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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근대현대 인물

조금 더 위 였습니다. 조지 워싱턴

by 연송 김환수 2011. 7. 30.

 

조지 워싱턴(1732-1789)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있던

어느 여름날

홍수가 범람하자,

물 구경을 하러 나갔더랍니다.

 

 

 

물이 넘친 정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초로(初老)의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제가 이 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저를 업어 건네주실 수 있을까요?

 

뭐, 그렇게 하시구려! 이리하여 중령은,

워싱턴의 등에 업혀,

그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노인께서도 군대에 다녀오셨나요?

네, 다녀왔지요.

 

사병이셨습니까?

장교였습니다.

 

혹시 위관급(尉官級)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보네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중령이셨군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대령이셨단 말씀이십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럼 장군이셨네요.

 

 

[중령이 당황해서]

 

노인어른, 저를 여기서 내려 주세요.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업어 건네 드리리다.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최고의 계급인 중장이셨단 말씀이세요?

 

이때 막 냇가를 다 건너게 되자,

워싱턴이 중령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을 업어 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군 중령은,

그 텁수룩한 노인이,

 

당시 미합중국의 유일한 삼성장군(三星將軍)이던,

'조지 워싱턴'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군 계급이 중장에서 국가군통수 대원수(별6개)로 3계급 특진,

추서되었다. 

 

우리는,

흔히 막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혹은,

 

차림새가조금 초라하다거나,

몸에 걸친 의복이 다소 남루하다고 해서,

사람을 낮춰보는 우(愚)를 범하기 쉽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말해 주는 일화(逸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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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당시만 해도 미군의 최고위 계급은 별이 두 개였다.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도 처음엔 별 두 개를 달았으나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별 하나가 추가됐다. 요즘으로 치면 중장으로 진급한 셈이다.

미국에서 대장 계급이 생겨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다. 군 서열 1위인 참모총장(합참의장 보직은 한국전쟁 당시 신설)에게만 별 넷을 달아줬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 계급장이어서 퇴임하면 원래 계급인 별 두 개로 되돌아갔다. 아무도 워싱턴의 별 세 개에 근접하지 못했다.

계급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때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별 다섯 개, 소위 '원수'가 나오자 미국도 이에 맞춰야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조지 마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전쟁 주역들에게 '별 다섯 개(the general of the Army)'를 줬다. 이 바람에 워싱턴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

워싱턴은 그러나 훗날 화려하게 재기한다. 1976년 7월4일부로 '조지 워싱턴 중장'은 '별 여섯 개(the general of the Armies)'의 이른바 '대원수'로 특진한 것.

연방 상.하원이 조지 워싱턴 특진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백악관에 회부하자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은 지체없이 서명해 법안이 발효됐다.

법안은 2개 조항으로 짧았으나 시사하는 바는 아주 컸다.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에도 워싱턴은 미군의 최고 선임자라고 못박았다. 그래서 워싱턴을 일컬어 '항상 영원히(always and forever)' 현역이라고 부른다. 이 규정 때문에 미국에선 어느 누구도 별 여섯 개는 달 수 없게 됐다.

200년 전 죽은 사람을 왜 굳이 현역으로 남게 했을까. 맥아더의 망령을 잠재우기 위해서란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미국은 지상최대의 상륙작전을 펴 본토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맥아더를 6성 장군으로 승진시켜 작전을 총괄케 할 방침이었지만 원폭이 투하돼 무산됐다.

1950년대 중반 맥아더는 다시 별 여섯 개를 달 기회가 있었다. 연방의회에 그의 승진법안이 상정됐으나 맥아더 본인이 적극 고사해 흐지부지됐다. 마지막으로 그의 승진을 추진한 대통령은 케네디. 그러나 도중 암살당하는 바람에 '맥아더 대원수' 프로젝트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도 먼 훗날 혹시 맥아더를 포함해 다른 장군들에게도 별 여섯 개를 추서하자는 얘기가 나올까봐 의회는 워싱턴에 '항상 영원히' 군 최고 선임자란 타이틀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독재왕권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국 대통령'의 이미지를 훼손시키지 않기위해서 내린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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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으로,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미국인들은 그가 미국의 건국과 혁명의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1775년 대륙 회의에서 워싱턴은 미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영국 세력을 보스턴에서 축출하였고, 뉴욕을 잃는 대신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를 재탈환하기도 하였다. 그의 전략으로 독립군은 사라토가와 요크타운에서 영국의 주요 부대 둘을 잡을 수 있었다.

