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의자]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 법정(法頂) - |
“내가 와서 부엌 바닥에 최초로 만든 의자라 처음에는 이걸 장작으로 했어요. 지압은 되는데 아프더라고 그래서 이것만 갈았어요. 오래돼서 이게 덜렁덜렁하네.”
그의 의자에 앉자 보셨습니까? 자투리 장작 몇 개로 만들어진 이 불편한 의자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부자인가? 가난한가?’” 언제고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외로운 길에 의자 하나 내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살다가 다 가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 없잖아. 만약 내가 여기서 생을 마친다면 시신을 운반하지 말고 여기서 화장해서 뼛조각이 나오면 뼛조각이나 가지고 가지 시신 어디로 운반할 생각하지 말라고. 장례식 우리가 지금까지 봤잖아. 그렇게 야단스럽게 할 것 없어. 조촐하게 그냥 불일암에 가서 흩어 버리라고. 수행자의 회향 모습이 아니야." - 법정(法頂)스님의 유언 - |
‘미리 쓰는 유서’. 40년 전에 그가 남긴 글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그가 생에 마지막 순간에 남긴 실제 유언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윤청광 작가 / ‘고승열전’ 저자
“30대에 쓴 유언 그대로 79에 돌아가셨는데 그 걸 그대로 하신 분이 과연 세계에 몇 분이나 계시겠습니까?”
현장스님 /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자기 입던 옷에 관도 없고 수의도 없이 가사 한 장 천 하나 덮은 거잖아요. 스님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티베트 사람처럼 살다가 인도 사람처럼 떠나가셨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그 무엇도 없었다는 뜻이니 그게 곧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무소유 그 단 하나의 단어가 그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는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무소유로 살다 무소유로 떠났습니다.
60여 년 전 23세 청년을 사로잡았던 질문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본디 아무것도 없는데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홀어머니에 외아들로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만 했던 대학 3학년의 한 청년.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그의 겨울 법정은 산으로 갑니다. 부처의 인연은 타고나는 것이었을까? 무명초 같은 머리카락을 벗겨내자, 먹장구름이 벗겨지듯 세상이 환해졌습니다. “고타마시여! 부처여! 석가여! 이제 생과 사의 비밀을 여기에서 풀리라.” 그렇게 23살, 한 청년의 속세 인연이 끝납니다.
박완일 법사 / 효봉 제자, 전 동국대 철학과 교수
“출가라고 하는 것은 왕의 자리도 양에 안 차고 천하를 얻는 재벌도 양에 안 차고 성인이 되겠다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생사를 자유자재로 하겠다. 도를 깨든 진리를 깨든 성자가 되겠다는 그런 욕구로 머리를 깎고 중이 돼야 그게 지구상에 하나가 있더라도 진짜 중이요. 그럼 이발소에 다니는 놈은 다 중이게? 그건 가짜 중이요.”
세속의 아들로 태어나 세속의 인연은 끊자니 그 길이 곧 극형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죽든 살든, 이 한 목숨 여기에 이르러 끝내 부처의 도를 찾으리라. 승려의 길입니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은 또한 이같이 어려우리라" - 우파니샤드 - |
입산하는 날, 한 스승을 만납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되었던 이찬현. 그가 바로 법정의 스승 효봉(1888~1966)입니다. 판사로 살던 36살의 어느 날 그는 출가합니다. 한 죄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직후였습니다.
법흥스님 / 효봉 제자, 송광사 회주
“나도 같은 인간인데 내가 무슨 권한이 있다고 사람에게 징역을 내리고 사형을 내린단 말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사람에게 징역을 내리고 사형을 내리는 판사 자체가 괴로운 것이고 몸담을 것이 못 되는구나.”
통영의 미래사. 법정이 효봉을 모시고 첫 행자 생활을 시작했던 곳입니다. 절에는 아직도 효봉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합니다. 한 번 참선에 들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절구통 수자가 불렀던 효봉. 풀 섶 아래에는 아직도 그가 앉아 있었던 좌선대의 자리가 선명합니다. 저 아래는 까마득한 중생의 바다. 어찌하면 부처의 도로 저기에 이를 것인가? 대학생이란 신분도 첩첩산으로 쌓아 두고 읽었던 책도 머리 깎고 무명옷 한 벌 걸치면 다 소용없는 일.
“효봉스님이 부목시켰어. 부목이 나무꾼이요.”
그 이듬해인 1956년 예순 여덟인 된 효봉은 모든 지도자의 자리를 거두고 더 깊은 안거에 들어갑니다. 막 계를 받은 단 한명의 사미승만을 대동하고 나선 길. 그 젊은 사미승이 바로 법정입니다. 효봉이 이른 곳은 지리산의 쌍계사. 효봉은 이곳 탑전을 안거 장소로 정합니다. 법정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미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68살 노승이 마지막 안거에 들며 선택한 단 한명의 시자. 젊은 사미승에겐 가슴 벅찬 부름이었습니다.
박완일 법사
“네가 이놈아, 얼굴이 중의 얼굴이다. 그러시더라고. 잘 보신 거지. 중노릇을 잘했지. 법정스님이 모범적으로 깨끗이 했어.”
효봉과 보낸 그 한철을 두고 법정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법정 사상의 모든 곳이 그 한철의 시작되니 무소유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날 노스승의 바랑 속에서 비누조각 하나가 나옵니다. 너무 오래돼 거품도 나지 않는 비누. 스승은 말합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해.’
어느 하루 설거지를 하던 법정은 밥알 몇 알과 시래기 몇 가닥을 흘리고 맙니다. 스승을 그것을 일일이 주어 찬물에 헹구더니 홀짝 마셔 버립니다. 그리곤 말을 합니다. ‘어떠냐! 다음엔 함께 마시랴.’
박완일 법사
“법정 들어오너라.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 네 죄가 얼마나 크냐. 네가 장사해서 번 돈도 아니고 신도들이 갖다 준 것인데 도를 닦아서 부처가 되라고 신도들이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갖다 준 것을 그것을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장 보러 갔다 오는 길.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 공양 시간을 넘겨 버렸습니다.
