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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金明國)의 미술세계 작품 보기

by 연송 김환수 2012. 3. 4.

 

김명국(金明國)의 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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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1600-1663년 이후)은 조선중기 화가들 중 가장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천재적인 화가이다.

 

畵佛(화불)로 불리는 김명국은 특히 禪宗畵(선종화)와 狂態邪學派(광태사학파) 계열의 산수인물화에 뛰어났다.

 

본관은 安山(안산), 자는 天汝(천여), 호는 蓮潭(연담) 또는 醉翁(취옹)이며 命國(명국), 鳴國(명국)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규장각 소장 儀軌(의궤))에 따르면 김명국은 圖畵署 畵圓(도화서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국가적인 궁중행사에 30여회, 의식에서 소용되는 실용물 제작에 17회 선발돼 기록화와 치장용 병풍, 장엄용 문양 등을 그렸으며,

 

김명국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는데 사행 기간 동안 그림 요청이 많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 번째 일본행은 일본측의 특별요청에 의한 것임이 공문서에 남아 있어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1647년(인조 25)에는 창경궁 중수 공사에 책임화원으로 참여하여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총괄하였다. 1651년(효종 1)에는 한시각(韓時覺)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하였다.

 

도화서 화원으로는 최고위직에 속하는 종6품 교수를 거쳐 기술직 관인으로서의 한계품직을 넘어 정6품 司果까지 올랐다.

 

조선 후기의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은 그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하였다.

 

 

 

 

 

 

 

설경산수도  = <설경별리도> = 설중행려도(雪中行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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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취한 후에 그려진 것이다. 설경산수도에도 김명국의 이러한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다른 그림에 비해 화면이 약간 정리된 듯하지만 활달성은 한층 심화되어 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겨울 새벽녘인 듯한 시각에 사립문에 기대어 전송하는 동자와 뒤를 돌아다보며 길을 떠나는 나귀 탄 고사(高士)와 종자(從者)의 송별 장면이 눈 덮인 설경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중경에 그려진 넘어질 듯 솟아 오른 산의 무게를 대각선상에서 받치면서 화면의 변각구도를 보강해 주고 있는 다리와 그 위의 기려(騎驢)인물은, 패교를 건너 설산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을 연상케 한다.

 

언덕과 눈 덮인 산기슭과 앙상한 나뭇가지와 인물들의 옷 주름에 가해진 힘차고 날카롭게 각진 윤곽선이라든지 거친 묵법 등은 광태파 화풍과의 유관함을 보이면서 어둡고 차가운 설경 속 화중인물의 심의(心意)를 승화시키고 있다..

 

17세기. 족자모시에 수묵  101.7*54.9cm. 국립박물관 소장

 

 

 

 

 

탐매도(探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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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매도에는 김명국의 광태적 화풍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산등성이와 암괴(岩塊)는 굵고 힘찬 필치로 대담하게 묘사되었으며, 지팡이를 비스듬히 잡고 서 있는 은사(隱士)와 그 옆의 시자(侍者)의 의습선들은 분방하면서도 날렵하여 김명국 특유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강한 필치가 연두색 등의 연한 담채에 어울려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며, 화면 전체에 서정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다만, 포치(布置)가 다소 옹색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17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45.7*31.6cm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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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16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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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산수(泥金山水)는 사계절을 8폭에 담은 화첩 중 초춘. 만춘. 초하. 만하의 네 폭이다.

 

각 계절마다 두폭씩 8폭으로 꾸며졌다. 도판의 그림은 두 폭씩 한 쌍을 이루되 각기 좌우에 치중하여 중앙을 비우는 화면 구성을 이루고 있다. 화첩이 오른쪽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초춘은 오른쪽에 비중을 둔 그림이다.

 

춘경에는 수면을 비교적 좁게 나타냈고 물결이 잔잔하며, 전경에 나타난 수종은 덩굴이 감긴 노송(老松)으로 되어 있다.

 

만춘에 이르면 버드나무가 전경에 크게 부각되어 사방이 트인 옥내에 있는 인물 역시 크게 나타나 있다.

 

초하는 도롱이를 입고 귀가 중인 두 인물이 전경에 등장하여 우중(雨中)임을 알려주고 물살이 다소 높아져 있다.

