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록 다시 보기]
봄여름가을겨울 & 넥스트
퓨전재즈 [fusion jazz]
1980년대 후반 록은 서서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부흥에 이은 자연스런 내리막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댄스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록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구도 록 음악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 록을 하려는 사람도, 들으려는 사람도 별로 없는 ''암흑기''가 도래했다.
1980년대 중반 록의 르네상스가 들국화에서 시작되었다면 르네상스의 끝자락을 잡은 밴드는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그 뒤로는 인디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전까지 오직 넥스트만이 실낱 같은 록의 명맥을 이어갔다.
1988년 봄여름가을겨울이 동명 음반으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재즈는 소수의 음악이었다. 재즈를 아는 사람은 있어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 앞에 붙은 퓨전 재즈는 이름조차 낯설었다.
낯선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긴 이름과는 달리 멤버는 김종진(기타, 보컬) 전태관(드럼) 단 둘. 하지만 이제까지의 듀엣과는 달리 세션 맨들의 도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밴드였다.
그것도 타이틀 곡이 되기 마련이었던 1번곡을 비롯해 음반 수록곡 11곡 중 3곡을 연주곡으로 할 정도 연주를 중시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스스로를 연주인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김종진의 보컬은 결코 노래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술 한잔 걸치고 편하게 내뱉는 듯한 목소리는 자연스럽고 매력 있었다.
음악도 이문세, 변진섭이 호령하던 당시의 발라드와는 궤를 달리했다. 무어라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지만 참신하고 세련되었다.
편곡, 연주를 위시해 전반적으로 마치 외국 음악을 듣는 듯 했다. 노랫말 역시 사랑 일변도였던 당시 노래들과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 하는 데뷔곡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는 화자의 자의식과 타인에 대한 관조가 오고 가는 지적이고 독특한 노랫말이었다.
이듬해 발표한 2집의 ''어떤 이의 꿈'', ''열 일곱 그리고 스물 넷''이나 1991년 라이브 음반에 실린 ''외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리고 2002년 초 발매한 7집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노랫말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냉소가 배어있는 듯도 했지만 결국은 희망과 낙관으로 귀결되었다.
모두 록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두 사람 모두 록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연주자의 꿈을 키웠다. 김종진은 키스, 전태관은 레드 제플린을 좋아했다. "록은 우리들에게 요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은다.
재즈는 음악을 깊이 듣게 되면서 접하게 되었다. 김종진은 재즈는 자유 정신이라는 점에서 록과 맥이 닿아 있으면서도 자유를 갈구하는 록 보다는 한 수 위에서 자유를 누리는 음악이라고 설명한다.
에너지를 중시하는 록에 비하면 훨씬 섬세했고 연주력의 비중이 큰 음악이기도 했다. 재즈에 전자 악기를 결합한 퓨전 재즈는 록을 듣고 자라 재즈에 빠진 두 사람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뒤늦게 일본 퓨전 재즈 밴드 카시오페이아를 알게 되었고 이후 표절설이 나돌 정도로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들처럼 고난도의 테크닉과 날선 일본도 같은 빈틈없는 음악을 우리는 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시작은 밴드의 연주자였다. 포크와 블루스에서 출발했지만 컨템퍼러리 재즈로도 불리는 스무드 재즈에 관심이 많았던 싱어 송라이터 김현식을 만나 1985년부터 유재하, 후일 빛과 소금을 결성한 장기호, 박성식과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했다.
1986년 3집에 실렸던 ''비처럼 음악처럼'', ''가리워진 길'', ''빗 속의 연가''가 모두 이 때 노래다. 하지만 1987년 10월 김현식이 대마초로 구속되자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길을 택했고 봄여름가을겨울에는 달랑 둘만 남았다.