“수행자가 시간을 지켜야지. 시간 내에 점심을 안 주느냐고 말이야. 오늘 나 점심 안 먹는다.”
젊은 제자는 그 길로 괭이를 들고 나가 밭을 갈았습니다. 참회의 노동이었죠. 젊은 사미승의 괭이질은 한나절 동안 계속됩니다. 해가 질 무렵 스승은 젊은 제자 앞에 국수 한 그릇을 내놓습니다. 참회를 마치고 먹는 소박한 국수 한 그릇. 그 국수 한 그릇에 법정은 또 한 번 깨우칩니다. 승소(僧笑). 중을 웃게 하는 음식. 불가에 승려만이 안다는 그 국수의 참 맛을 법정은 그날 배웁니다.
덕조스님 / 법정 맏상좌
“몸무게 몇 kg이야. 이렇게 가끔 물으시거든요. 그 뜻이 뭐냐면 출가할 때 몇 kg이냐. 출가했을 때 몸무게보다 더 늘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그게 뭐냐면 시주물을 많이 축냈다는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그는 매 끼니를 먹을 때마다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오관(五觀)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위해 이 공양을 받습니다.” |
법정은 갈수록 화려해지는 불가의 풍속을 가장 못 견뎌했습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 죽비와도 같은 법정의 일갈이 세상을 깨웁니다.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나만 믿고 살라는 거예요. 중 믿을 것 못 돼요. 누가 되었든 자기 집도 버리고 떠나온 놈을 어떻게 믿어?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
법흥스님 / 효봉 제자, 승광사 회주
“1964년도에 불교신문에 글을 썼잖아요. 중이 돈이 아쉬우면 법당을 파 재낀다고…….”
현장스님 /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교회고 절이고 결국 돈 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법정스님은 돈을 내지 말라고 그래요.”
"돈독이 올라서 그런다고" - 법정(法頂) |
법흥스님
“한국 불교가 말이야 죽은 사람 염불이나 해 주고 돈 받아먹는다고 장의 불교라고 들이 까고 그랬지.”
혜총스님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종단을 비판하는 부처님 전 상서도 쓰고 그러셨어.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은 가시와 같잖아. 지적을 하니까.”
"시주물이 넘치고 있어요. 받았으면서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고마워할 줄도 몰라요. 또 어디서 오는 줄도 모릅니다. 넘치는 물량은 결코 맑고 향기로울 수 없습니다." - 법정(法頂) - |
중이 됐으면 ‘중답게 살다, 중답게 가자.’ 법정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 그거였습니다.
길상사는 특이한 절입니다. 땅의 주인이 절의 부지로 써달라며 법정을 지목하고는 10년을 졸은 끝에 어렵게 만들어진 절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절. 그러나 법정은 주지 자리를 거부합니다.
"거사님들 늘 약을 보내 주셔서 잘 공양합니다. 점심 드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삼배하겠습니다. 삼베는 여름에 입는 것이지." - 법정(法頂) - |
노스님을 만나면 삼배를 올리는 게 불가의 관습이죠. 법정은 그걸 허락하질 않습니다. 흔히 노스님을 지칭하는 큰 스님이라는 호칭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 이름은 법정 스님입니다. 법정 큰 스님이 아니에요. 그걸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 법정(法頂) - |
자기를 낮추는 하심의 자세. 그거였습니다. 길상사를 지어 놓고 그는 단 하루 밤도 이곳에서 자지 않았습니다. 1년에 두 번. 법문을 마치면 서둘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박완일 법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좋은 절의 주지를 해 본다거나 불교 본부의 요직에 들어간다거나 이런
생각은 전혀 없던 사람이야.”
“그 정도는 돼야 도를 통하는 못하든 하루를 하든지 한 달을 하더라도 중 된 맛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거 아니요?”
법흥 스님
“그게 중의 본분이지. 그거 욕심 부리면 탐욕심 아니요.”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그 쇠를 먹는다." - 법구경 - |
노객에 잠식당하지 않는 쇠를 벼리듯 법정은 산 속에 은거 합니다. 맏상좌가 스승의 암자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승의 유해가 뿌려진 후방나무 아래에 꽃을 놓아두는 것으로 제자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막 피어난 매화 꽃 한 송이 스승이 좋아하던 향기입니다.
덕조스님
“스님이 계시니까요. 스님이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뒷문을 이용하는 거예요.”
기워 신은 고무신 한 켤레. 깨끗이 닦아 매일 아침 댓돌에 올려놓습니다. 스승은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덕조스님
“요즘은 매화꽃이 피어서 스님이 좋아하시는 매화꽃을 올립니다. 매화 향기가 좋으니까 당신도 좋아할 것 같아서”
스승은 이 향기를 마셨을까요.
"이제 피기 시작한다. 피기 시작해." - 법정(法頂) - |
법정이 이곳으로 처음 오던 날, 텅 빈 절터에서 홀로 피어 그를 맞아 주던 꽃들입니다.
"내가 처음 여기에 1975년 4월 19일에 왔거든. 그때 비가 내리 더라고 텅 비어 있고 그런데 이 벚나무가 그때는 크지 않았어. 조그마했는데 활짝 피어 있더라니까. 그러니까 아주 정답더라고. 아이고, 이 벚꽃 나하고 같이 살아야겠구나. 또 우물에 가서 물맛을 바가지로 물을 먹었더니 아주 물맛이 좋아. 그래서 여기가 내가 살만한 곳이구나." - 법정(法頂) - |
이곳에서 17년. 43세에 들어와 60세까지 한 승려의 생애에서 가장 절정의 수행 기간이었습니다. 이곳에 와 맨 처음 만든 작품이 바로 이 의자였죠. 암자의 모든 것은 그 의자를 닮았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두고 그 이상의 것은 단 하나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주 물건을 축내지 마라.’ 먹는 것 또한 직접 지어 먹었습니다. 뭐든 너무 많아 탈이 나는 세상. 법정은 늘 말했습니다.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하고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며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 법정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홀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한 곳 흐트러짐이 없었지요. 새벽 3시면 어김 없이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승려로서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현장스님
“스님의 손을 보면 여러분이 굉장히 놀랄 거예요. 글 쓰는 선비의 손이 아니라 완전히 노동으로 단련된 농부의 손과 똑같습니다.”
