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폐수집방/훈장,문진,수석

서울대 국산법학도서관 문진 / 김택수 이야기 (스압주의)

by 연송 김환수 2011. 1. 28.

서울대학교 국산법학도서관

                준공기념 문진

 

 

규격 : 가로 7.5 cm / 세로 5 cm / 높이 5 cm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1983년도 정기총회기념

1983.  12.  3 

 

다른면에는 菊山(국산)법학도서관 준공기념

1983.  12.   3

 

금빛 찬란한 문진인데 사진상으로는 표현이 잘 안되네요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출범과 함께 법과대학 도서실로 처음 문을 열었다.

 

1961년 6월 동숭동 캠퍼스에 새로이 건물을 준공하면서 2개의 자유열람실과 1개의 모의법정을 갖추고 열람석을 275석 마련하여 도서관으로서의 실질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게 되면서 법학도서관도 법과대학과 함께 관악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학도서관의 정식명칭은 국산법학도서관으로 이는 법학도서관의 건립을 위하여 기꺼이 사재를 털어 재원을 마련해주신 故 국산 김택수 동문(법대 제6회)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아호를 따른 것이다.

 

1982년 10월에 기공하여 1983년 12월 3일에 준공을 마치고 개관한 국산법학도서관은 연면적 1,246㎡의 지하1층, 지상2층으로 이루어진 단독 석조 건물로 이는 독립된 별도의 건물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전문도서관이다.

 

===============================================================================================

김택수 전의원은 3선개헌안을 주도한 사람으로 박정희 전대통령때 실세였습니다.


그러나 1995년 한겨레21에서 특종으로 보도되어 다르게 밝혀진

사실 하나는 민청학련 사건의 자금줄로 그 당시 반유신체제 모임에

막대한 돈을 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한두씨 그리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통해 박형규목사 등을

통해 지원되었다고 하는데 권력의 중심에 있는 분이 그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단체에 자금지원을 했으니 보도 당시에 충격을

받은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정치인들이 만약을 대비하여 들은 보험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부분에 대해서 김 전의원이 권력으로 부터 밀려났기 때문에 민청

학련에 돈을 되었다는 설부터, 정말 제대로된 정치사상으로 인해서

유신에 반대했다는 말까지 있지만 돌아가신 본인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 겁니다.

 

 1963년 왼쪽 김택수 의원

 

'氣' 막힌 김해 4 - 김해가 낳은 큰 정치인 김택수

                             영남매일 2010.11.24 13:46

 

필자가 허튼소리 코너를 통해 `氣 막힌 김해`편을 연재 하면서 걱정을 했던 부분이 있다.

 

김해의 역사와 인물들의 발자취를 살피면서 혹시나 잘못된 기록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1969년에 김해에 안착하여 살고 있다. 따라서 김해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저 필자가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대단한 도시였던 김해가 그 어떤 장애 때문에 성장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시민들도 화합보다는 사분오열로 상호 불신 풍토가 확산되고 있다. 김해 인물들이, 기업들이 자의적인 것 보다 타의적인 영향으로 나래를 접거나 고초를 겪어야만 하기도 했다.

 

김해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된 1973년 11월 14일 이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승승장구하던 의원들이 어느날 갑자기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여기에는 6,7,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고 김택수 전 의원도 포함된다.

 

한일합섬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배경으로 공화당은 김해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한일합섬 창업주인 김한수 회장의 동생 김택수 씨에게 제6대와 7대에 공천을 주어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김택수 의원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공화당 원내총무를 역임하는 등 정권실세이기도 했으며 IOC위원으로서 한국 스포츠발전에 큰 기여를 하면서 승승장구 했다.