방황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그냥 평소 듣고 싶지만들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던 노래도 김종진이 맡기로 했다. 김현식에게서 그냥 노래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노랫말은 운율에 대한 관심만 있었을 뿐 작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노랫말로 풀어냈다. 하지만 가수 같지 않은 이들에게 음반을 내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무작정 김현식의 소속사였던 동아기획을 찾아갔고 김영 사장은 "하고 싶은 게 뭐니?"라고 묻고 두 말 없이 음반을 내주기로 했다. 김 사장은 두 사람이 하고 싶은 음악에서 새로운 패션을 읽었다고 한다.
과연 음반이 나오자 틀어달라 홍보하고 다니지 않아도 방송국 관계자들이 먼저 찾아서 틀기 시작했다. 연주자였던 이들은 직접 연주하는 자리가 아니고서는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고 자연스레 콘서트에 주력하게 되었다.
김종진 전태관 두 사람이 듣고 싶었다던 음악은 바꿔 말하면 이제까지 들었던 여러 종류의 외국 음악이었다. 록도 재즈도 그 중 하나였다. 전태관은 "봄여름가을겨울은 퓨전 재즈 밴드라기 보다는 그냥 퓨전 밴드"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굳이 한국적으로 다듬을 생각은 없었다.
태생적으로 미국 음악을 받아들여 자기화해온 한국 록의 역사에서 이전까지의 음악인들이 주로 한국적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국화에 힘을 쏟았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은 반대로 오리지널을 충실히 소화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말하자면 한국 음악과 외국 음악의 퓨전이 아니라 외국에서 생겨난 음악들의 퓨전이었다. 김종진은 외국 음악을 이것저것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 음악은 어짜피 ''섞어찌개''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가능한 한 원재료의 맛을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시나위의 장르 음악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많은 음악인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식의 접근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새롭고 세련되며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남들보다 앞선다는 생각 때문에 외국 음악에 열광했던 당시의 대학생과 일부 중고등학생들도 흔쾌히 그들을 받아들였다.
한국 가수가 외국 음악의 수준과 느낌을 낸다면 더 이상 굳이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음악을 찾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팝 프로그램 일색이었던 FM은 가요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외국 음악과 한국 음악의 비율이 8:2까지 육박했던 시절, 봄여름가을겨울은 이미 시작된 다른 여러 요소들과 함께 외국음악과 한국음악의 대역전에 일조했다. 그리고 다시 그 흐름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넥스트가 활동한 1992년부터 1997년은 한국 가요사상 전무후무한 댄스 음악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벤치 마킹한 무수한 그룹들이 10대들을 겨냥한 가볍고 빠른 랩 댄스 곡을 격한 춤 동작과 함께 쏟아냈다. 이따금 발라드가 끼어들긴 했지만 그야말로 댄스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던 편식의 시절이었다.
댄스와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던 록은 제일 먼저 패퇴했다. 아무도 록을 한다거나 록 밴드를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신해철은 보란 듯이 전문 세션 맨인 정기송(기타), 이동규(드럼)와 함께 넥스트(New Experiment Team)를 만들었다. 이름처럼 새로운 실험을 해보겠다는 것이었고 실험의 주 소재는 록이었다.
댄스의 광풍 속에서 록을 해보겠다는 것 뿐 아니라 록의 다양한 변주들을 실험해 보겠다는 뜻도 있었다. 3인조에 금기시되던 컴퓨터를 적극 활용한 것은 시나위, 부활, 백두산 H2O 등 다분히 전세대 밴드들을 염두에 둔 신해철의 차별화 전략이기도 했다.
서강대 철학과 2학년이던 1988년 무한궤도라는 팀으로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 ''그대에게''를 불러 대상을 수상하고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으로 1991년 KBS, MBC의 연말 가수상을 수상했고 변진섭과 함께 음반을 만들 정도로 지극히 상업적인 솔로 활동을 하던 신해철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해철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레시브를 중심으로 록을 들었고 파고다 극장에서 연주한 마지막 세대로음악은 당연히 밴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가위바위보에서 져 기타리스트보다 ''하수''인 보컬까지 맡게 된 게 내내 ''분열증''을 일으킬 정도로 불만이기도 했지만 재미 삼아 나간 대학가요제에서 프로그레시브를 접고 가요제에 맞는 팝송을 만들었고 관객을 사로잡으면 상을 탈 수 있다는 걸 꿰뚫어 보았고 솔로 활동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한 생존전략이라고 말하는 영민함을 갖춘 그다.
