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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보신각종(普信閣鐘) 우리 할아버지 작품이었네

by 연송 김환수 2011. 11. 22.

보신각종(普信閣鍾)은 서울시 종로에 있는 종각인 보신각에 있던 종이다.

 

 

나이 되도록 보물 2호 보신각종에 직계 할아버지의 손길(제조,提調)이 닿아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ㅠㅠ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2호 각사 10층석탑에서만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던 내게 깜작 선물 이었던가 봅니다.

 

보신각종의 타종은 1985년까지 섣달그믐 자정에 종을 울리는 행사를 하였으나 종의 보호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경복궁,  구 국립중앙박물관 우측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 2호 보신각 종

 

 

  ▲ 2004년 12월 20일, 보신각 종을 용산 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는 장면

 

용산에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기 위해 비각을 허물고 크레인으로 옮기고 있다.

 

 

 

 

 

  ▲  신 박물관으로 이전된  보물 2호 보신각 종

 

현재 서울시 용산에 있는 신 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오늘날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보신각에 걸어둔 종은 원래의 보신각종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면서 ‘보신각종 중주위원회’에서 성덕대왕신종 보다 크게 만든 새로운 종이다. [1]

 

 

 

이러한 사실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높이 3.18미터, 지름 2.28미터, 무게는 19.66톤이며, 양식은 쌍두(雙頭) 용뉴(龍紐)로 되어 있고, 종신복(鍾身腹)에는 3조의 굵은 띠를 돌리고 있다.

 

또한 종구(鍾口)에는 위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2조의 띠를 돌리고 있어 이것이 하대(下帶) 역할을 하는 문양대로 되어 있다. [2]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년)에 주조되어 정릉사[3]에 걸려 있었다.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타 종루로 옮겨졌다.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어 보신각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4]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행사를 갖는다. 1985년부터 보신각에서는 새로 만든 종으로 타종하고 있다.

▲  1985년 새로 만든 종이 걸려 있는 보신각

    주석

    1. ↑ 세계일보 관련기사

    2. ↑ 문화재청

    3.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던 절이다.

    4. ↑ 문화재청 관련정보

 

보신각 종기 (普信閣 鐘記)

다음의 종기(鐘記)는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 매달았던 종의 명문이다. 종에 관한

내용은 없고 제작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나열하고 있다.

 

감독관에 해당하는 23명의 관료들을 제조, 낭청, 아전 순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제작자인 공장을 85명이나 열거하였는데, 이들 중에 이 즈음의 다른 제작물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세조 14년(1468년)에 권근(權近)이 지었다.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보존되고 있다.

 

보신각종에 새겨진(양각陽刻) 숭정대부 김개(金漑) 할아버지

함자를 찾아 봅니다.

 

 

▲ 보신각 종에 새겨진 명문

 

 

 

 

시 대 : 조선

연 대 : 1468년(세조14년)

유형/재질 : 금구명·종명 / 청동

문화재지정 : 보물 - 제 2호

크 기 : 높이 318cm, 너비 228cm

출토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번지

소재지 :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서 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권근(權近) /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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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종기 (普信閣 鐘記) 해석문

 

경성(京城) 보신각종기(普信閣鐘記)   

성화(成化) 4년 월 일(에 만듦).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광덕대부(光德大夫) 의빈부의빈(儀賓府儀賓) 신 심안의(沈安義)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병조판서(兵曹判書) 춘추관지사세자시강원이사(春秋館知事世子侍講院貳師)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광산군(光山君) 신 김국광(金國光)

추충좌익적개공신(推忠佐翼敵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서원군(西原君) 신 한계미(韓繼美)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무송군(茂松君) 겸 의금부판서(義禁府判書) 신 윤자운(尹子雲)

숭정대부 행중추부지사(行中樞府知事)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 김개(金漑)

숭정대부 행호조판서(行戶曹判書) 겸 춘추▨▨사(春秋▨▨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 ▨▨▨

숭헌대부 은천군(銀川君) 신 ▨

숭▨▨▨▨▨▨▨▨(崇▨▨▨▨▨▨▨▨)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상산군(商山君) 신 황효원(黃孝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원성군(原城君) 신 원효연(元孝然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겸 성균관지사(成均館知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신 서거정(徐居正)

낭청(郞廳)

창선대부(彰善大夫) 행복성수(行福城守) 신 ▨(▨)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천문학교수(行天文學敎授) 신 이석산(李石山)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선공감부정(行繕工監副正) 신 이▨(李▨)