 

7대 후반기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을 이끌다 당 총재가 김택수 의원을 공화당 원내총무로 지명하자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달리하여 3선 개헌 통과에 눈부신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같은 당 의원들과 야당 시민사회 단체로부터 욕이란 욕을 다 들으면서 당의 방패막이가 되어 죽을 고생을 했지만 김택수 의원은 결국 제8대와 9대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하고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8대와 9대 김해 지역구를 같은 당 김영병 씨에게 금배지를 내준 이후 제10대(선거일 1978년 12월)때 공화당 공천을 받아 김해에서 당선 되었다.

 

이때는 김해, 양산 중선거구로 1선거구에 2인을 선출했다. (신민당에선 신상우 의원 당선) 김택수 의원은 형이 이끌고 있는 한일그룹이라는 든든한 배경으로 6~7대 의원시절 3~4선급 의원으로 예우를 받을 정도로 거물급 의원으로 추진력 있는 차기 유망 정치인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다수의 김해 사람들은 김 의원을 보고 김수로왕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큰 정치인이 될 것이라며 많은 기대 속에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성원을 보냈다.

 

이러했던 김택수 의원이 제8대 공천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나라와 국민을 위한 당신의 큰 꿈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김택수 의원을 아끼던 종친들과 지역 인사들은 김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시절에 돌아가신 모친의 산소가 문제가 있다며 이장을 권유하기도 했다.

 

당시 김 의원의 모친 산소는 김수로왕의 탄생지인 구지봉 하부능선에 있었다.

 

산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일합섬가의 자녀들이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김 의원도 공천에서 탈락 됐던 것이다. 결국 모친의 산소를 지금의 김해시 내동 수인사 아래로 이장하였다.

 

김 의원은 제10대에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3선 의원으로 재기했지만 그동안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김 의원은 곡창 지역인 김해평야가 홍수로 상습침수 되어 농민들의 1년 농사를 망치는 일이 빈번하자 정부의 예산으로 수입한 대형양수발전기 2기중 1기를 김해로 가져와 김해의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김 의원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형 김한수 씨가 있었다. 1978년 김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김 의원의 자택(왕릉 앞)에 머무르고 있던 고 김한수 회장께서 당시 필자를 비롯하여 배석현, 조종택, 배칠만(모두 고인이 됨)씨를 앉혀 놓고 김 의원이 돈으로 부터 떳떳하고 나라의 큰 정치인이 되기까지 자신이 그 뒤에서 뒷바라지 했던 일화들을 들려주기도 했지만 생략한다.

 

김해의 큰 인물 나라의 큰 지도자 김택수 의원은 못다 한 꿈을 가슴에 안고 1983년 지병으로 작고했다.

 

 

'氣' 막힌 김해 5 - 제8~9대 국회의원 김영병

 

2010년 11월 27일 (토) 11:35:47 조유식 기자 bbscho@yahoo.co.kr

 

전호에 김해지역 국회의원 신상우, 김택수 전 의원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글을 쓰면서 그분들의 선거유세와 정치 활동시절을 잠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영위했던 많은 지인들도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그 분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레 이 코너를 이어가고 있다.

 

제3공화국 아래 실시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선거일 1971년 5월 25일)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화당 총무인 김택수 의원을 제치고 김해지역구 공천을 받아 출마한 김영병 후보가 당선 되었다.

 

당시 김해지역 유권자들은 이 공천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별 문제 없이 국정활동을 활발히 해 온 김택수 의원이 당연히 공천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고 했다.

 

김영병 후보는 김해 출신이지만 김해에서는 많은 활동을 하지 않았고 1952년 동아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1966년 해외개발공사 전무이사, 1968년 경제담당 무임소장관 보좌관, 1971년 공화당 훈련부 부장을 역임하는 등 중앙에서만 활동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낙하산 공천이었지만 군민들은 그에게 표를 몰아주어 당선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당선된 제8대 국회의원은 1년 4개월 후인 1972년 10월 10일 유신헌법 통과로 국회가 해산됨으로 인해 국회의원직도 날아가 버렸다.