그 농부의 손이 참된 중의 손이었습니다. 제자 하나가 지옥 한 칸이라. 그는 제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승려가 된지 30여 년이 되는 53살에야 첫 제자를 받았으니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중이 남에 시봉을 받는 다는 것 자체를 그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윤천광 작가
“젊은가 도인이 되겠다고 도를 닦겠다고 머리 깎고 들어왔는데 인생을 다 포기하고 그런데 이 늙은 중 심부름이나 해서 되겠느냐? 늙은 중 뒤치다꺼리나 시켜서야 되겠소? 도를 닦고 공부하게 해야죠.”
불일암으로 오기 전 그는 불교신문의 주필로 세상에 주목을 받던 승려였습니다. 서슬 퍼런 기개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죠.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접고 은거한 법정. 법정은 침묵했습니다.
은거에든지 1년. 마침내 무소유가 나옵니다. 그 책 한권이 몰고 온 충격은 컸습니다. 지금까지 총 판매부수 330만부. 무소유는 당장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 때가 1976년 바야흐로 개발시대였죠. 전국의 땅 값이 열배 이상 오르며 너도 나도 부자가 되겠다며 매달리던 시대. 그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 속으로 법정의 아주 작은 이야기 몇 개를 던져 놓습니다.
파르스름한 삭발자국 선명하던 사미승 시절, 그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책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책을 보고 싶다. 장보러 나간 길에 참지 못하고 주홍글씨 한 권을 사옵니다.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부처의 법을 공부하는 자가 웬 잡생각인가?’ 그는 당장에 부엌으로 달려가 아궁이 속에 책을 던져 버립니다. 책에 대한 집착. 그 또한 지식의 교만이라 미몽 속에 아집 하나가 깨어져 나갑니다.
잊지 못할 이야기가 또 하나 있죠. 어느 해 여름. 법정은 난초를 선물 받습니다. 외로운 수행자 생활에 벗 하나가 생겼습니다. 볕이 뜨거울까, 날이 찰까, 법정은 온갖 정성을 바쳐 난초를 키웁니다. 장마 구름이 가득한 날, 법정은 난초를 마당에 내놓은 채, 잠시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구름이 걷히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기 시작합니다. 법정은 허둥지둥 암자로 돌아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난초는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들은 깨달음 하나,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에 얽매인다. 법정은 결심합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건 터득한 셈이었다." |
법정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 또한 버리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사물을 스스로 공개하는 규칙이 있다네. 그러니까 그 말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남 앞에 내놓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가질 것만 가지라는 거지. 갖지 않는 것이 부자거든. 많이 가질수록 가난한 것이고 그런 도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자유롭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
덕조스님
“뭘 계속 쌓아 둔다는 것 자체를 당신이 불편해 하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버리고 떠나기죠. 뭐라도 좀 쌓이면 정리하고 없애 버리는 성품이시거든요.”
현장스님
“겨울에 떨어진 것을 쓰고 계시면 다녀간 사람마다 뜨개질을 해서 하나씩 보내와요. 그러면 겨울에 한 10개 20개씩 생기거든요. 그것을 그대로 쓰고 큰절 스님들한테 내려 보내 주고”
하나가 있으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 법정은 이 양은 대아 하나를 평생 썼습니다. 물건 하나에 쓰임이 43년입니다.
"자기 주거 공간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면 단순해야 한다고 공간이 단순해야 어떤 광활한 정신 공간을 지닐 수 있어요. 이것저것 가구 같은 것을 잔뜩 늘어놓으면 그 안에 틀어박혀서 개운치가 않잖아요. 눈에 띄는 것이 많아서, 근데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누를 수가 있다고 무엇인가를 갖게 되면 거기에ㅔ 붙잡힌다고 말하자면 가짐을 당하는 거지. 그런데 될 수 있는 한 가진 것이 적으면 홀가분해요. 매인 데가 없으니까. 텅 빈 상태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거예요." |
법정의 의자는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뭘 더 가지려 하는가? 본래 무일무. 소유의 유혹에서 벗어난 곳에서 진정한 자유는 찾아 올 것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 |
흙탕물 속에 피어난 연꽃과 같이 간소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삶은 그대로 글이 되었습니다. 법정은 어려운 법문을 말하지 않습니다. 쉽고 간결한 글. 그 글이 일으키는 파문은 넓고 깊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했습니다.
윤청광 작가
“우리말을 그렇게 사랑하셨어. 우리말, 우리글을. 그래서 특징이 초등학교 안 나온 사람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 그러니까 한글만 알아도 글을 다 알아보게 썼고 국어사전 펼칠 필요가 없어요.”
한 작가가 말했지요. 그는 만약 중이 아니었더라면 시인이 됐을 거라고.
"열엿새 둥근 달이 이제는 후박나무 위에 걸려 있다. 듬성듬성 별들이 돋아 있다. 옷깃으로 스며드는 한 밤중의 바람 끝이 차다. 달빛을 빼고 그만 자야겠다." - 법정(法頂) - |
법정의 필력을 가장 눈여겨 본 사람은 운허였습니다. 평양의 인텔리로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했던 운허.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사업을 시작한 동국역경원을 세운 사람이 바로 운허입니다. 1960년 법정은 운허의 부름을 받고 역경 사업에 뛰어듭니다. 수많은 책이 그의 손을 거쳐 나옵니다.
박종린 /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불교사전입니다. 운허스님께서 이 작업을 하셨고 이 사전 작업을 하는 데 법정스님께서 참여를 하셨습니다.”
어려운 불교 용어를 사전으로 풀어내는 불교 사전. 역경은 최고의 불사였습니다.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를 최초로 번역한 이도 법정입니다. 가장 방대하다는 화엄경을 정수만 모아 펴내기도 했죠. 그의 역경 사업은 13년 동안이나 지속됩니다.