중훈대부(中訓大夫) 행군자감첨정(行軍資監僉正) 신 이삼로(李三老)

중훈대부(中訓大夫) 행군기시첨정(行軍器寺僉正) 신 조▨(趙▨)

아전(衙前)

병조서리(兵曹書吏) 김효흥(金孝興)

악학도감재랑(樂學都監齋郞) 장자이(張自弛), 이지(李智), 김옥현(金玉玄)

선공감서리(繕工監書吏) 전사용(前司勇) 김한▨(金漢▨)

사재감서리(司宰監書吏) 한계▨(韓繼▨)

제용감서리(濟用監書吏) 조기(趙奇)

군자감서리(軍資監書吏) 전효달(全孝達)

공장(工匠)

정략장군(定略將軍) 김덕생(金德生), 방내은산(方內隱山), 정길산(鄭吉山), 이장수(李長守), 이파회(李波廻), 이만(李萬), 김몽총(金蒙寵), 이천대(李千大), 김례(金禮), 정장수(鄭長守), 장중산(莊中山), 박천길(朴千吉), 박사춘(朴思春), 강자고미(姜者古未), 어모장군(禦侮將軍) 허▨(許▨), 봉승대부(奉承大夫) 양춘봉(梁春奉), 장금동(張今同), 김승재(金升才), 김물금(金勿金), 이칙삼(李則三), 황거부비(黃巨富非), 김순생(金順生), 강묘을동(姜卯乙同), 최막생(崔莫生), 홍개미치(洪介未致), 김금동(金今同), 김석동(金石同), 유자고미(劉者古未), 기매(其每), 권돈일(權頓逸), 최철산(崔哲山), 박유실(朴有實), 장선남(張善男), 박막동(朴莫同), 귀동(貴同), 이효생(李孝生), 양수산(梁守山), 양오▨지(梁吾▨知), 박영생(朴永生), 홍자고미(洪者古未), 고중산(高仲山), 양을부(梁乙夫), 윤방구(尹邦舊), 이득방(李得方), 원정의(元丁義), 박산수(朴山守), 고타내(高他乃), 이득수(李得守), 김득남(金得南), 이달마(李達摩), 이득생(李得生), 나개부(羅夫介), 백만(白萬), 박의산(朴儀山), 최말금(崔末金), 이달(李達), 박막동(朴莫同), 김석산(金石山), 홍득부(洪得夫), 정계생(鄭界生), 이유상(李有尙), 이달생(李達生), 김산수(金山守), 문언(文彦), 권덕룡(權德龍), 홍상온(洪尙溫), 안▨ㅅ달(安▨叱達), 한수림(韓守林), 이근중(李斤中), 임을생(林乙生), 이룡(李龍), 이구지(李仇智), 정연수(鄭延壽), 염흥달(廉興達), 김호생(金好生), 강원기(姜元奇), 박석이(朴石伊), 고상례(高尙禮), 고춘길(高春吉), 안경(安京), 윤성수(尹成守), 김춘경(金春敬), 유추남(兪秋南), 김오미(金吾未)

사령(使令)

강인덕(康仁德), 박춘생(朴春生), 이춘(李春), 문상중(文尙中), 조승수(趙承守), 채막동(蔡莫同)

 

(종고십척오촌구경칠척오촌삼분자경팔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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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종기 판독문 

 

