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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근대현대 인물

전교 68명중 68등 - 박찬석 총장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11. 11. 2.

 

전교 68명중 68등이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

 

 

 

 

박찬석(朴贊石, 1940년 9월 5일 산청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2001년 경북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 영남권 교수로는 처음으로 이인제 후원회에 가입한 것과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에 참여한 이력이 있으며 이 인연 덕분에 노무현 정권 출범 이 후 새천년민주당 대구시장 후보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 하마평에 오르내리다가 2004년에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비례대표 5번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박찬석 의원은 경북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하와이대에서 박사를 받고 졸업했으며 경북대 총장(13, 14대)을 지내면서 전국 국·공립대학교총장협의회 회장, 지방대학 육성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경력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지리학과 59학번이다. 몇 년 전까지 경북대학교에서 총장으로 8년간 재직했었다.

 

대학 총장 시절 총장실에 직접 여직원을 두고 동문 주소록을 작성하며 대학과 동문들을 연결시키려 노력했고 동문들의 결속을 다지는 일에 발벗고 나서는 등 경북대 동문회 활성화를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지난 2003년 열린우리당 공천(전국구)으로 17대 국회의원이 된 그는 여전히 동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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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서 대학총장, 국회의원, 농사꾼으로

 

 

 

전 경북대 총장, 그리고 국회의원, 그는 어느 직함을 원할까? "그냥, 교수라 불러주세요."

 

신장 172㎝, 체중 72㎏. 얼굴 표정은 몽골에서 봄직한 유목민 같다.70년을 살아왔다. 벽촌의 말썽꾼 아이가 훗날 국립대 총장에 이어 금배지를 달았다. 초선만 한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으로 호연장귀, 호미를 잡았다. 예전 선비식으로 말하면 그는 '출처관(出處觀)'이 분명했던 것이다.
학창시절엔 성공의 징조가 전무했다. 경남 산청군 산등면 양전리 고향이 싫어 산등중 3학년 때 당시 유행병처럼 나돌던 가출을 시도, 부모 속도 적잖게 썩였다.

 

기본 실력 탓인지 진주농고에 들어간 뒤부터 철이 든다. 농촌을 못 벗어나면 자기 삶도 끝날 것 같았다. 농고에서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여건상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는 경북대 사범대 지리교육과에 입학한다.

 

1971년 경북대 전임강사가 된다. 이후 10년 이상 강물처럼 살았다. 하지만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그가 조금씩 달라진다. '저항 마인드'를 갖게 된다. "세상이 이래선 교육의 장래가 없다."

 

단초가 있었다. ROTC 시절, 금서였던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갖고 있다가 제명된다. 경북대 학생부처장으로 있을 때 시국성명서에 서명한다. 그래서 각종 압력에 시달린다.

 

일단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 교환교수로 잠시 피신한다. 그는 자신이 좀 한심해 보였다. 무슨 일을 하려면 대충해선 안되는구나 하는 걸 절감한다. 일단 대학부터 혁신시켜야겠다고 결심한다.

 

당시에는'대학 개혁'이란 말이 아직 생소하던 시절. 94년 53세 때 골리앗과 같은 철학과 이모 교수에게 도전장을 낸다. 다들 게임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압도적으로 그가 승리를 한다. 이변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가 국내 총장 중 비즈니스 마인드를 제대로 갖춘 첫 사례로 기록된다.

 

그는 '경북대 국제화'를 독려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눈여겨 보고 교육부 장관 카드를 내밀지만 그는 고사한다. 노무현 정권 때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단다. 의원시절, 자전거타기와 로스쿨을 공론화시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남들이 뭐라하건 그는 자전거를 타고 등원했다. 이에 앞서 97년 대구에서부터 자전거 출퇴근을 강행했다.

 

 

지난해 5월 고향으로 내려왔다. 국회의원, 중독성이 강한 자리라 여간 독한 맘을 먹지 않으면 재선에의 꿈을 포기 못한다. 국회의원은 한번만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인터뷰도 자기 삶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거라면서 고사를 했다.

