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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노래모음

엘비스 프레슬리 힛트 명곡

by 연송 김환수 2010. 2. 5.

 

엘비스 프레슬리 기본정보

 

 

본  명 :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


출  생 : 1935년1월 8일 

           미국미시시피 주투펄로


사  망 : 1977년8월 16일 (42세)

           미국테네시 주멤피스


장  르 : 로큰롤, 록, 팝, 컨트리


활동 시기 : 1954년 ~ 1977년


웹사이트 : Elvis.com엘비스 기념관

              엘비스 프레슬리 팬클럽

   

 

 

부모와 함께 2살때 모습

 

 

 

 

01.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Anything that's part of you - Elvis  Presley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I memorize the notes you sent
당신이 보낸 쪽지를 기억해요.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
우리가 함께 다녔던 곳을 모두 가보았죠,
I seem to search the whole day through
아마도 하루 종일 다녔을 거예요...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흔적이라도 찾으러

I kept a ribbon from your hair
당신의 머리 리본을 간직하고 있어요...
A breath of perfume lingers there
아직도 향내음이 맴도는 리본
It helps to cheer me when I’m blue
내가 우울할 때 날 기쁘게 합니다...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일부였던 그 어느것이라도



Oh, how it hurts to miss you so
아, 그렇게 당신을 그리는게 얼마나 내 맘을
아프게 하는지
When I know  you don't love me anymore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To go on needing you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수록
Knowing you don't need me
당신은 날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았기에

No reason left for me to live
내겐 더 살 이유가 남아있지 않았죠.
What can I take, what can I give
내가 무얼 받고 또 무얼 줄수 있는지...
When I’d give all of someone new
내가 새로운 누군가에게 모든 걸 바쳤을 때...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흔적이라도...



02. Are You Lonesome Tonight


03. Burning Love

 

04. Danny boy

 

05. Can't help falling in love

 

06. HOUDDOG

 

07. Amazing Grace-Elvis presley

 

08. Remember You

 

09. only_you

 

10. It,s Now Or Never

 

11. I Can't Stop Loving You

 

12. Kiss Me Quick

 

13. Love Me T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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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 1935년 1월 8일 ~ 1977년 8월 16일) 는 미국배우이자 가수로, 그의 음악은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는 로큰롤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흑인음악백인음악을 주 장르로 불렀으며, 로큰롤, 가스펠, , 펑크, 발라드, 등의 장르에서 모두 정상급에 올랐다.

 

그는 세계에서 비틀즈와 함께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약 10억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77년 8월 16일, 미국 테네시 주멤피스에서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기념하는 엘비스 기념관이 설립되어 엘비스의 생일인 1월 8일과 사망일인 8월 16일에 대한민국 엘비스 프레슬리 팬클럽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하고 있다.

패러디

미국 프로레슬링 WWF(현재 WWE)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따라한 홍키통크맨이 등장했다. 그러나 홍키통크맨은 프로레슬러로서 능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였다.

가족

리사 마리를 낳은 엘비스의 전부인 프리실라의 모습. 1954년생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포즈 [로이터 2003-05-23 14:42]


[라스베이거스/로이터=뉴시스】 22일 미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MGM 그랜드가든 어리너에서 열린 한 비영리 음악재단의 후원 콘서트에 참가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 부인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기사제공 : Reuters

 

 

1954년 5월24일 Brooklyn에서 출생, 결혼하기 전 처녀적 이름은 Priscilla Ann Wagner(프리실라 앤 와그너)이고, 양부가 서독의 에어포스(Air Force) 직원이었다는군요. 엘비스 프레슬리를 1959년에 처음만났고, 1967년 5월 1일날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8년, 두 사람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태어나고 5년 지난 1973년에 이혼을 하죠. 1988년에 Elvis and Me라는 제목의 자서전 형태의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또, 미국에서 성공적이었던 TV드라마 시리즈 Dallas에도 출연, Naked Gun(1988) 에서 제인 스펜서 역으로도 연기를했습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 - 딸

             마이클 잭슨 - 사위(이혼) 

 

마이클잭슨과 부인(이사람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이혼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달 30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엘비스의 딸 리사 마리(中), 전 부인 프리실라(左)가 지켜보는 가운데 엘비스가 생전에 즐겨 썼던 선글라스를 끼고 엘비스가 췄던 춤을 추고 있다.

