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방/생활정보

가치구미(勝ち組)란 - 승자

by 연송 김환수 2013. 6. 11.

 

 

가치구미(勝ち組) 란 ?

 

가치구미(勝ち組, 승자조, Winners, 승자)

사회적 지위, 신용 및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개인이나 기업을 가리키는 말. 성공한 사람(가치구미)

 

 

 

 마케구미(負け組, 패자조, 패자)

"마케구미" 는 소득수준, 사회적 지위, 신용도가 낮고 소위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그룹을 말한다.

 

 

-------------------------------------------------------

 

가치구미(勝ち組)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정보 부족에 의하여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치구미(勝ち組)란 하와이와 남미(브라질)의 일계인(日系人) 사회에서 태평양 전쟁패전 후에 정보부족에 의해 일본이 미국에 승리했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일계인 (日系人)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지역에 농업이민을 갔었던 일본인과 그 후손을 일컫는 말.

 

일계인은 남미에 거주하는 숫자가 많기 때문에 일계인하면 남미출신의 일본이민자의 후손을 지칭

 

일계미인(日系米人)은 남미 지역외에 미국에 사는 일계미국인을 일계미인(일본계 미국인)이라고 함.

 

 

하와이에서는 일본의 패전 이후 10년이 지나고도 가치구미가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본의 패전이라는 정확한 정보가 알려짐에 따라 현실을 인정하고 자연히 소멸되었다.

일본의 패배를 상정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마케구미" 라고 불렀다.

 

브라질에서는 "가치구미" 와 "마케구미"  간에 다툼이 일어나 대규모 무력충돌 사건으로 비화되어 사상자도 발생했다.

 

=============================================================

 

일본 패잔병, 30년 만에 필리핀 정글에서 나와

 

 

▲ 패전 후 30년 만에 투항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1974년 2월 20일 | 일본 패잔병, 30년 만에 필리핀 정글에서 나와

 

“명령이 없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29년 4개월을 산속에서 보낸 사람의 첫 마디였다.

 

1974년 2월 20일 저녁, 필리핀 루방섬에서 그를 찾아나선 한 일본인 청년과 조우했을 때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전 일본 소위의 반응이었다.

 

오노다가 조국을 떠나 멀리 루방섬에 배치된 것은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던 1944년 9월이었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투항하지 말라”는 상관의 명령을 아로새기며 루방섬에 상륙(1945년 3월)한 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40여명만 살아남아 정글로 도주했다.

 

일본의 항복 사실도 모른 채 항전을 거듭했으나 차츰 패전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부분은 투항했고, 오노다 소위와 3명의 사병만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들었다.

 

 1950년에 1명이 투항하고, 1954년과 1972년에 2명마저 사살되어 혼자가 됐으나 오노다의 의지에는 굽힘이 없었다.

 

미군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리는 전단을 산속에 뿌리고, 일본 정부와 가족 역시 수차례 현지를 방문해 투항을 권고했지만 오노다는 여전히 일본의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다.

 

멀리서 가족을 보았을 때도 미군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며 만나지 않았다니 이쯤 되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것이 정상이다.

 

일본은 오노다의 요구대로 과거 직속상관에게 구(舊) 일본군의 투항명령문을 보내 하산을 유도했다.

 

오노다는 1974년 3월 10일 필리핀 공군사령관에게 일본도(刀)를 넘겨주며 정식으로 항복했다. 처음 발견 당시 머리는 일본군 규칙에 따라 짧게 깎았고 복장은 단정했으며 소총은 반짝반짝 손질되어 있었다. 항복한 그날 밤 오노다는 30년 동안의 루방섬 정찰 및 전투경과를 과거 상관에게 보고했다.

 

3월 12일, 22세 청년에서 52세 중년으로 변해버린 오노다가 귀국했을 때 일본 국민은 “일본 군인정신의 부활”이라며 열광하고 우익들은 “일본 정신, 즉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굳게 지킨 영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노다는 이듬해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후의 일본에서 과거의 일본적 가치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가 말한 ‘일본적 가치’라는 게 이같이 사리분별 없고 맹목적인 명령과 복종이었다면 일본식 군국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될 법도 하다.

