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유출·수난의 민족
문화유산을 지키다…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 이충렬 지음 / 김영사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
조선 인물 풍속화의 진수인 신윤복의 ‘혜원풍속도’(국보 135호), 조선 세종 때 엮은 음운서인 ‘동국정운’(국보 71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들이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12건, 보물 10건,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해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소장 문화재 면면을 보면 사립미술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신윤복 등 조선시대 주요 화가들의 서화, 서책, 고려 및 조선의 자기, 석탑과 불상 등 소장품 중에는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이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소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선각자의 열정과 우리 문화재에 소명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 이충렬은 한반도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더기로 유출되던 일제강점기 때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삶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고증을 바탕으로 간송의 삶과 시대를 되살려 냈다.
간송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기 위해 일부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간송의 생애와 시대상황, 문화재의 가치 등을 왜곡하거나 훼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간송의 큰아들 전성우 간송미술관장의 공인과 감수까지 받았다.
책에는 간송이 전국 각지와 일본까지 오가며 문화재들을 수집하게 된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전형필은 귀국 후 당대 최고 서예가이자 고서화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지도를 받아가며 30년대부터 우리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다.
1928년 대학재학 시절 방학중의 간송 1927년 조도전 대학 재학시절
와세다대학 [早稲田大学(조도전대학), Waseda University]
스물 넷에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을 바탕으로 서화와 서책, 도자기, 석조물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사들였다.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품은 값을 따지지 않았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2만원에 사들였고, 일본에 유출됐던 신윤복의 풍속도 ‘혜원전신첩’은 2만5000원에 되사왔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국 귀족출신 변호사가 20년 가까이 모은 국보급이 포함된 고려청자 20점은 40만원에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참기름병으로 쓰였던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은 1만5000원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1만원에 각각 사들였다.
그는 특히 일제 말기인 43년 경북 안동에서 사들인 훈민정음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일제가 한글을 탄압하던 시기여서 꼭꼭 숨겨뒀다 해방이 된 후에야 훈민정음을 공개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녔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어 지켰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문화재 수집에 많은 재산을 들인 데다 말년에 자신이 인수한 보성중고등학교의 빚을 갚느라 생활이 어려워 집과 땅을 팔았지만 소장품들은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38년 서울 성북동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66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 대표적인 문화재 미술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저자는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고,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고 적었다.
책에는 우리 문화재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유물 수집에 매진해 온 선각자 간송의 열정과 사명감이 배어 있다. 또 간송 후손들의 협조를 얻어 구한 100여장의 귀한 문화재 도판 등이 실려 있어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2010.05.06 17:34] 국민일보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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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입장료는 간송의 유지에 따라 무료이며,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까지 입니다.
개관은 연 2회이며 5월초부터 6월 1일, 10월초부터 말까지입니다.연락처 : 02) 762 - 0442
간송미술관 (하얀건물)
완공된 보화각 (1938)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단오풍정(端午風情: 단오날 풍경)
야금모행 (夜禁冒行: 심야에 금지된 나들이)
연소답청(年少踏靑 : 젊은이들의 봄나들이)
월하정인(月下情人 : 달 아래 두 연인)
백자박산향로 (보물 제238호)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제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제65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높이 42.1cm 밑지름 24.5cm)
천 마리 학이 날다