현장스님
“대장경 안에 갇혀 있던 절에 갇혀 있던 불교를 완전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심어 준 스승이었구나.”
윤청광 작가
“불교가 대중화되는 데에 아마 법정스님만큼 기여한 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글이 쉽고 말씀이 아주 쉽고 들으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란 말이에요.”
법정이 역경에 매달리는 데는 한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해인사에 있을 때, 장경각을 구경하고 나오던 한 보살이 법정 곁을 지나며 투덜댑니다. ‘팔만대장경이 있다더니 웬 빨래판만 가득하더라.’
박종린
“중요하고 좋다고 해서 가 보니까 전부 빨래판만 있더라. 그 말씀에 상당히 충격을 받으셨대요. 부처님의 소중한 말씀도 내용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빨래판으로 보이는구나. 그러면 이 소중한 말씀을 우리가 호흡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을 해야겠다.”
그 순간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번역되지 않는 불경은 대중에게 한낱 빨래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충격이 법정을 재촉했습니다.
운허만이 아닙니다. 구한말부터 한국불교를 이끌어 온 수많은 스승들이 법정의 재능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혜총스님
“자운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하셨어요. 그래서 특별히 자운스님 방을 비워서 법정스님한테 드리고 자운 큰 스님은 밑에 명월당으로 나하고 같이 내려 가셨어요. 그리고 번역도 자운스님이 맡기셨고요.”
미래사의 두 승려의 비가 있습니다.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과 그 효봉의 스승이었던 석두화상의 비입니다. 한글로 된 특이한 비석. 뭔가 다르지요.
법흥스님
“비문은 ‘서경수 비문 짓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비문은 법정스님이 지은 거예요. 그리고 석두 스님 비문이 있는데 효봉스님의 은사 스님, 그걸 법정스님이 둘 다 지은 거에요. 법정스님이 본인 이름으로 안 하고 남의 이름으로…”
정작 법정의 글이 더 빛을 바란 건, 그의 수필집입니다. 법정이 펴낸 수필집이 총 20여권. 모두 다 발간되는 데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승려생활 56년, 역경 서적까지 합치면 그의 거의 1년에 한권 꼴로 책을 펴낸 셈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몰아세운 걸까요.
"스님이 산중에서 혼자 사는데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가 그것을 듣고 스스로 많이 반성해요. 그렇겠구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지. 근데 가끔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고 즐거워하고 또 그런 걸 볼 때 뭐 이런 식으로 살아도 세상에 큰 폐는 되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을 해서 스스로 만족은 하지 않지만 우선은 이런 식으로 살고 있고 내가 세상을 모른 체하지 않고 그냥 내가 자연에서 얻어들은 어떤 삶의 교훈이라든가 자연의 신비라든가 아름다움을 그때그때 기회 있을 때마다 말로 글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밥값의 일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법정(法頂) - |
밥값의 일부. 그것은 일종의 회향 정신이었습니다.
현장스님
“작은 것을 돌이켜서 큰 것을 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하면 복을 받잖아요. 그런데 회향이라는 것은 이 복이 나에게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거예요. 내가 지은 작은 선업이 공덕이 나 아닌 모든 이웃에게 돌아가서 이웃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또 하나는 내가 언젠가는 번뇌를 벗어나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고 또 내가 내 몸을 벗어날 때는 정념을 잃지 않고 아미타물의 정토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회향의 마음이거든요.”
법정은 불자들에게도 늘 회향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얻어 쓰면 주라는 것입니다.
"진짜 기도는 오늘부터예요. 그동안 내가 백일동안 열심히 간절한 마음에서 닦은 기도의 공덕을 그 지력으로 오늘부터 회향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한 사람하고 안 한 사람하고 다릅니다. 내가 바른 기도를 했다면 오늘부터 내가 이웃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가, 거기에서 기도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판가름이 납니다." - 법정(法頂) - |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은산철벽’이라. 얼음으로 덮인 은산이고 강철로 막힌 철벽이라 했습니다. 허나 모기가 쇠를 뚫듯 뚫고 뚫으면 그 길이 열린다 했습니다. 용맹정진. 긴 겨울이 지나면 꽃비가 내린다는 깨달음의 아침이 오겠지요. 그러니 어찌 멈출 것인가?
구도의 길은 아직도 까마득한데 스승은 가고 산사에는 이제 그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오늘도 불일암으로 오릅니다. 인연이 묘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무소유를 읽고 법정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 법정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문현철 / 초당대학교 교수
“1학년 2학기 등록을 해야 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스님 대학을 꼭 다녀야 합니까? 대학을 안 다니고도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한 번 불일암에 올라가서 드린 적이 있어요. 제 형편을 뻔히 알고 계시는데 덤덤히 들으시더라고요. 들으시면서 베토벤을 한번 가 보라고……”
법정이 말한 베토벤은 광주에 있는 고전 음악 감상실. 법정이 가끔 들러 차 한 잔을 마시던 곳입니다. ‘베토벤에 가봐라.’ 가보니 법정이 놓고 간 장학금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법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창구였습니다.
이정옥 / 베토벤 고전음악감상실 사장
“스님이 오셔서 아르바이트생 중에 어려운 학생들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장학금을 좀 도와주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그때 조선대 간호학과 다니던 학생하고 여기 손님으로 드나들었던 문현철 교수님 그 시절에는 대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이 떠올라 연결해서 제가 2번 장학금을 받아다가 전해 준 적이 있어요.”
문현철
“1학년 2학기 등록금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대학교 3학년 올라갔을 때 한 번은 주변에 어렵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많죠. 그랬죠. 고등학교 후배들 친구들이 같은 대학 다니면서 항상 대학 등록금 납부 일이 되면 학교를 그만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됐는데 베토벤 음악감상실에서 사장님이 스님께서 그러셨는데 현철이 너 어려운 친구들 몇 명 더 있으면 추천해 보라고 그래서 제가 4명인가 5명인가를 추천했습니다. 그 친구를 대학 졸업할 때까지”
그 돈은 모두 그가 글을 써 번 돈이었습니다. 등록금 철만 되면 출판사에 인쇄를 채근하기도 했죠.