 

(유신헌법-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접 선거, 임기 6년 대통령, 중임제 폐지, 대통령이 국회의 3분의 1 추천권(유신정우회), 긴급조치권(헌법을 초월), 제 4공화국 출범(1972, 유신체제)) 1973년 중선거구제가 된 김해선거구는 양산이 포함되어 1선구에서 2명을 선출 하게 되었다.

 

김영병 전 의원은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아 김해, 양산 선거구에서 신상우(신민당) 의원과 함께 당선되어 재선 의원이 되었다.

 

김영병 의원과 신상우 의원이 국회에서 활발한 국정활동을 하고 있던 시점인 1978년 2월 25일 당시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 가락면 등 낙동지구가 부산시로 편입되어 버렸다.

 

김해 군민들은 김해 국회의원들의 방관 속에 김해 땅을 부산에 빼앗겨 버렸다며 연일 규탄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김해국제공항이 부산ㆍ김해 국제공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김해 땅 부산 편입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필자와 사회단체들을 비롯한 군민들이 반대투쟁을 하였지만 부산의 야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산에 편입된 이 지역 대부분이 그린벨트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버리는 바람에 32년 동안 재산권 행사도 재대로 못하고 부산시의 쓰레기 매립장만 들어서게 되었다.

 

요즘 김해시의 발전을 보고 다시 김해로 돌아가고 싶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김해 땅 낙동지구가 김해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이들 국회의원들도 정치와 멀어져 갔다.

 

-----------------------------------------------------------------------------------------------

 

김택수 (金澤壽)

1926. 9. 30 경남 김해 ~ 1983. 7. 17 서울.

체육행정가·정치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일합섬 그룹의 사업가로 출발하여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7대 및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7대 때는 원내총무, 1979년에는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당내의 화합과 결속을 다졌으며 고향인 김해의 지역발전에 노력하였다.

 

고교시절의 축구선수생활이 인연이 되어 196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경남체육회 회장을 맡으면서 체육행정에 참여하기 시작, 1966~73년 대한 아마복싱 연맹 회장을 역임하고, 1966년에 아시아 아마복싱 연맹 회장 겸 세계 아마복싱 연맹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71년 11월에 대한체육회 회장 겸 대한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장에 선출되어 1979년 2월까지 역임했다.

 

1977년 6월 16일 장기영의 뒤를 이어 체육인 최고영예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81년에 서울 올림픽 대회조직위원회(SLOOC) 조직위원 겸 집행위원을 지냈다.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에 밑거름이 된 체육인으로 1960~80년대초까지 한국체육계 발전에 이바지했다.

 

사재를 털어 태릉선수촌의 숙소와 급식을 현대화했으며 전임 코치제와 경기력향상연금제도를 마련하여 경기력 향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체육외교에도 관심을 가져 197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는 직접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공산권과 교류의 기틀을 마련했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상했다.

---------------------------------------------------------------

한국의 정치가이며 체육인이다. 박정희정부의 삼선 개헌에도 적극 개입한 국회의원으로, 대한체육회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면서 체육 발전에 공헌하였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195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3년 박정희정부의 출범과 함께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에 입당하고,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김해, 민주공화당)에 당선되어 민주공화당 경상남도당위원장이 되었다.

 

1966년에는 민주공화당 당무위원을 지냈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김해, 민주공화당)에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삼선개헌의 강행을 막는 김종필(金鐘泌) 계열의 중진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69년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를 맡은 뒤 개헌 파동 때 적극

개입하기도 하였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김해·양산, 민주공화당)에 당선되어 국회개헌특별위원회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61년 경상남도체육회 회장을 비롯하여, 1966년 아시아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겸 세계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 1971년에는 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위원장을 맡았고, 1977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한국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 등을 지내면서 체육발전에 공헌하였다. 제5공화국(전두환정부)이 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오직 체육인으로만 활동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체육훈장 청룡장·국제올림픽위원회공로훈장 은장이 추서되었다.

