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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蒼巖集(창암집) 영인간행 및 해제(解題) 작성 중

by 연송 김환수 2012. 2. 10.

蒼巖集(창암집)이 2009년에 영인간행 되었고 2012년 초에 해제9집에

수록 간행된다는 한국고전번역원의 좋은 소식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창암선생님 관련자료가 있으신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해제(解題) : 책의 저자,내용,체재,출판 연월일 따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함. 또는 그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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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입니다.

 

보낸이 이OO<lms823@naver.com>

받은이 <yeskorea@humetro.busan.kr>

날 짜 2012.02.10 18:09:37

 

蓮松선생님

 

안녕하세요?

 

한국고전번역원의 이oo(HP 010 XXXX XXXX)입니다.

 

저희 기관에서 金尙彩 선조님의 蒼巖集을 영인간행하고(한국문집총간 속총간79), 해제를 작성중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족보 등 문중의 자료를 제공하여 주시길 부탁드리며,  확인된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 金尙彩 : 1710년(숙종 36)~?. 초명은 尙炫. 자는 敬叔. 호는 蒼巖. 본관은 安山. 嚴漢朋, 洪禹澤 등과 교유.

 

추정된 가계도

未詳 ────未詳──┬─男

                              ├─尙彩

                              │   ║────┬─濟良────宗軾

                              │  結城張氏    ├─忠良

                              │  昌漢의 女   ├─國良

                              └─ 男           ├─喆良

                                                   └─女═金壽完

창암은 振武의 7세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계도에서 조부와 부친, 형, 아우, 아들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 창암집은 1816년에 손자 종식이  而已广張混(1759∼1828)의 협조

  를 받아 활자로 인행하였습니다.

 

而已广 張混(이이엄 장혼) : "이이엄은 자족(自足)한다는 뜻의 집이름,  '이이엄' 집주인은 장혼 
장혼(張混)그는 계속 “그만(而已)”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더니,“나의 천명을 따르면 그만이다. 그래서 내 집 편액을 이이엄(而已广)이라 했다(聽吾天而已,故扁吾以而已)”고 설명했다.
그의 집 이름이 ‘이이엄’이 된 것은 당나라 시인 한퇴지의 시에서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만(破屋三間而已)”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김상채(金尙彩)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영조 때의 시인. 본관은 안산(安山). 초명은 김상현(金尙炫), 자는 경숙(敬叔), 호는 창암(蒼巖). 중인출신.

김진무(金振武)의 7세손이라고 하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아들 김제량(金濟良)이 영‧정조시대에 시인으로 행세하였고, 손자인 김종식(金宗軾) 또한 시인 장혼(張混)과 친구로 여항의 시인이었다.

정5품의 품계인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으나, 어떠한 관직을 역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가정은 비교적 윤택하였다.

어려서부터 큰아버지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장인인 장창한(張昌漢)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 여항문학이 대두하던 시대에 활동하였던 시인으로,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시가 실려 있다. 여항시인으로 이름있는 엄한붕(嚴漢朋)과 가까이 지냈고, 홍우택(洪禹澤)전만종(田萬種)최상즙(崔尙楫) 등과 어울렸다.

글씨에 능해 초서‧해서를 잘하였다. 조엄(趙曮)풍양조씨 일가에 서리를 지내면서, 한편으로 유자(儒者)의 도리를 좇는 데 치중하였다.

인간이 초목금수와 구분되는 요소 8가지를 제시하여 이를 효‧제‧충‧신‧예‧의‧염(廉)‧치(恥)라고 규정하였으며, 이들 요소를 주제로 잠언(箴言)을 짓기도 하였다. 시에는 이같은 덕성이 반영되어 조탁을 일삼지 않고 돈박(敦樸)하며, 또한 섬세한 묘사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얻는다.

언행이 조심스러웠고 특히 자식교육에 힘써 아들이 불민한 것은 아비가 불민해서이며, 아들이 무식하면 이 또한 아비가 무식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계자책기 戒子責己〉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아들 김제량과 손자 김종식도 시로써 이름을 날려, 3대를 이어 시명을 떨쳤다.

저서로 《창암집》 3권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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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巖集(창암집) 영인간행 및 해제(解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grpId=&itemId=MO&gubun=book&depth=2&cate1=Z&cate2=&dataGubun=서지&dataId=ITKC_MO_105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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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집 (蒼巖集)

 

 

조선 후기의 시인 김상채(金尙彩)의 시문집. 3권 1책. 목판본. 1816년(순조 16) 손자 종식(宗軾)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창암집≫의 권두에 조종영(趙鍾永)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당시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어 나갔던 장혼(張混)과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의 발문이 있다. 장혼은 종식과 친구 사이이다.

 

≪창암집≫의 권1·2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소재로 한 평범한 것이거나, 안분자족하고자 하는 생활의식을 읊은 것들이다. 권1 초두의 사언시 8수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 유가적 덕목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각각 8행씩으로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권2의 〈술계자질시 述誡子姪詩〉도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시에 화답한 엄한붕(嚴漢朋)·홍우택(洪禹澤)·김시빈(金時彬) 등 12인의 당시 여항시인들의 시가 같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여항문단에서의 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권3에 실린 문(文)들은 대개 개인적인 것들이다. 〈족보서〉는 자신의 집안인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족보내력을 기술한 것이다. 〈기일록서〉는 자손들에게 선조의 기일을 지킬 것을 당부한 글이다. 그리고 〈가록서〉와 〈선영중즙기〉 역시 한미한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쓴 글이다. 〈장빙군행장〉은 장인 장창한(張昌漢)의 행장이다.

 

≪창암집≫의 잡저 〈효선성훈계술편팔장교회자질〉은 사친(事親)·봉제(奉祭)·교자(敎子)·우애(友愛)·근학(勤學)·목족(睦族)·적선(積善)·치가(治家)의 8조목으로, 이를 자손들에게 지킬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리고 〈삼성재유고 三省齋遺稿〉가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아들 제량(濟良)의 시문 약간을 모은 것이다. 종식이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아버지의 것도 함께 수습하여 넣은 것이다. 내용은 시 13수, 문 1편이다. 국립중앙도서관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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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영(趙鍾永) : 청암집 서문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870C885C601B1771X0
자 : 원경(元卿)
시호 : 충간(忠簡)
생몰년 : 1771(영조 47) ~ 1829(순조 29)
시대 : 조선 후기
본관 : 풍양(豊壤)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부 : 조진택(趙鎭宅)
출신지 : 서울




[관련정보]
[문과] 정조(正祖) 24년(1800) 경신(庚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25위
[진사시] 정조(正祖) 16년(17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8위




[상세내용]
조종영(趙鍾永)에 대하여
1771년(영조 47)∼1829년(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원경(元卿). 서울 출신. 경상도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우승지를 역임하였다.




그뒤 1810년(순조 10) 안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민병을 규합, 난의 평정에 진력하였다.




1813년 황해도관찰사, 이어 한성부의 좌윤‧우윤을 거쳐 공조‧형조‧호조의 참판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어 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1829년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벼슬길에 오른 초기부터 경제문제에 관심을 두었으며, 국가의 전장제도(典章制度)와 백성들의 이해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성력(星曆)‧복서(卜筮)‧용병(用兵)의 요체(要諦)에도 밝았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淵泉集

 

창암 김상채 손자 종식의 친구인 장혼 (張混) 출생연도 : 1759~1828

 

* 장혼은 결성장씨로 종식의 조모 또한 결성장씨 에다

신분 또한 같은 중인   출신이니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왕래하며 친구로 지냈을 것이다.

 

창암 김상채 선생 또한 장인이신 결성장씨 장창한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는 기록을 보면 서로 이웃해 살면서 친분을 쌓았을 것이다.

 

 

 
장혼(張混) : 창암집 발문



이명 : 자 원일(元一), 호 이이엄, 공공자(空空子)
출생-사망 : 1759(영조 35) ~ 1828(순조 28)
출생지 : 서울
본관 : 결성(結成)
시대 : 조선 후기
직업 : 시인, 학자
가족 : 아버지 장우벽(張友璧), 증조 장필한(張弼漢)
         아들 장창(張昶), 장욱(張旭)
         손자 장효무(張孝懋)




장혼은 서울 출신 중인인 우벽()의 아들로 1790년 정조가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자 대제학이던 오재순(吳載純)의 추천으로 교서관사준(校書館司準)이 되어 서적편찬에 종사하였다.


이후 1816년경까지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어정서(御定書)를 교정하였고, 《율곡전서》 등 문집류를 수교(修校), 간행하였다.

