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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겨둔 금화 찾아나선 일본

by 연송 김환수 2011. 8. 2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겨둔

금화 찾아나선 일본

 

한겨레 | 입력 2011.08.23 12:20

 

 

[한겨레]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겼다는 천문학적 보물이야기는 일본의 3대 매장금 보물 전설의 하나로 구전돼 오고 있다.

 

히데요시가 1598년 어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 조선침략의 군자금으로 쓴 뒤 오사카 성에 보관하고 있던 천문학적인 금화와 금괴를 효고현 다다은동광산의 21곳 갱도 안에 매장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그의 가신의 유서 등에 남아 있다.

 

히데요시의 보물은 금화 4억5천만냥과 금 3만관(1관은 3.75㎏)로 현재 시가로 따져서 일본 연간 국가예산의 600배 이상의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알려져 있다. 히데요시의 재력을 과장한 기록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최소한 수조엔은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효고현 교육위원회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물이 매장돼 있는 장소로 기록된 '다다은동광산'의 한 갱도에 무인 탐사 로봇을 들여보내 보물찾기에 나섰다고 < 아사히신문 > 이 22일 보도했다.

 

이번 조사는 공식적으론 광산의 실태조사가 주목이나 전설에 관심이 많은 한 전문가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자치단체가 드디어 매장 금의 로망에 손을 내는 것인가. 효고현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다은동광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할광산으로 개발했으나 2000개의 갱도 대부분이 붕괴 위험성 있어 1971년 폐광된 이후 그동안 내부 탐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 탐사대상은 인근 고속도로 교각건설에 따른 조사과정에서 발견한 갱도로 히데요시 시절 채굴된 갱도의 이름이 남아 있는 지구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7월 사전 조사에서 이 갱도는 입구의 높이는 0.9m, 폭 0.6m, 높이 약 6m로 확인됐다. 탐사에 사용되는 로봇은 길이 60㎝로 경사각 등을 잴 수 있는 소형센서와 카메라가 부착돼 있으며, 갱도 입구에서 원격조작할 수 있다.         김도형 선임기자/트위터 @ai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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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풍신수길 (とよとみのひでよし) 

 

1537년 3월 17일{덴분 5년 음력 1월 1일(153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

 

일본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겸 다이묘이다. 그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이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尾張国) 아이치 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기면서 오다 가문 안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죽자 주고쿠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 후, 오사카 성(大坂城)을 쌓았으며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태합검지(太閤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라는 정책을 펴 국내를 안정시켰지만, 조선 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오도 범했다.

 

임진왜란 중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죽여 후계를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주었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음을 맞이하였고, 히데요리의 보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필두로 한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위임하였다.

 

스노마타 성(墨俣城), 이시가키 산성(石垣山城)을 하룻밤에 완성했다는 이야기와, 가나가사키(金ヶ崎)에서의 퇴각에 있어 후위부대를 맡은 일, 다카마쓰 성 수공(高松城の水攻め) 등 그의 재능을 살린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고, 농민 출신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생애는〈센고쿠 제일의 출세가〉라는 정평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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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난 日지자체, 히데요시가 묻어놓았다는 '金의 로망' 찾아…

김형원 기자 won@chosun.com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조선일보DB
 

재정난에 허덕이는 일본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전설로 내려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보물을 찾아 나섰다.

 

22일 아사히(朝日)신문은 효고현 교육위원회가 23일부터 히데요시의 매장금 전설이 서린 ‘보물산’ 조사에 나선다고 보도했다.

 

효고현 교육위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물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다다은동 광산(多田銀銅山)’ 갱도에 무인 탐사로봇까지 밀어 넣어 보물을 찾을 계획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세기 일본 전국을 평정한 인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에 침략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 막혀 고전하던 중 교토에서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으면 남게 될 어린 아들이 걱정이었다. 임종이 임박한 무렵에는 가신들을 불러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히데요시 가신의 유서에 따르면 1598년 6월 히데요시는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 오사카성에 남아있던 엄청난 양의 금화와 금괴를 다다은동 광산의 21개 갱도에 매장했다.

 

일부는 조선침략의 군자금으로 쓰기도 했지만, 그의 보물은 금화 4억500만냥과 금 3만관(11만2500kg)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값이 크게 오른 올해 시세로 따지면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600배에 이른다고 신문은 전했다. 매장량을 두고 히데요시의 재력을 과장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못해도 최소 시가 수조엔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다다은동 광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발한 광산이다. 그러나 2000개의 갱도 대부분이 붕괴 위험성 있어 1971년 폐광된 이후 내부 탐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에 탐사하게 될 갱도는 고속도로 교각건설 중 발견됐다. 16세기 당시 채굴하던 광산 지구와 가까워 히데요시의 금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효고현은 보고 있다.