 

오노다 히로오(오른쪽) - 1944년

1922생인 오노다 히로오는 현재 나이가 90살이다

전쟁이 끝난줄 모르고 29년 동안 필리핀의 정글속에서 숨어지내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본의 마지막 낙오병이었던  오노다 히로오  - 1974년 3월 10일 

 

일본군 퇴역 소위 오노다 히로오는 일본의 패전이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 루뱅에서 숨어 지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1944년 12월 자신의 말대로 이미 패색이 짙은 전쟁에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며 루뱅섬으로 파견되었다.

 

250여명의 오합지졸에 불과한 풋내기 부대 지휘관으로 부임하자마자 곧 미군의 공격으로 207명이 죽고 43명이 남았다. 이때부터 전쟁이라기보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쥐처럼 숨어 지내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에 "45년 8월 15일에 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투항하라"는 전단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그러나 오노다는 이를 미군의 속임수로 생각하고 투항을 거절했다. 그해 12월에도 같은 내용의 전단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때 43명중 대부분이 패전 사실을 받아들이고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고  오노다를 비롯한 4명만이 투항을 거절했다.

 

 1946년 4월에는 이미 투항했던 부하들이 섬 전체를 다니며 "오노다, 어디있나? 나와라. 전쟁이 끝났다. 어서 나와라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자" 라고 부르며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노다는 이것도 미군의 흉계로 믿고 거절했다. 이번에는 오노다의 가족이 가족사진과 가족들이 보낸 편지 전단을 뿌리면서 돌아오라고 부르짖었다. 오노다는 이것도 가족들이 살기 위해 당국에 협조하는 것으로 알고 거부했다.

 

오노다는 이러한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루뱅 섬 원주민들 30명을 살해했다. 심지어는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질러 몽땅 태우는가하면 가축을 죽이고 원주민들을 토막 살해하기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노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털끔만치도 반성은 커녕 뻔뻔스럽게도 하는 말이 "그들이 거기 있는게 불행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 이후 해마다 각계 각층에서 찾아가 "일본으로 돌아갑시다.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라고 부르면서 찾았다.

 

심지어 필리핀 주재 일본 대사관 이름으로 편지함을 설치하여 고국에서 온 편지들과 신문 등을 넣어두어 보게 했지만 함정으로 알고 접근마저 거부했다.

 

1965년에는 마을 원주민으로부터 라디오를 약탈하여 직접 패전을 비롯한 모든 뉴스를 들었음에도 돌아오기를 거절했다.

 

가족들과 고등학교 동창생들까지 동원되어 오노다 구출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학교 교가를 울먹이면서 부르며 "오노다, 일본에서 형님, 누나가 오셨습니다.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 주십시오"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그후 16개월 동안 종적을 감춘 뒤 어처구니없게도 옛 상관이 전해준 '패전했으니 귀국하라'는 특별명령서를 받고서야 투항했다.

 

그가 29년 동안 루뱅 섬 원주민을 학살한 것이나 피해를 준 것에 따르게 되면 당연히 전범처리하여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져야 함에도 마르코스 정부는 막강한 일본의 경제력 앞에 오노다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사면석방하고 말았다.

 

루뱅섬의 피해 원주민들은 지금도 이를 두고 증오심을 삭이고 있다.

 

만약 오노다 히로오가 처음부터 패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투항했더라면 더 이상의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30년 청춘 인생을 그토록 패잔병의 미치광이 같은 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일부 우익단체에서는 그를 영웅시까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고 있지만 그는 누가 봐도 그는 조그만 섬에서 생쥐같이 숨어 살았던 교활한 일본 낙오병의 인생이었다.

 

 

 

      낡아서 고쳐입은 남루한 군복을 입고 일본식 경례를 붙이는

      오노다 히로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일본도를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내어

 주며  정식으로 항복 의식을 취하는 오나다 히로오 

  - 1974년 3월11일 

 

 비행기편으로 일본 본토에 귀국한 직후의 오노다 히로오

  

귀국 직후의 오노다 히로오

 

22년후 74세때 필리핀 루방섬을 다시 찾은 오노다 히로오와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필리핀 농부 칸디도 트리아(Candido Tria)씨

(81세)의 만남 - 1996년 5월 20일

 

세월이 죄인을 용서해 주는 것인가. 아니면 세월이 지나면 죄인의 죄가 어쩔수 없이 면죄가 되는 것인가. 일본으로 보면 국가적 영웅일지 모르지만  그는 엄연히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범죄자이자 무고한 필리핀  민간인 30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일 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지난 세월의 역사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였든지  시간이 지나도 그 역사의 물줄기는 도도히 흘러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남기게 된다. 

