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김명국
김명국(1600-1663년 이후)은 조선중기 화가들 중 가장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천재적인 화가이자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畵佛(화불)로 불리는 김명국은 특히 禪宗畵(선종화)와 狂態邪學派(광태사학파) 계열의 산수인물화에 뛰어났다.
본관은 安山(안산), 자는 天汝(천여), 호는 蓮潭(연담) 또는 醉翁(취옹)이며 命國(명국), 鳴國(명국)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으나 생몰연대 등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아래 족보기록 참조)
김명국이 활동했던 인조(1623~1649), 효종(1650~1659) 연간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잇따라 겪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규장각 소장 儀軌(의궤))에 따르면 김명국은 圖畵署 畵圓(도화서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국가적인 궁중행사에 30여회, 의식에서 소용되는 실용물 제작에 17회 선발돼 기록화와 치장용 병풍, 장엄용 문양 등을 그렸으며,
김명국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는데 사행 기간 동안 그림 요청이 많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 번째 일본행은 일본측의 특별요청에 의한 것임이 공문서에 남아 있어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1647년(인조 25)에는 창경궁 중수 공사에 책임화원으로 참여하여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총괄하였다. 1651년(효종 1)에는 한시각(韓時覺)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하였다.
도화서 화원으로는 최고위직에 속하는 종6품 교수를 거쳐 기술직 관인으로서의 한계품직을 넘어 정6품 司果까지 올랐다.
조선 후기의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은 그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하였다.
정내교(鄭來僑)의 ≪완암집 浣巖集≫에 의하면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취한 뒤에 그려진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기질은 힘차고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처리된 그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작은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파(狂態派)에 속한다.
작품으로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를 비롯하여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기려도(騎驢圖)》 《관폭도(觀瀑圖)》 《투기도(鬪碁圖)》 《은사도(隱士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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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 (선종화로 유명한 화가)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30
김명국의 '죽음의 자화상'
http://blog.daum.net/yescheers/8597918
천재화가 화불(畵佛) 김명국(金明國)
http://blog.daum.net/yescheers/8598174
김명국(金明國)의 미술세계 작품 보기
http://blog.daum.net/yescheers/8598177
연담 김명국(金明國)의 설경별리도
http://blog.daum.net/yescheers/859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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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는 14세에서 분파되는데 明國(명국)은 첨정(僉正)공파(한산파)
孟錘(맹추)의 후손이다.
* 첨정(僉正) : 조선시대 정3품 당하아문(堂下衙門) 중 시(寺)·원(院)·감(監)
등의 이름이 붙은 관아에 속한 종4품직
첨정(僉正) : 조선시대 돈녕부·봉상시 등에 소속된 종4품 관직 돈녕부는 1401년(태종 1) 1월에 처음 설치될 때 종4품의 부지부사(副知府事)가 1470년(성종 1) 4월에 첨정으로 개칭되었고, 봉상시 등 정3품 당하아문은 1392년(태조 1) 7월의 신정관제(新定官制) 이후 태종 때인 1401년 7월, 1403년 6월, 1414년 1월 등 여러 차례의 관제개혁을 통하여 처음 소경·소감으로 설관되었던 것이 부령(副令)·부정으로, 다시 소윤으로 개정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 1월의 관제갱정(官制更定) 때 이들 관서의 관제가 정·부정·첨정·판관·주부·직장·봉사·참봉의 체계로 갖추어짐으로써 종4품의 첨정으로 고정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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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산 본관 오기(광주인을 경주인으로 오기) * 족보간행시 인쇄잘못
이전 족보(1776년, 1958년)는 광주인으로 되어 있음
明國(명국)의 아버지(父)는 중휘(重輝)
折衛(절위) ? = 근위(近衛 : 임금호위) ?
증(贈) 숭정대부 판돈령부사 중휘(重輝)
아버지는 김중휘(金重輝),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경복(李慶福)의 딸, 처(配배)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明國(명국) 선조는 도화서 화원으로는 최고위직에 속하는 종6품 교수를 거쳐 기술직 관인으로는 한계품직을 넘어 정6품 司果까지 올랐다.