 

마츠에 공업 고등전문학교의 큐우마 히데키(久間英樹) 교수가 개발한 길이 약 60cm의 탐사 로봇이 이번 탐사에 동원된다. 이 로봇은 경사각 등을 잴 수 있는 소형센서와 카메라를 갖췄다. 갱도 입구에서 원격조작이 가능한 무인 로봇이다.

 

 ▲ 아사히신문 캡처

 

매장금 전설에 관심이 높은 한 전문가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지자체가 드디어 매장금의 로망에 손을 대는 것”이라면서 “효고현이 갑부가 되는 날이 가까워졌는지 모른다”면서 흥분했다.

 

현 탐사 관계자는 “다다은동 광산은 역사적인 산업 유산”이라면서 “로봇의 힘을 빌려 매장금 전설을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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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전투와 도요토미 씨 멸문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 씨에 위협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측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 성에 남겨둔 막대한 도요토미 씨의 재산을 최대한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

 

우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도요토미 씨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긴키 지역의 신사, 사찰의 수리와 새로운 신사, 사찰의 조영을 건의하였다.

 

히데요리는 이를 수락하여 긴키 일원의 신사와 사찰의 수리 복구와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그 결과 상당한 자금이 소모되었다.

 

특히 교토 히가시야마의 호코지(方広寺) 대불전의 수리 복구 비용에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 1614년 4월 호코지 대불전의 수리가 완성되자 히데요리의 가신인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에게 완성 소식을 알리고 첫 공양의 거행을 알렸지만, 이에야스는 대불전의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법종 명문의 일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국가는 편안하고, 군주와 신하는 풍요롭고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하길 기원합니다. (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102][103] ”

 

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덴의 말을 바탕으로 이 명문의 내용이 도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이에야스 (家康)의 이름 사이에 안(安)이라는 글자를 넣어 갈라놓은 것이 이에야스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1614년 10월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자신은 총지휘관이 되어 오사카 성 부근의 덴노지에 진을 치고 히데요리를 포위하였다.

 

 

오사카 성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 일명 풍신수길이 3년의 공사를 걸쳐서 완성한 오사카성은 그 당시의 그의 권력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성의 정문을 들어서면 성인의 키를 넘는 거대한 바위로 성의 벽을 만든것을 볼 수있다.
   

같이 출전한 히데타다는 오사카 성을 총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지구전을 통해 히데요리를 굴복시키려 했던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11월 19일 이에야스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의 외성 공격으로 첫 공격이 시작되긴 했으나, 11월 26일에 이마후쿠와 시기노에서 크게 충돌한 것 이외에는 작은 충돌이나 기습전만 반복되다가 12월에서야 두 차례의 교섭 끝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대신 이에야스는 혼마루만을 남기고 오사카 성의 바깥 쪽 해자를 매립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공사를 맡은 혼다 마사노부·마사즈미 부자에게 안쪽 해자와 망루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고, 히데요리의 사신이 항의를 위해 찾아올 때마다 혼다 부자는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면서 해자를 모두 매립하였다.

 

그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야마토 국이나 이세 국의 다이묘 자리로 옮겨가도록 명령하여 히데요리를 자극하여, 히데요리 측이 1615년 4월 교토에 방화를 한 것을 빌미로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병력과 물자 면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 비해 월등히 유리하였으나, 초반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고전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가 죽기를 각오 하고 이에야스 본진까지 오자 이에야스는 나는 죽었다 할복하겠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가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성내의 내관인 다이도코로가시라 등과 내통하고, 손녀인 센히메를 풀어주도록 압박하였다.

 

결국 5월 8일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도노가 자살함으로서 도요토미 씨는 대가 끊기고 말았으며 이에야스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자결터 豊臣秀賴 (풍신수뢰)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후 지은 성이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도요토미가를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곳이 바로 이 오사카성이다.

 

오사카성은 두 겹의 호수(안쪽 호수, 바깥 호수)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이 덕분에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의 공격을 1년 가까이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자 이에야스는 '우리의 체면을 위해 바깥 호수만 메우게 해준다면 물러가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이를 히데요리가 받아들이자 밤사이 안팎의 호수를 다 메우고 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오사카성의 지금 모습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쳐 지은 성으로 이후 몇 차례의 재건과 소실을 반복해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