 

만하는 야경으로서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으나, 전경의 나무들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며 사뭇 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화첩은 또 다른 6폭의 산수 인물첩과 필치 및 구도면에서 유사점이 많아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김명국은 산수에 있어 소방(疎放)한 절파계 화풍만이 아니라 전기화단의 안견화풍도 오히려 노년기에 접어들어 그리고 있어 <사시팔경도> 화첩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첩 비단에 이금 각각27.1*25.7cm 국립박물관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4폭중 (초춘),

1662년, 화첩 비단에 이금, 각27.1 x 25.7 cm, 국립중앙박물관

춘경에는 수면을 비교적 좁게 나타냈고 물결이 잔잔하며, 전경에 나타난 수종은 덩굴이 감긴 노송(老松)으로 되어 있다.

 

 

 

 

▲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4폭중 (만춘),

1662년, 화첩 비단에 이금, 각27.1 x 25.7 cm, 국립중앙박물관 

만춘에 이르면 버드나무가 전경에 크게 부각되어 사방이 트인 옥내에 있는 인물 역시 크게 나타나 있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4폭중(초하),

1662년, 화첩 비단에 이금, 각27.1 x 25.7 cm, 국립중앙박물관

초하는 도롱이를 입고 귀가 중인 두 인물이 전경에 등장하여 우중(雨中)임을 알려주고 물살이 다소 높아져 있다.

 

 

 

▲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4폭중 (만하),

1662년, 화첩 비단에 이금, 각27.1 x 25.7 cm, 국립중앙박물관

 만하는 야경으로서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으나, 전경의 나무들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며 사뭇 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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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의 초상이나 행적은 선종화에서 즐겨 다루었던 소재였는데, 이 그림도 그의 행적 중의 하나를 묘사한 것이다. 6세기 초 중국에 건너간 달마가 양(梁) 나라 무제에게 최초로 설법하였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갈대잎을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한 줄기 갈대에 몸을 싣고 서 있는 달마의 얼굴은 광대뼈와 매부리코, 치켜 올라간 눈매로 매우 강하면서도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담묵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얼굴에 비해, 의복부분은 죽죽 그어댄 활달한 농묵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주춤거리는 곳이 없는 빠른 속도의 감필묘(減筆描)는 김명국의 세련된 기교를 말해준다.

 

이같이 대담한 필선은 예리한 눈매와 더불어 달마의 농축된 선기(禪氣)를 성공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진전하는 듯한 인상이면서도 옷자락의 끝단이 왼쪽으로 날리게 처리한 것은 필선 자체의 추상적 리듬에 치우쳐 사실적인 묘사에 위배된 부분이다.

 

17세기 족자 종이에 수묵 97.6*48.2cm 국립중앙박물관

 

 달마도, 지본수묵, 83 x 58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담 김명국은 ?  

우리나라 화가제일 거칠고 호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인물로 손꼽힌다. 남태응 (1687~1740) 김명국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섞여있는것과같았다는 평가를 전하고 있다.

 

남태응이청죽화사(聽竹畵史)평을보면,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자기마음대로하면서주어진법도밖으로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화법어느하나천기(天機) 아님이없었다. ()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一家)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따름이다. 최고의 찬사이다.

 

달마도(達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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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은 절파풍의 화가로 유명하지만, 선종화(禪宗畵)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 달마도는 조선시대의 선종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이 그림은 일본에서 유전하던 것인데, 8.15해방 후에 구입해 왔다. 따라서 작품의 제작 시기는 그가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도일했던 1636~1637년과 1643년의 어느 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남인도인으로서 6세기 경 중국에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보리달마의 모습은 선종화의 중요 화제로서 즐겨 다루어지던 것이다. 여기서는 두포(頭布)를 달마의 상반신만을 묘사했는데, 9년 동안의 면벽좌선으로 고양된 그의 내면 세계가 대담하고 힘찬 몇 번의 붓질로 잘 포착되어 있다.

 

옷주름에 나타난 극도로 생략된 감필 붓자국의 굵고 가는 선폭의 결과 모양은 화면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해 주며, 재빠른 필선의 속도에서는 작가의 활기찬 움직임이 느껴진다.

 

1636~1637 또는 1643년 족자 종이 수묵 83*58.2cm 국립중앙박물관

 

 

 

 

 

기려도(騎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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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려도〉는 그의 김 명국의 <산수인물화첩> 중의 한 폭으로, 그 기법에 있어서 선종화적인 풍취가 깃든 작품이다. 갓을 쓰고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를 그린 소경산수인물도에서는 오랜 여행길에 몹시 지쳐 보이는 나귀와는 달리 시상에 잠겨 있는 선비의 모습을 김명국 특유의 재빠른 붓질로 잘표현되고 있다.

 

배경의 산수는 절벽에 덩굴풀이 흘러내리도록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림의 초점이 중앙의 나귀 탄 인물에 있음을 알려준다.

