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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법정스님 말씀 등

무일푼 스님 알고보니 1억짜리 그린 화가

by 연송 김환수 2012. 7. 5.

무일푼 스님 알고보니 1억짜리 그린 화가

 

 

온라인뉴스팀, widecvrg@gmail.com

등록일: 2012-06-29 오후 5:28:58

 

 

스님에겐 명품 외제차가 있었다. 직접 그린 선화를 줬더니 그림 값 대신에 어떤 재력가가 남겨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외제차를 또 다른 누군가가 보더니 부러워했다.

 

“갖고 싶은가? 그럼 자네가 가져가게나.”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이 있어 화제다. 스님은 사찰도 없고 시주도 안 받는다. 직접 그린 선화가 팔리면 화구 구입비만 빼고 모두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자신의 소유로 된 재산이 없다.

 

작품 중 1억 원 이상에 팔리는 것도 있고, 가로 12m, 세로 2.8m 화폭에 100만 동자상으로 숲을 이룬 작품 <화엄 법계도 백만동자-새벽>은 ‘법력의 극치를 이룬 역작’이라 칭송되고 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스님은 파괴되고 유린되고 상처 입은 생명을 수행자로서 위로하기 위해 끊임없이 참선하며 그리게 되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니 외제차가 있어도 그건 그냥 외제차일 뿐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주는 것이다.

 

오늘도 홀로 작은 암자 ‘휴유암’을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픈 상처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붓을 들고 있는 허허당 스님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말한다.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이후 세상에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다고. 이러한 때에 진실로 버리고 비울 수 있는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는 허허당 스님이라는 존재는 가뭄 날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존재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내 것이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가진 채로 버려라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오늘도 쉼 없이 일하는 우리들의 텅빈 가슴에 스님의 목소리는 한줄기 청아한 풍경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가진 것이라곤 흰 여백의 화선지와 한 자루 붓이 전부인 허허당 스님의 말과 그림이 한권의 책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에 오롯이 담겨졌다.

 

떠나 있어라

떠나 있는 자에겐

삶이 곧 여행이다

찾지 마라, 잃기 쉽다

 

소설가 이외수는 허허당 스님의 <비고 빈 집>을 읽고 “가시가 살에 박혔을 때처럼 ‘아!’하는 탄성을 발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아트디렉터 김홍기는 “스님의 그림은 자유로운 그 자체다.

 

붓을 던져 학을 그리고, 그 학이 날게 만드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일필휘지로 생명력 가득한 존재를 담아냈다”라고 했다. 책에는 돈으로 절대 환산할 수 없는 스님의 그림 80여 컷이 들어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굳이 전문가의 고견을 빌리지 않아도 스님의 글과 그림은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는 듯한 평온함을 준다. 그런데 그 평온함은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담은 것이라 더 마음에 울림을 준다. 이는 연습하거나 흉내 낸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림과 글에 베어난 것이다.

 

 

오늘 하루도 마음에 담을 수 없는 것들과 힘든 하루를 보냈는가? 그런 당신에게 산중 생활에서 길어 올린 명상과 사색에 스님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 어우러진 스님의 글과 그림은 세상 풍파에 지치고 상처 받은 영혼의 피안처가 되어줄 것이다.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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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책소개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선 수행에 바탕을 둔 선화 작업을 통해 세상을 통쾌하게 품어내는 허허당 스님의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경상북도 비학산자락 작은 암자 휴유암에 머물면서, 파괴되고 유린되고 상처 입은 생명을 위로하기 위해 끊임없이 참선하며 붓을 들어온 저자의 글과 그림을 담아냈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아픈 통찰과 무한한 사랑에서 솟아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아픔, 괴로움, 집착을 잊고서 즐겁고 자유로울 뿐 아니라,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수행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저자 허허당은 1974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6년 해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향곡 선사 문하에서 선 수행을 쌓았다.