 

 



조인영 (趙寅永) : 창암집 발문




본관 : 풍양(豊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 : 장원급제
1841년(헌종 7) 영의정, 1849년(철종즉위초,헌종15) 영의정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870C778C601B1782X0
자 : 희경(羲卿)
호 : 운석(雲石)
시호 : 문충(文忠)
생몰년 : 1782(정조 6) ~ 1850(철종 1)
시대 : 조선 후기
본관 : 풍양(豊壤)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부 : 조진관(趙鎭寬)
저서 :《운석유고》




[관련정보]
[문과]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생원시] 순조(純祖) 5년(1805) 을축(乙丑)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3등(三等) 22위
[음관] 음보(蔭譜)




[상세내용]
조인영(趙寅永)에 대하여
1782년(정조 6)∼1850년(철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의 아들이며, 국구(國舅) 조만영(趙萬永)의 동생이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바로 응교에 임명되고, 그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었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복명 후 대사헌에 특진하였으며,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0년 세자(뒤에 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으며,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조씨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己亥邪獄)을 주도, 그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으며,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김씨를 압도하고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하였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10여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재정의 확보와 민생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고,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화양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연구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종을 기증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하였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그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翼宗)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雲石遺稿
 朝鮮圖書解題(朝鮮總督府, 1932)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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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집 [ 蒼岩集 ]

 

 

 

유   형 : 문헌

시   대 : 조선

성   격 : 시문집

편저자 : 김상채

제작시기 : 1816년(순조 16)

권수/책수 : 3권 1책

간행/발행/발급자(처) : 김종식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정의

조선 후기의 시인 김상채(金尙彩)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16년(순조 16) 김상채의 손자 김종식(金宗軾)에 의하여 편집·간행되었다. 권두에 조종영(趙鍾永)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당시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어 나갔던 장혼(張混)과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의 발문이 있다. 장혼은 김종식과 친구 사이이다.

 

서지적 사항

3권 1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권1에 사언시 8수, 오언절구 38수, 칠언절구 38수, 오언율시 46수, 권2에 칠언율시 65수, 오언고시 3수, 칠언고시 1수, 권3에 「족보서(族譜序)」·「기일록서(忌日錄序)」·「가록서(家錄序)」의 서 3편, 「선영중즙기(先瑩重葺記)」·「장빙군행장(張聘君行狀)」, 그리고 잡저인 「효선성훈계술편팔장교회자질(傚先聖訓誡述編八章敎誨子姪)」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2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소재로 한 평범한 것이거나, 안분자족하고자 하는 생활의식을 읊은 것들이다. 권1 초두의 사언시 8수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 유가적 덕목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각각 8행씩으로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권2의 「술계자질시(述誡子姪詩)」도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시에 화답한 엄한붕(嚴漢朋)·홍우택(洪禹澤)·김시빈(金時彬) 등 12인의 당시 여항시인들의 시가 같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여항문단에서의 활동을 짐작하게 한다.

 

권3에 실린 문(文)들은 대개 개인적인 것들이다. 「족보서」는 자신의 집안인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족보내력을 기술한 것이다. 「기일록서」는 자손들에게 선조의 기일을 지킬 것을 당부한 글이다. 그리고 「가록서」와 「선영중즙기」 역시 한미한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쓴 글이다. 「장빙군행장」은 장인 장창한(張昌漢)의 행장이다.

 

잡저 「효선성훈계술편팔장교회자질」은 사친(事親)·봉제(奉祭)·교자(敎子)·우애(友愛)·근학(勤學)·목족(睦族)·적선(積善)·치가(治家)의 8조목으로, 이를 자손들에게 지킬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말미에는 「삼성재유고(三省齋遺稿)」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아들 김제량(金濟良)의 시문 약간을 모은 것이다. 김종식이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아버지의 것도 함께 수습하여 넣은 것이다. 내용은 시 13수, 문 1편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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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채(金尙彩) 인물정보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E40C0C1CC44U9999X0

자    : 경숙(敬叔)

호    : 창암(蒼巖)

일명 : 김상현(金尙炫)

생몰년 : 

?

~ ?

시대 : 조선 후기

본관 : 안산(安山)

활동분야 문학 > 시‧시조인

 

김상채(金尙采) 인물정보

UCI G002+AKS-KHF_13AE40C0C1CC44U9999X0

자 : 문중(文仲)

생년 : 무진(戊辰) 1688년

합격연령 : 25세

본관 : 미상(未詳)

거주지 : 경(京)

 

[이력사항]

전력 : 한량(閑良) =

조선 후기에, 무과의 합격자로서전직(前職)이 없던 사람

품계 : 정5품 통덕랑(通德郞)

관직 : 총융청

(摠戎廳)

감관(

부모구존 : 구경하(具慶下) = 부모생존

[무과] 숙종(肅宗) 38년(1712) 임진(壬辰) 정시(庭試) 병과(丙科) 203위

 

**감관() : 조선시대 각 관아나 궁방에서 금전출납을 맡아보거나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특정업무의 진행을 감독하던 관직.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석(金磶)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전행충좌위좌부장(前行忠佐衛左部將)

[형]

성명 : 김상질(金尙質)

 

[출전]

《임진 정시 별시방 문무과 방목(壬辰庭試別試榜文武科榜目)》

 (국립중앙도서관[古6024-220])

 

 
부모양친(父母兩親, 부모 모두)이 생존(生存)하면 구경하(具慶下)
모친(母親, 어머니)만 별세(別世, 돌아가심)하면 엄시하(嚴侍下)


부친(父親, 아버지)만 별세(別世, 돌아가심)하면 자시하(慈侍下)
양친(兩親, 부모)이 다 별세(別世)하면 영감하(永感下)라 합니다.


나의 부친 별세 후(父親別世後) 아버지를 선친(先親), 선인(先人) 또는
선고(先考)라 합니다.
나의 모친 별세 후(母親別世後)는 선비라 합니다.


남의 부친 별세 후(父親別世後)는 선부군(先府君), 선대인(先大人)이라 합니다.
남의 모친 별세 후(母親別世後)는 선부인(先夫人), 선자당(先慈堂)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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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김 족보에는 창암선생의 휘(諱)상채(尙彩) 는 보이지 않네요.

  *** 휘(諱) : 죽은 사람을 공경해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 것과 때로는 그 이름.

 

위에 언급된 가족사항의 부(父) 김석((金磶)과 형 상질(尙質)의 휘자도 찾을 수는 없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다른 자료도 찾아봐야 될 듯합니다.

 

창암선생의 분파된 내용이 없어 족보 전수조사를 해보니 가장 근접해 보이는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1958년 간행된 족보에 연성군의 제 5자인 안성위 한의 제 1자인 예조판서 맹철의 후손중에 비슷한 휘자들이 보이고 연대도 비슷해 보여 이분의 후손으로 추정하려고 하니 문제가 있었습니다.

 

1958년 간행 족보는 1989년 발행시 일부 계보를 변경하는 계대

변경이 있었는데 바로 이분들의 계대 입니다.

 

 

판서공파 휘 맹철 후손 계대에서 사재감정을 지내신 휘 맹전

선조의

사재정공파로 수정되었기에 사재정공파 맹전의 후손으로 잠정 추정해 봅니다. 현재 이분들은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실소생과 동일한 위치에서 자신의 가계도를 주장할 수 없는 시절에 사시다 보니 족보에 이름을 못 올리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

으로서는 정확한 계대를 알수 없어 추정해 봅니다.

 

정5품 상계인 통덕랑(通德郞) 총융청(摠戎廳) 감관() 지내신 기록이 있지만 스스로 한미한 집안이라 자괴(自愧)하시며 본인 소생과 친형제에 대한 언급만을 한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 추정된 가계도

 

未詳 ────未詳──┬─ 

                              ├─ 尙彩

                              │    ║────┬─ 濟良 ──── 宗軾

                              │   結城張氏    ├─ 忠良

                              │   昌漢의 女   ├─ 國良

                              └─

            ├─ 喆良

                                                    └─ 女 ═ 金壽完

 

참고로 위 가계도 붉은 글씨와 아래 족보의 가계도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1958년 변경전 족보 가계도 변경후 → 휘 (暉) 선조이하 계대 삭제


연성군 김정경→ 안성위 한 예조판서 맹철 (판서공파 파조)
 → 판결사  →  사양 → 환  기성  
  ↓
일(溢) 무신(戊申)1668년생 顯宗9~경진(庚辰)1700년 肅宗26
수종(壽宗) 己巳(기사) 1689생 肅宗15  ~ ?  
휘 (暉) 庚子(경자)1720년생 肅宗46 ~ 정해(1767년) 英祖43   빈(尙彬) 丁卯(정묘)1747년생 英祖23 ~ ?  
제량(悌良) : 甲申(갑신)1764년생
                 英祖40 ~ ?
종범(鍾範) : 병오 1786년 - ?
윤택 : 병술 1826년 - ?
낙훈 : 신유 1861년 - ?
병섭 : 기축 1889년 - ?
기영 : 임자 1912년 - ?
한진 : 단기4266 1933년 - ?
석량(錫良) 甲午(갑오)1774년생
              英祖50 ~ ?
종구(鍾九) : 계해 1803년 - ?
진택 : 계미 1823년 - ?
낙환 : 무신 1848년 - ?
춘섭 : 무인 1878년 - ?
기성 : 무신 1908년 - ?
영진 : 단기 4268 1935년 - ?