 

 1973년 필리핀 루뱅섬에 갇혀있다가 일본으로 귀국후 오노다 히로오는 일본이 발전을 하면서 옛날의 좋은 전통을 잃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1974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브라질로 결혼한 아내 마치에(町枝)와 함께 이민을 갔다.

 

그 곳에서 그는 목장을 운영 하였는데 섬에서 숨어살았던 경험 덕분에 목장 운영을 잘했다.

그는 규모가 큰 목장 운영으로 돈도 많이 벌어 성공한 이민 일본인이 되었고 이후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의 청소년들에 대한 강연회등의 사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 영국 BBC 방송이 오노다 히로오와 인터뷰를 하고 그 행적을 조사하면서 제작했었던 다큐멘터리 [최후의 황군]은 전세계인들에게 2차 세계대전 당시와 이후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영국 BBC 방송이 그러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의도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근원이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사상에 깊게 배여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오노다 히로오는 필리핀에서의 홀로의 전쟁을 끝내고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변해 있는 일본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의 눈에 비친 일본은 나약한 미국의 식민지였던 것이었다. 과거의 그들이 지녔던 미덕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기 절제등이 온데 간데 없었다고 개탄한다.

한편 그를 숭상하는 무리들도 많았다.
그는 그들로 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개인의 안녕 따위는 돌보지 않고 천황만을 위하여 기계와도 같이 철저하고 강인한 그의 정신을 갸륵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갸륵하다고 보는 그 정신이 진정 어떠한 것인지 세계인들이 공감하게끔 영국의 BBC 방송은 객관적인 잣대로 파헤친다.

오노다 히로오는 필리핀 정글에서 고립되어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그의 부하 셋과 함께 외로운 전쟁을 시작한다. 민간인을 해치는 의미없는 전쟁을 하는 와중에 일본인들이 공중에서 뿌린 삐라와 본국에서 그를 찾으러 온 동료등에 의해 그는 전쟁이 진짜로 끝났음을 깨달으나 그에게는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일본이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부하들이 죽어 혼자가 되지만 그는 오히려 더 홀가분해 한다.

 

자기 방식대로 전쟁을 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존재가 없어졌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끝내는 한 일본인이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자 상관(천황)의 명령이 없이는 항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오노다를 구할 목적으로 항복하라는 상관의 명령서를 가지고 돌아와 그를 귀국시킨다.

이러한 형태를 보면 그것은 전 시대 일본의 허황된 천황 이데올로기로
타국민과 타인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토록 학대하면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러한 사람을 영웅시 하는 일본 사회의 한심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천황의 이름으로 라는 말도 안되는 비인도주의적인 명분으로  수많은 중국인과 한국인및 동남아시아인들이 학살을 당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에 의해 죄없는 필리핀인들이 비명에 살해를 당하였다.

 

아무 실익도 명분도 없는 이미 끝난 전쟁에 고립된 오노다는 자신의 일생을 필리핀 정글에서 썩이며 허비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는데 그것은 그의 행위를 환호하며 자랑스러워 하는 비슷한 족속의 동포에 의해 더욱 고양된다.

 

영국 BBC 방송 다큐멘터이의 마지막 장면은 자기 동생을 잃은 한 필리핀인 농부의 증언으로 끝난다.
"제 동생은 야자 나무에 올라가 있었는데 어디선지 모를 총탄에 허벅지를 맞고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서 그가 지녔던 야자 따는 칼로 난자를 당해 죽었습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있었죠. 천인공노할 놈들입니다.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2차 세계대전의 패전후 자본주의에 의해 다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하여 필리핀 정권은 개탄스럽게도 일본과의 유화정책으로 전후 필리핀인 30명을 살해한 범죄자인 오노다 히로오를 사면하고 대통령은 그를 초대했는데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

 

일본군 패잔병 두 명 찾았다

 

필리핀 민다나오섬에 숨어 살아 온 2명의 일본 패잔병 중 한 명인 나카우치 쓰구요시가 청년 시절 군마를 타고 있는 모습.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이다.[도쿄 AP=연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은줄 알았던 형부가 60년만에 필리핀 산악지대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처제가 27일 시고쿠 한 묘지에 세워진 그의 묘비를 어루 만지고 있다.[시고쿠AP=연합]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60년 동안 필리핀의 산악지대에서 생활해 온 옛 일본군 2명이 발견됐다.