 

1978년 경남 남지 토굴에서 한 도반과 정진하던 중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붓을 잡기 시작한 뒤, 1983년부터 지리산 벽송사 방장선원에서 선 수행과 함께 본격적인 선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뒤 꾸준히 국내 전시회뿐 아니라, 2000년 6월 스위스 취리히, 2010년 하와이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2013년 뉴욕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왼발은 뜨고 오른발은》《낙타를 모는 성자》《허허당 비고 빈 집》 등이 있다. 경북 비학산자락 ‘휴유암’에서 정진 중이며, 강원도 화천군에서 ‘평화의 마을, 허허당 미술관’을 조성 중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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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백만동자'를 그린 허허당 (虛虛堂ㆍ 비고 빈집)

 

"붓을 놀릴 때만 한판 놀고…붓 놓으면 내 것이 없어"

 

부호 집안, 철학책에 빠져… 중졸 후 가출 18세때 출가…성철과 향곡 스님 수발 들어

출가는 도 깨닫고… 부처 되려고 한 것… 절을 짓는 일 안해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1.05.09 03:18 /  수정 2011.05.09 07:27

 

"백만동자(童子)를 그린 것도 '장난기'인데, 아무도 흉내 못 낼 걸 그려야지, 백만 개를 흉내 내다가는 탈진해 죽어버릴 테니. 백만 개를 세어봤느냐고?

 

동자 하나 그릴 때마다 '석가모니불' 외며 염주알을 하나씩 굴리지. 천 알 염주를 천 번 돌리는 데 일년쯤 걸렸다.

 

혹시 개수가 모자랄 수 있으니, '서비스'로 두 번쯤 더 돌리면 된다. 그 수행이 너무 즐거워 밥짓는 시간도 아까워 건빵을 던져놓고 먹었다." 

 

경북 포항시 죽장면의 산골. 허허당(55) 스님은 손님이 온다고 머리를 새로 밀었는지, 덜 깎인 머리카락 몇 올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절(寺) 대신 11평짜리 단칸집에서 산다. 문패는 '휴유암(休遊庵)'. 쉬고 노는 암자라는 뜻이다.

 

안에는 부처상 족자와 승복 몇 벌, 화구(畵具), 찻잔, 전기밥통, 냄비, 재떨이, 색소폰, 이불로 차 있다. 그는 6년째 산골에서 혼자 자취하며 선화(禪畵)를 그리고 있다. 가로 12m×세로 2.8m 대형 화폭에 부처와 백만 명의 동자상도 여기서 그렸다. 그의 선화는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는 평도 있으나, 이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 [조선일보] 허허당 스님은 자기 삶을 주인으로서 사는 사람은

    결코 변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최보식 선임기자

 

"나는 신도도 없고 보시를 받지도 않는다. 기름도 때야 되고 뭐도 해야 하고 돈이 좀 필요한데, 답답해질 때쯤 그림이 하나씩 팔려나갔다. 내가 그림을 그리며 노니까, 함께 춤을 춰주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림 하나 갖고 간 뒤 오토바이를 한 대 갖고 왔다. 머리 깎은 중이지만 막 몰고 다녔다. 위 아래 이가 다 빠졌는데 임플란트 치료도 그림 한 장 갖다주고 다 했다. 얼마 전에는 학(鶴) 그림을 하나 갖고 가고는 중고차를 한 대 가져왔다. 현찰이 없어 문제지. 내 통장에는 돈 한 푼 없다."

 

현찰이 없지는 않았다. 몇 년 전 한 대형 사찰에서 그의 작품을 1억여원에 산 적이 있었다. 돈이 생기자 그는 전국을 다니며 신세 진 승려와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돈 떨어질 때까지 스무날이 안 갔다. 그의 형제 중에는 대구 그랜드호텔 회장이 있다. 그 형이 절을 지어주겠다고 했을 때도 거절했다.

 

"절을 가져본들 깨달음과 상관없는데, 그 짓을 왜 하나. 내가 출가한 것은 도 깨닫고 부처 되려고 한 것이지.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내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나는 대중 앞에서 법문도 잘 안 한다.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기분이 들고, 또 불사(佛事)하라고 말하는 것도 내 삶의 방식과 맞지 않다."

 

―지금 소속 절이 있나?

 

"세상의 절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고 싶으면 가서 놀다 오고, 방 있으면 앉아 살았다. 한 번도 '여기 좀 살아도 되는가' 묻고 산 적이 없다. 출가자가 살라고 절이 있으니 당연히 그게 내 집이다. 물론 내 집이지만 내가 가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내 절 내 절' 하는 소릴 들으면 웃긴다. 진리의 맛을 보면 그런 짓을 못하게 된다. 뭔가를 알면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승려들이 돈과 연관되고 절을 크게 짓고…, 사실 부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 의미가 없다."

