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부부 결혼 60년…
그 세대의 사랑과 전쟁
김종필(金鍾泌·85) 전 국무총리 부부가 15일 결혼 60년을 맞았다.
김 전 총리와 세 살 아래인 박영옥(朴榮玉·82) 여사는 1951년 1·4후퇴의 그 참담한 전선(戰線)에서 결혼했다.
결혼 60년이면 회혼(回婚)이다. 지금 회혼을 맞는 부부들 모두가 전쟁통에 인연을 맺은 것이지만, 1·4후퇴 60년인 이 시기에 듣는 김 전 총리 부부의 이야기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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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전쟁발발과 첫 만남
박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형의 딸이다. 김 전 총리가 첫 만남을 회고했다. "당시 박정희 소령(실제로는 문관)이 국수를 좋아했어요.
우리 젊은 장교들을 불러서 국수를 만들어줬어. 1950년 6·25전쟁 직전 어느 날도 박 소령 관사에서 국수를 먹는데, 못 보던 여자가 왔다갔다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박 소령이) '저거 내 조카딸인데 국민학교 선생하고 있지' 하시데. 부끄러우니까 부엌으로만 가고 장교들 앉은 쪽으로는 안 와. 그때 처음 봤지요."
전쟁이 터졌다. 국군은 허무하게 무너져 낙동강 전선에 마지막 보루를 만들고 있었다. 대구역에 적의 120mm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국군은 대구의 한 여관을 정보국 장교 숙소로 사용했다.
어느 날 당시 중위였던 김 전 총리를 한 여자가 찾아왔다. "'김 중위'가 누구냐고 묻기에 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박 소령(50년 6월 28일 소령으로 공식복귀)이 '조카딸인 박영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김 중위를 찾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따라가 보니 요도 없이 홑이불 한 장을 쓴 박 여사의 몸이 고열로 끓고 있었다. 말라리아였다. "박종규 일등중사(후에 경호실장)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사 구해오라고 했지. 의사가 약을 먹이니 효과가 있었어."
얼마 후 박 여사가 친구들을 데리고 김 중위를 찾아왔다. 김 중위는 그들에게 비스킷, 빵 등이 들어 있는 미국 야전식을 대접했다. 박 여사는 며칠 걸러 한 번씩 찾아왔고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당시 느낌이 어땠냐"는 물음에 김 전 총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쏠리더군."
어느 날 박정희 중령(소령에서 진급)이 연병장으로 김 중위를 불러냈다. "내 조카딸 어때?" 단도직입이었다. "좋게 봤습니다" 하니 "그래? 빠르긴 빠르구나"는 답이 돌아왔다.
박 중령은 "잘생기진 못했지만 기질은 좋은 여인이다. 데리고 갈 생각 없나?" 하고 몰아붙였다. 김 중위는 그때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지내봐야지요" 했더니, 박 중령은 "지내보긴 뭘 지내보나. 이 전쟁 언제 끝날지 모르지 않나"라고 했다.
■1·4후퇴와 결혼
9월 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전면 반격을 개시했다. 6사단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을 때 김 중위는 평양 너머 청천강까지 가 있었다.
그러다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급습을 받았다. 전(全) 전선이 붕괴되면서 처절한 후퇴가 시작됐다.
겨우 서울 육군본부로 돌아온 김 중위는 건물 앞에 서 있는 박 여사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여사는 대구에 있어야 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중위님 연락이 끊어져서 죽은 줄 알았어예. 여기 와서 확인하려고 왔어예." "뭘 타고 왔소?" "화물차 얻어타고 왔지예."
김 전 총리는 그때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몰랐어요. 그러면 둘 다 외로운 고혼(孤魂)이 되는 것이지. 시간이 없다고 느꼈어."
다시 서울이 중공군 손에 떨어졌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그때 두 사람은 대구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자는 아니었으나 신(神)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나는 전투복에 군화 신고, 아내는 평생 한이 될까 봐 대구를 다 뒤져 신부 복장을 찾아서 입혔지."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중령의 황소 선물을 회고했다. 박 중령은 강원도에서 싸우느라 못 왔다. 대신 황소 한 마리를 보냈다.
■춘천의 폐허에서
결혼 두 달 뒤 대위로 진급한 김 전 총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부 중대장을 하다 그해 8월 6사단에 자원해 다시 전선으로 갔다. 가족은 두고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대령 (중령에서 진급)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네 집사람을 춘천 시장통에서 만났네."
육군본부에 있던 박 대령이 춘천으로 출장을 왔다가 폐허가 된 춘천에서 우연히 박 여사를 발견한 것이다. 박 여사는 젖먹이 첫딸 예리를 업은 채였다.
김 대위는 연대장의 지프를 얻어타고 춘천으로 달렸다. "가 봤더니 다 부서진 집에 거적을 덮고 담요로 바람구멍을 막은 곳에 젖먹이와 함께 있어.
영하 20도가 넘는 극한의 날씨였지.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걱정이 돼서, 그 추운 데서 어찌 사나 싶어서 왔다는 거요.
" 김 전 총리는 "집사람의 그 열정 때문에 내가 60년을 꼼짝 못하고 살아온 거지"라면서 껄껄 웃었다.
■"여자 문제로 다투지는 않았다"
김 전 총리는 60년 결혼생활의 공을 모두 아내에게 돌렸다. "부침이 심했던 내 인생 아니오. 쫓겨서 해외에 나간다고 하면 나보다 더 속 썩고 짐 지는 게 집사람이었지.
내가 어디 가서 사고가 나진 않나, 어디서 굴러다니는 건가, 매일 소식 줄 수 없으니 내 연락만 기다리며 좌불안석하느라 허송세월한 여인이지. 참 고마운 여인이야."
김 전 총리는 "부부싸움은 안 하셨는가"라고 묻자 잠시 침묵한 뒤 "내가 여자 갖고는 다투지 않았어, 그거 하나는 큰소리칠 수 있지" 하고 '비장하게' 답했다.
"내가 지난해 농담으로 '어이, 59년 한 여인과 잔 멍텅구리 놈이 여기 있어' 했다가 집사람한테 엄청 혼났어요. '당신만 한 여자랑 잤느냐'면서 말이지."
말미에 김 전 총리에게 "우리 인생에서 결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결혼이 뭐냐고? 고생길을 택하는 거지.
젊은 사람들이 결혼의 참뜻을 몰라요. 섹스나 하는 걸로 알고, 기분 나면 좋다고 하고, 기분 나쁘면 헤어지고.
내가 못할 짓 많이 했지만, 다른 거 몰라도 60년 한 여인과 살아온 그 마음은 젊은이들이 따라줬으면 좋겠어." 회혼식은 가족들만 모여 서울의 한 식당에서 조촐하게 가질 예정이다.
입력 : 2011.02.15 03:01 / 수정 : 2011.02.15 08:42
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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