 

일본 정부는 27일 이들의 신원 확인과 귀국 준비를 위해 현지에 외교관을 급파했다.

 

일본에선 "1972년 괌 밀림 속에서 일본의 패망 사실을 모르고 원시생활을 하고 있던 남성이 구출된 것과 같은 드라마가 또다시 현실에서 일어났다"며 흥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지에 옛 일본군 4명이 살아 있다는 정보가 있다"고 발표했다.

◆ 게릴라 부대에 합류해 생존 = 필리핀 민다나오섬 최남단인 제너럴 산토스 부근에서 생존 사실이 확인된 주인공은 중위 야마카와 요시오(山川吉雄.87)와 상병 나카우치 쓰즈키(中內續喜.83) 2명. 일본군 기록에는 전사자로 처리돼 있었다.

두 사람이 소속했던 30사단은 44년 7월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민다나오섬으로 파병됐다.

 

30사단은 미군의 공습으로 퇴각을 거듭하면서 사단 병력의 80%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일부 부대는 산악지대에서 분대 단위로 흩어져 있다 종전을 맞게 됐다. 야마카와 등 생존자 두 사람도 이 과정에서 낙오된 채 산악지대에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최근까지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는 필리핀의 반정부 게릴라 부대에 합류해 전술 교육 등을 맡아왔다.

 

이들이 숨어 있던 지역은 필리핀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반군 점령지역이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현지 여성과 결혼해 자녀까지 둔 것으로 보도됐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일본 패망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보인다. 

 

 

◆ 발견과 구출 노력 = 이들이 처음 발견된 것은 지난해 8월. 민다나오에서 일본인 남편과 함께 목재 벌채 작업을 하던 필리핀 여성이 게릴라와 접촉하던 중 우연히 이들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여성은 곧바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남편은 옛 일본군의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 '위령사업협력단체 연합회'에 연락했다.

 

이 단체의 주선으로 두 남성은 현재 반정부 게릴라 점령지역을 벗어나 필리핀 당국의 보호 속에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한때 "일본에 돌아가면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느냐"고 걱정하면서 이름조차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러던 중 필리핀 여성과 몇 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일본행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합회 측은 이들이 밝힌 이름을 옛 일본군 명부 등 기록과 대조한 결과 30사단 30연대원으로 등재된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에선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 속에서도 이들의 조기 귀국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언론들은 필리핀 전역의 일본군 생존자가 40여 명에 이른다는 정보도 있다고 보도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중앙일보
2005.05.27 19:23 입력 / 2005.05.28 06:23 수정

 

===============================================================

 

끝까지 버틴 일본군 패잔병 대표적인 인물

 

요꼬이 병장

괌에서 발견되었는데 귀국시 "부끄럽게 살아돌아왔다"라는 인사를 환영하는 국민에게 남겼음.

 

오노다 중위

필리핀 루방섬에서 발견당시 소총 한정에 탄환 5백발, 수류탄 6발을 즉시 사용가능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었으며, 은거기간에 필리핀 순찰대와 민간인 30명을 죽였음.

전쟁이 끝났으니 귀환하자는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여 전쟁당시 상사가 직접 찾아가 공작중지명령을 내리자 돌아가는데 동의함.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특별사면하여 처벌 안받고 귀국함. 귀국시 거국적인 환영을 받고 마지막 사무라이 투혼으로 칭송받았으며, 이후 우익단체에 소속되어 남경학살 조작설을 외치고 다녔다 함.

 

요꼬이 병장 일본 패전 후 28년째 정글생활

 

1972년 1월24일 저녁, 괌(서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에 위치한 미국 자치령)의 타로포포 강변. 새우 그물을 걷으러 가던 동네 주민 두 명은 갈대숲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동물인가 싶어 들여다보는 순간 사람 비슷한 형체가 튀어올라 도망쳤다. 두 사람은 잽싸게 달려 ‘그것’을 붙잡았다. 동물이 아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텁수룩하고,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누더기를 걸쳤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일본군 패잔병 요코이 쇼이치는 이렇게 28년 만에 세상에 발견됐다.

 

요코이는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41년 일본군에 징집됐다. 그전까지는 아이치현 사오리에서 양복점 견습으로 일했다. 중국 만주와 서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를 거쳐 괌에는 43년에 왔다. 이듬해 미국이 괌을 재점령하자 요코이를 포함한 10명의 병사는 정글 깊숙이 퇴각했다. 