이러한 벼슬덕에 족보에 등재된 것으로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명국(明國)의 활동기록을 보면 형제간인 善國(선국)의 출생년도는 1708년 戊子(무자)가 아닌 1648년 戊子(무자)가 되어야 하므로 60년이 당겨지고 그 후손의 출생기록도 동일하게 앞 당겨져야 한다.
은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엽달마도
달마도
일찍이 신위(申緯, 1769년~1845년)는 김명국의 그림을 일컬어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混融) 백년 이내에는 필적할 이가 없을 것 같다”고 하였거니와 이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작자의 면모를 과시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경쾌하고 호방(豪放)한 필촉으로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인 달마(達磨)의 상을 묘출하고 있는데 단숨에 그려내린 인물의 윤곽과 한점의 실수도 없는 세부의 붓끝까지 신기할 정도로 생명감이 스며 있으며 기교의 묘를 터득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려 그곳에 남겨두었던 작품으로 근래에 일본 화가들이 그리는 달마도는 이 그림의 필법을 종(宗)으로 삼고 있다고 전해진다. (국립박물관 소장 1폭 및 일본 동경미술학교 소장 1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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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申緯, 1769년~1845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경수당(警修堂)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14세 때 정조가 그를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1799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이조참판을 지냈다. 당시 시·서·화의 3절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이래 시작이 가장 많았었고 백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천재적 시인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보다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청조의 시풍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참신한 시를 썼다. 그의 시작품 속에는 애국 애족적인 정신이 잘 나타나 국산품 애용, 양반 배척, 서얼의 차별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등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서도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소악부(小樂府)〉에는 45수의 시조가 한역되어 실려 있다. 그가 쓴 〈동인론시(東人論詩)〉 35수는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그 당시까지의 시인들의 작품을 평가해 놓은 대표적인 평론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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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1 – 연담 김명국 [설경별리도]
조선시대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가 전부 흥미롭고 애정이 생기지만 그 많은 화가들 중에서도 유독 관심과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화가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화가들은 대부분 생애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서 작품동기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아 ‘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점을 주곤 합니다. 그런 의문점을 남겨주는 화가 중 조선 중기 인조 연간에 활동했던 연담 김명국은 특히 저에게 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화가입니다.
연담 김명국에 대해서는 좀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대표작인 <달마도>를 보시면 ‘아하 이 그림’ 하고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지본수묵. 58×83 cm. 국립중앙박물관
혹시 누군가 아시아 아니 세계 최고의 달마도가 어느 그림이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이 작품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연담 김명국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작품과 회화사의 위치에 비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그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은 전무하고 다만 후대 비평가나 평론가들의 그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의 대한 일화를 적어놓은 것은 제법 있어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한 편입니다.
연담의 본관은 안산.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국담(菊潭), 취옹(醉翁)을 사용했으며. 도화서 화원을 거쳐 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1636년(인조 14)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대부분의 일화는 술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는 인물과 산수에 능했고 거칠고 대비가 강한 묵법이 특징인데 화법은 조선 초기 안견의 화풍을 따라 그린 작품도 있고 선종화도 많이 있지만 산수화의 대부분은 절파풍의 그림입니다.
절파풍이란 중국에서 유래된 화풍인데 원나라 사대를 풍미했던 문인화가 쇠퇴한 후 명나라 초기 ‘대진’ 등 절강(浙江)성 출신 화가들이 주축이 된 화풍으로 먹을 강하게 쓰면서 산수화에 있어 자연을 중심으로 그리지 않고 자연을 단지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이 절파 산수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절파 산수는 역동적인 산세를 표현하고 인물이 처해있는 어떤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데 매우 효과적인 화풍입니다.
하지만 절파 화풍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강조하다 보니 필법이 거칠어져서 절파말기에는 미친 듯이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광태사학(狂態邪學)풍 이라 비판 받았습니다. 절파화풍은 그 뒤 동기창 강조한 ‘남종문인화’ 의 우위성이 화단을 풍미하면서 점차 역사적으로 쇠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이런 광태사학 풍의 화가를 꼭 한 명만 꼽으라면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두말없이 연담 김명국을 꼽을 것입니다.