 

 

* 1989년 변경된 족보 가계도

 

 변경후 → 진해(振諧) 선조이하 계대 추가



시조 상서좌복야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金兢弼) 1세
  ↓
연성군 김정경(金定卿) 12세
좌참찬 개(漑) 13세 
사재감정 맹전(孟銓)  사재정공파 파조  14세 
건수(乾壽) 15세
  ↓
귀선(貴善) : 1614년생 光海6 甲寅(갑인) 19세
연준(延埈) : 1652년생 孝宗3 壬辰(임진) 20세
진해(振諧) : 1670년생 顯宗11 庚戌(경술) 21세
상빈(尙彬) : 1687년생 肅宗13丁卯(정묘) 22세
제량(悌良) : 1704년생 肅宗30 甲申(갑신) 23세
   弟 석량 : 1714 肅宗40 甲午(갑오)
종범(鍾範) : 1726년생 英祖2 丙午(병오) 24세
현택 : ? 弟 성택 : ? 弟 윤택 : 1826 純祖26 丙戌(병술) 25세

 

참고로 1776년 족보상의 항렬은 25世부터 정식으로 사용하고 이전에는 소문중에서 집안항렬을 정하여 사용했기에 분파별로 약간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김진무(金振武)의 7세손이라는 자료를 근거로 연관 관계를 찾아

보면 상호군파 휘 암(의주,용천)派에서 振O 항렬을 사용했는데 振O

이후 7세에서 尙O 항렬이 많이 보이지만 振武, 尙彩, 이후 후손의 항렬 등 동일한 휘(諱)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1958년 족보 항렬중 尙O자, O良자, 宗O자를 사용한 집안은 예조판서를 지내신 판서공파 후손의 한계파에서만 보이는데 그런데 청암선생의 휘(諱)는 보이지 않습니다.

 

최근 이분 계대를 족보 재발간시(1989년) 사재정공 후손으로 계대를 다시 편성 했는데 출생년도 등 보완과정을 거친 계보도는 여러가지 여건상 이분들과 직접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갑니다. 

(* 이복형제 추정)

 

* 무과 합격자 김상(金尙)김상(金尙)동일인 여부  ?  위 1989년족보에 계대 변경 된 가계도의 상빈(尙彬,1687년생) 이복형제라면 시대는 맞지만

기록상 상이함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중에 이분의 휘 상채가 없으니 음직(음서)으로 벼슬하시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렇다면 무과나 잡과 등 과거 응시기록 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기록부재입니다.

 

이 당시 무과 식년시(정기선발)는 대체로 최종 28명을 선발했지만 부정기시는 선발인원을 정하지 않아 수천명에서 많게는 만명이상을 선발하여 합격 후 보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결국 이렇게 많은 합격자를 선발하니 이후 명단관리가 제대로 되었을리 없고 무과 합격 후 보직(벼슬)을 받지 못하거나 받더라도 하급관리의 경우에 기록이 부실하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자료는

일부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별시 무과의 선발인원 남발은 무과가 만과(萬科)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작이 되었다.

조선후기에 무과시험 만과(萬科 : 선발 인원을 천명, 만명을 뽑는다는 뜻)는 무과시험의 혼란과 큰 폐단을 낳았다.

 

김상채 선조는 정5품 상계인 통덕랑 기록과 총융청(摠戎廳) 감관() 벼슬을 지낸 기록이 있으니 기술직인 잡과 보다는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셨겠지만 신분상의 한계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상(金尙) 인물정보    * 채 (彩)  ?


[무과] 숙종(肅宗) 38년(1712) 임진(壬辰) 정시(庭試) 병과(丙科) 203위


자 : 문중(文仲)    경숙(敬叔)  ?
생년 : 무진(戊辰) 1688년
합격연령 : 25세
본관 : 미상(未詳)    안산(安山)  ?  
거주지 : 경(京)

  

* 19세이전 안산김씨 항렬은 항렬분파에서 확인하시면 되기에 여기는 생략하고

   기록합니다.

 

20세(19대손) - 하(夏)○ = 하주, 하구, 하삼, 하이, 하일 

21세(20대손) - ○기(基) = 언기, 수기, 형기, 원기

                    필(必)○ = 필채, 필견, 필명, 필성,

22세(21대손) - 명(命)○ = 명직, 명익, 명윤, 명조

23세(22대손) - 처(處)○ = 처욱, 처간, 처수, 처은

24세(23대손) - ○종(鍾) = 기종, 익종 록종, 응종, 원종, 운종

 

■ 1776년 (병신보) 안산김씨 족보 항렬 기록

25세(24대손) - ○원(源)

26세(25대손) - 락(樂)○

27세(26대손) - ○섭(燮)

28세(27대손) - 기(基)

29세(28대손) - ○진(鎭)

 

■ 1958년 안산김씨 족보 항렬 기록

30세(29대손) - 제(濟)○

31세(30대손) - ○채(采)

32세(31대손) - 응(應)○

33세(32대손) - ○재(在)

34세(33대손) - 종(鐘)○, 의(義)○

35세(34대손) - ○순(淳), ○태(泰)

36세(35대손) - 상(相)○, 재(栽)○

37세(36대손) - ○환(煥), ○걸(杰)

38세(37대손) - 효(孝)○, 규(圭)○

39세(38대손) - ○현(鉉), ○용(鎔)

40세(39대손) - 영(永)○

41세(40대손) - ○식(植)

42세(41대손) - 희(熙)○

43세(42대손) - ○균(均)

44세(43대손) - 련(鍊)○

45세(44대손) - ○수(洙)

46세(45대손) - 동(東)○

47세(46대손) - ○형(炯)

48세(47대손) - 원(遠)○

 

■ 1989년 안산김씨 족보 항렬 기록

49세(48대손) - ○호(鎬)

50세(49대손) - 하(河)○

51세(50대손) - ○주(柱)

52세(51대손) - 성(成)○

53세(52대손) - ○준(埈)

 

 

위 가계도 관련 족보 이미지를 올려드립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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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 연구가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예를들어 1958년 간행 족보자료를 근거로 글을 작성한 이후에 1989년에 족보 발행시 수정한 사항을 몰랐을 경우에 정말 난감하다는 점입니다.

 

윗 분의 계보가 판서공파 휘 맹철 후손에서 사재감정을 지내신 휘 맹전 선조의 사재정공파로 수정되었습니다.

 

1958년 계대변경 전 족보와 1989년 수정된 족보관련 자료를 올려 드립니다.

 

먼저 변경전 1958년사재정공파 휘 맹전 후손 족보입니다.

관련 계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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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수정된 판서공파 휘 맹철 후손 족보 입니다.

관련 계대를 삭제하고 사재정공파 맹전 후손으로 계대를 편성 하였습니다.

 

 

 

1958년 발행 족보에는 휘(暉)의 후손으로 계대 편성을 하였으나 1989년 족보에

사재정공파로 계대를 변경하여 바로 잡고 계대를 삭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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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계대 추가된 사재정공파 휘 맹전 후손 족보 입니다.

 

 

 

파란 선 부분이 추가된 계대 입니다. 

振諧(진해) 선조이후 계대 추가편성 되었습니다.

 

* 가계도

 



시조 상서좌복야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金兢弼) 1세
연성군 김정경(金定卿) 12세 ↓
좌참찬 개(漑) 13세 ↓
사재감정 맹전(孟銓) 14세 ↓
건수(乾壽) 15세 ↓

귀선(貴善) : 1614년생 光海6 甲寅(갑인) 19세 ↓
연준(延埈) : 1652년생 孝宗3 壬辰(임진) 20세
진해(振諧) : 1670년생 顯宗11 庚戌(경술) 21세
상빈(尙彬) : 1687년생 肅宗13丁卯(정묘) 22세
제량(悌良) : 1704년생 肅宗30 甲申(갑신) 23세
弟 석량 : 1714 肅宗40 甲午(갑오)
종범(鍾範) : 1726년생 英祖2 丙午(병오) 24세
현택 : ? 弟 성택 : ? 弟 윤택 : 1826 純祖26 丙戌(병술) 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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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전자책 일부 발췌

 

   

 

  

 

  

 

 

 

 

 

   

 

 

                

121 page                                          122 page

                                            

123 page

〈장빙군행장〉 : 창암 김상채의 장인

결성장씨 장창한 (結城張氏 張昌漢) 행장  

(121-123페이지)

 

결성장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하시중 판전리감찰사사 상호군을 지내고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해진 장사(張楒)를 시조로 삼고 있다.