[멤피스(테네시주) 로이터=연합뉴스] 2006.07.03 04:43 입력

 

 


 

대표적인 힛트곡

 

엘비스 프레슬리는 많은 힛트곡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은  Love Me Tender 정말 감미로운 음악이랍니다.

Hound Dog, Can't Help Falling In Love, Lawdy, Miss Clawdy, Heartbreak Hotel 등 유명한 곡이 많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베스트 앨범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엘비스의 대표곡인 Hound Dog, Can't Help Falling In Love, Lawdy, Miss Clawdy등이 수록된 2001년 발매 더블CD앨범에는 50여곡의 주옥같은 노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노래는 대표적 힛트곡이라 할수 있지요.

 

01.  Heartbreak Hotel

02.  Don't Be Cruel 

03.  Hound Dog 
04.  Love Me Tender  아래 누르시면 동영상 노래 감상 가능

      http://www.youtube.com/watch?v=HZBUb0ElnNY

 

출연 : 리차드 이건, 데브라 파기, 엘비스 프레슬리 

영화 줄거리

1865년 4월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철로 역에 모여 있던 북군들에게 남북전쟁의 승전과 함께 종전 소식이 전해진다. 역사가 기쁨으로 들떠 있는 순간, 벤스(Vance Reno: 리차드 에간 분)가 이끄는 남군들이 갑자기 습격하여 북군들을 죽이고 현금수송 열차에서 현금을 강탈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군들은 남군들의 뒤를 쫓지만 그들을 잡을 수가 없다. 한편 아직도 종전소식을 듣지 못한 벤스 일행은 작전임무를 완료하기 위해 약속장소에 도착하지만 남군들을 만나지 못한다. 그 후 마을에 도착해서야 벤스 일행은 마침내 종전소식을 듣게 되고 강탈한 돈을 나누어 갖고 고향의 집으로 향한다. 꿈에도 그리던 연인 캐시(Cathy Reno: 데브라 파겟 분)를 만나기 위해 돌아온 벤스. 그러나 그가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연인 캐시는 이미 벤스의 동생과 결혼해 버린 뒤였다. 마을에서 학교 설립을 위한 바자회가 열리던 날, 가족들과 함께 참가한 벤스는 연립정부 군인들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고 그들에게 호송을 당해 기차를 탄다. 그날 오후, 함께 북군 현금수송 열차를 털었던 남군일행들이 벤스의 동생을 찾아오는데.

05.  Too Much 

06.  All Shook Up 

07.  (Let Me Be Your) Teddy Bear 
08.  Jailhouse Rock

09.  Don't 

10.  Hard Headed Woman

11.  one Night

12.  (Now and Then There's) A Fool Such As I

13.  A Big Hunk O' Love

14.  Stuck on You 

15.  It's Now or Never 

16.  Are You Lonesome Tonight? 

17.  Wooden Heart

18.  Surrender 

19.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

20.  Can't Help Falling in Love 아래 누르시면 동영상 노래 감상 가능

       http://www.youtube.com/v/s5doQJ5SHFY&hl=ko_KR&fs=1

21.  Good Luck Charm 

22.  She's Not You 

23.  Return to Sender

24.  (You're The) Devil in Disguise 

25.  Crying in the Chapel 

26.  In the Ghetto

27.  Suspicious Minds

28.  The Wonder of You

29.  Burning Love  아래 누르시면 동영상 노래 감상 가능

      http://www.youtube.com/watch?v=oAbfryG8_JM

30.  Way Down

31.  A Little Less Conversation

32. welcome to my world  아래 누르시면 동영상 노래 감상 가능

          http://www.youtube.com/watch?v=LKWy9odNwuM

33. Anything That's Part Of You  아래 누르시면 동영상 노래 감상 가능

         http://www.youtube.com/watch?v=F7BZpFFqPUk

         나는 이 노래가 제일 좋더라. 왜냐고 묻지 마세요 그냥 좋으니까요 

         
            난 당신이 보내준 편지를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갔던 곳을 모두 가죠
            난 당신의 흔적만 찾아서 하루종일 다니는 것 같아요

            당신의 머리에 달았던 리본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곳에 은은한 향수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죠
            당신의 흔적은 내가 우울할 때 날 위로해 준답니다.