그런 절파풍 산수화의 대표작인 <설중기려도> 또는 <설경산수도>라 불리는 그림이 바로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설경별리도> 김명국, 모시에 수묵, 101.7 x 54.9cm. 국립박물관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니 아직 날이 환하게 밝지 않은 새벽이고 가운데 대나무 가지와 우측 하단 나뭇가지 위에 흰 여백을 보니 눈이 덥혀 있는 어느 겨울의 모습인 듯 합니다.
동양화에서 눈을 그리는 방법은 이처럼 사물의 위에 여백을 남겨 눈이 쌓인 모습을 표현하니 달을 표현할 때 달 주변의 하늘만 그림으로 써 달을 표현하는 방법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지 않음으로써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이 동양화 매력 중 하나입니다.
눈 쌓인 겨울 어느 산길에 선비가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나귀 앞에서 길을 재촉하는 시동은 작대기의 바랑을 매고 걷고 있으니 잠시 잠깐의 외출은 아닌 듯싶습니다.
우측의 초가집은 그 앞의 오래된 고목으로 인해 초라해 보이며 나무로 대충 만들어 놓은 문 앞에 어느 여인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듯한 모습으로 먼 길 떠나는 선비를 말없이 배웅하고 있으며 다리를 건너던 선비는 고개를 돌려 집 앞에 서있는 인물을 바라 봅니다.
깎아지른 산세와 어두운 새벽, 눈 덮인 산길을 떠나는 선비와 집 앞에서 그를 바라보는 아낙네. 대충 슬쩍 보아도 무엇인가 스토리가 있을 법 한 그림입니다.
그림을 좀 자세히 살펴보면 중경의 산악이 묵중하게 그림을 누릅니다. 또 그 표현은 매우 각을 날카롭고 거칠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운데 바위에서는 나뭇가지가 죽 내려오고 있고 바위 위로는 나무가 짧게 표현되어 있으며 가운데는 도끼로 나무를 찍어낸 듯한 표현이란 뜻인 부벽준법으로 산세의 묵직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중경의 부각, 각이 진 날카로운 산세, 늘어진 나뭇가지 이런 표현들이 바로 절파화풍의 특징들입니다.
우측에 초가집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해조묘로 표현된 가지 때문에 집이 더욱 누추해 보입니다. 어설픈 담장을 봐서도 분명 풍족한 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궁색해 보이는 집 문 앞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길 떠나는 선비를 애절하게 배웅하고 있습니다.
집과 동자를 앞세운 선비의 방향은 산세의 기울기와 같은 방향으로 그려져 있어 무거운 산세의 무게를 교묘하게 분산 시키고 있고 무거운 우측에서 좌측으로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도 산세의 표현과 동일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화가의 뛰어난 구성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비가 타고 있는 동물이 왜 말이 아니고 당나귀인가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으면 귀를 자세히 보시면 됩니다. 짧은 말의 귀와는 분명 다른 당나귀 귀입니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말은 엄청난 부의 상징이기에 저런 누추한 집에서 사는 선비가 타고 다닐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아무튼 선비는 무엇인가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고 있는데 감상자로 하여금 묘한 궁금증을 유발 시키는 표현입니다. 겨울 새벽 눈 쌓인 길을 떠나는 선비의 모습과 그를 배웅하는 아낙네. 묘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지그시 눈을 감고 뚜벅뚜벅 걷고 있는 당나귀. 이런 것이 한데 어우러져 갖가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럼 술에 취해야 더욱 좋은 그림을 그렸다는 김명국의 그림치고는 정돈된 묵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과연 어떤 그림일까요? 무슨 화의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후대 미술사가들의 일부는 이 그림을 겨울에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그림인 <패교기려도>로 해석하곤 합니다. 기려도는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를 그린 그림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인데 기려도 중 특별히 다리를 건너는 그림을 <패교기려도>라고 부릅니다.