 

대구에 오면 앞산 언저리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머문다. 인터뷰는 그곳에서 이뤄졌다. 거실 한 켠에 꽤 비싸보이는 이탈리아제 자전거가 있었다.

 

1~2년전만 해도 서울과 대구를 2차례 왕복하는 혈기를 갖고 있었지만 요즘은 나이도 있고 해서 자전거를 잘 못타고 있단다. 이제 그도 삶의 이치를 꽤 터득했을 것 같다.

 

그에게 전화 걸면 포복절도할 컬러링을 만난다. 이은미의 '애인있어요'. 참, 경계가 없으신 분이다.

 

-국회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은 없다고 합니다. 다들 평생 금배지 달고 싶어하잖아요.

"권력은 불같은 거라서 너무 가까이 있으면 데어 죽고 너무 멀리 있으면 얼어 죽어요. 왜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할 수가 없었지요. 내가 변절하지 않는 한, 민주당으로 국회의원을 대구에서 두 번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무리수를 두지 아니한 겁니다."

 

 

-국회의원들 요즘 참 욕 많이 먹죠.

"국회의원, 정말로 힘든 직업입니다. 적당히 할 수도 있지만, 적당히 하면 자신이 용서치 못하고, 친지가 용서치 못하고, 지역사회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치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세 권력기구 중 가장 크게 발전한 게 그래도 입법부라고 생각합니다. 2006·2007년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의 각국의 정치발전 평가에서 2년 연속 한국이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의 신임도가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의정 활동 중 자전거에 무척 애착을 보였는데.

"자전거타기 활성화를 위해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했습니다. 모두가 웃더군요. 언론까지 생뚱맞다는 반응이었어요. 그런데도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홈페이지에 17대 국회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한 인상 깊은 의원이라고 저를 극찬했습니다.

 

초창기엔 수모도 많이 당했어요. 정문 경비들이 자전거를 세우게 한뒤 '신분증을 보자'고 하더라고요. 화가 나서 '자동차는 무상출입을 하는데 자전거는 못가느냐'고 하니 '자전거로는 국회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 후에 국회사무처에 얘기 해서 출입이 허용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자전거 타고 가던 중 슈퍼에 가서 막걸리 마시다가 걸인 취급도 받았다면서요.

"여의도에서 집까지 25㎞였어요. 하절기의 경우 집까지 타고 오면 땀범벅이 됩니다. 집근처 슈퍼에서 막걸리 두병을 자주 사오는데, 어느 날 호주머니에 한 병 값 뿐이라서 비닐봉투에 있는 한병을 빼내니깐 슈퍼 아주머니가 내 형색을 딱하게 생각했든지 두부 한 모를 안주로 줬습니다. 나중에 그 아주머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인사를 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는 온갖 이데올로기의 백화점이라고 합니다. 한국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의 한계를 간단하게 정리해주세요.

"건전한 사회는 좌와 우가 함께 비판하며 공존해야 합니다. 리영희 교수는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로 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진보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출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이데올로기를 기반한 정당이 없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민은 자기가 국회의원을 뽑아 놓고도 그 다음 날 비판하는 형국입니다.

 

서구에서는 노골적으로 자기 이익을 대변할 국회의원만 뽑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당원, 경제가 좋아지면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자유당이 늘어날 겁니다."

-총장에서 국회의원 된 것은 자의였습니까.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의지 없이 국회의원을 하지는 않았지요.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무리(黨)를 지어야 하는데, 대구·경북에는 같이 할 동료가 없었습니다.

 

'교육자인데 왜 교육상임위원으로 가지 않고, 국방상임위원에 갔느냐'고 많이 묻습니다. 어제 대학총장으로 있다가 나왔는데 오늘 교육정책에 비판하고 감사하는 것이 낯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국방위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 것 같습니까.