김성주 / 샘터사 사장
“요새 같은 학기 초에 그때도 직접 전화를 거셔서 채근을 하시는 거예요. 왜 빨리 인세를 안 보내 주느냐, 처음에 그런 전화를 받게 되면 당황이 되잖아요. 우리가 뭐 인세 안 드릴 것도 아니고 당연히 때가 되면 다 드리는데 왜 스님께서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인세 채근까지 하시나 스님이 왜 돈을 밝히시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했죠.”
무소유 출판 후 그가 처음으로 받은 인세는 50만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뜯어 보지도 않고 봉투째 장준하의 유족에게 전합니다.
김희숙 / 고(故) 장준하 미망인
“큰 딸아이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말 속상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지 몰라 그냥 있으니까 법정 스님이 오셨어요. 오시더니 그냥 아무 말씀 안 하고 누런 봉투 그냥 척 주고 돌아서서 스님, 스님 찾아 불러도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고 그게 50만 원이에요. 원고료 받은 것 그대로 갖다 주고 간 거예요. 그 50만 원 가지고 큰 딸을 시집보냈어요.”
그의 모든 인세가 그렇게 쓰여집니다. 단 한 곳, 속가의 가족들에게만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습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 그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보냈는데 출가를 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박성직 / 사촌 동생
“유구무언이죠. 거기에다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속만 상하시고 약주를 좋아하시니까 약주 좀 하고 그러셨죠.”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그는 작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편지로 전하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은혜로운 분은 작은 아버지시다." - 법정(法頂) - |
마을 사람들에게 법정은 지독한 책벌레. 그 모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희재 / 고향 후배
“우리는 책을 보면 읽고 쭉 넘어가잖아요. 그 양반은 좋은 글귀 대목마다 노트에 다시 기록을 해요. 그 기록한 노트가 아마 이 정도는 됐을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아무것도 부지런한 것이 없는데 책 보는 것만 부지런했죠. 그리고 성격은 좋은 편은 아니었죠. 글쎄요. 좀 인간미가 없다고 할까. 좀 그랬어요.”
언젠가 딱 한 번 형편이 어려워진 사촌동생이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박성직
“형제들이나 집안에 일절 없었습니다. 중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 그런 말을 하시면서 일언지하에 편지도 없고 다른 게 없으니까 거절하신 거죠. 그러니까 큰 스님이 되셨겠죠. 가족한테는 상당히 냉정하고 엄하셨어요.”
지금까지 법정이 받은 인세 총액은 수십억대로 추산됩니다. 자신과 속가의 가족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했던 사람. 그 돈은 모두 남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윤청광 작가
“다 같이 물에 빠졌으면 남의 식구부터 구하는 것이 수행자 본분이지 자기 식구부터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세속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돈 대주는 스님은 안 되는 스님이에요.”
수십 년을 입은 법정의 누더기 옷 한 벌. 무소유로 살았던 그의 평생을 증명합니다. 그가 평생 소유해 본 것은 딱 4가지입니다. 당장 읽은 몇 권의 책, 그리고 한 모금의 차, 건전지로 듣던 음악, 몇 평의 채마밭. 그 4가지가 그가 소유해 본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었습니다. 법정의 책이 유명해질수록 법정을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 존경의 마음을 담고 찾아오는 이들이니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죠.
현장스님
“내가 다른 것은 다 버리고 놔 버릴 수가 있었는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은 가장 버리기 어려웠다.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가장 단순한 데서 찾죠.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이런 삶 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사신 공간을 당신의 철학에 맞게끔 정돈하고 사셨어요. 그리고 이런 것이 넘쳐 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없애 버리고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죠.”
그 끝에서 법정은 불일암을 떠나 버립니다.
법흥스님
“사람 안 만나려고 ‘버리고 떠나기’라는 수필 집을 남겨 두고 나는 일절 송광사에 효봉스님 제사든 구산스님 제사든 공식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리고 떠나기’를 써놓고 떠나게 돼요.”
물이 불면 건너가기도 힘든 외진 산 속. 그곳에 그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오두막에는 경고문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이마저 그의 소유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법정이 떠나고 지금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법정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야 그의 오두막은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법정은 제자들에게도 이곳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알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곳에 올 때 법정에 나이 60살. 그는 이곳에서 홀로 18년을 삽니다.
"너무나 우리는 자연과 격리돼 살기 때문에 자연 속에 오면 그동안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자연을 마음껏 되찾고 누리고 가라는 거지 이런 데 오면 사람 말이 시시해진다니까. 그냥 대숲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거나 맑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사람이 참 맑아지고 깨끗해지고 차분해지잖아요. 그것이 필요해요. 텅 비우라는 거예요. 이런 데까지 와서 뭘 채우려고 하지 말라니까." - 법정(法頂) - |
그는 대자연 속에서 충만했습니다. 언젠가 그가 번역했던 초기 경전에 한 구절처럼 당당하고 자유로운 경지, 그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나이었습니다. 홀로 사는 노승의 산골 생활. 평생을 달고 살았던 천식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한밤중에 밤이 두려웠다고요. 밤에도 기침이 나오니까.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스스로 느끼고 내가 밤에 이 고요를 즐기고 있구나. 이 기침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한밤중에 자다가 깨어나서 이런 시간을 누리지 못할 텐데 기침 때문에 내가 일어나서 이런 맑고 투명한 시간을 갖는구나 생각을 하니까. 때로는 기침한테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 법정(法頂) - |
그 즈음 법정은 고승들의 죽음 형태를 묻는 한 작가에게 충격적인 말 하나를 합니다.
윤청광 작가
“(고승열전) ‘겸익 스님’ 편을 쓰는데 돌아가시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옛날 스님들은 돌아가실 때 흔적이 없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다른 스님들은 입적이라고 나오는데 이 스님은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글쎄 그런 경우에는 옛날 중들이 가장 멋있게 죽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그래서 제가 모르죠. 뭡니까. 그것을 보고 뭐라고 그러냐. 천화라고 부른다 천화.”