"2만 원에 사겠소!"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조선 청년의 말 한 마디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쌀 한 가마니가 16원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돈이 있는 조선 청년이라지만, 그 값에는 설마 살 수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제시한 금액이었다. 제대로 허를 찔린 마에다는 낭패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골동품상 마에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그 조선 청년은 짐작하다시피, 간송이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거금으로 그가 사들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얀 꽃구름이 흐르는 옥빛 가득한 하늘을 수십 마리의 학이 날개를 활짝 피며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고려 상감청자 한 점이었다. 고려청자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은 이렇게 하여 간송의 수집품이 되었다. 한 '조선 애송이' 에게 자존심을 다친 것은 마에다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탐냈으나 엄청난 가격 때문에 포기한 바 있고, 일본 굴지의 수집가 중 한 사람인 무라카미는 흥정이 끝난 뒤에 간송을 찾아와 자신이 4만 원에 사겠으니 되팔라 하기도 하였다. 간송은 찾아온 무라카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청자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언제든 원금에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없다는 것쯤은 무라카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제294호 높이 42.3.cm 밑지름 13.3cm)
조선백자로 하나의 작품에 붉은색 안료인 진사, 검은색 안료인 철사, 푸른색 안료인 청화를
함께 곁들여 장식한 매우 이례적인 작품
청자압형수적 (국보 제74호) 괴산외사리석조부도 (보물 제579호) 세종 28년 (1446년) 9월에 출판된,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는 제값을 받아야 한다 간송은 파는 사람이 부른 가격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자진해서 지불하기도 했다. 좋은 물건, 진귀한 물건을 만났을 때는 고미술상이나 파는 사람에게 가격을 묻지도 않고 알아서 그 가치에 합당한 충분한 가격을 지불했다. 간송이 '훈민정음' 을 소장하게 될 때의 일이다. 1942년 늦여름, 한남서림에서 창밖을 보던 그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는 이름난 골동품 상인이 들어왔다.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며 알아보니, 사연인즉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 는 것이었다.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 이라고 했다. 조선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후에 출판한 이'훈민정음' 은 당시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담긴 한글을 말살하려 했기에, 만약 그 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총독부의 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1만 1,000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1만 원을 전하고 1,000원을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귀한 물건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다.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간송은 '훈민정음' 이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무척 조심했다.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과 잡지를 모두 폐간하고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잡아 가둔 일제였다. 만일 조선총독부가 알게 된다면 '훈민정음' 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둘러 피난을 가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훈민정음' 만은 가방에 넣고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사이에 끼워 놓고 자는 등 잠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간송의 삶, 비밀의 수장고가 열린다!
왜 간송은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부었는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가 이 땅에 남긴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0년의 연구조사,
100여 장의 원색사진, 간송가의 도판 협조와 감수로 마침내 세상에 나오는 간송 전형필 일대기!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를 복원하고, 위창 오세창에서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을 후원하며,
암흑의 식민지 조선에 탐미와 매혹의 근대예술을 꽃피운 간송.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수장한 서화 전적, 골동들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 간송미술관. 그는 한국의 미를 발굴하고 지킨 문화 국부(國父)였다!
세기의 보물 《훈민정음》,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천학매병’, 겸재, 현재, 단원, 혜원, 오원, 추사 등 거장의 걸작 100점씩을 수집하기까지! 천하 명품들에 숨겨진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출처] <간송 전형필> (김영사 네이버 카페) |작성자 김영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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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존의 대가를 만나다
‘훈민정음’ 집 열채 값으로 구입, 감탄스런 간송의 문화재 감식안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전시가 열리는 봄, 가을이면 전국이 들썩인다. 한두 시간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기본. 고미술품을 보기 위한 기다림은 오히려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간송미술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 우리 예술의 명품과 진품이 소장돼 있다. 이를 보기 위해 매년 10만명 이상이 성북동 주변에 몰려드는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은 질적인 면에서 명실공히 국내 최고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국보 12건, 보물 10건 등 22건의 국가 지정문화재와 뜰에 전시된 석탑, 부도, 불상 등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이 있다. 이곳이 바로 ‘민족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간 미술관이 어떻게 이런 대형 문화재를 모아 왔을까. 국내 최초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조선 제일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삶과 문화재 수집 이야기 ‘간송 전형필’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뤘다.
이 책은 간송 전형필의 선각자적이고 감동적인 삶에 대한 평전이다. 일제강점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간송의 삶은 책으로 감동을 이어받을 만큼 생생하다.