京城 普信閣鐘記   

成化四四年月 日

都提調」

提調」

 光德大▨▨賓府儀賓臣沈安義 精忠▨▨▨▨▨」

愾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兵曹判書春」

秋館 知事 世子侍講院貳師五衛都摠府都摠」

管光山君▨▨▨光 推忠佐翼敵愾功臣崇祿」

大夫議政府▨ 賛成兼五衛都摠府都摠管西原」

君臣韓繼美 推忠佐翼功臣崇政大夫茂松君」

兼義禁府判書臣尹子雲 崇政大夫行中樞府」

知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金漑 崇政大夫」

行戶曹判書兼春秋▨▨事弘文館 大提學五衛」

都摠府▨摠管▨▨▨▨ 崇憲大夫銀川君臣」

穳 崇▨▨▨▨▨▨▨躋 推忠佐翼功臣正」

憲大夫▨▨▨臣黃孝▨ 推忠佐翼功臣正憲」

大▨▨▨▨書原城君臣元孝然 資憲大夫中」

樞府知 事兼成均館知事藝文館大提學臣徐居正」

郞廳」

 彰善大夫行福城守臣頴 通訓大夫行天文學」

敎授臣李石山 通訓大夫行繕工監副正臣李」

嶷 中訓 大夫行軍資監僉正臣李三老 中訓」

大夫行軍器寺僉正臣趙嶟」

衙前」

 兵曹書吏金孝興 樂學都監齋郞張自弛 李」

智 金玉玄 繕工監書吏前司勇金漢寳 司」

宰監書吏 韓繼▨ 濟用監書吏趙奇 軍資監」

書吏全孝達」

工匠」

 定略將軍金德生 方內隱山 鄭吉山 李長」

守 李波廻 李萬 金蒙寵 李千大 金禮」

 鄭長守 莊中山 朴千吉 朴思春 姜者古」

未 禦侮將軍許▨ 奉承大夫梁春奉 張今」

同 金升才 金 勿金 李則三 黃巨富非」

 金順生 姜卯乙同 崔莫生 洪介未致 金」

今同 金石同 劉者古未 其每 權頓逸」

 崔哲山 朴有實 張善男 朴莫同 貴同」

 李孝生 梁守山 梁吾亇知 朴永生 洪者」

古未 高仲山 梁乙夫 尹邦舊 李得方」

 元丁義 朴山守 高他乃 李得守 金得南」

 李達摩 李得生 羅夫介 白萬 朴儀山」

 崔末金 李達 朴莫同 金石山 洪得夫」

 鄭界生 李有尙 李達生 金山守 文彦」

 權德龍 洪尙溫 安▨叱達 韓守林 李斤」

中 林乙生 李龍 李仇智 鄭延壽 廉興」

達 金好生 姜元奇 朴石伊 高尙禮 高春吉 安京 尹成守 金春 敬 兪秋南」

 金吾未」

使令」

 康仁德 朴春生 李春 文尙中 趙承守 蔡莫同」

        (鐘高十尺五寸口徑七尺五寸三分字徑八分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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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종은 세조 14년(1468)에 현재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 종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그 후 절이 없어지게 되자 이 종은 남대문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 30년(1597)에 현 명동성당 부근인 명례동현에 옮겨졌다.

 

그 후 광해군 11년(1619)에 서울의 한복판인 관철동의 보신각에 옮겨져 파루(오전 4시)에 33번, 인정(오후 10시)에 28번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는 일과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데 쓰였다.

 

그러나 종의 안전을 위하여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이 종은 특징은 몸통 한가운데 세 겹의 굵은 띠를 장식한 점인데, 밑면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가닥의 띠를 두르고 있다. 몸체에 주조 연대가 있어 제작 시기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몇 안 되는 범종의 하나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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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건물을 처음 세웠던 조선 태조 5년(1396)에 단층 건물인 ‘각’이 아닌 2층 건물인 ‘루’였다.

 

인사동 근방에 있던 그 ‘루’는 태종 13년(1413) 현재의 종로 네거리로 이사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는 바람에 광해군 11년(1619) 단층 건물인 ‘각’으로 다시 지었으나 이게 웬걸, 숙종 12년(1686)에 또 불타 버려 다시 세워야 했다.

 

불운은 계속되고 불난 집은 또 나는 법이다. 고종 6년(1869)에는 종각 일대 화재로 인해 모두 타 버렸고 같은 해 이번에도 역시 단층 건물로 세워졌다.

 

1915년엔 길을 넓히면서 뒤로 이동했는데 이 역시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고 1953년 또다시 더 뒤쪽으로 자리를 물려 다시 세웠다.

 

 

 

     보신각종도 일제에 의해 부평조병창으로 왔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다행히

      녹여지지 않고 다른 많은 유물들과 같이 조병창터에 남게 되었습니다.

 

 

 

1978~1979년에는 공사를 하면서 이번엔 아예 불나도 끄떡없게끔 튼튼한 철근 콘크리트로 2층 누각으로 짓게 된다. 여전히 그 편액에는 ‘각’ 자를 단 채.

 

 

                        고 임인식(1920-1998) 사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신각에 덩그러이 놓여 있는 보신각종


조선은 새 수도 서울을 건설하면서 유교의 이념에 따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인의예지를 한 글자씩 따 문에 이름을 달았다.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소지문이 그것이다. 이중 남는 글자인 ‘신’을 따서 고종은 1895년 3월 15일 도성 사대문 가운데쯤에 위치한 이 건물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강조하건대 조선의 중심은 서울이었고 서울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종각이었다.