 

화 법 : 비단에 수묵  크기:29.3cm x 24.6cm   소장처 : 서울 개인 소장

 

 

은사도(隱士圖) 60.6*391cm 국립중앙박물관

 

전문가들도 그가 그린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나 기려도(騎驢圖)는 알아도

은사도(隱士圖)는 잘 모르고 있다.

 

은사도의 화제(畵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將無能作有 (장무능작유)

畵貌豈傳言 (화모개전언)

世上多騷客 (세상다소객)

唯招己散魂 (유초기산혼)

 

 

없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있게 만드니

그것을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세상엔 시끄러운 사람들이 많으니

누가 이미 흩어진 혼을 다시 불러 일으키겠는가

 

 

그림이란 연담(蓮潭)의 唯招己散魂(유초기산혼)이란 표현처럼 그렇게 그려야 하는 것이다

 

 

 

<습득도> 시모노세키 초후박물관 소장

 

 

<박쥐를 날리는 신선>

종이에 수묵, 25.0 X 34.0 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포대도(布袋圖)

포대화상은 미륵의 화신인데,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복과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졌다.‘대계 조선통신사’ 제2권.

 

 

관폭도

견본수묵담채 180cm X 101.7 cm국립중앙박물관

 

 

비급전관, 간송미술관


위의 그림을 보자. 이제는 김명국의 작품은 옷자락의 힘찬 필치만 봐도 한눈에 그의 것임을 알아보겠다. 도인 두 명이 비급자료를 두고 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도인은 눈빛이 심상치 않다. 뒤의 고목은 정신이 없는 듯 한 필치이면서도 신비함을 배가 시킨다.

 

두 신선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한 각도. 아니면 두 신선이 이야기 하는 중에 수 백년이 흘러서 단순히 말라 비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도 모른다하지 않았는가

 

아래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구도가 유사한 ’고사관화도’에 비해 훨씬 좋다. 아래는 분명 그의 초기 작품이리라.

 

 

고사관화도, 국립공주박물관

 


철괴, 간송미술관

 

’철괴’이다. 취중에 그린 그림 같지 않은가? 그래서 여기선 관지를 ’연담’이 아닌 ’취옹’을 행서를 이용해서 취한 듯한 필치로 썼다. 이 그림은 배경지식을 알지 못하면 잘 이해가 안 된다. 이번 전시의 도록 ’간송문화’를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설이 있다.

’철괴는 도교의 팔선인 중의 하나로 꼽히며 이철괴 또는 철괴리로 불린다. 철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성이 이씨로서 체격이 컸는데 일찍이 도를 배우고자 산 속 동굴에서 수행하였다.

 

노자가 산에 내려와 도교를 가르치자 철괴는 노자를 만나기 위해 화산에 갔다. 이때 철괴가 제자들에게 몸은 이곳에 두고 가는데 만약 7일 동안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몸을 태워도 좋다고 하고 떠났다. 제자가 마침 어머니 병환으로 급히 집에 가야 해서 6일 만에 몸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철괴가 7일이 되어 돌아와 보니 몸이 사라져 혼을 의탁할 곳이 없었고, 겨우 굶어 죽은 시신을 찾아 몸을 의탁하여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절름발이에 형체가 자못 험상궂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발에 병이 나서 서왕모가 하늘로 올라가며 철괴를 동화교주에 봉하면서 쇠지팡이 하나를 주었는데, 후에 이 지팡이를 공중에 던지니 용이 되고 철괴는 용을 타고가서 동화제군이라 부른다고 한다.  (간송문화 48호, p. 139)’

 

 

                           노승도                               노승도

 

 

 

 

 연담 김명국 <수노인 (壽老人)>

종이에 수묵, 105.2x 52.8cm, 간송미술관 소장.

 

 <수노인>

일본에서 유전되다가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수노인은 그림됨됨이만도 한눈에 들어오는 명작인데, 수노인의 얼굴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처리하여 그의 여유 있는 솜씨에 다시 감탄하게 된다.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壽星을 의인화한 것이 '수노인'인 바 그 얼굴 모습에서 신령스러움을 나타내야 할 것인데, 김명국은 존엄함이 아니라 친근감으로 그것에 접근하고 있다.