"20세기 후반에 혜성처럼 나타난 국가입니다. 광복은 엄격하게 우리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만, 그 후의 민주화운동은 우리의 힘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50년만에 OECD에 가입하는 2만불 소득국가로 진입중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놀라울 뿐입니다. 이 기초는 교육입니다. 정말 대단한 국가입니다."

-미국은 버리기도 뭣하고 안 버리기도 뭣하고,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나는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을 이해하고 미국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나를 반미주의자로 봅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도 미국, 가장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나라도 80%가 미국이라 답합니다.

 

대학생이 나라를 생각하면 미국이 싫고, 개인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미국으로 가야합니다. 미국은 전 세계와 전쟁을 해도 이길 수 있을 만한 군사력을 가졌습니다.

 

인권변호사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이 되었다고 약소국가에 대한 배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미국은 세계 제1의 국가로 유지 발전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기저입니다. 분단도, 6·25의 참전도, 미군의 주둔도 한국인을 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참 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성공도 하셨고요. 그리고 평범한 시민으로 쉽게 돌아오셨으니.

"고향으로 내려오자마자 아버지가 살던 집을 대충 고쳐 살고 있습니다. 전원주택에 비하면 무척 낡았죠. 거기서 사람을 만나는 대신 식물과 만나고 있습니다.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비롭습니다. 지난해 4월 토마토, 가지, 고추, 고구마 등을 텃밭에 심었습니다. 씨앗을 뿌리니 열매가 달려요. 50년만의 이 경험은 내게 너무나 신비롭고 감동 그 자체입니다."

-요즘 좌절한 사람들 많습니다. 특히 청년 백수 친구들에게 용기어린 한 마디 해 주시죠.

"어릴 때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고 저는 문제아였죠. 동네 어른들은 나를 두고 '박 서방네 아들은 인간되기는 틀렸어'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런데 저는 슬기롭게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어른들 보고 젊은이들에게 절대 막말을 하지마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젊은 친구들, 그리고 지금 좌절한 분들 명심하세요. 값싼 곳을 찾지 마시고 공짜를 찾지 마세요.

 

특히 젊은이의 경우 평생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방안에서만 고민말고 일단 국내라도 좋으니 죽도록 고생하며 여행부터 해보세요. 그럼 자기 앞날이 구체적으로 보일 겁니다. 또 한 가지, 일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해요. 적당히·대충대충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의 웃음은 단도직입적이었고 천진난만했다. 웃을 때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보였다. 그가 국회에서 텃밭으로 한숨에 내달릴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컬러링으로 선택하셨는데, 좀 면구스럽지 않으세요.

"아들 방에 가서 처음 들었어요. 가사도 얼마나 재미 있어요. '애인이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처음 접했을 때 이은미씨의 열창에 전율을 느끼겠더라고요. 늙어간다는 것은 사랑을 잃어가고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잃어간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박찬석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농림고를 졸업한 뒤 59년 경북대 사범대학 지리학과에 들어갔다. 67년 경북대 지리학과 대학원 석사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71년부터 2004년까지 경북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94년부터 8년간 경북대 총장에 두 번 선출된다.

 

이후 2003년 국회에 들어가 국방위 상임위원이 된다. 국회에 있는 동안 자전거로 등원을 했고 자전거 타기 활성화법안을 의원입법했다.

 

그 법안이 전국 자전거타기 붐을 조장했다. 전국자전거연합회 회장과 자전거학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로스쿨 탄생의 산파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 지으며 살고 있다.

 

대학총장에서 국회의원, 이제는 농사꾼으로…
경비원에게 온갖 수모 당하고… 슈퍼주인에겐 걸인 취급 받고…
자전거로 국회 출·퇴근하다 별일 다 겪었죠 흐흐
"어릴땐 고향 싫어 가출도 했었는데…요즘엔 고향 산청서 농사짓고 살아요"

박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