            당신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건
            너무 가슴아파요
            당신은 날 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당신을 계속 원하는 건 너무 가슴아파요

           내겐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당신의 일부인 어떤 걸 얻으려고 다른 새사람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할 때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영화 VIva Las Vegas (1964년작)에서 안 마그렛과 열연

 

 안 마그렛은 그의 소중한 영화 파트너였다

 

 부모와 함께 2세때

 군 복무시절 엄마와 찍은 사진

 경제공황이 한창이었던 즈음이었고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해서 힘들었지만 그의 어머니 글래디스는 엘비스에게 항상 ‘너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낌없는 애정을 주었다.

 

 1958. 3.24일 한창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엘비스에 입대, 서독으로 파병되어 전차병으로 복무하게 되는데 그의 팬들이 대통령에게 "엘비스를 군입대에서 사면시켜 달라며 탄원서도 냅니다.

엘비스가 군복무를 했던 곳은 독일과 헝가리 등이며 1960.3.2 전역을 합니다.

 

 

 

 

 

 

 

 

 

 

 

 

  

 

 

 

 

 

 

 

 

 

 

지난 92년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진행한 바 있는 엘비스의 유품 경매시에 뉴저지주에 사는 한 팬에게 팔린 미공개 엘비스의 제대 기념 기자회견 사진인데요, 이 사진을 구매한 뉴저지주의 한 팬이 30주년 기념 엘비스 유품 전시회에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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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 댓 드림(follow that dream)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한국 기념관

 

 

 엘비스 밀랍인형

 
‘팔로 댓 드림’(follow that dream)은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념관입니다.
70년대 엘비스 한국 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던 이종진씨는 사람들이 잊고 사는
옛 꿈을 되찾기 바라는 마음에서 설립했다고 합니다. 1962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제목을 딴 팔로 댓 드림에는 수많은 엘비스 관련 자료들,
엘비스의 LP 전부(72장)와 20여종의 최신 DVD, 크고 작은 밀랍 인형을 비롯한
기념품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기념관 앞에는 엘비스가 좋아하던 60∼70년대 미국
자동차들도 전시돼 있습니다.

http://www.elvishall.com/
전화:(031)948-3358. 개관시간:토·일요일 종일(주중에는 전화요망).

 

 외부모습

 외부모습

 내부모습

 내부모습

 내부모습

 내부모습

 내부 기념 촬영 모습

 찾아 가는길

 엘비스 기념관 (팔 로 댓 드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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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의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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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비스 프레슬리 가족 묘지

 

엘비스 프레슬리 동상

 

엘비스 프레슬리 프라자 내 동상
 

엘비스 프레슬리 생가 그레이스랜드


엘비스 프레슬리 생가 그레이스랜드 내부

 엘비스 프레슬리 승용차

 

엘비스 프레슬리, 1970년 백악관에서

1970년 12월 21일, 백악관 Oval Office(대통령 집무실)에서 당시 37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을 만난 엘비스 프레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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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Aron Presley 1935 - 1977)

 

