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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병교, 세병로 지명유래

by 연송 김환수 2012. 5. 6.

부산의 온천천에 위치한 세병교와 세병로 지명 유래를 알아 보겠습니다.

 

세병교(洗兵橋)는 부산 연제구 거제동과 부산의 동래구 수안동을

연결하는 다리를 말한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습니다.

세병교 (거제동방면에서 2012.4.6 촬영)

세병교 다리 아래 교각에 적혀 있던 세병교 유래 

 

세병교의 세병(洗兵)이란 병기를 물에 씻었다는 뜻으로, 병기를 씻어서 거둔다는 의미로 전쟁이 끝나 평화가 돌아옴을 말한다.

 

동래성 남문의 익성에 있던 세병문 남쪽의 다리에서 연유 되었으며

동래읍성 남문 앞 온천천에서 임진왜란 등 큰 전쟁을 치른 후 피묻은 병기를 물에 깨끗이 씻은 곳이었고 이곳에 석교를 세우자 세병교라 명명했다.

 

온천천 세병교 구간은 예전에는 온통 모래사장이었으며 ‘황새벌’이라 불릴 만큼 황새(학鶴, 두루미)가 많았다. 이런 황새(학)의 몸짓에 따른 동래학춤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세병교 근처에서 조선시대의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태어나 동래 관노로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예전 세병교 부근은 바다였을 때 고래가 자기 집 안뜰처럼 노닌다고 하여 안뜰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세병교 다리 옆에서 본 모습

온천천 에서 바라본 세병교 모습 뒷쪽에는 동해남부선 철교가 보인다. 

세병교 바로 아래 동해남부선 철도 현재 복선공사를 위해 교각작업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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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세병로(洗兵路)에 대해 알아봅니다.

 

세병로(洗兵路) 도로명 주소는 과거 일제시대 조세징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주소체계인 지번이 2012년에 없어지고 도로명 주소찾기로 전환되면서 
생긴 새로운 도로명 주소입니다.

 

 

도로명 주소는 기억하기 쉽고 찾아가거나 찾아오기 쉽도록 만들었는데

곧 적응될 좋은 방식입니다.

 

세병로의 시작은 연산로타리에서 반송로 방향 연산동 콘티넨탈

호텔부터 시작하여 세병교까지 입니다.

 

사진은 세병교 옆 동해남부선 미원 건널목에서 연산동쪽을 보고

찍은 사진 입니다. 

 

연제구 거제동 세병교에서 부터 연제구 연산동쪽 방향으로 세병로를 설명합니다.

사진 왼쪽은 온천천 쌍용아파트 오른쪽은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입니다.

 

왼쪽은 롯데캐슬아파트 오른쪽은 월드메르디앙 입니다. 

부산시 연제구 세병로 44번지 롯데캐슬아파트 입니다. 

거제천로와 세병로 사거리 입니다. 이곳에서 연산동 콘티넨탈 호텔까지 가다보면 왼쪽으로 삼보아파트, 한성기린아파트가 있습니다.

 

사진중앙 끝에 보이는 건물이 반송로에 있는 연산동 콘티넨탈 호텔입니다.

참고로 콘티넨탈 호텔부터 세병로 번지수가 시작되어 미원 건널목 까지가 도로명 세병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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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교 일제 강점기 시대 사진입니다.

 

1930년대의 세병교 석재 다리 모습입니다.

이전 1910년경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 목교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세병교


 동래읍성 남문의 모습

동래읍성 보이는 성문은 2중으로 된 익성의 성문중 처음 만나는 누각과 성문으로 성문의
명칭은 세병문입니다.

왼쪽은 1층 누각이고 오른쪽 누각은 2층으로 된 누각입니다.

1층 누각의 문은 세병문(洗兵門)이고 뒤쪽 문은 주조문(朱鳥門)입니다.


 주조문 무우루(無憂樓) :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


남문인 주조문 안에 있는 내주축성비

 

 내주축성비 내용은 " 1731년(영조7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축의 내력을 적어 1735년에 건립하였다.

비명(碑銘)에 의하면 읍성의 원둘레가 3,090척, 높이가 13척이었는데 1731년 정월에 성터를 측량하여 경상도 64개군에서 5만2000명의 민정(民丁)·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연인원 41만7050명, 전(錢) 1만3454량(兩), 포(布) 1,552석(石), 미곡(米穀) 4,585석으로 동년 4월에 성벽을 축조하고,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하고 난 뒤 둘레 1만7291척, 높이 17척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장 모습

좌측에 있는 누각이 바로 식파루인데 객사 출입을 하는 외삼문이고 식파루 뒤에 어렴풋이

객사의 모습이 보인다. 우측에 보이는 누각이 회의나 연회를 하는 누각인 정원루입니다. 

객사의 외삼문 역활을 하는 식파루

식파루 정면사진


동래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고 있던 객사 모습


동래동헌의 외삼문인 망미루의 모습으로 동래도호아문


 망미루 앞 모습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망미루는 동래동헌 앞에서 금강공원 입구 이전 

내삼문인 동래독진대아문

동래독진대아문 (출입 :우측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