천화. 전설적인 고승들의 죽음의 형태로 전해지지만 그 죽음의 방식은 알려진 게 별로 없습니다. 법정은 그 죽음에 방식을 말합니다.
윤청광 작가
“나무꾼도 안 다니는 길고 자기가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간다고 그리고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도 기운이 남아 있으면 나무 긁어서 깔고 나무 긁어서 덮고 그리고 누우신다는 거죠. 완전히 기진맥진이니까. 물이 있어 뭐가 있어요. 그냥 그대로 가는 거야. 그러면 시체도 못 찾는 거지. 산속이니까 누가 찾겠어요. 그것이 가장 멋진 죽음이죠. 중들이 꿈꾸는”
법정은 언젠가 자신의 오두막에서 흔적도 없이 죽고 쉽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천화였습니다. 언젠가는 또 제주로 가는 밤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서 그대로 낙화하면 그게 곧 천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연이었을까? 법정의 병세가 깊어지자 제자들은 추위래도 피해야 한다며 제주도에 거처 하나를 마련합니다. 농담처럼 했던 제주 바다의 천화. 그는 이 바다에서 매일 그 천화를 생각했을 겁니다. 뒤늦게야 그걸 안 지인들이 서둘러 그를 서울로 옮깁니다.
왕상한 / 법정 재가 제자. 서강대 교수
“스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죠. 발목이 완전히 뼈만 남은 발목이었고 침대에 누워서 가늘어진 팔다리를 보니까 울컥하는 거예요. 참 많이 울었네. 병상에 누워 계시는 스님의 모습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스님께서는 누구한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 아니세요.”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토록 천화를 꿈꾸었던 것이겠죠. 폐암이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계속 됐습니다. 그 속에서도 그는 병상일기를 계속 씁니다.
병상에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허락받은 남은 세월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삶이란 순간순간의 있음. 언제 어디서 살 건 간에 인연 따라 있음이다. 그 순간순간을 자신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무소유 정신으로 살 것. 늘 끼어 있기 깨어 있되 드러나지 않게." "오늘 아침부터는 서서 예불하기로 했다. 어깨와 팔의 통증 때문에 엎드려 할 수 없으니 서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일 일었다." - 법정(法頂) - |
고통 속에서도 승려의 계율은 엄격했습니다. 일어설 수 없으면 앉아서라도 예불을 올렸습니다.
현장스님
“지금 내 소원이 뭔지 알라? 스님 뭐예요? 그러니까 하루 빨리 더는 폐 끼치지 않고 다비장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윤청광 작가
“스님 무슨 말씀을 하세요. 이렇게 누워만 계셔도 저희가 얼마나 든든한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랬더니 사람 구실 못하니까 빨리 가야지.”
사람들의 간절함이 그의 생명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 마지막 유언이 작성됩니다.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는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
유언은 또 한 번 충격을 몰고 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간된 모든 출판물을 절판해 달라.’ 그는 자신의 책이 세상에 진 많은 빚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말빚을 거두어 가겠다는 겁니다. 출판사도 그의 유언을 지켜주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기왕에 발간된 책은 모두 기증됩니다. 생전에 그는 늘 말했습니다.
"누구 주려면 살아 있을 때 줘야 해. 물건이라는 것이 그 물건을 가졌던 주인이 죽게 되면 그 물건도 같이 죽더라고 빛을 읽어. 누가 죽은 스님들 물건 가지라고 하면 섬뜩해서 안 가진다고 살아 있을 때 주면 모두 갖는데 물건도 그 사람이 죽으면 같이 따라 죽기 때문에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살아 있을 때 줘야 해." - 법정(法頂) - |
그렇게 한 승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2010년 3월 11일 입적). 그 입적의 밤이 그가 길상사에서 잠들어 본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혜총스님
“살기 힘든 세상을 부처님 마음으로 부처님 입으로 부처님 몸으로 일평생을 올곧게 살다 가신 분이다.”
박완일 법사
“중답게 살다 갔지. 중답게. 더 미화할 것도 없고 격하할 것도 없고 중답게 살다가 중답게 갔어.”
그가 떠납니다. 입던 옷 그대로 가사 한 장 덮어 떠나는 길. 유언에 따라 일체의 장례식은 물론 그 어떤 추도행사도 없었습니다. 중답게 살다, 중답게 떠나는 길, 그 중다움이 법정이 세상에 온 이유였는지도 모릅니다.
덕조 스님
“다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다 주고 가셨죠. 정신적으로 저희에게 주신 것을 본다면 무궁무진하고 세상에 물질보다 더한 보배스러운 선물을 저희한테 주고 가셨죠.”
모든 것을 내어주고 텅 빈 몸 위로 장작이 쌓입니다. 살아서는 그 삶에 철저했고 죽음 앞에선 그 죽음에 철저했습니다.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각자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꾸어 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 보기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지나가요.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난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 법정(法頂) - |
해마다 봄이 되면 이 꽃이 보고 싶어 섬진강으로 달려 왔다던 법정. 그곳에 꽃이 피고 있습니다. 그 환한 매화 꽃 아래 법정이 있습니다.
<약력>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 출생. 속명 박재철.
우수영 초등학교 졸업.
목포 상업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 상과대 입학.
1955년 전남대학교 상과대 3학년 재학중 입산 출가.
1956년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해인가 강원 대교과 졸업.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3년 불교 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1975년 송광사 불일암에서 수행.
1976년 '무소유' 발간.
1993년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맑고 향기롭게' 창립.
1997년 길상사 창건.
2010년 3월 11일 세수 79세 법랍 56세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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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쓰는 유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 법정 스님 - |
침묵은 범죄다 - 봉은사가 팔린다. 法頂 (불교신문/ 1970년2월8일-4면)
1.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있지만 현장의 침묵은 더러 범죄와 동일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승가정신은 첫째 회(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문제를 폭력이나 독선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이성적인 대화와 설득에 호소하는 것이다. 둘째 의견이 서로 다를때에는 건전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중지(衆智)에 묻는 것이다. 셋째 승가정신은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 공존의 윤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덕이다.