 

===============================================================

 

[6차탐방후기]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허정도)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에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1970-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은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이른바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20년사』에는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양덕동 석전동 산호동 일대에 살던 마산시민들의 곡창이었고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1967년에 방추(紡錘)가 22,400개였던 것이 1979년에는 무려 344,000 추로 세계 최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고용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67년에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 수가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 수가 이랬으니 이 거대기업을 둘러싼 2차고용 3차고용 효과까지 계산하면 그 수가 얼마였겠는가.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의 결과다.

한일전산여고에 얽힌 일화도 많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큰 공이었지만 그 유명한 ‘팔도잔디’는 전 국민의 심정을 녹아내리게 했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는데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에 40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규모다.

 

이른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였다.

나는 탐방대원들과 함께 양덕동 찬바람을 맞으며 한일합섬의 옛 영화를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 한 쪽에 솟아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국내 최고 최고최대의 화학섬유회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잘나가는 SK나 CJ나 코오롱도 비슷한 업종이었는데 왜 한일합섬만 이렇게 몰락하였을까?

 

답을 찾지 못한채 길을 걷던 중, 눈 앞에 한가닥 실마리가 보였다.
어쩌면 나의 물음에 작은 답이 될수도 있는 '사라진 한일합섬'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

 <한일합섬이 들어서기 전의 양덕들판>

 

<건설 초기 모습>

 

<확장 또 확장>

 

                   <고향에서 가져운 팔도잔디를 가꾸는 한일여고생들>


………그것은 아파트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겠지만, 한일합섬이 몰락하게된 원인 중 한조각은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 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 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도 양덕동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고 전성기 때의 한일합섬, 오른쪽 운동장이 한일여고 팔도잔디>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

집을 짓기만 하면 재미를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 거대기업도 집 장사로 그 시절 재미를 좀 보았고, 사주(社主)는 쉽게 돈버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자신을 있게 한 기존의 섬유산업은 수명이 다해, 저 멀리 퇴조의 징후가 보였지만 미래를 위한 진지한 모색도 과감한 투자도 하지 않았다.

 
연구와 개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업의 탈출구를 찾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장사의 단 맛에 빠져 본격적으로 공장규모를 줄이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건설규모도 크게 늘려 그 때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제품창고 헐고 아파트 지어  ‘1차’
기숙사 헐고 아파트 지어  ‘2차’
모노마 탱크 헐고 아파트 지어  ‘3차’

서쪽 편 공장 헐고 아파트 지어 드디어  ‘4차’까지.

 

 

 

 


아파트 단지의
차수가 늘어날수록 '한일합섬'은 왜소해졌고, 차수가 늘어날수록 사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비례해서 마산경제도 점점 쇠락해 갔다.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들을 통칭 ‘한일 1차’ ‘한일 4차’ 등으로 부른다.
만약 '한일합섬'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면 최근 태영과 한림에서 지은 대규모 아파트단지 '메트로시티'는 ‘한일 5차’, 바로 그 옆에 마지막 남은 터는 ‘한일 6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4차 만에 ‘한일’은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긴 시간을 한눈에 보면,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섰고 다시 그 모든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양덕동 일대 주민들 땀이 밴 기름진 양덕 들이 30여 년 만에 아파트 터로 변한 셈이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거대기업의 몰락,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몰락을 떠올리니 새로운 물음이 생겼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의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온갖 곳 보이는 땅마다 ‘아파트와 아파트’로 채우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이 한일합섬 몰락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새로 탄생하는 통합시는 이 사라져버린 거대기업에서 얻어야할 교훈은 없는 것일까?

석양의 역광에 검게 물든 한일아파트의 수십층 높은 벽이 마치 몰락한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잔영처럼 보였다.

 

 

 

 

 

 

 ==========================================================================================

 

 보너스 27년된 기념메달

서울대 의대 졸업 20주년 기념 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