 

대륙 회의와 식민주들, 그리고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그는 사실상 와해와 실패의 위협 속에서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같은 국가와 결속력 없는 군대를 같이 통솔하고 있었다. 1783년에 전쟁이 종결된 이후,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루머를 듣고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이에 왕은 "만약 워싱턴이 그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실제로 그러하였으며, 버논 산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당시에 연합 규약에 대한 대체적인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1787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가 열렸었는데 워싱턴은 이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연방정부 수립 이후엔 새 정부의 각 부서들의 관례와 목적 등의 기초를 다잡았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진 현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1793년의 일방적인 중립 선언으로 그는 해외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겠다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전쟁으로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이에 따라 영국과의 약 십 년 간의 평화가 1795년에 체결된 제이 조약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제퍼슨을 위시하는 민주 공화당의 집중적인 반대로부터 이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연방당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계획을 지지하는 등 사실상 정신적인 지주였다.

 

워싱턴의 퇴임 연설은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주제로 하는 기본 입문서와 같은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워싱턴은 1799년에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어린 시절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에 버지니아 주의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에 소재한 오늘날의 콜로니얼 비치 인근에서 어거스틴 워싱턴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 볼 워싱턴 사이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첫째 부인인 제인 버틀러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이들 중 둘은 어려서 죽고 둘(대략 1718년 즈음에 태어난 로렌스와 1720년 즈음에 태어난 어거스틴)은 생존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지는 셋째 아이였으며 이들보다 한참 어렸다.

 

여섯 살 되던 해에 페리 농장에서 스태포드 카운티로 이주를 하면서 조지는 아버지와 맏형으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워싱턴의 조상은 영국 출신이었다. 증조부인 존 워싱턴은 1657년에 버지니아로 이주했다.

 

버지니아에서의 상품 작물로서의 담배의 성장은 이를 재배하기 위해 수입된 노예의 수를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워싱턴이 태어났을 즈음에 식민지 인구의 절반은 흑인이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아프리카 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유년 시절에 워싱턴은 측량 기사로 활동하였는데, 이를 통해 버지니아 식민지의 지형에 대한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맏형이 유력한 가문이었던 페어팩스 가문의 여자와 결혼함에 따라 조지는 당시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토마스 페어팩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749년 늦은 7월에 포토맥 강가를 끼고 버지니아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짐에 따라, 당시 17세였던 조지는 첫 번째 측량 기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직책은 의심할 여지 없이 페어팩스 경과 그의 사촌이었던 윌리엄 페어팩스(그 땅의 소유자)의 명령 하에 보장되었다.

 

활동

 

워싱턴은 농장주로서 활동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역사가들은 농장주의 개념을 2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자로 규정하고 있다. 1748년, 그는 블루 릿지의 서쪽에 위치한 페어팩스 경의 토지를 측량하는 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749년에는 처음으로 공직에 임명되었는데, 새로 생긴 컬페퍼 카운티의 측량기사로서 였다.

 

배다른 형제인 로렌스 워싱턴을 통해, 그는 오하이오 컴패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서부의 땅을 개척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1751년에 조지와 로렌스는 바베이도스의 부시 힐 하우스에 머무르면서 로렌스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했다. 이는 조지 워싱턴이 오늘날 미국 지역의 바깥을 나가본 유일한 사건이었다.

 

1752년에 로렌스가 죽고 난 이후에 조지는 로렌스가 소유한 부동산의 일부를 상속 받았고 로렌스의 직업이었던 식민지의 부관 임무 중의 일부를 떠맡았다.

 

1752년 말, 버지니아의 새 주지사였던 로버트 딘위디는 군대를 네 지역으로 개편하여 조지를 한 지역의 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조지가 갖고 있던 유일한 자격은 죽은 형이자 부관인 로렌스의 동생이라는 점과 조지의 열정뿐이었다.

 

조지는 1752년에 버지니아 군대의 부관 참모로 임명되었는데, 스무 살의 나이로 워싱턴 소령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1753년 12월, 워싱턴은 딘위디 주지사의 요청으로 캐나다에 소재한 프랑스인들에게 영국의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오하이오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워싱턴은 프랑스 군의 힘과 사기를 가늠하였으며 오늘날의 펜실베니아에 소재한 워터포드 지역의 프랑스 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였다.