덕분에 넥스트 역시 언제나 남들이 하지 않는 반골과 튀는 음악, 지적이고 앞서가는 엘리트의 음악이면서도 최소한의 상업적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음악을 하게 된다.
데뷔작 [홈]은 당시 가정과 가족을 주제로 한 ''컨셉트 음반''으로 ''도시인'', ''인형의 기사 파트 1'', ''아버지와 나''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 마치 록의 모든 세부 장르를 섭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형식과 내용 모두 화려했다.
신해철도 팝송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로서 여지껏 들었던 음악을, 하고 싶었던 음악을 모두 다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노랫말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었고 때로 난해하기까지 했다.
어려서 듣던 외국 음악의 교육 덕인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음반은 100만 장 가까이 팔렸다. 신해철의 말대로 댄스를 싫어하든 록을 좋아하든 당시 가요계에 불만을 가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규합했기 때문이었다.
군에 다녀오고 나서 신해철의 생각은 달라졌다. 1994년 기본이 없는 변칙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4인조 밴드로 진용을 갖추고 록 밴드답게 정공법을 택했다.
그 사이 정식 록 밴드들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제는 도리어 정식 록 밴드가 ''튀는'' 시절이 됐다. 록 발라드 ''날아라 병아리''가 히트한 2집에 이어 1995년 김세황(기타), 김영석(베이스), 이수용(드럼)으로 멤버를 교체하고 ''머니''가 수록된 3집을 냈다.
2집 이후로는 한국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과 결합한 하드 록이 왜 불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자 기술과 사운드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알고 있는 모든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던 1집의 생각은 서양 음악을 통째로 알고 싶다는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서양 음악과 가요의 차이를 고민하는 중에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서양 애들은 음악을 즐기지만 우리는 음악을 고민해요. 서양에서는 기타가 놀이 기구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비장의 무기인 것과 마찬가지죠."
소리를 대하는 방식도 달랐다. 한국을 포함해 동양 사람들은 높낮이와 좌우 구분은 확실한데 앞뒤 개념이 별로 없어 입체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지요. 차이를 알고 난 다음에는 그 차이를 없애려 노력했다.
봄여름가을겨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한국화보다는 서양 음악의 완벽한 재현을 우선한 세대였다. 3집 때 영국 엔지니어를 데려오고 만화영화 ''영혼기병 라젠카''의 사운드트랙을 겸한 4집 ''더 스페이스 록 오페라''는 아예 영국에서 후반 작업을 하는 그를 두고 쓸데없이 티 낸다는 비난도 샀지만 사운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바꿔 놓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댄스가 위세를 더하고 록이 코너로 몰리면서 넥스트는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비록 신해철의 이미지와 차별화 전략이 주효한 것이긴 했어도 록도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한 셈이었다.
1997년 11월 넥스트는 해산을 발표했다. 더 이상의 독야청청은 싫다는 말과 함께. 신해철은 "빙하기의 공룡같은 신세로 음악적 지향이 같은 동료 밴드 하나 없이 내부적으로 답을 찾으려다 보니 깨질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본다.
혼자 달려 1등만 하는 것은 언제나 1등을 할 수 있다는 프리미엄을 있을지언정, 달리기 자체가 즐겁지 않게 된 탓이다. 1990년대 초 중반의 한국 록을 돌아볼 때 그나마 넥스트라는 밴드가 있어서 다행이라 할 수도 있지만, 오직 넥스트 하나만으로 그 시대를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 틀림없다.
oimusic 2003년 05월호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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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밴드로 만난 두 남자, 1989년에 독립
봄여름가을겨울은 고 김현식의 백밴드로 결성됐다. 속칭 ‘김현식 밴드’로 불렸던 이 팀의 원년 멤버는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그리고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간 천재 뮤지션 유재하였다.