 

옷자락을 그린 윤곽선을 보면 붓이 흘러간 자취가 역력하여 짙고 옅음이 완연히 나타나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선의 굵기에도 변화가 있어 리듬과 생동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화인열전에서 발췌)

 

 

 

 

▲ 스님과 학   

 

 

▲ 기리인물도, 견본수묵, 24 x 19 cm, 개인소장

 

▲ 송하선인도  

 

▲ 송하문동도

 

 

 

 

 

   

 

 

 

 

 

 

 

 기려도

 

나귀를 탄 사람

모시에 담채, 20.6 x 15.8cm 안규응 소장

 

 

신승

 

산수도

 

<수묵 습득도> (박쥐를 날리는 신선)

종이 수묵 북한 평양조선미술박물관 25.0 cm X 34.0cm

 

단원의 습득도와 유사한 양식 힘차고 대담한 필치한 필치를 엿볼수 있다

 

산수도 2

 

도강도

 

신승 2

 

신승

 

기목관수도

 

 

포대화상도 김명국 17세기 종이에 수묵 브루클린박물관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粱)의 고승으로 봉화(奉化)의 악림사(岳林寺)에서 살았던 정응대사(定應大師)를 지칭한다. 늘 작대기에 포대를 걸러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동냥한 것을 자루에 담아서 포대화상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포대화상은 배가 나오고 대머리이며 때로는 호탕하게 웃기도 하며 거칠면서도 선종에 명석했던 인물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포대를 둘러메고 서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눈동자의 방향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선종화의 전형적인 감필묘를 사용하였고 담묵(淡墨)과 중묵(重墨)으로서 강약의 리듬을 살렸다. 현재 포대화상은 중국이나 대만 등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재복(財福)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노승도 

 

심산행려도 모시에 담채. 103.0 x 60.2cm, 이병직 소장

소재를 알수 없지만 한동안 김명국의 대표작으로 손꼽힌 명품

 

 

관폭도(觀瀑圖)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관폭도(觀瀑圖)>

견본(絹本) 설채도(設彩圖). 177.9×101.2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그림 <관폭도>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는 선비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는 배경이 생략된 소경(小景) 산수인물화 형식을 취하지만, 김명국의 <관폭도>는 주위 경관이 더 비중있게 묘사된 대경산수인물화(大景山水人物畵) 형식으로 그려졌다.

 

2. 왜 폭포를 감상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는가?

조선시대에 즐겨 그려졌던 관폭도는 중국 당나라 때 이백(701~762)이 여산(廬山)의 폭포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李白의 시 望廬山瀑布 (망여산폭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운)

향로봉에 해 비치니 보랏빛 안개 일고

遙看瀑布掛前川 (요간폭포괘전천)

멀리서 보노라니 폭포가 냇물처럼 걸렸구나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그 물줄기가 곧추 삼천 자 밑으로 흘러 떨어지니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하늘에서 은하수 내려오는 듯

 

이 시는 <望廬山瀑布> 2수 연작시의 두 번 째 작품인데, 이백의 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정평이 났다. 특히 飛流直下三千尺이란 표현은 요즘도 흔히 폭포의 장엄함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

 

 

김명국, 달마절로도강도, 97 x 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그림 <달마절로도강도> 양나라 무제를 만난 후, 북위의 도읍 낙양에

   갔는데, 이때 갈대를 꺽어 양자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2. 왜 달마는 양자강을 건넜는가?

   달마가 처음 중국에 건너와서 양무제와 상봉했을 때다.

양무제는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다. 불교를 보호하고 원조하며 스스로 반야경과 열반경을 강의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양무제가 "나는 이제까지 많은 사찰을 창건했고 경서도 간행했으며 승려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무공덕(無功德)" "성제제일의(聖濟第一義,최고의 진리)란 무엇입니까?"

 

"확연무성(廓然無聖,거기는 텅텅 비어 있으며,최고의 진리라 할 것도 말것도 없습니다)!!"

 

"스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시오?" "불식(不識,모릅니다)“ 양무제는 달마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달마 대사는 기연이 맞지 않음을 알고 낙양으로 가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려 할 때, 강가에 있는 갈대 잎을 꺾어 강물 위에 띄우고 그 위에 올라 유유히 강을 건넜다. 이 장면이 바로 달마 절노도강(折蘆渡江)이다.

 

3. 달마는 실재 인물인가?

최근 학자들은 달마란 선승은 실제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달마는 6세기 인물인데 문헌에 나타난 것이 9세기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달마에 의해서 선종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발전된 후대의 선종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라는 인물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달마라는 인물의 역사적인 기록이 시대와 그 기록자에 따라서 특히 선종의 사상적인 전개와 더불어서 변천을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 백로도  소장| 고려미술관

 

▲수노도  소장| 야마토 문화관(좌), 개인(우)

 

▲ 달마매죽도  소장| 도쿄 예술대학

 

 

 

목판각(木版刻) - 達磨 (김명국畵 석촌 김상철木版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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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신선도(松下神仙圖)>는 소경산수인물화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남태응의 <청죽화사>에 따르면,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화원이었다고 하는데요,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달마와 신선을 그린 그림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교과서에서 봤을 달마를 떠올리면 김명국 특유한 작품 세계에 고개가 끄덕여질 텐데요. 최소한의 붓질로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감필법’을 구사한 김명국은마음이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를 수 있는 ‘선종화’를 더 선호한 듯합니다.