팝 뮤직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의 리듬앤 블루스를 록큰롤에 접목시킨 장본인이다. 공연 중에 정열적이고,섹시한 정감이 배어 나오며,곡의 활기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걸직하게 중얼거리는 흑인 리듬 앤 블르스 스타일로 노래하는 최초의 백인 가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와 앤디 윌리암스,팻분 같은 엔터테이너들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더 이상 팝계를 지배를 할 수 없었다.음악의 형식과 생활 양식을 그의 팬들 부모님들이 가진 것과 완전히 구분된 것으로 만들므로써 엘비스 프레슬리는 10대의 반발감을 고양시킴으로서 50년대말의 록큰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자 우상이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 "East Tupelo"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쌍둥이 형제 Jesse는 낳자마자 사망했다. 그는 Vernon 그리고 Gladys Presley란 이름을 가진 양친 밑에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 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제일 하느님 교회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노래 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야영회나 신앙 부응회 등에 그의 부모를 따라 다녔다. 그는 11회 생일 때 자전거를 선물 받기 원했지만 대신 기타를 선물 받았으며, 1948년 7월에는 테네시의 멤피스로 그의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엘비스는 학교가 끝난 뒤 영화 안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제임스 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1952년 말 고등학교 버라이어티 쇼에서 노래 했으며 1953년 6월 졸업 후에는 Crown Electric사의 화물차 운전수가 되었다. 한 달 후에, 의론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My Happiness"를 개인적으로 녹음하기 위하여 지방의 군소회사인 선 레코드사에 갔다. 그곳에서 비서인 마리온 키스커의 주목을 받아 엘비스 프레슬리는 기타리스트인 스코티 모어, 베이스트인 빌 블랙과 함께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 주선으로 팀을 구성하고 몇 개월동안 연습을 했다. 초창기에는 팬도 별로 없었고, 모친이 제1의 팬이었다. 1954년 7월 선의 스튜디오에 돌아온 세사람은 컨트리곡인 "Blue Moon Of Kentucky"와 "That's All Right MaMa"를 녹음 했다. 지방의 디스크 자키인 듀이 필립스는 뒤의 곡을 방송하여 그 싱글은 그 지역의 히트곡이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4년 8월 10일 멤피스의 오버턴 파크에서 직업 가수로는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으며, 그의 정열적인 거친 목소리와 섹시한 개성으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곧이어 선 레코드사에서 2차 3차 싱글이 지역 히트가 됨에 따라 자신을 "힐리 빌리 켓"으로 선전하며 무어,블랙과 함께 남부를 순회하였다. 1954년 말 그들은 쉬리브포트의 "루지애나 헤이라이드" 라디오 쇼에 출연했고, 다음 해 3월에는 그 쇼의 TV 각색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였다. 7월에는 "Baby, Let's Play House"가 엘비스 프레슬리 최초의 전국적인 히트곡이 되었고, 이어서 9월에는 "Mystery Train"이 톱 컨트리 앤드 웨스턴 히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전직 순회 공연 흥행사였고,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일회 매니저인 "콜로넬"

톰 파커의 눈에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의 전 매니저를 떠나, 파커와 계약을 맺는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레코드 회사들을 일대 소용돌이에 몰아 넣었으며, 결국 RCA-Victor가 치열한 쟁탈전 끝에 1955년 11월 당시로는 놀라운 금액인 3만 5천 달러에 그와 계약을 맺는다. 선 레코드 샘 필립스 사장은 나중에 그가 RCA의 황금 덩어리란 사실을 알고, 가슴을 치며 억울해 했다지만, 엘비스를 발굴해낸 선 레코드사의 공로는 두고두고 록 음악사에 기록되리라 생각한다. 1956년 1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와 쳇 엣킨스, 베이시스트인 빌 블랙과 드러머인 D.J 폰테나의 반주로 내쉬빌에서 그의 최초인 레코딩 세션을 완성시켰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6년 1월 28일 "도지 브라더즈 쇼"에

출연 함으로써 CBS의 방송망을 통하여 전국적인 TV 데뷔를 했고, 그 직후 RCA에서의 첫 번째 곡인 "Heartbreak Hotel"이 발표되어 컨트리 앤드 웨스턴,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팝 분야에서 대 히트를 날렸다.

TV와 콘서트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골적인 성묘사에 대한 찬반 양론의 화제 속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는 발라드 곡인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와 양면에 "Don't Be Cruel/Hound Dog"으로 대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그가 9월 7일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여 상반신만 방영된 해프닝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놀라운 성공은 계속 되어서 "Love Me Tender" "Too Much", 그리고 "All Shook Up" 등으로 잇달아 대 히트를 터뜨렸다. 1956년에는 첫 영화인 "Love Me Tender"가 개봉되었고,이어서 1957년에는 "Loving You","Jailhouse Rock"이 발표되었다. 그는 "King Creole" 영화 완성을 위하여 2개월간 연기 지도를 받았지만, 1958년 3월 초에 엘비스는 군복무를 위해 2년간의 공백 기간을 갖는다. 엘비스가 원하면 특별 대우도 받을 수 있었는데, 엘비스는 보통 사병을 원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2년 동안 단 한번의 레코딩을 가졌을 뿐이지만 그의 히트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복무 중에도 "Wear My Ring Around Your neck","Hard Headed Woman" 양면곡인 one Night/I Got Stung"과 "A Fool Such As I/I Need Your Love Tonight"그리고 "A Big Hunk O' Love 등이 히트를 기록했다.