 

결성(結城)은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의 결기군(結己郡) 또는 결사현(結巳縣)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결성군(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13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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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 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 교정 보고 책 만드는 일로 반평생을 보낸 장혼
 
장혼(張混·1759∼1828)의 아버지 장우벽(張友壁)은 날마다 인왕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그가 노래 부르는 곳을 가대(歌臺)라고 불렀다.
 
장우벽 자신은 글을 웬만큼 알았지만, 총명한 아들 장혼을 서당에 보내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도 쓸 데가 없는데다, 오히려 중인 신분의 한계를 탄식하며 처절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혼의 어머니 곽씨가 집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가난한 집안 살림은 장혼이 도왔다. 여섯살 때에 개에 물려 오른쪽 다리를 절었지만,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1790년에 옛 홍문관 터에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고 여러가지 책들을 인쇄하여 반포하려고 하자, 오재순이 장혼을 사준(司準)에 추천하였다. 교정 보는 일을 맡은 사준은 정9품 잡직이었는데, 기술직 중인들이 맡는 말단 벼슬이었다.
 
그는 “원고와 다른 글자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솜씨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았다. 규장각의 여러 고관들 가운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그에게 일을 맡겼다.”고 한다. 책 한권을 다 만들면 의례 품계를 올려주는 법인데, 그는 번번이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 장혼이 목활자로 만든 서당교과서 몽유편.
 
“적은 봉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받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유를 밝혀, 정조가 봉급을 더 많이 주었다.
 
모친상을 당한 3년을 빼고는 1816년까지 줄곧 사준으로 일하며, 사서삼경을 비롯해 ‘이충무공전서’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들을 간행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장혼이 교정을 보았다.
 
장혼이 교정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나자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금속활자를 만들려면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 민간에서는 대개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재산이 넉넉하고 인쇄할 책이 많은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문중의 책을 다 찍은 다음에는 그 활자를 남에게 빌려주며 돈을 받기 때문에 처음에 많은 자본을 들이면 어느 정도 상업성도 있었다.
 
돈암(敦岩)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누이가 순조의 생모 수빈 김씨였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지극한 총애를 입어 호조판서에 오르고 훈련도감을 맡았다.
 
그는 가통을 세우기 위해 5대 이하의 유고를 모아 ‘반남박씨 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했으며,1816년에 정교한 금속활자를 직접 만들어 세고와 함께 아버지의 문집 ‘금석집(錦石集)’을 인쇄하였다.
 
청나라 취진판(聚珍版) 전사(全史,二十一史)의 글자를 자본으로 인서체(印書體) 동활자 20만자를 주조한 것이다. 박종경이 개인적으로 만든 활자를 전사자(全史字), 또는 그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활자(敦岩印書體活字)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주변에 빌려줘 여러 종류의 책이 만들어졌다. 박종경의 활자로 인쇄한 초기 십여종의 책은 대부분 장혼이 교정하였다.
 
●목활자 만들어 서당 교재를 인쇄
 
인왕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장혼은 ‘천자문’ 말고도 여러가지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기 서당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직접 찾아와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좋은 교과서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위주로 만들어진 ‘천자문’이 좋지 않은 교과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이미 비판해, 나름대로 대안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장혼이 처음 만든 교과서는 ‘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보아야 할 내용을 가려뽑은 책이다. 정리자체 철활자를 빌려 1803년에 인쇄하였다. 그런데 남의 활자를 빌려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했다. 그래서 인쇄 전문가였던 장혼은 스스로 필서체(筆書體) 목활자를 만들었다.
 
웬만한 책을 만들려면 금속활자를 10만개 넘게 주조해야 했는데, 장혼의 재산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무로 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윤병태 교수(전 충남대문헌정보·작고)는 이 목활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폭 12mm 내외, 높이 8mm 내외의 비교적 폭이 넓은 납작한 평면을 가진 활자로 보인다. 그 자체(字體)는 필서체로 되어 있으며, 다른 관주활자(官鑄活字)에 비해 약간 작은 아름다운 글씨체로 보인다.
 
활자의 자본(字本)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으나, 김두종은 초예(草隸)에 능한 장혼의 의장(意匠)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장혼이 처음 목활자로 인쇄한 교과서는 ‘몽유편(蒙喩篇)’과 ‘근취편(近取篇)’ ‘당률집영(唐律集英)’ 세권이다. 모두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경오는 1810년이니 그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빨리 닳아서 찍을수록 글씨가 뭉툭해지는 단점이 있는데,1810년에 인쇄된 책들은 글자체가 비교적 정교하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크기가 작지만 만든 솜씨가 정교하면서도 글자 모양이 예뻐서, 이 활자로 찍은 책들은 금속활자본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 있다.
 
장혼이 직접 짓거나 편집한 책은 위항시인 333명의 시 723수를 천수경과 함께 편집한 ‘풍요속선(風謠續選)’에서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요약한 ‘동사촬요(東史撮要)’까지 24종이다. 그는 자신의 책만 인쇄한 것이 아니라 1816∼1818년 위항시인들의 책 5종을 자신의 목활자로 인쇄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최성환이 이 활자를 인수해서 장혼의 제자나 후배 문집 5종을 인쇄했다. 그의 문집인 14권 분량의 ‘이이엄집(而已集)’은 끝내 간행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그가 편집 인쇄한 책들을 통해 위항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그의 서당 제자들이 금서사(錦西社)와 비연시사(斐然詩社)로 인왕산 시사의 대를 이었다.
 
■ 아희원람이란
 
‘아희원람(兒戱原覽)’은 고금의 사문(事文) 가운데 아이들이 찾아보아야 할 내용을 열가지 주제로 가려뽑은 책이다.
 
1803년에 제작된 본에는 동국(東國)·수휘(數彙)·보유(補遺)가 더 실렸다.
 
몽유편(蒙喩篇)은 낱글자로 배웠던 천자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어휘집이다. 상권에는 신형(身形)·연기(年紀)·칭호(稱號)·위분(位分)·명물(名物)의 기본어휘 1049개에 동의어나 유사어가 붙어 있다. 우리말 어휘도 383개나 실렸다.
 
하권은 인명록인데 덕행(德行)부터 이단(異端)까지 일곱 부류 1 441명의 이름을 실었다.
 
근취편(近取篇)도 어휘집인데 13장까지는 네글자로 된 속담과 고사숙어 1046개, 그 다음에는 세글자로 된 고사숙어 98개, 그 다음에는 두글자로 된 숙어 192개를 실었다.
 
아희원람은 윤병태 교수가 확인한 판본만도 7종이나 될 정도로 자주 인쇄돼 널리 읽혔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장혼 필적 

 

 

한국의 페스탈로찌 장혼

 

정재걸(대구교육대학교 교수)

 

1.장혼이라는 사람

 

장혼(張混:1759-1828)은 교육자라기 보다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잘 알려진 이유는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장혼은 중인 신분이다. 조선 초기에는 중인이라는 용어가 신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잡과 합격자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신분의 고착화와 신분의 해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중인은 양반보다는 못하지만 일반 서민보다는 높은 신분을 지칭하게 되었다.

 

문과 시험에 대한 배타성의 확대가 신분의 고착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신분의 해체는 족보의 위조, 과거합격증의 구입 등으로 양반 신분의 비율이 급격히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불법적인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개 상업과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반 양인들이었다. 그러나 향리, 서얼, 기술관으로 대표되는 중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의 특성상 불법적인 방법에 의한 신분상승이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후기 신분제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낸 집단은 일반 양인이나 노비가 아니라 이들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능력에 있어서는 결코 양반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근대적 상공업 사회에 적합한 기술과 일선 행정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양반들보다 일찍이 북학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또 18세기부터 위항문학운동(委巷文學運動)을 일으켜, 이를 통해 사대부에 필적하는 시(詩), 서(書), 화(畵)의 교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위항문학운동은 시사(詩社)의 조직, 공동시집, 공동 전기의 발간 등으로 전개되었는데, 문학적 교양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자부심을 한층 높여 주었다.

 

장혼은 바로 이러한 위항문학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1786년 여름에 천수경(千壽慶)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그 모임을 이끌었으며, 1797년에는 천수경과 더불어 당시 민간에 회자되던 노래를 모은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중인 신분이라는 질곡 속에 산 장혼은 당연히 신분제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출해야 할 것이다.

 

사실 많은 장혼 연구자들이 이것을 기대하면 연구를 한다. 그러나 장혼은 결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있다. 장혼의 시나 글에서는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울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장혼은 찢어질 듯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더구나 그는 여섯 살 때에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시대와 사회에 대한 강한 울분을 토로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러나 연구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장혼은 자신의 신분과 가난, 그리고 그의 불구를 결코 불만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현실인식이나 사회개혁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불만은 부족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혼은 그의 호(號)를 공공자(空空子) 또는 이이엄(而已广)이라고 하였다. 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붙였으니 자호(自號)라고 할 수 있다.