 

―작년에 조계종 공문이 와서 '사후에 재산을 반납한다는 각서'를 썼다고 들었다.

 

"죽고 나면 내 그림들은 조계종으로 귀속된다. 승려 중에는 개인 재산이라고 다투는 이도 많다. 나는 얼른 해준다. 어차피 죽을 때쯤이면 내 그림들을 다 팔아먹었지 내게 남아 있을 것 같나, 하하."

 

그는 시골의 부호(富豪) 집안 출신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가출해 몇 년 간 떠돌다가 해인사로 출가했다. 열여덟살 때였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니체, 쇼펜하우어 등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학교 공부는 시시했다. 고등학교에 가기 싫어 도망나왔다. 당시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하루를 사나 만년을 사나 무슨 차이가 있나,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때 불교 경전을 보니 부처가 '멋있는 사나이'였다. 궁전을 버리고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를 찾아나섰다. 소유와 집착을 버린 길 위의 삶이었다. 이 공부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주변 지인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는 촉망받은 수행승이었다. 그는 당대 선승인 향곡(香谷) 스님 문하였다. 향곡이 성철(性徹) 스님을 만나러 해인사에 오면 그가 수발했다. 산에 오르는 거구의 성철 스님이 "아이고 힘들어라" 하면 뒤에서 엉덩이를 밀어주곤 했다.

 

"두 분이 노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서로 '성철아' '향곡아' 부른다. 한밤중 숲 한쪽에서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까꿍' 장난하면 '아이 깜짝이야' 한다. 정말 걸림이 없었다. 진리를 설파할 때는 서릿발 같았지만 일상에는 철없는 아이 같았다. 성철 스님은 종정(宗正)에 추대돼도 '내가 왜 가나. 그 자리 비워놔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요즘에는 이렇게 그리운 분들이 없다."

 

화엄법계도 - 풍경

 

↑ [조선일보]'화엄법계도'

 

↑ [조선일보]'생명의 축제'

   

― 선화를 그리게 된 것은 지리산 토굴에서 용맹정진을 하던 중 '문득 깨달아' 그랬다는데, 문득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당초에는 부처의 끄트머리라도 되고 싶었다.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조차도 '욕망'임을 깨달았다. 내가 무(無)가 되고 일체가 무가 되는 상태, 깨닫겠다는 마음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되면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지. 나는 깨닫고자 하는 대상의 세계로 쫓아가려고만 했지, 세상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진리임을 몰랐다. 내가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버리면 스스로 찾아온다. 그때 '허허당(虛虛堂)'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고 빈집처럼, 내가 이렇게 살면 되는구나."

 

―그런 깨달음과 선화를 그리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

 

"내가 경험한 상태를 표현해보고 싶었다. 불교에는 8만4000 법문과 주석서가 있으니, 그런 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그림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놀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에는 기본적인 테크닉이 필요하다. 출가 전에 배운 솜씨인가?

 

"지리산 벽송사에서 한 스님이 글을 쓰기 위해 먹을 갈아놓은 것을 보고 내가 붓을 잡고 휙 그려보았다. 수영하는 사람은 일단 물에 뛰어들면 안 죽으려면 하게 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하면 그런 기술이 오게 된다."

 

―세상 그대로의 상태가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진리 내용은 뭔가?

 

"일체가 꿈이다. 현상 모든 것이 꿈속의 꿈이다. 그걸 아무리 얘기해도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니 꿈인 줄 모른다. 무엇 하나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엇 하나 변하고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특별히 욕심내고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어디에도 매이지 않게 된다."

 

―삶이 꿈이라면 허무한 것일 뿐, 굳이 애쓰며 살아갈 필요가 있겠나?

 

"잘못 알면 허무에 빠지지만 똑바로 깨닫고 나면 나날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 같은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 애써 죽지 않아도, 가만히 버려둬도 죽는 것을 안다. 원래에는 나고 죽는 것조차 없다.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부여할 뿐이다."

 

―이런 식의 문답은 말의 유희처럼 비친다. 어쩌면 깨닫는 순간은 있겠지만 평생 깨달음 속에서 사는 승려가 있는지, 나는 그걸 의심한다.