<기려도>는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나섰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나 시성이라 불리는 두 보가 나귀를 타고 출퇴근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그림인데 노자의 소요유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나귀를 타고 명상과 시상에 잠겨 고고한 선비의 풍류를 동경하는 선비들의 이상적 모습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기려도>는 우리나라 선비화가들도 자주 그렸던 그림인데 조선시대 <기려도>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중기 화가 함윤덕이 그린 <기려도>입니다.
함윤덕, <기려도> 견본담채, 15.6 X 19.2 Cm, 국립중앙박물관
김명국의 설경산수도를 <기려도>로 이해하는 이유는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라는 소재와 더불어 김명국 스스로가 이런 <기려도>나 <탐매도>를 자주 그린 사실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경산수도를 <기려도>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은 소재로만 그림을 이해하는 좁은 견해인 것 같습니다.
<기려도> 김명국, 지본수묵, 29.3 x 24.6 Cm, 남궁련 소장
<탐매도> 김명국, 비단에 채색, 45.7*31.6 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이 선비의 소요유한 삶의 동경이라는 <기려도>로 이해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원래 <기려도>는 힘겨운 나귀의 모습과 그런 힘겨움과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한 선비의 모습의 대비를 통해 무위적인 삶과 소요유의 화의를 부각 시키는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편안한 표정은 선비가 아니라 나귀의 표정이고 선비는 무엇이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기려도>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로 그린 셈이지요. 따라서 세속의 속됨에 때묻지 않겠다는 <기려도>의 화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선입견을 싹 걷어내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은 겨울에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나섰다는 맹호연과도 관련이 없고 나귀에 몸을 싣고 시상에 몰두하는 두 보와도 관계 없습니다.
오직 부인을 남겨두고 추운 겨울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어느 선비의 모습과 그런 가장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염원하는 여인과의 애절한 이별만이 화면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별’ 이것이 감상자의 가슴을 자극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의 제목을 <설중기려도> <설경산수도> 가 아닌 <설경별리도雪景別離圖> 라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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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2 ? 연담 김명국 [설경별리도]
연담 김명국은 어떻게 이런 애절한 이별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모든 그림은 화가 자신의 경험이나 마음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김명국은 <설경별리도>를 그릴만큼 집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연담 김명국의 삶에서 애틋한 이별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림의 모습을 보았을 때 단지 잠깐의 이별이 아닌 어쩌면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힘든 먼 길을 떠나는 모습이라 화원인 그에게 이렇게 먼 길 떠날 일이 있었을까 싶습니다만 김명국의 인생에서 유추 해볼만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본 입장에서 선진 문화를 접하는 유일한 공식적인 통로는 바로 조선통신사 사절단이었습니다. 선진 문화의 대한 갈증을 조선통신사를 통해 해소하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자신들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일본과 조선의 오래된 문화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 파견은 중단되었고 그 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 여 년이 지난 1609년에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재개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일본과의 외교복원을 통해 다시 전쟁을 만들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 일행을 선발하는데 있어 문화적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매우 기량이 뛰어난 인물로 선발했는데 특히 그림을 과시하기 위한 화원, 글씨와 문장을 과시하는 사자관, 마상무예를 선보여야 하는 군관은 그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선발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기량이 나라에서 인정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글씨와 문장은 한문을 아는 일본인들에게만 인기가 있었으나 화가와 마상무예를 담당하는 무관은 모든 사람에게 인기가 있었기에 화원의 비중은 통신사에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아무튼 연담 김명국은 1636년 제4차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 오게 됩니다. 보통 통신사에 뽑힌 화원은 하루에 인물화를 3~4본씩 그렸다고 하니 산수화, 사군자 등을 포함하면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는지 통신사 부사 김세렴의 [해사록] 1636년 11월 14일 기록에는 “ 그림과 글씨를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찾아와 박지영, 조정현, 김명국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심지어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 “ 라고 쓰여져 있는걸 보니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정교하게 공을 들여 그려야 하는 채색화나 산수화는 가급적 피하고 일필휘지 할 수 있는 선화도를 중심으로 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습득도> 시모노세키 초후박물관 소장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의 풍간선사가 숲 속을 거닐다가 강보에 싸여 울던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데 주워 왔다고 하여 아이 이름을 습득이라 하였다. 습득이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서 “네 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자 두 손을 맞잡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차수이립(叉手而立)이라는 화두가 생겼다.