지난 연말부터 총무원 일각에서는 봉은사 임야와 대지를 팔아 불교회관을 사자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었다. 그것이 요즘에는 거의 실현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18일 종정스님을 비롯하여 청담장로원장, 월산총무원장, 그리고 법안 교무부장을 선두로 한 총무원 간부진 등 우리종단의 원로와 실권자들이 임석한 중진회의 석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동참자로서, 그리고 현장을 입회한 목격자로서 이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스님 친필 -봉은사 다래헌에서
2.
불교회관 건립은 몇 해 전부터 논의된 우리종단의 염원이다. 그 회관을 세우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봉은사 같은 도량을 팔아서까지 회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급한 일인가에 의문이 없지 않다.
봉은사는 잘 알다시피 한국불교사상 영구히 기억될 도장이다. 불교가 말할 수 없이 박해를 받던 이조시절 보우스님에 의해 중흥의 터전이 구축된데가 이곳이며, 서산,사명같은 걸승의 요람이 된곳도 바로 이 봉은사인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거나 또는 불교 중흥의 도량이라는 과거를 무시하고라도, 한수이남에 자리잡은 그 입지적인 여건으로 보아 앞으로 우리 종단에서 다각도로 활용할수 있는 아주 요긴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제6한강교가 봉은사쪽으로 놓인다는 서울시의 계획이 발표되자 그 주변의 땅값이 폭등하고, 이해타산에 약삭빠른 업자들이 총무원 문턱이 닳도록 출입이 빈번해진 실정이었다.
그 결과 바로 봉은사 대지와 임야매각으로 낙찰된 것이다. 곁들여 장충단 공원에 있는 ‘공무원 훈련원’을 불교회관으로 사들이자는 착상이 동국재단에 관계하고 있는 몇몇 인사들에 의해 구미를 돋구게 된 것이다. 왜냐면 불교회관의 일과는 관계없이 캠퍼스 확장의 뜻으로 훈련원을 사들이려는 계획은 벌써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없던 차 때마침 불교회관건립이라는 대의명분이 결정적인 구실을 해준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것 같지만 바로 이 점으로 해서 종단에서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될 것 같다.
3.
그런데 지금 ‘공무원 훈련원’ 자리가 한국불교발전상 막대한 손해를 치루고라도 놓쳐서는 안 될 그런 위치인가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뻔하다.
그곳은 동대에서나 필요한 터이지, 우리 종단의 역량이나 처지로 보아 회관으로서는 부적합한 곳이다. ‘막대한 손해’란 말은, 첫째 우리 종단에서 앞으로 유용하게 쓸 도장이 없어진다는 점이고, 둘째는 굳이 가은 땅을 팔 경우라도 제6한강교가 준공된 다음에 처분한다면 지금의 몇 곱을 받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선택된 자리에 우리 뜻에 맞도록 설계된 회관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1천 6백년의 전통을 가진 대종단에서 모처럼 회관을 가지는데 남이 쓰다만 낡은 건물을 사서 쓴다는 것은 종단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눈 앞일만 생각하고 쫓기듯이 바삐 서두는걸 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일들이 게재된 것처럼 오해를 초래하기 알맞다.
물론 우리 종립대학인 동대의 캠퍼스가 확장된다는데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다. 허나 오늘날 동대가 타 대학에 비해 하강일로인 요인이 현재의 캠퍼스가 좁아서인가? 동대의 근본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면 8억 5천만원(얼마전 공무원 훈련원의 감정가격)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집’을 사기보다는 교수의 자질 향상과 학생들의 학구열을 북돋는 등 인력개발에 그러한 재력을 투자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일 것 같다.
이점 운영관리자들의 안목이 아쉽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회관을 갖자는 것은 우리들의 여망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발전의 근본적인 저해 요인은 결코 회관의 유무에 달린 것은 아니다. 우리 같이 발심못한 얼치기들이 중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나처럼 탐욕과 명리에 눈이 가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줄도 모르는 일부 우....들이 불자 노라 하면서 신..를 받아먹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종단을 위해서라면 봉은사 하나쯤 법당까지 다 팔아버려도 아까울 것 없다는 견해는 물론 종단을 아끼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종단’이라고 할 때 추상적인 존재는 아니다. 구체적인 도장 없이 종단이 있을 수 있겠는가?
회관을 갖게 되면 그 뒷날부터 당장 한국불교가 중흥될 것처럼 벌써부터 흥분하는 다혈질들이 계시는데, 문제의 열쇠는 그 회관을 어떻게 운영 하느냐에도 달린 것이다. 어떤 교포가 총무원에 쓰라고 보내는 승용차 하나 굴릴만한 능력이 없이 다른 기관에 넘기고 만 작금의 우리 종단 실정을 두고 생각할 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염려 말라’는 호언장담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언론자유가 아니다.
4.
거듭 밝히지만 회관을 갖자는 뜻에는 동조하고 싶다. 그러나 봉은사 같은 유서깊고 장래성 있는 도장을 우리 종단 자체에서 보존 활용하지 못하고 끈덕진 업자들의 입맛에 맡겨 팔아 버리려는 일에는 찬성할 수 없다. 필자가 평생 삼보도량을 지켜야 할 의무와 종단이라는 유형체 속에서 살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봉은사 경내의 임야가 ‘유휴재산’이라 해서 처분한다면 우리나라 사찰림이나 대지치고 유휴재산 아닌게 얼마나 될 것인가. 유휴재산 처분에 대한 지난번 종회의 결의는 이와 같은 맹점을 내포하고 있다.
도장이란 법당이나 몇 채의 요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청정승가가 도량의 전제조건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환경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총무원 측이 획책하고 있는 구상대로라면, 봉은사 소유의 임야 및 대지 13만평 중에 그 6분의 5가 팔리고 나머지 6분의 1이 고작 도량으로서 존속될 모양이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 수고하고 있는 현직 동국 재단 이사이면서 교무부장인 오법안 스님은, 팔고 남은 봉은사 둘레에 담장을 사주고 식량을 확보하겠다는 등 사후대책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자연인의 인격과는 달리 그동안 겪어온 ‘비구승의 신의’를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5.
