신(庚申)은 금(金)의 날로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
소호국의 국조 지(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경신일(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고신씨(高辛氏)의 제(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서지방에서 흉노 모돈씨)(匈奴 冒頓氏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120년 한나라의 포기장군 곽거병(郭去病)이 농서지방에 쳐들어갔을 때 휴도왕(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김일제가 그의 아우 윤(倫)과 함께 모친 알씨(閼氏)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무위군(武威郡)이다. 포로가 된 김일제는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흉노왕비 알씨(匈奴王妃 閼氏)"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김일제를 후(候)로 봉(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 시호(諡)號를 경후(敬候)라 하였고 아들 상(常)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봉거(奉車)가 되고 건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선제(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광록훈(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 當의 아들 성(星)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전한서(前漢書)의 왕망 전(王莽 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때에 후(候)가 되고 보국(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김씨가(金氏家)에서 봉(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김일제의 아우인 윤(倫)의 아들 안상(安上)은 선제(宣帝)때 궐내(闕內)의 후(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중낭장(中郞將), 광록대부(光祿大夫),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8세에 태자(太子)가 되자 김창(金敞)이 중서자(中庶子 즉 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원제(元帝)가 즉위할 때 김당(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김창(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제(成帝)때 모두 시중기도위(侍中騎都尉), 영삼보(領三輔), 호도위(胡越騎)가 되었다.섭(涉)에게 탕(湯), 융(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제조장대부(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섭(涉)의 종부(從父) 흠(欽)의 아우 천(遷)이 상서령(尙書令)이 되니 이제 한(漢)나라 왕실(王室)은 金氏의 권력하(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에 왕망(王莽)의 군형제(群兄弟 즉 六寸)는 모두 장군(將軍) 겸 후(侯)가 되었는데 오직 망(莽)의 부친 만(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백부(伯父) 대장군 봉(鳳)이 병으로 누우매 망(莽)이 극진히 시탕(侍湯)하니 봉鳳이 천거하여 망(莽)을 황문랑교위(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보정(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성제(成帝)가 즉위하니 제(帝)의 생모 김씨(生母 金氏)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후(候)로 봉(封)하였다.
평제(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망(莽)에게 서정(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망(莽)은 11세의 평제(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황후(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평제(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유영(劉영)을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 황제(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왕망(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유수(劉秀)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시종 공손취(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 성봉 - 출처 : 광산김씨 전자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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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흉노왕>과 관련해서 의문점들....!!!
출처 : 오란다 2009.04.24 15:43 http://blog.daum.net/12409/18091011
알타이족과 브라야트, 투바공화국 몽고의 역사를 조금씩 보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신라인 고려인과의 교류 등 금관의 형태와 의복 등에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김일제는 흉노의 <선우> 아래 관직의 휴도왕의 아들로 한나라에게 정복당한 노예에서 관리로 또, 그의 후대 7대까지 내려오는 중국의 중효집안으로 유명한데.......중국의 서역경략의 역사속에 있는 사람을 신라와 연관해야 할까? 이는 의문이다....또 현재 중국에 생존하는 金氏가 한국의 김씨와 동일하다고 보아야하는데....그들의 족보와 한국의 족보는 많은 차이가 있는것 같다....
1. 한국에서 <휴도왕>에 관해 흉노라는 집단의 최고 권력자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흉노의 최고 권력자는 <선우>로서 그 밑에 관리로 <휴도왕>, <곤사왕>등의 체계를 가진것이 흉노국가의 권력층이다.
2. 김일제와 관련해서 <김알지>는 김일제의 어머니로 신라의 전설과는 일치하지 않는면이 많다.
역사적인 중국책과 한국의 책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틀린부분이 있다. 김일제의 어머니는 閼氏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흉노족의 풍습 등을 연관한다면 신라와 틀린것은 사실이다...
3. 김일제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연대가 신라와 차이가 난다. 실제로 김일제는 한나라 무제때 대신으로 곽병과 함께 생존했던 인물이다. 중국의 김씨중 이들의 자손들은 <족보>책을 보면 <일제 / 론 - 운 - 건 - 창- 탕 -선.....>으로 1대부터 13세까지의 실존연대가 AD220년인데 신라의 기록과 연대가 맞지 않는다.
특히 중국의 소호금천의 김씨와 신라의 김씨와 연계를 따지는것은 중화사상에 가까운것 아닌가? 라는 의문도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김일제의 5세손을 성한왕이라고 하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 김알지의 7세손이 미추왕이라면 년대는 262년 전후이다. 그런 위치라면 한대가 그 당시에는 50세에 아들을 놓아야 하고 김일제는 실제로 49세에 죽었다....그런데 2세대의 차이가 100년에 가까워야 수학적으로 성립한다...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의 족보책은 김일제의 13세손이 이미 220년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년대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어떤이는 가야의 김씨가 탕과 관련 되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의문이다.