 

왕이 있던 궁궐이야 권력의 중심이겠지만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종각은 예나 지금이나 중심 중의 중심이다. 종을 쳐야 시간을 알리고 시간을 알리려면 가운데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신각종은 조선시대의 시계였고 사이렌이었으며 알람이었다. 인경(밤 10시)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통행금지였고 만일 이때 잡히면 통금 위반에 걸려 곤장을 맞아야 했다.

 

파루(새벽 4시)를 치면 비로소 사람들은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보신각에 걸린 종은 어떤 종이었을까?

조선시대에는 다섯 개의 큰 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보신각종이다.

 

보물 2호인 보신각종은 높이 3.18m, 입지름 2.28m, 무게 19.66톤에 달하는 큰 종으로 처음 주조되던 세조 14년(1468) 당시만 해도 신라 성덕대왕신종 이후 가장 큰 종이었다.

 

이 종에는 음통이 없고 용 두 마리가 고리 역할을 하는데 이는 일찍이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분류하신 것처럼 조선 종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중국 종의 면모에 가깝다.

 

보신각종은 원래 신덕왕후의 능사인 정릉사의 범종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정릉사가 폐사된 후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로 옮겨졌다.

 

다시 원각사가 문을 닫고 나서도 그냥 종루에 매달려 있다가 한때 숭례문으로 옮겨질 뻔도 했었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 제독에 의해 현 명동성당 부근 고개에 위치한 명례동현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종각을 복구하면서 종로의 종각으로 옮겨진다.

 

그 뒤 보신각이 고초를 겪을 때마다 화마를 함께 입었다. ‘종’ 신세도 ‘각’ 신세 못지않게 사납다. 사나운 신세의 끝은 이러하다.

보신각종은 파루에 33회, 인경에 28회 타종했다. 그러면 하루에 61번 친 셈이고 1년이면 22,265회, 440년 동안 9,796,600회를 타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보신각종이 종각으로 옮겨진 후 여러 차례 화재를 겪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 보신각종이 일평생 겪었을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보신각 공사가 한창이던 1979년 3월, 보신각종의 균열이 발견되었다.

 

양 종의 경우 수명은 약 400년이라 하는데 이 종은 균열이 발생되던 당시 나이가 500년이 넘던 때였다. 균열의 크기 또한 커 가로 3m 93cm, 깊이 70mm에 달했다 한다.

결국 이 종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1983년 12월 12일, 보신각종을 새로 만들기 위한 ‘보신각종 중주위원회’가 꾸려지고 대대적인 성금 모금을 하는 한편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에 새 종의 주조를 위임하고 설계는 서울대 공대 염영하 교수에게, 디자인과 조각은 서울대 미대 강찬균 교수에게 의뢰했으며 주물제작은 성종사에 맡겼다.

 

기본설계는 종의 높이 3.8m, 입지름 2.30m, 중량 20톤으로 했으며 네 개의 시안을 만들어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성덕대왕신종보다 큰 크기다. 가장 큰 종이 되기를 열망한 당시 정권의 바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1984년 2월 19일 최종적인 디자인을 확정했고 그렇게 제작된 종이 바로 지금 보신각에 걸려 있는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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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보신각, 28.5 X 41cm,

지금은 2층 누각이지만 원래는 단층으로 지금보다 규모가 작은 1900년경 모습.

오른쪽 처마에 매달린 등과 낮은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기둥에 옷가지를 걸어놓고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과 기둥위 붙은 벽보(혹은 광고)가 붙어있다.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 보신각. 앞으로 지나가는 전차

 

 

빙수판매를 알리는 큰 깃발. 우산바치고 지나가는 어른과 우산들고 지나가는 아낙네,장옷두르고 지나가는 여인들. 사진 찍는 곳을 바라보는 아이들.

 

 

 

 

1915년 도로를 보수하며 보신각이 약간 뒤로 옮겨지며 45도 방향을 틀고 교통의 안전과 시야확보를 위해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겨 도로선과 평행을 맞추었고 도로는 석재로 포장

 

 

1950년 9월,전란으로 불타버린 보신각과 그을린 보신각종.