 

7명은 일찌감치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나머지 세 명은 서로의 은신처를 오가며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64년 두 병사가 굶주림으로 사망해 요코이 혼자 남았다.

 

그는 놀라운 생존력으로 정글에서 살아남았다. 강에서 게와 새우를 잡아 먹고, 망고와 코코넛을 따 먹었으며 비둘기, 야생 돼지, 쥐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나뭇가지를 두드려 얇게 편 조각을 꿰매 바지와 셔츠를 만들었고, 손전등의 플라스틱을 돌에 갈아 단추도 만들어 끼웠다. 나뭇가지를 비벼 불씨를 피워서 물을 끓여 마시기도 했다.

 

그가 손과 원시적인 도구로 판 땅굴 은신처는 바로 앞에서도 분별하기 힘들 만큼 감쪽같았다. 긴 대나무 사다리를 내려서 땅굴에 들어가면 한 사람이 간신히 쪼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 나왔다. 나름대로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엌, 강물에 흘려 보내도록 설계된 화장실도 있었다. 요코이는 낮엔 땅굴 안에 은신해 있다가 밤에만 나와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녔다.

 

일본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유명인이 돼 있었다. “살아 돌아와서 몹시 당황스럽습니다”라는 그의 귀국 인사는 빠른 속도로 일본 전역으로 전파됐다.

 

사실 요코이는 52년께 정글에서 일본 패전을 알리는 전단을 봤다. 그러나 ‘산 채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라’는 일본군 훈령이 두려웠던 그는 정글에서 야인으로 사는 쪽을 택했다.

 

요코이는 9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텔레비전 스타 겸 ‘소박한 삶의 전도사’로 살았다.

 

괌의 타로포포 폭포 리조트에는 요코이의 땅굴을 재현해 놓은 모형이 만들어졌다.

 

외줄을 타고 거기까지 다녀오는 게 인기 관광코스 중 하나다.

 

 

오노다 히로(小野田寛郎, 1922년 3월 19일 -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는데도 29년 동안 필리핀의 정글에 숨어서 항복하지 않았던 일본 장교이다.

 

오노다 소위는 필리핀 루방 섬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정보장교였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루방 섬을 점령하면서 대부분의 일본군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는데, 오노다 소위와 몇명은 정글 깊이 숨어 들었다. 오노다 소위는 처음에 세명의 동료와 함께 산에서 살았다.

 

그 중에 한명은 필리핀 정부군에 항복했고, 나머지 두명은 각각 1954년과 1972년에 지방 순찰대와 교전중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오노다 소위는 2차 대전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끝내 29년 동안이나 투항을 거부하며 정글에서 홀로 지냈다.

 

2차 대전중 연합군이 살포한 선전물은 물론 2차대전이 끝나고 필리핀 정부군이 뿌린 '전쟁은 끝났으니 항복하라'는 내용의 선전물까지 자신들을 기만하는 계략이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 정부와 오노다의 가족들도 필리핀에 와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것도 연합군의 계략이라고 생각하여 응하지 않았다. 결국 1960년 일본 정부는 오노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판정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된 오노다 소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직접 찾겠다고 결심했다. 1974년 루방 섬을 방문한 스즈키는 결국 오노다를 찾는데 성공했다. 스즈키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2차대전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오노다를 설득했으나, 오노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렇다고 해도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투항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스즈키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오노다의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찾았고, 제대후 도서 판매상이 된 타니구치는 스즈키와 함께 루방 섬에서 오노다를 만나 투항을 명령했다. 오노다는 2차 대전에서 끝내 일본군이 패망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오랜 설득끝에야 투항을 결심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발의 탄환과 대여섯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는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오노다가 29년 동안이나 정글에 숨어서 지역 순찰대와 게릴라전을 벌이느라 30명의 필리핀 사람을 죽이고 1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범죄를 사면해줬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들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다.

 

30년 동안이나 필리핀의 정글에서 숨어지냈던 오노다는 현대화된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떠나서 목장을 경영하였다가, 1984년 오노다 자연학교(小野田自然塾)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속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 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여 결혼하였다.

 

아내와 함께 우익활동가로 활동하여,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의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군에 의한 남경 대학살을 중국측에 의한 조작이라고 외치며 부정하고 있다.

 

 

8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