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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국내지폐,우표

좌이박 신 천원 및 조선은행 무 백원

by 연송 김환수 2011. 6. 14.

지인께서 보내주신 지폐 2장 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런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스캔으로 멋지게 올려야 하는데

디카로 찍었더니 제 모습이 잘 안나옵니다.

 

 

물품명 : 한국은행 신 천원권 (일명 좌이박 신천원, 중앙인 천원)

발   행 : 1952년10월10일

크   기 : 156 x 66mm  /  4285년(1952년) : 1~47, 4286년 : 48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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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앙인 천원 위폐 준미사용 (화폐상 판매가 15,000원) 입니다.
있을수 없는 번호가 찍혀 있으며 진폐와 구분이 안될정도로 정교하게

아주 잘 만들어진 위폐입니다. (재질, 도안, 인쇄 좋다고 해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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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명 :  조선은행 무(戊)백원  / 백색지 / 수노인상

발   행 : 1947년 6월 3일

크   기 : 162 x 93mm  /  기호 32A~48A  (* 황색지 기호 10A~31A) 

 

1945년 8월에 을(乙) 100원권이 최초로 발행되었고, 10월 20일에는

을(乙) 1원권, 12월 10일에는 병(丙)100원권과 을(乙) 10원권이 각각

발행되었으며 이후에 모든 은행권 인쇄는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가

전담하였다.

 

조선 독립 이후에 발행되어 지폐 상부의 문양이 일본의 오동문양

이 아니라 무궁화 꽃을 상징문양으로 삼았다는데 의미가 크다.

 

 

    조선은행권 개(改) 백원(1938.12. 1) 동엽(桐葉, 오동나무잎)문양

 

조선은행권에는 1914년 처음발행된 금권 백원을 제외한 모든 권종에

하나같이 수노인상 도안이 들어가 있다.

 

수노인은 일본의 칠복신 중에서 장수를 뜻하는 신인데 일본의 민간

신앙에서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이 수노인상을 김윤식으로 잘못 표기한 곳도 많은데 도안의 생김새가 상당히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총독부의 고시 사항을 찾아 보면 1914년 (대정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569호 ‘조선은행1원권의 발행 고시’를 보면 수노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윤식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일본인 오오교우요시하루(大橋義春)의 ‘일본지폐 대계도감’에 조선

은행권의 수노인상은 김윤식의 초상을 모델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은행권의 인물은 수노인이다. 하지만

수노인의 도안은 김윤식의 초상화를 보고 그렸기에 김윤식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지만 수노인을 그린다고 그렸으니 수노인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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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 1835~1922]

 

 

본관 청풍(淸風). 자 순경(洵卿). 호 운양(雲養). 1874년(고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청(淸)나라 톈진[天津]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군란이 평정된 뒤에 신설된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과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의 협판(協辦)이 되고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겸하여 강화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원군으로 김옥균(金玉均) 일파를 제거, 병조판서가 되고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자 1885년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처리하였다.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민영익(閔泳翊)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면천(沔川)에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시작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외무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받고, 이듬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0년 후인 1907년 특사로 풀려났다.

 

1910년 대제학에 발탁되고 한일병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으나, 흥사단(興士團) ·대동학회(大東學會) ·기호학회(畿湖學會)를 조직하고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나철(羅喆)을 원조, 그 교도가 되어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한국 독립의 청원서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제출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고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한말의 이름높은 석학(碩學)이자 문장가로 일본 학사원의 회원이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문집에 《운양집(雲養集)》, 저서에 《천진담초(天津談草)》 《음청사(陰晴史)》 등이 있다.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

 

        

 

187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황해도 암행어사,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됐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1908년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인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소극적인 반대를 표명했다.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보냈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 간 투옥되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5세의 고령임을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1916년 박제순의 뒤를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것 외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윤식 사망 후에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코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