 

 

사진출처 : 한화미술관 / 김명국 作 <송하신선도>

 



>>>송하신선도
 
소나무 아래에서 손을 모으고(공수) 있는 신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옷의 주름과 소나무 줄기를 이룬 선들이 마치 신선이 가진 초연한 모습처럼 절묘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우측으로 기울어져 화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그 위로 가지를 펴 신선의 머리 위를 우산처럼 받치고 있는 소나무 그리고 저 멀리 희미하게 드러나는 산과 화면의 중간에서 빗자루를 턱에 괴고 좌측을 바라보고 있는 늙은 신선은 웃고 있는지, 아닌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소나무 넝쿨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 세속과 먼 발치 떨어져 맨발로 비질을 하다 잠시 세상을 바라보는 신선. 속세를 바라보며 초연한 표정을 짓는 신선의 모습에서 김명국이 꿈꾸던 삶을 엿볼 수 있다.


(한화그룹 사보 한화한화인. art in hanwha. 미술평론가 박영택)

 

 

삼성미술관 LEEUM의 조선화원대전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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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 이공 영정(忠肅 李公 影幀)은 충숙공 이상길(1556∼1637) 선생의 초상화로 영정은 공이 80세 때에 화가 김명국이 두 폭을 그려 한 폭은 보물 792호(이상길초상)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남원 덕과면(南原 德果面) 이정기}에 보관되어 있으며, 한 폭은 서울시 시도유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되어 하계동 충영각(忠影閣)에 봉안되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9호 - 충숙공 이상길 영정

종 목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

명 칭 : 충숙이공영정 (忠肅李公影幀)

분 류 : 충숙이공영정 (忠肅李公影幀)

수량/면적 : 1폭

지정일 : 1988.04.20

시 대 : 조선 17세기 중엽

규모·양식 : 세로 186.5cm 가로 93cm 종축

재 료 : 비단 바탕에 채색

소 유 자 : 벽진 이씨 충숙공파 종중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16

관리자 : 이상원

자료참조 : 문화재청

 

충숙 이공 영정(忠肅 李公 影幀)

 

충숙공 이상길 영정은 도화서 화원 김명국(金命國)이 2폭을 그렸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초상화는 실물과 같은 규모인 가로 93㎝, 세로 186.5㎝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사모를 쓰고 엷은 홍색의 단령을 입고 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자락 안에 넣었다.

 

집무복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겉옷의 안자락을 표현하고,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 표현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냈으며,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화가 원작을 옮겨 그린 이모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초상화로서 가장 오래된 실제본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보물 제792호의 이상길 초상화는 얼굴 부분의 묘사에 있어 보다 후기의 초상화법을 보여주고 있어 후대의 이모본(移模本)으로 여겨진다. 즉, 원복을 충실히 옮겨 그렸으나 안면 처리에 있어서는 옮겨 그릴 당시의 시대색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작품은 실물과 거의 같은 규모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낮은 사모(紗帽)를 쓰고 엷은 홍색의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자락 안에 넣은 공수(拱手) 자세를 하고 있고 발 아래에는 족좌대(足座臺)가 그려져 있다.

 

무복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겉옷의 안자락을 표현하였는데 그 경쾌한 파란빛은 허리띠의 파란색과 잘 어우러져 있다.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 표현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중기의 초상화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관복을 입은 정2품관의 초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실제본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이상길과 그의 부인 경주이씨묘

 

충숙공 이상길(李尙吉)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1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30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ㆍ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인조때에는 공조판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순절한 충신으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쳤다.


효종 8년(1657)에 충숙공에 봉해졌으며 이후 강화도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충절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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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이색, 1328~1396)의 초상화.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 보물1215호.

1654년 김명국(

金明國)

이 옮겨그린 것으로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비록 이모본(移模本)이지만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보여주고있어

회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

 

이색 초상 (李穡 肖像) [보물 제1215호]

종 목 : 보물 제1215호

명 칭 : 이색초상 (李穡 肖像)

분 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  5폭

지정(등록)일  : 1995.03.10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5길 76 (수송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한산이씨대종회

관리자(관리단체)  : 한산이씨대종회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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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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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곡(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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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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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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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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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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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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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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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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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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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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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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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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