1960년 3월 사회로 복귀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곧바로 그를 1976년까지 대중으로부터 보호하고 격리시킨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라는 것을 조직하였고, 더욱 충실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뮤지션들을 추가하여 녹음을 시작했다. 이 당시의 음악은 전 보다는 기운 차지 못하고 열광적이지 못한 것이었으나 "Stuck on You" 그리고 "Are You Lonesome Tonight"등이 스매시 히트에 올랐다. 1960년 5월 12일 ABC-TV에서 방영된 "웰컴 홈 엘비스"는 약 6분짜리 프로로서 약 12만 5천불을 받았다. 그 쇼를 마지막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8년동안 TV쇼에 출연하지 않았는데 특이할만한 점은 록큰롤은 "거칠고, 무모하며, 사악한 표현 형태"라고 깎아 내렸던 프랭크 시나트라가 사회를 보았다는 점인데 어쩌면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의 전처를 밟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1년 엘비스 프레슬리는 8년 동안 갖지 않은 실황 공연에 출연하였고 "Flaming Star","Wild In The Country" 그리고 "Follow That Dream" 등의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수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반면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별난 위치에 무대를 세우고 수많은 한창 때의 육체파 여자들을 부각시키며 비슷비슷한 따분한 구성을 반복하는 이익이 남을지는 모르지만 지각없는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이후 7년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일한 리드밍 앨범이 된 것은 가스펠 앨범인 "His Hand In Mine And How Great Thou Art" 였고 그 밖에 "Surrender","I Feel So Bad","His Latest Flame/Little Sister","Can't Help Falling In Love","Good Luck Charm","She's Not You" 그리고 "Return To Sender" 등이 히트했다. 1962년 이후 히트곡은 극히 평범한 곡으로 이루어 지는데,"Devil In Disguise"," Bossa Noba Baby","Kissin' Cousins","Viva Las Vegas" 그리고 완전히 잊혀진 "Do The Clam" 등이 그러한 곡이다.

1968년 50년대 록큰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남을, 처음으로 암시하는 TV 컴백 프로가 방영되었다. 그의 스페셜이 방영되고, 일주일도 채 못되어서 그의 후기 싱글 중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인 "If I Can Dream"이 주요 히트가 되었다. 그 스페셜 프로는 1968년 12월 3일 NBC에서 방영되었는데 대규모로 제작된 곡들을 선발된 청중 앞에서 스코티 무어, 폰테나와 함께 연주하였다. 그 스페셜은 그 해의 텔레비젼 방송 중 5개급의 고급 쇼 프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어쩌면 그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처음으로 출간된 앨범 "From Elvis In Memphis"는 14년 동안 멤피스에서 녹음된 최초의 앨범으로 일반적으로 그의 후기 앨범 중 최고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앨범에는 그의 몇 안되는 사회적 의식이 담긴 곡인 맥 데이비스의 "In The Ghetto"가 포함되어 있고 이 곡도 역시 대 히트가 되었다. 1969년 여름 엘비스 프레슬리는 라스베가스의 인터내쇼날 호텔에서 실황 공연을 재개했는데, 이 공연의 반주는 30인조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컨트리 분야 최고의 연주자들인 기타리스트 제임스 버튼과 키보드 주자인 글렌 하딘이 리드하는 5인조 캄보가 담당했다. 9월에 그는 "Suspicious Minds"로 히트를 차지하고, 이어서 "Don't Cry Daddy"와 "The Wonder Of You" 톱 송들을 다시 녹음했다. 그는 다시 미국의 선발된 지역의 순회 공연을 나섰는데,이것은 1975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가끔 라스베가스에 출연할 뿐이었다.