당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앨범의 제작과정에서 유재하는 김현식에게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자신의 주옥 같은 명곡들을 모두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식은 타 멤버들과의 형평성을 위해 <가리워진 길>만을 앨범에 수록하기로 했고, 이에 마음이 상한 유재하는 밴드를 떠났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출처는 2009년<황금어장-라디오 스타>).
유재하가 떠난 이후 밴드에 새로 합류한 멤버는 박성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박성식은 김현식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만들었다.
김현식 3집의 성공 이후 장기호와 박성식은 팀을 떠나 빛과 소금이라는 팀을 결성했고, 김종진과 전태관도 1989년 3월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생소한 장르인 퓨전재즈를 표방하며 파격적으로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연주곡을 타이틀로 삼았다. 그러나 대중들은 김종진의 매력적인 보컬을 금방 눈치챘고,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라는 가을의 테마곡이 큰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은 1989년 10월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싱글이나 미니앨범이 아닌 10곡이 들어 있는 정규 앨범이었다. 1집이 발매된 지 불과 7개월 후였다.
1집 발매 7개월 만에 발표된 봄여름가을겨울 2집
봄여름가을겨울은 2집에서도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5분 56초짜리 연주곡을 앨범 첫 머리에 실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밴드답게 따로 타이틀곡을 정해 놓진 않았지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노래는 역시 <어떤 이의 꿈>이다. 김종진의 멋진 목소리와 관조적인 가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곡이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는 “종진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태관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여러분은 꿈을 이루며 사세요”라고 개사해 부르며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하는 노래인 <봄여름가을겨울>도 빼놓을 수 없다, 4계절의 특징을 표현한 단순한 가사의 3분 21초짜리 짧은 노래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기도 하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과 상관없이 순수한 사랑을 하자는 의미를 담긴 <열일곱 스물넷>도 신나는 노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이 열일곱인지 가사에 표현을 안했다는 점이다. 뭐 이 노래를 듣기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지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시절 김현식의 목소리로 녹음됐던 <쓸쓸한 오후>도 새로운 느낌으로 편곡돼 이 앨범에 실렸다. 김현식 버전도 좋지만 역시 이 곡의 감정은 원작자인 김종진이 가장 잘 표현하는 듯 하다.
1997년 이현도가 리메이크했던 <사랑해>의 원곡도 바로 봄여름가을겨울의 2집에 수록돼 있다. 중후한 중저음으로 부르다가 “지친 나의 두 어깨 위에 따스한 손길로 다가온 그대”에서 갑자기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이 무척 매력적이다.
결성 25주년을 맞은 퓨전재즈의 ‘거장’
이후 봄여름가을겨울은 1992년 3집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와 <아웃사이더>등을 히트시키고, 2002년에도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빅히트하며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가장 응원송'으로 불려지고 있다.
사실 한 명의 멤버가 작사, 작곡. 노래를 도맡아 하는 밴드는 장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동률의 전람회와 유영석의 푸른하늘과 화이트가 그랬고,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해철의 넥스트도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한 바 있다.
그러나 1986년에 처음 만난 김종진과 전태관은 벌써 결성 25년을 맞았고 멤버들의 나이도 50세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해체’라는 말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퓨전재즈라는 생소한 장르를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강산에 꽃이 피고 꽃들이 만발하고 강산에 단풍들고 아이들이 눈장난을 20번 넘게 반복할 때까지 신선한 음악을 들려준 퓨전재즈의 ‘거장’이다.
출처 : http://blog.ohmynews.com/hitandrun/272937
어떤이의 꿈
어떤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이는 꿈을 잊은채로 살고
어떤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이는 꿈은 없는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하고
꿈이란 이런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혹 아무 꿈
어떤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이는 꿈은 이런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하고
꿈이란 이런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혹 아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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