 

공공자는 말 그대로 “비고 또 비어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상당히 불교적인 색채를 띄는 호인 셈이다. 또한 이어엄에서 이이(而已)란 “.......할(일) 뿐이다”이라는 뜻으로 한문에서 문장을 마칠 때 쓰는 허사(虛辭)이고, 엄(广)이란 글자 모양 그대로 바위에 의지하여 지은 집이다.

 

그는 실제로 인왕산 옥류동(玉流洞) 골짜기에 ?이이엄?이라는 집을 짓고 자기와 같이 중인에 속하는 위항시인들과 더불어 시주(詩酒)를 즐겼다. 장혼은 이이자(而已子)라는 인물이 실재했던 사람으로, 중국 전국시대 유명한 맹상군의 집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이자(而已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가난하면서도 뜻이 컸고, 낮은 데 살면서도 높고 고상한 것을 말하였다. 들어가면 책을 읽고 나가면 단정하게 처신했다. 처자식은 추위와 주림을 면하지 못했고 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비웃었다.

 

누가 이이자를 알겠는가? 그리고 누가 이이자를 비웃을 수 있는가? 장혼은 아마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2.왜 페스탈로찌인가?

 

그러나 장혼은 역시 조선시대 아동교육에 있어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인물이다. 장혼을 “한국의 페스탈로찌”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박성수 교수이다.

 

그는 장혼이 시집이외에 [아희원람(兒戱原覽)]과 [몽유편(蒙喩篇)]을 위시하여 [동습수방도(童習數方圖)], [집영이견(集英利見)], [정하지훈(庭下至訓)], [대동고시(大東故是)], [초학자휘(初學字彙)], [동민수지(東民修知)] 등 6책이나 되는 아동교육용 도서를 지은 뛰어난 아동교육 이론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아희원람]과 [몽유편]을 제외한 6권의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처럼 장혼이 많은 아동교육용 도서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은 1790년 정조가 설치한 감인소(監印所)에서 일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당시 대제학이던 오재순(吳載純)의 추천으로 교서관사준(校書館司準)이 되어 서적편찬에 종사하였다.

 

장혼은 1816년경까지 26년간 여기에 근무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어정서(御定書)를 교정하였고, [율곡전서] 등 문집류를 수교(修校), 간행하였다. 그는 또한 이이엄 활자라는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이것으로 그의 수많은 편저들을 인쇄하고 주변의 위항시인들의 시문집을 간행하였다.

 

장혼 자신 가난한 삶을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영위했지만, 주위에는 같은 중인 신분으로 서당의 훈장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혼의 문하생(門下生)으로 비연시사(斐然詩社)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고진원(高晉遠)도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직하시사(稷下詩社)의 중심 인물인 최경흠(崔景欽)도 서당 훈장을 직업으로 하였다.

 

이러한 중인 출신의 훈장들에게 배우는 아동들은 사대부 계층의 자녀들이 아니라 주로 중인층 이하의 자녀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경험과 주위 인물들의 훈장 경험은 장혼의 [몽유편]과 [아희원람]에 그대로 반영되어, 기존의 사대부 중심의 서당교재와는 다른, 중인층의 새로운 시각이 반영된 아동교육용 교재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유편(夢喩篇)]은 1810년 간행된 교재로 종래의 윤리서라기 보다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일용백과서이다.

 

이 책은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명물유휘(名物類彙)로 신형(身形)․연기(年紀)․칭호(稱呼)․위분(位分)․명물(名物) 등 신체부위의 이름 및 유형․무형의 명칭 등을 모아놓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각 부류에 한자로 된 동의어(同義語)를 나열해 놓고 그 한자 단어 밑에 그에 해당하는 국어 단어를 한글로 써놓았다는 것이다.

 

제2권은 인명유휘(人名類彙)로, 덕행(德行)․훈업(勳業)․문장(文章)․예술(藝術)․품부(稟賦)․은일(隱逸)․이단(異端) 등 인문(人文)에 관련된 명칭들이 7개의 부류로 기술되어 있다. 이 또한 각 부문에 해당하는 인명이나 도서명을 한자로 써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아동교육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국어어휘에 대한 연구 및 최초의 소형 필서체 목활자본이라는 점에서 서지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 한 권의 아동교재인 [아희원람] 또한 종래의 삼강오륜 중심의 아동용 교재에서 벗어나 일상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백과사전식으로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장혼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을 등한시하고 고원한 도덕만을 강조하던 당시의 교육풍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초학의 어린 학생들은 귀는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며, 가까운 것을 꺼려하고 멀리 있는 것만을 좇아간다. 내가 늘상 그 다화소실(多華少實)함을 걱정하여 고금의 사문(事文) 중에 가히 크게 의거할 수 있는 것을 뽑고, 제가군서(諸家群書) 중에서 가려서 갈고 닦고, 보고들은 것 중에서 추려내어, 수천만에 이르는 것을 10가지로 만들었으니, 자질구레한 것을 어렵게 알아 깨우치고 다스리는 뜻이 여기 있는가 하노라.

 

장혼은 이 책에서 다양한 설화를 통해 평민들의 삶을 긍정하고 양반층의 부귀공명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자세히 소개하여 아동들로 하여금 중국 중심의 문화관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방도(邦都)> 항목에는 단군, 박혁거세, 석탈해, 미추왕, 궁예, 동명왕, 가락국, 탐라국 등의 건국설화와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조선의 관사, 관직, 지리, 지명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 <국속(國俗)> 항목에서는 답교놀이, 관등행사, 유두, 약밥, 팥죽 등 우리나라의 고유한 놀이와 행사를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시(創始)> 조항에서는 투호, 쌍륙, 투전, 골패, 그네뛰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등 아동의 놀이와 그 창시자를 밝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정순우 교수는 [아희원람]이 아동들에게 유희의 세계, 신화의 세계, 민속의 세계를 열어준 획기적인 교재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아희원람]이 방각본으로 출판되어 널리 보급된 시기를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출발로 보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이러한 사실과 함께 일반 양민들의 서당계 조직을 통한 교육주체로의 성장, 몰락 양반이나 유랑 지식인 출신 서당훈장들의 저항적 세계관의 형성, 이러한 서당교육을 통한 기층민의 의식 고양과 각성 등을 근거로, 18세기 후반을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3.아동중심과 아동존중

 

장혼을 한국의 페스탈로찌로 명명하거나, 아니면 장혼의 [아희원람]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자생적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장혼의 사상을 서구 근대교육의 한 조류인 아동중심교육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동중심 교육하면 의례 루소와 페스탈로찌. 혹은 존 듀이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의 아동중심 교육에 있어서 아동은 아동 자신이 목적으로 간주될 뿐, 그러한 목적으로서의 아동이 지향해야할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언급할 수가 없다.

 

아동들의 계속적인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듀이는 목적으로서의 아동들이 경험의 교류를 통해 공유된 경험(shared experience)을 갖게 되는 사회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전통 교육에는 목표가 분명히 있다. 유학은 성인(聖人)을, 불교는 부처를 목표로 한다. 전통교육에서 아동존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성인과 부처의 마음이 아동의 마음과 동일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루장(離婁章)>에서 “대인(大人)이란 어린아이의 마음(赤子之心)을 잃지 않은 자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대인의 마음은 온갖 변화를 통달하여 순일(純一)하여 거짓이 없는데, 그 마음은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성선(性善)”이라고 한다.

 

주역의 “산수몽(山水蒙)”괘에서는 “몽은 몽매함이니 물건의 어린 것이다” 라고 하고, “몽에는 개발(開發)하는 이치가 있으니 형통한 뜻이고, 몽으로써 바른 것을 기름이 성인이 되는 공(功)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순일(純一)하고 개발되지 않은 몽에서 그 바름을 기르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요, 개발된 뒤에 금지하면 막혀서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몽괘는 산 아래에 샘이 솟는 형상이다. 물은 흘러가는 것이다.

 

샘물이 처음 솟아날 때는 아직 갈 곳이 없어 몽이 되지만, 한 번 흘러가게 되면 크게 형통하여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간다. 이처럼 주역에서의 아동은 아직은 몽매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교육은 그러한 가능성을 깨우쳐 주는(擊蒙) 것이다. 그 가능성은 물론 나를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아동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확인하고 반추하는 “자기교육(自己敎育)”을 통해 마침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동중심”과 “아동존중”의 차이이다.

 

장혼의 교육사상이 아동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아휘원람]에 나오는 다양한 속담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소학단계에서의 교육원리인 “아동기의 가르침은 천성으로 변하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小成若性 習慣若自然)”는 아동교육의 원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아동중심 교육이 그 자체가 목표라면 아동존중 교육은 분명한 목표, 즉 성인이 되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동중심과 아동존중의 차이를 우리는 “놀이”를 보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아동중심 교육에 있어서 놀이는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교육활동이다.