그는 라스베가스에서 출연료가 비싼 아티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50년대 말 그토록 열렬하게 따랐던 젊은 청중들과 함께 가졌던 과거의 인기는 다시 얻을 수 없었으며 체중이 늘고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고 공연이 나약해지고 형식적이 되어감에 따라 과거의 대한 향수의 빠지는 활동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에 이례적인 레코딩에는 1971년의 "Elvis Country" 앨범과 1972년의 스매시 히트 싱글인 "Burning Love"가 있다. 1973년 1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호놀루루에서 36개국에 위성 중계된 공연을 가졌고, 4월에는 NBC-TV에 출연했다. 그 쇼는 약 일억인의 지구 가족이 시청하였고, 쇼 앨범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의 주요 히트 앨범이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은 더욱 더 나약하고 기계적이 되었으며,약물 복용과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게 돌았다. 그는 1974년의 "Promised Land"와 1977년 그의 초기 레코딩인 "The Sun Sessions" 발매했다.

1977년 8월 16일 그는 심장관계 질병으로 멤피스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앨범은 그가 죽기 전에는 판매가 부진하였으나, 팬들은 그의 죽음의 따라 그의 앨범을 사려고 난리였다. 비록 비틀즈,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몇몇 앨범과 싱글 부분이 뒤지기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최다 챠트 앨범, 최다 양면 히트 레코드, 그리고 24년간 연속 챠트 등의 기록을 갖고 있다.

 

엘비스는 현재 사후 30년째 '생존설'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아래 글은 참고로만 읽어 보시고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2 Episode - Elvis Presley


제    목 Episode - Elvis Presley

DRAMATIC PHOTOS PROVE ELVIS FAKED HIS DEATH IN 1977!
극적인 사진이 엘비스가 1977년도 그의 죽음을 위조했음을 증명한다.



멤피스 - Elvis Presley는 1977년도에 그의 죽음을 위조했다.

위클리 월드 뉴스에서는 엘비스가 그의 장례식 후 엘비스가 관 주위를 돌아다니는 이 믿지 못할 사진과 함께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사진은 엘비스의 장례식 후에 친구에 의해 찍어졌다.

그 엘비스의 친구는 사진과 그 놀라운 비밀을 20년동안 혼자만 알고 지냈다. 왜냐하면 엘비스가 그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엘비스는 내가 여태껏 아는 사람 중 가장 좋은 사람 이였지요"라고 익명을 요구하는 그 사진을 찍은 친구가 말했다. "엘비스는 내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었습니다."

전에 잡지사 기자였던 이 사람은 20년전 엘비스의 장례식에서 약간의 의심스러운 점들을 눈치챈 후 엘비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장례식을 가득 채운 수많은 눈물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엘비스의 가족들 사이에서 장례식 이외에 뭔가 다른 일이 꾸며지고 있는 것 같은 눈치들이었죠. 나의 기자 적인 본능이 발동했고 나는 무엇이 꾸며지고 있는지 알아내기로 결정했지요."

그래서 이 40세의 남자는 장례식이 끝날 무렵 방을 슬며시 빠져나와 근처의 화장실에서 몰래 잠복해 있었다. " 10분후 오르간 연주자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라고 그는 기억했다. "나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커튼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모두 떠나기를 기다렸지요. 마지막으로 문이 모두 닫히는 순간 엘비스의 관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났습니다. 그 때 갑자기 엘비스가 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품을 하더군요 마치 낮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이죠. 난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엘비스가 움직이는 장면을 찍었습니까. 손이 떨려서 셔터도 누르기가 힘들었지요. 나는 엘비스가 관 밖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그 때 엘비스의 경비원에게 그만 들켜버렸습니다."

두 건장한 경호원이 그 사진사를 움켜쥐고 그의 손으로부터 카메라를 낚아챘다.그리고 카메라를 막 부수려고 할 때 엘비스가 끼어들었다. 엘비스는 우리가 난투를 벌이는 것을 들었고 그 경비원에게 그만두라고 말했다. 엘비스는 " 이 사람은 내 친구야 그리고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하여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비밀을 꼭 지켜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고 그는 나에게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날 믿는다고 말했지요"

그 사람은 그 극적인 사진을 20년동안 서랍 속에 비밀히 보관해 왔으며 엘비스가 말하기 전까지 사진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내 엘비스가 2주전에 " 좋아 사진을 발표하라고. 이제는 어째든 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 사진은 언론에 발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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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여름 어느 날,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에 위치한 허름한 벽돌건물 앞에서 기타를 어깨에 멘 백인 청년

한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여직원의

물음에 그는 자비로 음반을 하나 녹음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멤피스 음악계를 주도하던 선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는 4달러만 내면 누구나 자작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

청년은 노래 두곡을 불렀고, 음반사의 여직원은 그의 재능에 좋은 인상을 받아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음,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이라고 덧붙여 두었다.