-조선의 르네상스 중인(허경진 著) 중에서
속필로 그린 선화도라 해서 그림의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실 분은 없겠지만 부연하자면 원래 선화도란 빨리 그리면서도 한 획에 참선의 깊이를 담아내야 하기에 붓질을 덧붙인다거나 수정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빨리 그리면서도 잘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며 오랜 운필의 숙달과 마음의 깊이가 없이는 잘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소묘풍의 얌전한 선화도가 대세였던 까닭에 힘찬 필치로 호방하게 그리는 김명국의 화풍은 당신 일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현재 우리 가요계의 힘찬 율동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 뮤지션들이 일본 가요계에 한류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강렬하면서도 호탕한 선화도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김명국을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이는 당신 일본인들의 취향에 딱 맞아 떨어져 조선통신사로 따라간 많은 조선의 화가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김명국이었고 그의 선화도가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따라서 그의 선화도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요청에 그려진 것이며 당시 조선 화단은 보수적인 화풍이 대세여서 은일, 소요유의 고사인물도가 주종을 이룬 것과 대별되는 점입니다.
전편에 실린 <달마도>도 일본 통신사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일본에 계속 남아있다가 조선말기 일본에서 다시 구입하여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된 그림입니다.
<박쥐를 날리는 신선> 종이에 수묵, 25.0 X 34.0 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저는 유명한 달마도 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박물관 소장의 <습득도>와 평양미술관 소장의 <박쥐를 날리는 신선>등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의습선(衣褶線)과 표정, 작품에 퍼져있는 선기 등이 결코 조선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에 비해 떨어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 빠른 속필로 그려진 의습선을 보면 과연 신필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에서 일본을 다녀간다는 것은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면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신에는 매우 엄청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부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산에서 규슈 섬 까지만 바다를 4번이나 넘어야 했고 규슈에서 시모노세키 바다를 한번 더 거쳐 혼슈에 도착해서도 장장 1600여 리를 걸어야만 에도에 도착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또한 조선통신사 파견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 경비가 상당히 많이 소요되는 행사이기에 정식 외교관인 정, 부사들의 필수적인 경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수행원들의 경비가 따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통신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용을 자체로 조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들에게는 일본에서 가장 값 비싸게 거래되는 인삼 밀거래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고 타국과 개인적인 상거래가 불법이었던 시절임에도 인삼을 판 돈으로 조선에서 필요한 물건을 몰래 들여오는 것을 대부분 눈감아 주었습니다.
제4차 조선통신사 일행은 1636년 10월 6일 부산을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 12월 7일 에도에 도착 합니다. 가을에 출발했지만 겨울에 도착한 것입니다. 에도에 도착할 때까지 많은 도시를 거칠 때마다 통신사 일행들은 자신들의 장기를 보여주어야 했고 일본은 극진한 환대로 보답했을 것입니다.
화원 김명국도 수많은 왜인들의 요청으로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억지로 그린 그림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고 술을 마셔야 더 그림을 잘 그릴 만큼 술을 좋아했던 연담으로써 공식적인 자리에서 술 없이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김명국이 울려고 했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김명국에게 통신사의 참여는 힘들고 괴로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삼 매매를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제4차 통신사의 정사였던 임광의 [병자일본일기] 11월 18일 기록을 보면 “일행을 검색할 때에 김명국의 인삼상자가 또 발각되었으니 밉살스럽다. 역관 윤대선은 스스로 발각됨을 면하기 어려울 줄 알고 손수 인삼자루를 들고 와 자수하였으니 딱하고 불쌍한 일이었다.”