 

왜냐하면 놀이는 아동들을 전체적으로 “몰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아동중심 교육에서 아동의 몰입은 그 자체로서 장려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교육내용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수학을 합리성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를 감성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 음악을 귀로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냄새와 맛으로도 수용할 수 있다.

 

호른의 소리는 오렌지색이고, 플루트는 푸른색이며, 단소소리는 차갑고, 대금소리는 따뜻하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동들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 몸 전체로 교육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들을 과연 장려해야 하는 것일까? 아동존중 교육에서도 물론 몰입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아동중심 교육에서 말하는 몰입이 유학에서 말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나 참선하는 승려들의 선정(禪定)과 같은 것일까?

 

아동중심 교육의 몰입이나 아동존중에서의 몰입은 지금, 여기, 전체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놀이에 몰두할 때는 전체적으로 몰입한다. 배고픈 것도, 시간가는 것도 모르고 자신을 잊는다. 이런 측면에서는 삼매에 든 부처나 성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노자는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도를 알 수 있고, 맹자는 성인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몰입은 깨어 있는 것이다. 삼매에 든 부처는 자신을 벗어나 있지만 그의 중심은 깨어서 그 몰입을 주시하고 있다.

 

부처는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것 그 자체가 되고, 걸을 때는 걸음 그 자체가 되지만, 그의 중심은 늘 깨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아동의 몰입과 성인(聖人)의 몰입이 갖는 차이를 김기태 선생은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는 사람과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아동의 몰입은 성숙되지 않은 자아의 몰입이고 성인의 몰입은 자아가 충분히 성숙하여 무르익어 떨어져버린 사람의 몰입이다.

 

자아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에든 쉽게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는 자아가 충분히 성숙하여, 무르익어 떨어진 사람이다. 아이들은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부처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거울이 된다. 부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인 것이다.

 

전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아동중심 교육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학습자의 전체성이다. 예컨대 꽃이라는 교육내용을 가르칠 때,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것의 냄새를 맡아보고, 꽃잎의 맛을 보고, 아니면 꽃 주위를 돌면서 춤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꽃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다. 냄새를 맡을 때는 맛이 배제되고, 맛을 볼 때는 꽃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학생들의 마음이 거울과 같이 되었을 때이다. 물론 학생들의 거울은 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만 아니라, 향기와 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울이다.

 

달리 말해 학생들이 완전히 자신을 비웠을 때만이 꽃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다. 전체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자신을 비우는,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비워 교육내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교육은 우리의 전통교육의 핵심이다. 우리의 전통교육에서는 자신을 비우는 방법으로 마음을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중심으로 향하도록 함으로써 실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성인(聖人)교육으로서의 유학교육, 자기를 버림으로써 변하지 않는 중심, 즉 불성을 찾는 불교교육의 핵심이었다.

 

장혼을 한국의 페스탈로찌로 부르는 것은 서구 근대성에 대한 열등감과 강박관념의 표현이다. 장혼 자신은 자신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동존중의 전통적인 교육사상이 일부 유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유한 계층이 된 오늘날 그의 사상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4.항상 깨어 있음

 

아동존중의 교육은 시공을 초월해서 존중되어야 할 이념이다. 그러나 아동중심의 교육은 서구근대의 개별자적 인간관(個別子的 人間觀)의 독특한 산물이지,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영원한 진리는 아니다. 21세기는 “자유와 권리”가 아니라 “상생(相生)과 조화”의 시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혼은 죽기 1년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평생을 시작(詩作)과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얻은 그의 깨달음이 잘 드러나 있다.

 

만약 하늘을 본받는 것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잘잘못은 들을 뿐이요, 물건의 검고 흰 것은 볼뿐이다. 이처럼 무엇 무엇할 뿐이기에,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고통이나 즐거움을 만나게 되면 피하지 않을 뿐이요, 기다림과 성냄, 좋음과 싫어함을 당하게 되면 나타내지 않을 뿐이다.

 

모든 많고 적음, 굽고 곧음, 예쁘고 추함, 맑고 탁함을 분변하지 말고, 간섭하지 말고, 헐뜯지 말고, 뽐내지 말아서 한결같이 다른 이에게 맡길 뿐이다.

 

위의 글에서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호인 이이(而已)를 나타낸 것이다. 위 글을 통해 우리는 장혼이 서구의 근대적 개인이 아니라, 성인과 부처의 경지인 “이원론의 극복”을 추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혼의 말과 같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과 악은 사회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적 체험이며 느낌이다. 깨달음 속에서 선과 악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다른 한 쪽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한 몸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초월하여 선과 악, 신과 악마의 이원론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러한 이원론의 극복은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행위나 생각을 할 때 그것을 바로 바로 의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의식이 중요하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주시와 자각을 통해 장악하지 못한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자각하지 못함을 어두움(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 혹은 본질은 본래 밝은 것이었다. 그것을 명덕(明德)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밝음은 본능적 성향에 후천적 습관이 겹쳐서 어두워진다. 인간의 관심과 정동, 욕망 등의 의지 그리고 이에 봉사하는 사고에 의해 본래의 밝음이 가려진다.

 

항상 깨어 있음(常惺惺)이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욕망과 감정이 모두 밖이 아니라 안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기쁨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지켜본다면, 그 기쁨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분노와 슬픔,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감정을 일으킨 대상은 단지 내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표출되도록 하는 하나의 자극에 불과하다.

 

주의 깊게 지켜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해소된다. 또한 외부로 향한 감정은 그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내부로 향하게 된다.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 에너지가 그대로 돌아온다면 나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에너지가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지 않고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 반구저기(反求諸己), 즉 바로 자기인식, 자기 조명인 것이다. 우리 마음이 외부의 감정이나 상념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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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2·끝>

장혼이 한평생 설계했던 행복한 집 이이엄

 

중인들이 인왕산 언저리에 모여 살자, 아들들도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같이 글공부를 하며 친구가 되었고, 장성해서 전문직을 얻은 뒤에도 함께 모여 시를 짓거나 인생을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많은 친구들은 집도 이웃에 지어 한평생을 같이 살았다. 인왕산에서 중인 자제들을 가르쳤던 장혼은 오랫동안 집터를 물색하다가, 마음에 드는 위치에 헌집이 나오자 일단 구입해 놓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오랫동안 비용을 마련해 집을 지었다.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집, 마음맞는 친구들이 함께 있으면 초가 삼간도 넓은 집이었다.

 

면앙정 송순도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라고 시조를 읊었는데, 집터를 장만해 놓고 아침 저녁 마음 속으로 설계하는 동안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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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헌 집을 사다

 

인왕산에는 골짜기가 많아 무계동에는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지어 왕자와 사대부들이 모여 시와 그림을 즐겼고, 청풍계에는 김상용이 태고정을 지어 그의 후손인 노론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했으며, 옥류동에는 중인 천수경이 송석원을 지어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천수경의 친구 장혼도 친구 따라 인왕산 자락에 집을 지으려고 대지를 물색하다가, 옥류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헌집을 찾아냈다. 그는 인왕산 옥류동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등 뒤로는 푸른 절벽의 늙은 소나무가 멀리 바라보이고, 앞쪽으로는 도성의 즐비한 집들이 빼곡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가운데로 맑은 시내물이 흘러가는데, 꼬리는 큰 시내에 서려 있고, 머리는 산골짜기에 닿아 있다. 졸졸졸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울리고 거문고와 축(?)을 울리는 듯하다가, 비라도 올라치면 백 갈래로 물길이 나뉘어 내달려서 제법 볼 만하다.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는 않았다.”

 

그가 말한 옥류동은 명승지이면서도 시장바닥에 가까워,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동네이다. 경복궁 옆에 있어 장안을 굽어보면서도 숲으로 가리워진 동네, 옥류동(玉流洞)이라는 이름 그대로 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같이 들리는 골짜기지만 개와 닭 소리가 들리는 동네이다.

 

낮거나 습하지 않아 사람이 집 짓고 살기에 알맞았지만, 일부러 대지를 구입해 집을 지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지는 않았던 동네이다. 지금은 옥류천이 복개되어 옛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옥인동 자락의 형세는 그대로이다.

 

“옥류동의 길이 끝나가는 산발치에 오래 전부터 버려진 아무개의 집이 있었다. 집은 비좁고 누추했지만, 옥류동의 아름다움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잡초를 뽑아내고 막힌 곳을 없애자, 집터가 10무(畝·300여평) 남짓 되었다.