 

 

훗날 이 청년은 그날 만든 자비 음반이 어머니의 생신 선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가수가

되려고 자청해서 오디션을 본 것이라고도 해석했다.

청년은 낮에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계속했다.

첫 번째 자비 음반을 만든 지 1년이 지난 1954년 여름,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흑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백인 가수”를 찾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가 예전에 본 그

청년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최초의 정식 녹음 작업 도중에 청년은 That's All Right (Mama)라는 유명한 곡을

장난삼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바꿔 불렀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노래를 듣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7월 10일 밤 9시 30분경, 그 노래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멤피스 인근에서 이름을 알렸고, 그윽한 눈매와 냉소적인 미소로

십대 소녀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곧이어 그는 일명 ‘대령’으로 통하는 톰 파커를 매니저로 맞이하고 대형

음반회사인 RCA와 계약했다. 1956년 초에 Heartbreak Hotel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Hound Dog, Don't Be Cruel, Love Me Tender 등이 연이어 히트했다. 아울러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특유의 몸동작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엘비스 애런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에 미시시피 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였지만 형이 태어

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외아들로 자라났다. 프레슬리의 부모는 이른바 ‘힐빌리’로 불리는 남부의 가난한

백인 계층이었다.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했고, 아버지는 한때 밀주 판매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엘비스는 그 어머니의 외모와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버지가 무능하고

폭력적인 까닭에 모자관계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돈독했다.

 

1948년에 엘비스의 가족은 테네시 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트럭 운전 등의 일을 하던 엘비스는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한 기회에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의 엘비스는 말론 브랜도나 제임스 딘 같은 유명 배우의 냉소적인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특유의 외모도 나름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드름을 가리려고 두툼한 메이크업을 선호했고, 눈을 돋보이게 하려고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를 상용했으며, 나중에는 코에 약간의 성형수술도 받았다. 머리카락도 원래는 짙은 금발이었지만, 무대에 설 때면 항상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엘비스의 초기 활동에서는 음악 못지않게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비스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영화였지만, 어디까지나 가수로서의 인기에 편승해 졸속으로 제작된 것이다 보니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엘비스가 평생 춤에는 능숙하지 못해서, 영화 촬영 중에도 종종 안무가가 가르쳐 준 스텝을 까먹고 쩔쩔 맸다는 점이다. 그가 종종 무대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몰고 온 센세이션을 생각해 보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았다(미국은 1973년까지 징병제를 실시했다). 국방부에서는 연예 사병

근무를 제안했지만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제작

으로 인해 한 번 입대를 연기한 그는 1958년 3월 24일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는다. 군 복무 기간 동안에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사망이었다. 엘비스는 이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일각에서는 이후

그의 은둔과 기벽 역시 이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해 가을, 엘비스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서독의 미군 기지로 배치되어 18개월 동안 근무했다. 훗날 아내가 된 프리실라 블라우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1960년 3월 2일에 전역한 엘비스는 대대

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러나 군 복무 중에도 여전했던 인기는

엘비스가 과거의 반항아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십대 외에 장년층에게도 인정받으며

인기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열기는

예전만 못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엘비스는 음악보다 영화 쪽에

전념했고, 촬영이 없을 때에는 멤피스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에 은거했다.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로 통하는 그의

친구들이 일종의 친위대 노릇을 하며

갖가지 향락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까닭에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1960년대의 엘비스는 음악적으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이전만큼 열광적이지 않았다.