이런 밀거래의 관행은 비단 김명국 혼자만 일으킨 문제도 아니었고 중국으로 간 사신일행이나 예전 일본 통신사 일행에 늘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한번 사신으로 다녀 온 사람은 통역을 담당했던 역관이 아닌 이상 다시 통신사 일행으로 선발 되는 경우가 없는데 유독 김명국 만이 제4차, 제5차 두 번이나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유일한 경우입니다.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다시 김명국을 통신사의 일행으로 보낸 이유는 일본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한류바람 중심에 김명국이 있었고 그 때문에 통신사의 화원은 김명국으로 보내달라는 일본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결국 김명국은 두 번째 통신사 때도 인삼거래 뿐 아니라 공식적인 그림 그리기는 등한시하고 돈 많은 상인들에게 높은 값을 받고 그림을 그려 넘기는 그림 매매에만 몰두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귀국 후 처벌까지 받게 됩니다.
김명국이 인삼 상자를 여러 번 들킬 정도로 무리하게 밀거래에 참여한 것이나 그림 매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욕심이 과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생활이 곤궁했고 절박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또한 화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결국 천한 환쟁이라는 사회적 위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빈궁한 생활을 면하기 어려웠기에 자신의 그림을 환호하고 크게 대우해주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 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설경별리도>는 누가 뭐라 해도 그 화의가 이별로 인한 진한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명국이 <설경별리도> 그린 해는 바로 그의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특히 처음으로 일본에 갔었던 제4차 조선통신사로 떠났던 1636년 겨울, 정확하게는 1637년 2월쯤이라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왜 특별히 1637년 2월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처음 김명국이 일본에 가 있었던 1636년 12월에 조선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병자호란의 발발입니다.
알다시피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입에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었다가 1637년 1월 결국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은 사건입니다.
남한산성을 포위당했다가 결국 임금이 항복했다는 사실은 한양은 이미 적국의 손에 떨어져 약탈과 방화로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런 비보가 통신사일행에게 전해진 시기는 아마도 2월쯤 조선으로 돌아오던 도중 일 것입니다.
김명국은 도화서 관원이었기에 한양이나 한양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을 것인데 병자호란에 대한 소식은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깨끗하게 번 돈은 아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가난한 아내와 자식들의 고생을 덜어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귀국하던 김명국에게는 가족 걱정에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의 변변치 못한 벌이에 늘 고생만 시켰고 그 와중에도 술을 좋아하는 자기 때문에 마음 고생만 시켰던 아내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설경별리도
잠자리에 들어도 자신의 먼 길 떠나던 날 집 앞에 나와 몸 건강히 다녀오라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던 아내의 모습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고 그때 조용히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집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한 겨울 밤. 그림은 집을 떠나는 순간을 그렸지만 내 반듯이 돌아가리라 그때까지만 나를 배웅해주던 그 모습으로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립니다. 떠난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보내는 편지. <설경별리도>는 이렇게 태어났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런 추측은 양식적인 추론이나 문헌적 근거에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추측해 본 것입니다.
<설경별리도>는 인물 묘사가 김명국의 다른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수지법(나무묘사) 또한 번잡하지 않아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취홍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절파풍의 준법이 그의 걷잡을 수 없는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에 누가 봐도 한눈에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설경별리도>가 한마디로 누구의 요청도, 돈 때문도 아닌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화의를 제대로 그려낸 명작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더구나 일반 종이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 붓이 잘 나가지 않은 모시에 이렇게 빠른 붓 놀림으로 정확한 묘사를 했다는 점은 그의 기량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본 적이 있습니까?
새벽에 대문까지 나와 먼 길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밥벌이를 위해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멀리서 배웅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가슴 한 켠에 그리움이 슬금슬금 올라와 몸은 점점 더 멀어지지만 마음에는 가족들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넣습니다.
그런 새벽에 눈이라도 살며시 내려앉아 있다면 남겨진 발자국에 더욱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떠난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보내는 간절한 마음. 이별을 통해 그리움을 보여주는 그림 <설경별리도>이 그림에 제시를 붙인다면 정희성 시인의 시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2009 . 8 . 4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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