중국의 김씨중 김일제와 관련되는 김씨는 140년간 한나라 무제이후 7대를 중국의 왕을 모신 충효의 집안으로 이름이 높다. 따라서 이 부분과 맞지 않는점이 많다.
참고자료 : http://www.jszq.cn/
이외에 서역과 관련된 문헌들....
중국에서 大姓이 아닌 金氏의 역사는 사료적으로 부족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집안과 신라김씨를 연관시켜 단정짓는것은 사료적인 연구가 많이 필요할것 같다...그리고 중국인들도 김씨가 많이 있지만 그들과 한국의 성씨를 같이 보지 않는다는것이 그 들의 생각인것 같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중국에 지금도 족보책을 쓰면서 생존하고 있는데 그들 중국인들을 신라김씨의 후손 집안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종사를 이야기 한다면 인정 가능할것이다. 중국에서 金氏를 족보로 하는 집안은 많았다. 김일제의 후손이 本을 달리하면서 여러 집안이 있었는데 한나라때 큰 벼슬을 하였고 7대가 천자<황제>를 모셨다는 점이 역사적 사료를 그 나마 잘 유지하였던것같다....후대에 한국과 연관하는것은 아직 사료적 연구가 필요할것 같고 신라김씨와의 역사적인 사료의 차이점을 살펴야 한다....
*** 중국의 金氏
1) 소호금천의 金氏....중국 황제의 후손 2) 휴도왕 일제의 후손들....<南溪寨 金氏 등등> 3) 오대 10국의 류씨에서 金씨로 변함. 4) 남북의 羌族의 金氏 <신당서: 한반도에도 있다고 하는데????> 5) 당나라때 신라의 김씨 6) 명나라때 몽고왕자의 관련된 김씨 7) 송원나라때 金이상 <劉氏에서 개명 함.> 8) 청대 문학가중에서 김성탄이 張氏에서 개명 함. 9) 청나라때 애신각라의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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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 왕족은 흉노의 후손이라 했을까
<칼럼>후광 효과와 권력의 정체성 김헌식 문화평론가(codessss@hanmail.net)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흉노족만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대신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후 묵특(冒頓, BC 209~174)은 흉노 부족들을 통합해 단일 세력으로 만들었고, 느슨했던 부족연맹체를 강력한 유목제국으로 만들었다.
BC 200년, 한 고조(漢高祖, BC 206~195)는 흉노족을 공격했다.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한 고조에게도 흉노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묵특의 군대는 평성(平城, 현 산서성 大同)에서 오히려 고조의 군대를 완전 포위했다. 묵특은 고조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놓아주었다. 그 뒤에 한나라와 흉노는 유화정책의 국면에 접어든다. 한나라는 흉노에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했다. 흉노들은 한나라를 아우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 무제는 화친정책이 막대한 비용을 소모시키며, 굴욕감을 준다고 여겨 BC 133년, 흉노와 맺은 유화정책을 폐기했다. BC 117년에는 흉노를 공격해 몽골 북부로 내몰았다. 기원전 99년, 10만 흉노를 5천명 군사로 대적하다가 투항한 한나라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기도 한다. BC 108년 한 무제는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린다며, 고조선을 정복했다.
고조선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요하 하류 유역과 한반도 서북쪽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결국 흉노와 고조선은 별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한 무제의 처지에서 같은 종족으로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흉노의 신앙은 하늘을 받들고, 특정한 산을 신성시했다. 곰 숭배 전통이 있다. 이는 단군신화를 보면 잘 나타나는 점이다.
최근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임을 구체적으로 적은 재당 신라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서안에서 최근 알려진‘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그것이다. 기록은 신라 김씨들이 한나라 제후였던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담고 있다. 사실 이 같은 발견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대성, 이종호, 김병모 교수 등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제기되어온 사실이고, 최근에는 KBS ´역사추적´을 통해 영상화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시작은 ‘문무대왕비’였다.
1796년(정조 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비석을 발견했다. 그것은 ‘문무대왕비’였다.비문에 적힌 내용은 홍양희, 유득공, 김정희 등을 놀라게 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끈 것은 문무왕 김법민의 오랜 조상 여섯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투후(宅侯)가 7대를 전해, ´15대조 성한왕(星漢王)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성한왕은 신라의 태조이며 신라의 태조는 김알지다. 문제의 단어는 ‘투후(秺侯)’였다. <한서>에 이 말이 등장한다. ´김일제전´에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封金日磾爲秺侯)"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김일제(B.C 135년에서~85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 무제의 포로가 되었다가 흉노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서한에 귀화한 인물이다. 이른바 김성한은 김일제의 7대손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성한은 김알지다.
