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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필 한석봉 묘 북한 개성 인근서 발견

by 연송 김환수 2011. 11. 7.

 

조선명필 한석봉 묘

북한 개성 인근서 발견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0-04-25 19:00

 

 

조선시대 명필로 유명한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묘가 그의 고향인 개성 인근에서 발견됐다.

 

 

2010.4.25일 북한의 대남 라디오 `평양방송'에 따르면 개성 고려박물관 연구사들이 최근 개성시와 인접한 황해남도 토산군 석봉리에서 한호의 묘비와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발견했다. 

 

북한 학자들이 발견한 묘비에는 `조선국 통훈대부 가평군수 증 승지 한공지묘(朝鮮國通訓大夫加平郡守贈承旨韓公之墓)'라고 돼 있다.

 

이는 생전 가평군수까지 올랐던 한호에게 사후 왕명의 출납을 맡는 승지직이 내려졌다는 뜻이다.

 

비석에는 한호가 명필로 이름을 떨쳐, 사람들이 한호의 글씨 한장을 얻으면 마치 구슬이나 옥돌을 얻은 것처럼 여겼고, 왕과 왕족들도 그의 글씨를 병풍이나 책상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감상했다는 내용이 음각돼 있다.

 

또 명나라 사신들까지 그에게 글씨를 부탁해 갖고 갈 정도로 명성이 나라 안팎으로 높았으며, 명나라 학자 왕세종이 한호의 글을 `노한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준마가 샘물로 달리는 듯하다'고 극찬한 기록도 포함돼 있다고 평양방송은 전했다.

 

방송은 "현재 개성시에는 한석봉의 필적으로 된 선죽교비와 화담 서경덕 신도비가 남아 있고, 불타버린 (개성) 남대문의 현판 글도 그의 필적인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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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조선조 서예가 한석봉 무덤 조사

 

"한석봉 무덤,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위치"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집단이 개성고려박물관 학술성원과 함께 조선조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한석봉의 무덤을 조사했다고 조선신보가 전했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13일 "한석봉의 무덤은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리 소재지의 석봉산이라고 부르는 높지 않은 야산 중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무덤무지의 흙이 많이 흘러내려 현재 높이가 1.2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조선신보는 "무덤 앞에는 높이 155㎝, 75㎝인 크고 작은 돌사람 조각상이 좌우에 2상씩 배치돼 있고 큰 돌사람 조각상들은 넘어진 상태이며, 무덤 왼쪽에는 받침돌과 비몸으로 된 높이가 167㎝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설명했다.

 

비석에는 "통훈대부(조선조 정3품 벼슬)이며 가평군수였던 한석봉의 무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무덤에서 남쪽(앞쪽)으로 약 35m 되는 곳에도 넘어진 받침돌과 비몸, 비머리가 있다"고 말했다.

 

비몸의 앞면 웃부분에는 '한석봉묘갈명'(묘갈명은 묘비명이라는 뜻)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한석봉의 출생과 생애 그리고 그의 뛰여난 서예술에 대하여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다.

 

조선신보는 "한석봉은 1543년에 출생해 1605년에 숨졌으며, 비문에는 한석봉의 이름은 한호이고 자는 경홍, 석봉은 호라고 쓰여져 있다"고 전했다.

 

고고학연구소의 리창진(44살) 실장은 "이번에 새로 조사한 한석봉의 무덤은 조선민족이 예로부터 서예분야에서도 남달리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진 우수한 민족이라는것을 보여주는 학술적의의가 큰 유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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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한석봉)

 

본관 삼화(三和) 후에 청주로 본관이 합쳐짐.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歙谷縣令)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 서예계에서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룬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한호의 부친은 한언공(韓彦恭, 1524∼1572)입니다.