 

메시지는 프랑스 인들이 오하이오 주에서 손을 떼도록 요청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두 식민 세력들의 힘이 전국적인 분쟁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보고는 북미 대륙과 유럽 지역 모두 널리 읽혔다.

 

결혼

 

마운트 버넌 농장

 

그리고 그는 21세였던 1753년에 버지니아 민병대에 입대하였고, 뒤에 영국군 정규군에 편성되어 프랑스-인디언전쟁에 참전하여 싸웠다.

 

참전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마운트 버넌 농장으로 돌아간 그는 이때 그의 부인이 될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의 미망인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를 만나게 되었다.

 

1759년 마사와의 결혼으로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땅이 그의 재산이 되어 그는 토지만 2만 2,000에이커나 되는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

 

결혼 전 그는 자신의 친구의 아내였던 샐리 패어팩스와 불륜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뒤에도 그는 샐리와의 관계를 공공연히 발설하여 문제가 되었고, 샐리가 과부가 되어 영국으로 떠난 뒤에는 다시 돌아올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독립전쟁 참가

 

마운트버넌의 농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그의 타고난 실력인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남을 이끌어가는 데에 훌륭한 장점을 가진 성격을 이용해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성취하게 하였다.

 

그 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재임기간

 

워싱턴의 공식 포스터

 

취임

 

그는 1787년에 버지니아주 대표가 되고, 약 2년 후에 치러진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당선되어 취임된다.

 

취임 후 그는 185cm의 큰 키에 당당한 체구로 정부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돋보였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끝낸 영웅이었으나 군인으로서 그는 그의 인품만큼 빛을 발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첫 대통령으로서, 특히 권좌에서 깨끗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같은 대통령

 

미국이 탄생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했고, 대통령인 자신도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하여 행동하였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때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초기에 그는 그에 대한 칭호로 왕에게 붙일 수 있는 전하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다른나라 왕처럼 위엄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했다.

 

또, 다른 나라 왕들이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듯이 그도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였고, 유럽의 왕실을 본받아 한없이 많은 접견회와 파티를 열었고, 영국의 왕처럼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였고, 국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듯 화려한 축하행사로 그를 환영했다.

 

이러한 그의 제왕과 같은 언행으로 새로 태어난 나라 미국의 새로운 직책인 대통령 지위는 처음부터 강력해졌다. 즉 그는 그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과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연방제와 반연방제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 이후 약 10년간은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해밀턴이 이끄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려는 연방주의자와 제퍼슨이 이끄는 주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려는 반연방주의자로 분열과 정치싸움이 심한 때였다.

 

그때 그는 내각에 두 파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균형을 잡아 자칫하면 유혈충돌로들까지 번질 수 있는 사태를 조정했는가 하면 수천 명의 농민들이 납세거부운동으로 일으킨 위스키반란을 단호하게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해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등 억압과 조정을 정교하게 배합하여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편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터지자, 중립선언을 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프랑스는 젊은 혁명가 에드몽 쥬네를 파견해서 워싱턴과 대립하는등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퇴임

 

1797년 두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직에 사망할 때까지 영원히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가 3번씩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2번의 임기만을 하였고,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아 있다.

 

이 고별사에서는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민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하려고 했다.

 

죽음

 

임기를 마친 그는 미련없이 자신의 사저가 있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친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깨고, 수정헌법 22조에 3선 출마금지, 타인의 임기로 2년 이상 대통령직에 봉직한 사람은 2번 이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할 때까지 철칙처럼 지켜온 절제의 미덕이었다.

 

(임기는 4년으로, 최대 8년까지만 가능) 당연히 수정헌법 22조에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은 워싱턴의 전통을 계승, 강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자, 떠날 때에는 떠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이고, 귀족정치를 지지하고 또 왕처럼 행동하여 정치를 결코 대중화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군 계급이 중장에서 국가군통수 대원수로 3계급 진급, 추서되었다.

 

업적과 평가

 

워싱턴의 동상

 

그는 그의 타고난 능력인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남을 이끌어가는 데에 훌륭한 장점을 지녔다.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성취했다.

 

그의 제왕과 같은 언행으로 새로 태어난 나라, 미국의 새로운 직책인 대통령은 처음부터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에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하고, 그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며 떠나는 때를 아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이었으며,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