과연 김알지는 김일제의 자손일까? 우선 그들이 한반도에 오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알지 = 김일제 후손이라는 주장은 대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나라에서 김일제 일족은 명문세가였다. 중요한 것은 왕망(王莽, BC 45~AD 23)이다. 김일제의 4대손 김당은 왕망과 동복형제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김당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 즉 김당의 이모부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왕망은 김일제 집안과 일가였다는 말이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薪)을 세운 인물이다. 나아가 왕망을 내세워 나라를 전복시킨 것이 김씨 일가인 것이다. 유수(劉秀:後漢 光武帝)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15년만에 신나라는 망하고 만다.
이때 위험해진 김씨 일파들이 한반도 남부로 건너와서 가락국을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이 신라 김씨의 뿌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락(駕洛)은 ‘낙양을 정벌(제어)하겠다는 의미라고 보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대로라면, 한족의 한나라를 무너뜨린 셈이 되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민족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이 된다.
언제인가 중원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진(秦)나라 진백 즉 진목공을 선조로 든 것은 여수의 난생설화가 있는 진나라(사기 진본기)와 김알지의 난생설화가 있는 신라의 동일성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진나라와 신라는 모두 소호씨를 조상으로 본다. 더구나 진백은 하족 그러니까 .임금을 시조로 황제족을 자처하는 오랑캐를 정벌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虩事蠻夏). 삼국지’ 위지 동은 진한(辰韓)의 6촌 촌장을 ‘망한 진나라의 유민(秦之亡人)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다. 그간 이러한 주장에서는 최초로 김씨성을 받은 것이 김일제라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일제 이전에도 김씨는 존재했다고 한다. 또한 성(星)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5대 투후이다. 따라서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김일제의 7대손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김일제 후손들은 7대 동안 투후에 봉직했기 때문에 한반도로 이주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들어서 김씨계가 자신들의 가계도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가해진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직접 자손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없고, 김일제 이후의 조상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김일제만 언급되고, 그 직계 후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의심스럽다. 마치 족보를 위조한 듯 싶다.
중국 본토에서 한반도에 남쪽 해안에 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삼국사기’는 진한 6부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했다. 당시의 교통 수단 상황을 볼 때 고조선 유민이 이동한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김씨부인 묘명에서 왕망의 신이 망하고 요동으로 이주해가서 살았다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에 살다가 다시 남하해서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다는 경로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라에서 김씨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6세기다. 중국과 적극적인 관계모색을 하는 가운데 김씨 성은 강조되었고, 그전에는 김씨를 내세우지 않았다. 갑자기 신라 후대에 이러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김씨부인도 9세기의 인물이다. 더구나 묘지명에는 김일제를 휴도 왕자라고 하지 않고, ‘흉노 조정에 몸담고 있었다’고 한 것도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난다.
장약용은 <아방강역고> 권 제3, 졸본고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의 호를 동명왕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동명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후대에 동명이라는 호칭을 주몽(추모)에게 붙인 셈이 된다.
이렇게 동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아무래도 부여가 훌륭한 국가이거나 동명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왕(聖王, ?~554)은 성왕 16년(538년)에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고친다. 이 역시 부여가 대단한 나라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구려가 부여를 얼마나 계승했는지, 백제가 부여를 얼마나 계승했는지는 따로 보아야 하는 문제다.
신라 김씨 왕족이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도 역시 관념적인 수준이며, 실제보다는 그러한 정통성을 통해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번에 알려진 산시성 시안(西安)시 곽가탄(郭家灘)의 김씨부인 묘명은 그러할 개연성이 많다. 아무래도 한나라 제후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는 전반적으로 한족의 유습을 이은 당나라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려 했으므로 이러한 김일제 신화화 작업을 강화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중원 진출을 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수도 있다. 통일신라만큼 활발하게 대륙에 진출한 이들도 드물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시조의식을 구성해낸 것이 후대로 갈수록 명확한 현실로 변했다. 하지만 김일제가 흉노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김씨의 뿌리는 한(漢)족이 절대 아님은 분명하다. 한 무제가 흉노의 왼팔이라며 고조선을 정벌한 것도 이와 같은 공통성을 말한다. 그들이 금을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금을 좋아한 것은 신라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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