 

집 앞에는 지름이 한 자 반 되는 우물이 있는데, 깊이도 한 자 반이고, 둘레는 그의 세 갑절쯤 되었다. 바위를 갈라 샘을 뚫자, 갈라진 틈으로 샘물이 솟아났다. 물맛은 달고도 차가웠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 우물에서 너댓 걸음 떨어진 곳에 평평한 너럭바위가 있어, 여러 사람이 앉을 만했다.”

 

중인들은 전문직을 지녔기에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다.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바위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 옥류동은 시인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영의정 김수항이 지은 청휘각을 비롯한 여러 누각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한쪽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헌 집도 있었다.

 

집터는 10무 밖에 안되었지만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곳인데다, 열댓 명이 앉을 만한 너럭바위까지 있어 시 짓는 친구들이 모여 놀기에도 좋았다.

 

● 여러 해 동안 마음 속으로 설계하고 꽃과 나무를 심다

 

“집값을 물으니 겨우 50관(貫)이라 그 땅부터 사 놓고는, 지형을 따라 몇 개의 담을 두른 집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기와와 백토 장식을 하지 않고, 기둥과 용마루를 크게 하지 않는다. 푸른 홰나무 한 그루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게 하고, 벽오동 한 그루를 사랑채에 심어 서쪽으로 달빛을 받아들이며, 포도넝쿨이 사랑채의 옆을 덮어 햇볕을 가리게 한다.(줄임)

 

앵두나무는 안채의 서남쪽 모퉁이를 빙 둘러 심으며, 그 너머에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는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사과나무와 능금나무, 잣나무, 밤나무를 차례로 심고, 옥수수는 마른 땅에 심는다. 오이 한 뙈기, 동과 한 뙈기, 파 한 고랑을 동쪽 담장의 동편에 섞어 가꾸고, 아욱과 갓, 차조기는 집 남쪽에 구획을 지어 가로 세로로 심는다.

 

무와 배추는 집의 서쪽에 심되, 두둑을 만들어 양쪽을 갈라 놓는다. 가지는 채마밭 곁에 모종을 내어 심는데 자줏빛이다. 참외와 호박은 사방 울타리에 뻗어, 여러 나무들을 타고 오르게 한다.”

 

그가 그린 집은 호화주택이 아니라 작은 집이다. 기와도 얹지 않고, 백토도 바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기가 좋아하는 꽃과 채소를 심었으며, 햇볕과 달빛, 비와 바람이 차례로 그의 집을 찾아들게 하였다.

 

그가 짓는 집은 남에게 팔려고 짓는 집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살려고 짓는 집이다. 그는 집을 짓기 전부터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꽃이 피면 그 꽃을 보고, 나무가 무성해지면 그 아래서 쉬었으며, 열매가 달리면 따 먹고, 채소가 익으면 삶아 먹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집을 다 짓고 나자, 그 집에서 즐길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다.

 

● 책 읽고 노래 부르며 천명을 따르면 그만인 것을

 

“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게 하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다.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비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이같이 그윽한 삶의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어렵고, 말해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계속 “그만(而已)”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더니,“나의 천명을 따르면 그만이다. 그래서 내 집 편액을 이이엄(而已)이라 했다(聽吾天而已,故扁吾以而已)”고 설명했다.

 

그의 집 이름이 ‘이이엄’이 된 것은 당나라 시인 한퇴지의 시에서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만(破屋三間而已)”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꿈속의 집을 짓는 비용으로 300관을 계산했는데,“자나깨나 고심한 지 십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평생지(平生志)´라는 제목의 이 글을 쓸 때까지 그는 이 집을 짓지 못했지만, 그 집에서 살 계획은 여러 차례 밝혔다. 오래 된 거문고에서 옥도장과 인주에 이르기까지 “맑은 소용품 80종(淸供八十種)”을 선정해 놓았고, 사서삼경, 역사서, 이야기책, 시집, 의서, 연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맑은 책 100부(淸寶一百部)”를 선정해 놓았다.

 

●인왕산을 백배로 즐기다

 

인왕산은 하나이고, 그가 사들인 땅은 10무 밖에 안되었지만, 그는 인왕산을 백배로 즐겼다. 그가 꼽은 “맑은 경치 열가지(淸景十段)”는 지난주에 소개한 옥계십경(玉溪十景)과 대부분 겹치니, 자신이 인왕산에서 찾아낸 열 가지 아름다움을 옥계사 동인들과 공유한 셈이다.

 

“작은 언덕의 닭과 개” “골짜기 안의 채마밭”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찾아냈고,“밤낮 쉬지 않고 흐르는 샘물” “흐렸다 맑았다 하는 산기운”에서 자연의 움직임을 찾아냈다.

 

“벼랑에 어린 가벼운 이내”에서 아침의 아름다움을,“푸른 봉우리에 비치는 저녁노을”에서 저녁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나 눈에 띄는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즐겁게 살았다.

 

30세 이전에 ‘평생지´를 써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설계했던 그는 자기 뜻대로 삼간 집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의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므로 남들은 그가 가진 것 없음을 비웃었지만” 그 자신은 69세 되던 해 입춘절에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운명을 따르면 그만이다(聽之命而已)”라고 자부한 뒤,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오양생(悟養生)´이라는 글 마지막 줄에 “이이엄주인이 스스로 짓다.”고 끝맺었으니, 서른이 되기 전에 인생계획을 세운 그대로, 인왕산 자락에서 늘 만족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중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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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2010-01-25 SBS 8시 뉴스 송석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서체

 

올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당시 청의 수도였던 연경, 즉 베이징을 다녀온 지 2백년이 되는 해입니다. 추사의 연행길을 통해 19세기 문화와 예술을 조망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천수경, 장혼 등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들의 시모임이었던 '송석원'에 추사가 예서체로 써 준 글씨입니다.

처음 공개된 사진으로 추사의 이 글씨는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앞 인물 윤덕영 뒷배경 송석원(松石園) 옆 벽수산장(碧樹山莊),

 송석원(松石園)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24B355C601B1873X0

생몰년 : 1873(고종 10) ~ 1940(1940)

시대 : 항일기

본관 : 해평(海平)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부 : 윤철구(尹徹求)

 

[관련정보]

[문과]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

[진사시]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552위

 

[상세내용]

윤덕영(尹德榮)에 대하여

1873년(고종 10)∼1940년(?).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파. 본관은 해평(海平).

 

영돈령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이며, 윤택영(尹澤榮)의 형으로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비서감우비서랑(祕書監右祕書郞)이 되었다. 비서랑의 자격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1896년 내각총리대신비서관 겸 내각참서관‧경연원시독관(經筵院侍讀官)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만장서사관(輓章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 3등의관에 이어 바로 2등의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농상공부협판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내부지방국장, 1901년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하였고, 일본이 1898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획득한 지 3년 뒤인 1902년 착공을 시작하자 철도원부총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지계아문부총재(地契衙門副總裁)에, 1904년에는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비서원경(祕書院卿)‧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의정부참찬‧홍문관학사‧평리원재판장‧의정부찬정을 역임하였다.

 

1905년 교육사업에 관계하여 법학교를 설치한 바도 있다.

 

1908년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었고, 1910년 국권상실 때에 궁내부대신인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합방불가피 역설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받고 주저하다가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협박‧회유에 동의하여 그 조인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국권상실 후 황실과 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분자에 대한 행상(行賞)을 실시하였을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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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동 47번지 일대의 송석원 터는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집안이 소유를 이어왔던 천혜의 터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인문학이 자리잡고 꽃피운 거점으로써의 역사문화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친일파 윤덕영은 초호화 별장인 벽수산장을 지어 세간의 사람들이 ‘아방궁’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일대에 딸과 사위를 위한 현재의 박노수 가옥 등을 지어 일가가 거주하였다.

 

이 중, 남산 한옥마을에 본 따 지어지기도 한 옥인동 47-133번지 ‘옥인동 윤씨 가옥’은 그 동안의 관리부실로 인해 비록 낡고 헐었으나 이 곳의 독특한 지형에 맞게 지어진 그대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조선후기 상류측 가옥의 전형으로, 그 입지와 건축양식은 물론, 원형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축이 아닌 존치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옥인동 윤씨가옥에서 경사를 올라가면 나타나는 한옥 밀집지역은 본래 아흔 아홉간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해방 이후 헐리고 현재의 밀집된 한옥이 들어선 것으로 추측되는 곳으로, 벽수산장을 별장으로 가지고 있던 윤덕영이 자신의 집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후 지어진 한옥들은 충분히 그 형식이나 갖춤을 보았을 때 주거사적인 연구 가치 또한 크다고 할 만 한 가옥들이다.

 

우암 송시열의 옥류동 각자는 해방 이후 주택개발 과정에서 깨어 없어졌다고는 하나, 그 위치나 파괴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를 밝히는 과정은 의미있는 일이다.