 

 

1956년 복구된 보신각. 1953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 20m 뒤로 옮겨 신축

 

1968년 보신각

 

 

현재의 보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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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조 14년(1468)에 주조되어 517년 동안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온 보신각종이 천수를 다하여 종신(鍾身)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애난사를 지켜 본 보신각종을 새로이 중주(重鑄)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여, 보신각종 중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위원회가 주관하여 국민들의 성금으로 새 종을 주조하여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보신각종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보신각신종(普信聞新鍾)이 갖는 의미와 세부 디자인의 개념을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보신각종 중주보고서》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보신각종은 조선시대 세조 14년 4월에 원각사의 종으로 주조되었다.
연산군 l0년(1504) 원각사가 폐사(廢寺)되자 종도 그대로 방치되었고 중종 37년 (1536)에 김안노(金安老)의 상소로 남대문 종루로 옮겨 달았다.


그 후 선조 37년(1597)에 명례동현(明禮洞峴 현 명동성당 부근)에 옮겨졌다가 광해군 11년(16l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보신각’이란 이름은 1895년 3월 고종 22년에 현재의 자리인 종각에 보신각이란 사액(賜額)을 내리면서부터였고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보신각종은 처음 불사(佛寺)의 종교적 의미를 담고 주성(鑄成), 타종되었으나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파루(罷淚:상오4시)에 33번, 인정(人定:하오 10 시)에 28번 울려 성문 여닫는 시간을 알려줌으로써 조선시대 시민들에게 하루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일제 36년 동안에는 보신각종도 우리 민족의 역사처럼 울리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로는 3·1절과 광복절 행사 때 타종되어 그날의 감격을 기리게 하였고 해마다 제야에는 한 해를 보내는 국민들에게 새 희망과 축복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마침내 80년부터는 3·1 절과 광복절 행사 때의 타종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보신각종을 새로이 중주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고, 역사적인 전통의 뿌리와 민족정기를 대대손손 이어가면서 국민적인 단합과 무한한 발전을 염원하는 시민의 성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새 종의 상징에는 한국 사상의 근본으로서‘우리의 뿌리’를 상징하는 태극형성도를 기본으로 하고 우리 나라꽃 무궁화로 금수강산을 장식하였으며, 또한 4계절의 꽃 문양대와 함께 우리의 고향을 뜻하고, 우리 조국의 새로운 세계 창조와 번영을 나타낸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종이 갖는 고유한 의미가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종이 갖는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와 사상의 변화에 의하여 약간씩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의 보신각종에 있어서는 범종(梵鐘)이 갖는 종교적인 내용이 소멸되고 오히려 초종교적인 민족의 소망과 의식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한 점은 오늘날 우리 현실의 다양한 종교와 종파 가운데 보신각종의 존재가치를 지속시켜 주는 근본 이유가 되고 있다.

 

 


무궁화에 담긴 우리의 민족정신으로 은근과 끈기, 자강불식을 말한다. 새로 주조한 보신각종의 음통(音筒)과 상·하대(上·下帶), 당좌(撞座)를 무궁화 문양으로 장식한 것은 국민의 성금으로 만들게 된 배경에 맞게 나라꽃 무궁화의 정신을 널리 고취시켜 주고자 한 것이리라.


음통 부분의 무궁화는 영원한 생명력으로 조국의 번영, 국운의 장구(長久)함을 나타내었고, 상·하대에 무궁화를 중심으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사계절에 피는 꽃을 당초문대(唐草紋帶)로 구성하여 화려한 금수강산을 표현하였다.


그 속에 꽃피웠던 찬란한 우리 문화의 배경에서 현대 조국의 기상과 자유·평화 애호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표현하였다.


당좌의 복엽변(復葉辦)의 무궁화는 국가 안녕과 통일을 기원하는 창으로서 융성한 조국 문화 발전과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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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金漑, 1405년 ∼ 1484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외척이다.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자는 선택(宣澤), 시호는 평호(平胡)이다.

 

1465년(세조 11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주관하였으며 숭록대부 판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안산군(安山君)에 봉작되었다.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 서산군의 부인 양천군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이다.

 

고려 현종의 장인이며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안산군개국후 김은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이다.

 

그의 딸 양천군부인 김씨는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 서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여러 관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부사로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관(二等管)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동지중추부사, 1457년 중추원부사 등을 지냈다.

 

1459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1461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상호군(行上護軍), 행첨지중추부사ㆍ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65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지휘하였다.

 

1467년 행의정부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을 거쳐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이후 1470년(성종 1) 행상호군ㆍ의묘조성제조(懿廟造成提調)ㆍ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안산군에 봉군되었다.

 

사후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고, 평호(平胡)의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