어린 시절부터 외종형인 월탄 박종화 등과 가까이 지내며 책 수집에 열정적이었던 전형필은 독립투사이자 시대의 감식안이었던 오세창을 만나면서 삶의 큰 전기를 마련한다.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의 제자가 되면서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얻고 문화재 수집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된다.
일본에 유출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파격적인 가격에 되사왔다. 심사정이 타계하기 전해인 1768년 62세 때 그린 818센티미터의 대작 ‘촉잔도’는 보존상태가 나빴지만 거금을 주고 사왔다.
청자 가운데 최고의 매병으로 꼽히는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수장한 것은 1945년으로 간송의 나이 30세 때다.
1943년 ‘훈민정음’을 입수한 것은 특히 극적이다. ‘훈민정음’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당시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 발명품이자 창제 동기가 분명히 알려진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숨은 노력이 컸다.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에 많은 재산을 들인 데다 말년에 자신이 인수한 보성중고등학교의 빚을 갚느라 쪼들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집과 땅은 팔았지만, 문화유산은 모두 지켰다.
이충렬 지음. 김영사. 1만8천원
2010-05-07 오후 12:45:36 게재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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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은 간송미술관을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입니다.
간송은 스물네살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안일하게 사는 길을 버리고 일제치하에서 스승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민족을 혼과얼이랄수있는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는 길로 접어듭니다.
그당시 많은 유물들이 일본으로 팔려갔지만 간송은 찾아와야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물건은 값을 따지지않고 이땅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알고있는 신윤복의 미인도, 세기의 보물인 훈민정음등 간송이 지켜낸 수장품들은 질적인면에서 볼때 국내 국,공, 사립을 불문 명실공히 최고이며
이는 단순히 돈이있다고 할수있는일이 아니라 예술품에 대한 심미안과 나라의 혼과 정신을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열정이 없이는 오래할수 없는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일제치하에서 이런일을 했다는게 더 대단한것 같습니다.
간송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대말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면 명품위주로 수집했기에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 미술사를 서술할수있을 정도랍니다.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뒤 자신은 미술관 근처의 빈집에 숨어 매일 미술관을 훔쳐보며 유물들이 북한으로 옮겨질까 노심초사했답니다.
피난할때도 훈민정음은 품속에 품고자면서 지켜냈지요..
광복이되자 예전처럼 수집하지 않았는데요..누가 수집해도 우리나라에 있을것이기 때문이라했답니다.
독립된 나라가 된것이지요..
쉰일곱 아까운나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예술품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던 그시절, 탁월한 심미안으로 일제강점기 절망의 시대에 조선의 국보와 혼을 지킨 간송 전형필
그가 없었다면 우린 우리의 보물들을 보기위해 다른나라로 여행을 가야했을지도.... [출처] 간송 전형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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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全鎣弼)에 대하여
1906년∼1962년.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대학 재학 시절 간송 (1928년) 보화각에서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바라보는 간송
증조 때부터 서울 배우개(지금의 서울 종로4가) 중심의 종로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이다.
주) 10만석은 현재의 쌀 20만가마, 한가마(80kg)에 20만원으로 계산하면 400억 정도의
가치로 당시의 시세는 더 높다고 봅니다.
쌀 한석(섬)은 대두 10말이며 지금의 쌀 2가마에 해당됨(한가마는 대두 5말, 소두 10말)
1. 사립박물관 보화각 설립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식민통치 아래 말살되어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을 인멸되지 않게 일당(一堂)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문화재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2. 서화수집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郞)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藍)의 경지로 향상시켜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화성(畵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선(鄭歚)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한 것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자료인 중국 역대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3. 문헌자료 수집
문헌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4. 교육사업과 미술연구소 설립
그리고 인재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 ∼19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피촉(被囑)되기도 하였으나(1954),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살펴보는 만년의 간송
그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놓은 연구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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