 

가재 김창업의 각자가 있다는 가재 우물 또한 1950년대 주택개발 과정에서 메워지고 현재의 주택 아래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역시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어 복원하거나 연구조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 각자는 주택개발 과정에서 시멘트에 덮여 현재에 이르고 있어서, 옥인제1구역 지표조사 과정에서도 추정지로만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진술이나 현장 지형 조건 및 조선시대 그림의 지형을 미루어 옥인동 47-253번지(재개발조합 사무실 건물)의 석축 아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에 대한 현장 조사와 발굴 복원 계획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다.

 

옥인동 일대, 조선지형도(1921)

 윤평섭, 송석원에 대한 논문, 한국전통조경학회지, 1984

 

재개발 구역 내 역사자원 위치도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지금의 서울 옥인동 옥류계곡에 있던 송석원은 조선시대 중인 문학의 정점인 옥계시사의 거점이었다.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에 실려있는 18세기 후반 작품으로, 천수경을 비롯한 위항시인들이 1791년 6월 15일 밤 송석원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던 풍경이다.  

단원의 낙관 옆에 미산 마성린(眉山 馬聖麟)의 제시(題詩)가 추가되어 있는데,

마성린은 위항시인들의 후원자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김홍도(金弘道) 그림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조선 18세기 후반, 개인 소장『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내

서울역사박물관,『 바위글씨전』, 2004년, 48면 전재(轉載)

 

송석원의 시사는 한달에 한 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달리하며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 보름), 칠석, 중양절(9월 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 그믐에 모였다.

 

 

 이인문 송석원 시사아회도  

이인문(李寅文) 그림 「송석원 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

 

정조 15(1791)년, 개인 소장『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내

서울역사박물관,『 바위글씨전』, 2004년, 49면 전재(轉載)

 

송석원 시사에 참여하는 문인들이 1791년 6월 보름밤 달밤에 옥계(玉溪), 즉 옥류동 계곡에 모여 시 짓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윗부분에 마성린(馬聖麟)의 제시(題詩)가 적혀 있으며 아래에 옥계가 보인다.

 

승문원(承文院)의 서리(胥吏)를 지낸 마성린은 재산이 넉넉하여 위항(委巷:조선 선조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중인ㆍ서얼ㆍ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시인들의 후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송석원> 각자는 실제와 다르게 세로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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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 터松石園址

 

송석원은 천수경(千壽慶: 1758~1818년)의 집 이름으로, 김수항의 육청헌과 청휘각의 옆에 있었거나 육청헌과 청휘각의 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각각 전한다.

 

김수항의 청휘각이 조선 말기까지 그 후손에게 대대로 전승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송석원은 청휘각을 그대로 계승한 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육청헌의 뒤에 송석원 각자가 있다는 것으로 보면 이 두 집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수경과 송석원에 대하여는 아래 조희룡(趙熙龍:1797~?년)이 엮은 야담집인『호산외사壺山外史』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천수경은 자를 군선(君善)이라 하였다. 집은 가난하나 독서를 즐기어 특히 시에 재주가 있었다. 옥류천 위에 초가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지어‘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하였다.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그 이름이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였다.

 

송(松)과 석(石)은 그가 사는 송석원에서 따온 것이고 족(足)은 셋이면 족하다는 뜻이며, 과(過)는 넷은 너무 지나치다는 뜻이며, 하(何)는 다섯이나 되니 어찌된 것이냐는 뜻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세간에 유행하는『풍요속선(風謠續選)』은 그가 모아서 엮은 책이다. 수경이 죽으니 안시혁(安時赫)이 그 묘 앞 묘갈(墓碣)에 다만,“시인 천수경의 묘(詩人千壽慶之墓)”라 썼다.

 

정조 10(1786)년 7월 천수경은 송석원이 있는 옥계, 즉 옥류동에서 같은 중인中人계층인 차좌일車佐一,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二, 박윤묵朴允默, 김낙서金洛瑞 등 13명의 시인들과 함께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는 장안의 화제가 되어 문인들이 초청받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으며,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큰 백일장도 열었다 한다. 이 시사의 이름은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 하였고 또한 이들이 모인 곳이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에 있음으로 서사西社,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도 불렸다.

 

송석원에는 뜻있는 선비들도 찾아 청한淸閑의 시간을 즐겼는데, 이 가운데에는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흥선군(興宣君: 흥선대원군)도 있었다고 한다.

 

송석원은 일제 강점기 때에 이르러 앞에서 언급한 육청헌 및 청휘각, 그리고 기타 일대의 여러 별서 및 집과 함께 윤덕영의 별장인 벽수산장이 되었다. 윤덕영은 순종 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백부伯父이며 친일로 그 이름을 더럽혔다.

 

윤덕영의 별장인 벽수산장과 그 안에 있었던 정자 일양정一陽亭에 대하여

 

▼ 김학진金鶴鎭이 지은 아래 기문記文「일양정기략一陽亭記略」에는 육청헌, 송석원, 청휘각, 벽수산장에 이르는 역사, 위치, 정취와 함께 대표적 친일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가꾼 별장의 호화스러움이 잘 나타나 있다.

 

옥류동 송석원은 나의 선조 문곡(文谷: 김수항의 호) 선생의 별장이다. 선생의 옛 집이 북부 순화방에 있었는데 그 뜰에 여섯 그루의 나무가 있어 슬하에 여섯 자제를 둔 것과 서로 맞았다. 그리하여 집 옥호(屋號)를 육청헌이라 하였다.

 

그 집에서 오른쪽으로 2, 30보를 가서 한등성이를 넘으면 그 기슭에 언덕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산골 물이 얽히고 굽이친다. 이를 차지하니 아침저녁으로 지팡이를 끌며 거닐 만하고 특히 청휘각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구경할 만하였다.

 

가재우물 또한 제격이다. 여기를 옥류동이라 하는데 그 옆 깔린 바위에 새긴「옥류동」이란 전암(鐫岩: 바위에 새긴) 문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필치라고도 전한다.

 

옥류동 골 안에 있는「송석원」이라 새긴 전암 문자는 추사 김정희공(金正喜公)의 필적이다. 기와집은 우리 집안끼리 번갈아 들어 살기를 10여 세(世: 1세는 약 30년)에 황사(黃史) 민상공(閔相公: 민씨 성을 가진 정승, 즉 민규호)이 병으로 여기 물을 마시게 됨에 내가 갈 데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인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지금 벽수(碧樹) 윤공(尹公: 윤덕영)이 산장을 꾸미고 거친 데를 다듬고 물이 막힌 곳을 뚫어서 완연하게 연못을 이루었다.

 

벽수선생이 심은 소나무가 층층 바위 옆에 큰 노목으로 울창하게 자라 온통 뜰을 덮었는데 몇 개 받침대로 받쳐주고 있다. 그 아래쪽으로 물을 끌어 반무(半畝) 가량 넓이의 네모진 연못을 꾸미니 사흥가(四興架), 팔관파(八觀坡), 서상대(西爽臺), 동서사(東西..)에 구름과 나무가 어우러져서 푸르르니 발 돌리는 대로 경치가 바뀌어 술 마시고 글짓기에 알맞다. 이름하여 일양정이라 하고 어느 친구의 글씨로 현판을 걸었다. 나에게 청하여 이렇게 쓴다.

 

박윤묵朴允默은『우혜천기又惠泉記』에서“송석원에는 우혜천이라는 물맛이 좋은 샘물이 있어 석벽에다 우혜천이라 새겼다”하였다. 이를 통하여 송석원 안에 우혜천이라는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학진(金鶴鎭: 1838~?년)

김수항의 9대손,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국왕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송석원松石園> 각자刻字

 

서울시 종로구 송석원 3길 13(옥인동 47-253번지) 일대(추정)

서울역사박물관,『바위글씨전』, 2004년, 49면 전재(轉載)

 

칠성대(七星臺)라 부르던 암벽에 있었던 이 각자는 지금은 개인 주택에 가려 쉽게 찾을 수 없다. 사진은 1950년대 후반에 촬영하였다.

 

<송석원> 각자의 왼쪽에는 <丁丑淸和月小蓬萊書(정축청화월소봉래서)>라는 작은 각자(刻字)가 있는데‘청화’란 음력 4월의 다른 이름이며, ‘소봉래’란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의 많은 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통해 이 각자의 글씨는 순조 17(1817)년 4월 김정희의 나이 32세 되던 해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송석원> 각자(刻字)와 함께 있었던 <귀대(龜臺)> 각자(刻字)는 계산(溪山) 김수근(金洙根: 1798~1854년)이 썼다고 한다. 김수근은 본관 안동(장동김씨), 호 계산초로(溪山樵老), 시호 정문(正文), 목사 인순(麟淳)의 아들이다.

 

순조 34(18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判尹) 등을 지냈다. 저서에『삼연년보(三淵年譜), 삼연은 김창흡(金昌翕: 김학진의 5대조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의 아호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