 

"공부를 해보면, 머리로 깨닫는 '해오(解悟)'가 있고 몸 자체로 깨닫는 '증오(證悟)'가 있다. 몸 공부가 중요하다. 의식은 감추고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몸에 가시가 박히면 '아야' 반응하듯 그냥 깨달음으로 가버린다. 깨달음은 언어 이전의 세계다. 그래서 개구즉착(開口卽錯·입으로 말하는 순간 틀림)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깨달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언어로는 다 설명이 안 되나, 진리 속에 노는 맛이라는 게 있다. 정말 재미있다. 나는 인생은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님은 가족 부양의 의무가 없으니 재미있게 놀 수가 있다.

 

"(웃음) 내 혼자 노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밝아지고 진리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지."

 

그를 두 번 만났다. 지난겨울에 가서는 함께 술만 마시다 그냥 돌아왔다. 술·담배·고기를 하고 한때는 여자와도 잠자리를 했다 하니, '땡추'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눈빛과 깡마른 얼굴이 좋았다.

 

"한 것은 했고 하지 않은 것은 안 했다. 나는 한 것을 안 했다고 하지 않는다. 주인공으로의 삶을 살면 변명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술 한잔 마시면, 멸치 하나 먹어도 죽는 줄 알았다. 이는 공부에 방해되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술에 내가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하지 마라'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면 승려의 삶과 속인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나?

 

"무엇을 취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아직도 통장에 돈 한 푼 안 갖고 있다. 그림을 팔아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사람들이 돈 주고 산다. 그러면 '되게 비싸게 받자'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비싸게 받아도 모아놓고 쓰지 않는다. 나는 붓을 놀릴 때만 노는 것이지, 붓을 놓으면 내 것이 없다. 나는 이를 확실히 깨닫고 있다.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소유와 집착 때문이다. 가령 아내도 당신 것이 아니다. 자식도 당신 것이 아니다."

 

―선화를 그리는 것 또한 자기표현과 명예의 집착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게 돼 있다. 부처님이 8만4000의 법문을 설파하고 제일 마지막에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엄청난 얘기를 해놓고 시치미를 떼버린다. 환장할 노릇이다. 부처는 중생과 세상을 위해 말은 했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그림으로써 비워내는 작업을 한다. 내 안의 세계에서 망상 집착을 비워내는 수행을 하고 있다."

 

―주변 도반(道伴)들은 스님을 어떻게 보나?

 

"희한한 중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그들에게 맞춰 살지 않는다. 그들이 시비를 걸어도 걸려들지 않는다. 자신 내면과의 정직한 대화만큼 훌륭한 도반은 없다. 부처의 무상(無常), 법의 실체를 어느 정도 봤으니 내 길을 가는 힘이 있다. 나는 세상이 맞춰놓은 잘난 중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당초 내가 출가했던 목적도 아니다."

 

낮에는 초여름 날씨였는데, 산골에서는 오후 다섯시가 넘자 쌀쌀해졌다.

 

"부처님은 외롭지 않았을까, 엄청나게 외로웠을 것이다. 고독하지 않았을까, 엄청나게 고독했을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외롭고 고독하고 슬픔이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깊은 슬픔 속에서 자비와 사랑이 나온다. 존재에 대한 슬픔이 없이는 깨달음이 나오지 않는다."

 

말은 왜 이렇게 화려한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낙타를 모는 성자-인도 사막 여행 중

 

스스로 길임을 아는 것은 

길은 길을 묻지 않고 길은 길을 가지 않네

스스로 길임을 아는 것은

아무런 길도 묻지 않고 아무런 길도 가지 않네

오직 사람만이 길을 묻고 길을 가는 것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 속에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겸손히 살피는 자에게 만물이 스스로 길이 된다.

 

만행

만행 1

 

바랑 하나 둘러메고 길 떠나던 날

無心衣 갈아입고 좋아했었네

옷깃에 별을 달고 달을 달아서

밤길 홀로 선 걸음도 시원해라

한 걸음 부처 나고 두 걸음 부처 나네.

오호라! 한 세월 억만 겁을 돌아서

한 걸음 두 걸음 억만 부처 만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