 

한호의 본관은 삼화인데 후에 삼화에서 청주로 본관이 합쳐진 연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혹 그의 필명이 이런 합본(合本) 과정에서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되는데, 특히 1593년 임진왜란 때 파손된 기자묘비를 새로 세울 때 한호가 글씨를 썼던 사실은 기씨.·선우씨와 함께 기자삼성으로 공인 받은 청주 한씨들에게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합본 시기 또한 미상인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한호의 본관이 청주로 적혀있으므로 18세기 이전에 이미 합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호의 신분에 대해 궁금한 사항입니다.

 

신분을 언급할 때는 조상의 관력을 살피게 되는데, 한호의 5대조 한대기는 황해도 곡산 군수, 고조 한치명(1442∼1482)은 진사, 증조 한순손(1467∼1494)은 무과

백령첨사, 조부 한세관(1486∼1557)은 중종 때 정국원종공신으로 호조정랑 벼슬을 하였다.

 

백부 한언량( 1521∼1581)과 부친 한언공(韓彦恭, 1524∼1572)은 관직에 못나갔고다만, 백부는 시(詩)로 이름이 있었다.

 

TV 진품명품에서 한호 서첩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의 중인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은 한호, 즉 한석봉과 허준 이다.

이 두분은 중인 출신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출세를 하고 또한 역사에 그 이름이 오랫동안 남아있다고 소개한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중인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에 사용되었고 한호가 개성 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이지만 명종 연간에 사마시(진사,생원)에 합격했고 당시 경국대전에 서얼(중인)은 생원, 진사시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즉, 서얼은 과거시험 응시에도 제한을 두어, 문과응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무과와 잡과에는 응시 가능하나, 승진에 제한이 있어 6품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호의 모친 홍주 백씨(洪州 白氏, ?∼1575)는 장사랑 백옥근의 따님으로 한부, 한호, 한제, 한택4형제를 낳았고 한택을 제외하고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이 모두 생원·진사를 뽑는 사마시에 합격한 것과 그의 조상이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관력으로 가문을 이어갔음을 볼 때, 단지 한호 모친이 떡을 썰어 훈육하는 내용들을 가지고 그가 중인이라 칭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설령 중인이라 할지라도 조선시대 훌륭한 명필에게 중인이라는 표현은 걸맞는 수식어(대우)는 아니다.

 

조선후기 중인 출신들이 낮은 벼슬을 갖고 다방면에서 기여 하기도 했지만 신분상 제약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하여 많은 능력을 제대로 발휘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상의 흐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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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친필이 담긴 '석봉한호해서첩'이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고 25일 밝혔다. 2010.1.25

 

한석봉이란 호칭과 여러 일화로 친숙한 한호는 추사 김정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필로 꼽히는 인물이다.

 

석봉한호해서첩은 한호가 평소 절친했던 간이당 최립의 시문 21편을 단정한 해서로 필사한 글씨첩이며 가로 27.2㎝, 세로 36.3㎝의 상ㆍ하권 두 첩으로 구성돼 있다.

석봉한호해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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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의 유금강산기

 

 

한석봉 시첩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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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 (三和) 지명에 대하여

 

평안남도 용강 지역의 옛 지명. (소재지 : 평안남도 용강군)

 

1136년(인종 14) 서경기(西京畿)를 나누어 6현을 만들 때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의 3부곡(部曲)을 합하여 삼화현을 만들고 현령을 두었다. 그 뒤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주(黃州)의 영현으로 되었으나 충렬왕 때 현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도 그대로 따르다가 1686년(숙종 12) 도호부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삼화군(三和郡)이 되었다가 용강군에 편입되어 삼화면이 되었다. 삼화의 지명은 세 개의 부곡을 합쳤다는 데서 나온 듯하다.

 

이곳은 대동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이므로, 해안가의 광량진(廣梁鎭)은 독진(獨鎭)으로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우산(牛山)과 대당두산(大堂頭山)에는 봉수가 있어 서해안을 연결하였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의 고분이 산재되어 있는데, 쌍영총(雙楹塚)ㆍ성총(星塚)이 유명하다. 삼화는 예로부터 고려자기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용강현지(龍岡縣誌)』

『평안남도지(平安南道誌)』(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