우리들의 오늘날 애용하고 있는 삼보재산이 어떻게 해서 마련되고 계승되어 왔는가를 돌이켜 볼 때 거기에는 신심단월의 고마운 희사도 있었지만, 그것을 지키고 가꾸어 온 우리 선사들의 피눈물 나는 ..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는 현재의 유용한 정재를 수호할 의무는 있어도 팔아버리거나 호용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따른 몇 가지를 한국불교전체 사부대중을 향해 호소하고 싶다. 첫째 불교회관 건립문제는 급히 서두를게 아니고 시간적인 여유와 자체의 역량을 살펴가면서 널리 종단의 여론을 들어 일을 진행시켜야 하겠다.
둘째 불교회관을 사기위해 한국불교 재건의 터전인 봉은사 경내지를 팔아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유휴재산을 처분하여 한수이남인 봉은사에다 우리 분수에 맞는 회관을 세웠으면 하는 것이다.
셋째 봉은사와 같은 중요도량의 처분 문제는 적지 않은 일이므로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불자들의 최대다수의 의견이 집약되어 역사적인 과오를 초래하는 일이 없어야 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진즉 이러한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총무원 당국으로부터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에는 보류해 달라는 충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지난 주 재단이사회에서 이 문제가 마침내 표면화되어 지상에까지 보도 되었다. 봉은사에 살고 있는 대중으로서 이 이상 침묵을 지킨다면 어떠한 범죄적인 오해를 받을지 알 수 없고 또한 승가정신에 입각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아 이와같은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봄한테는 미안하지만
1.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올해는 봄이 더디다고 봄인사를 주고 받는다. 봄이 온다고 해서 별로 기대할 것도 없지만 한 겨울 밀폐된 방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핼쓱해진 화분들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몇가지 이유로 해서 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초겨울의 초목이 풍기는 그 말할 수 없이 차분한 계절에 비한다면, 이런 표현이 모처럼 찾아드는 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봄을 좋아할 수 없는 그 첫째 이유가 변덕스런 날씨 때문이었다. 잘 풀리는 가 해서 한꺼풀을 벗어주면 금시 쌀쌀한 날씨다. 그런가 싶으면 어느새 활짝 애교를 떨고 있는 것이다. 더러는 뿌옇게 토우를 내리면서 횡설수설 은폐하려 든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봄을 믿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알맞다. 불투명한 이런 계절이 싫은 것이다.
둘째로 나는 체질적으로 봄을 좋아할 수가 없다. 이른 봄철이면 이렇다 할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한 열흘 누워서 앓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앓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 뭐 외롭다거나 어쩐다나 이런 청승맞은 생각은 벗어 버린지 오래지만 예정된 일을 못하고 자꾸만 침..하려는 육신에 더러는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얼마전에도 예의 봄철 행사를 치러주었다. 다래헌에 누워서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 남의 일처럼 까맣게 잊어버린 ‘죽음’ 같은 것이 내 자신의 일로 생각키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일인가에도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정말 문제되는 것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2.
지난 2월 이던가 우리절 주지스님이 불의앞에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상좌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유언하는 비장한 장면을 보고, 같은 도량에 살고 있던 대중들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우리 종단에서 삼보정재를 지키기 위해 분신자살로서 항거한 일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불의란 10여 만평에 달한 봉은사 임야매각에 따른 총무원 당국의 비승가적인 처사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반응은 굉장했다.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부대중들이 격려의 편지를 보내오고, 먼 지방에서 몸소 찾아와 주지스님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기고 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수업을 받다 말고 뛰어온 순진한 학생들까지 있었다. 불의 앞에 한국불교의 장래는 그래도 비관적일 수 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한편 총무원에 어떤 간부는 서운 주지의 이런 결심을 보고 ‘혹시 노망기가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우리는 적잖이 분개했다.
무슨 동기에서건 ‘분신 자살’을 결심하고 선언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불자로서 어떤 그릇된 현실 앞에 스스로의 몸과 목숨을 불태우겠다고 부처님 앞에 맹세한 것은, 즉흥적인 쇼맨쉽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신’에서임은 물을 것도 없다. 이와 같은 결정신앞에 많은 이웃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이해 관계를 떠난 순수한 공감에서여서 였을 것이다.
3.
요 며칠전 모 석간지에 최월산 총무원장과 김서운 봉은사 주지 공동명의로 낸 ‘해명서’를 보고 우리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닭 쫓던 개처럼. 그리고 실소를 머금었다. 한편 다행한 일이라고도 생각됐지만. 며칠전까지도 총무원 간부진에서 봉은사 주지의 직인을 위조했다고 해서 김서운 주지스님은 극도의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사주지의 입회없이 자행한 임야의 분할 측량과 수의계약사실에 대해서도 분개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가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3월 20일 총무원에서 총무원 간부와 봉은사 주지가 뜻을 같이하여 모임을 열고, 원만히 해결되었음을 해명한 것이다.
그렇게 비정했던 결의가 급전직하 한 걸 보고 어떻게 실소를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필자의 소신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봉은사 같은 유서 깊고 장래성 있는 도장을 팔아서 까지 남이 쓰다버린 건물을 사서 불교회관으로 써야할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된 것은 한 생명이 이제는 분신으로서 비명횡사를 하지 않고 제대로 수명을 누리게 됐다는 점에서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말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본래 중생계의 구조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급선회하는 인간의 그 심사가 실로 무상하다는 말이다. 당시 행정 책임자의 이런 ‘미묘한 과정’을 거쳐 삼보재산이 팔리는가 싶으니 조금은 슬퍼지려고 한다. 오늘은 날씨가 풀린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함부로 창문을 열지 말아야 겠다. 조석으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따르다가는 또 강 건너 약국의 ‘아스피린’이나 팔아주기 알맞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로 해서 올해는 봄이 더딘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더욱 봄철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모처럼 찾아든 봄한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본사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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