비틀즈를 위시해 크림,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등이 줄줄이 등장해서 로큰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던

그 즈음, 엘비스는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물 간 스타로 여겨졌다. 특히 비틀즈는 1965년의 미국

투어 도중에 그레이스랜드에서 엘비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우상 엘비스는 1961년

이래 영화 말고 음악 공연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프리실라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1968년에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고, 1973년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인 하와이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는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한 해 동안 엘비스는 무려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각성제로 시작한 약물 남용이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섞어 먹는 지경에 이르며 그의 몸을 망가트렸던 것이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사망한

다음이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약물 남용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관계자들은 어째서 인지 극구 말을 아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갑작스런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늘날 멤피스는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팬들이 순례하는 엘비스의 성지가 되었다.

 

‘왕’(The King)이라는 별명처럼 엘비스는 로큰롤의 역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며, 그 장르의

폭발적인 인기를 선도한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빌보드 차트 10위권 안에 36곡, 1위에 17곡을 올렸고, 미국 내 1억 장 이상, 전 세계 10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엘비스의 기록에 버금가는 음악인은 비틀즈뿐이다(참고로 비틀즈의 기록은 각각 29곡, 20곡, 1억

7천만 장 이상, 10억 장 이상이다). 엘비스의 흑인 창법은 한때 “흑인 음악을 훔친 백인 가수”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그나마 엘비스의 인기 덕분에 흑인 음악

인의 운신 폭이 더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보다 더 첨예한 논란은 엘비스의 인기가 음악성 때문인지, 아니면 한때의 유행 때문인지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의 성공에서 음악 못지않게 ‘논란 마케팅’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꼬집는 지적이 아닐까.

목소리 하나만큼은 훌륭한 엘비스였지만, 악기 연주나 작곡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음악성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 사실이었다. 초기의 폭발적 인기가 수그러진 다음, 오로지 음악성으로만 승부해야 할 시점에

내놓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점은 이런 한계 때문으로 지적된다. 비틀즈를 위시한 다른 후배 음악인

들이 새로운 실험과 변모를 시도했던 것에 비하자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변화를 기피한 엘비스의 태도는

큰 아쉬움을 남겨주는 면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엘비스의 인기는 십대 문화의 대두와 맥을 같이한다.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내트라의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이 대세일 때 청천벽력처럼 나타난 로큰롤은 기성세대와의 단절과 반항을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로큰롤에서 억눌린 욕망의 분출구를 발견했다. 엘비스의 ‘엉덩이 춤’은 성적 암시를 담았다는 이유로 언론과

학부모에게 뭇매를 맞았고, 데뷔 초 TV에 출연했을 때는 공연 내내 카메라가 그의 상체만 비추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십대들, 특히 소녀 팬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다. 엘비스야말로 오늘날처럼 십대 팬을 대중음악의

중요한 소비계층으로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비록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여 우상이 되긴 했지만, 엘비스 본인은 오히려 반항아와는 거리가 먼 모범생

타입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엘비스의 약물남용 문제는 오래 전부터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은 주로 암페타민 등의 각성제를

남용한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정 상태 역시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또 다른 의외의 사실이다.

무절제한 사치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엘비스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매니저인 ‘대령’에게

뜯기는 전형적인 노예계약의 희생자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로큰롤의 슈퍼스타라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연예계의 비리 앞에서는 무력했던 셈이다. 엘비스 사후에 유족들은 결국 ‘대령’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여 고인의 권리를 일부나마 회복했다.

오늘날 엘비스 관련 산업은 매년 수천만 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다.

 

한때나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엘비스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모든 것이

졸지에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그는

자신의 인기가 뚝 떨어져서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예전과 같은 빈털터리가 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힘든 일, 눈물,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엘비스의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로

존재하는 데 너무 지쳤단 말이에요.” 그의 이런 발언 때문일까?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엘비스가 죽지 않았으며 어디선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전설만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우리나라에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기로는 피터 해리 브라운과 팻 H. 브로스키 공저의 <엘비스, 끝나지 않은 전설>(성기완 외 옮김, 이마고, 2006)이 아직까지는 유일무이하다. 다만 이 책은 정작 엘비스의 음악보다는 마약과 연애 같은 사생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과연 한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엘비스, 끝나지 않은 전설비틀즈 뒤집기

 

애의 문제점 때문에 업적이 폄하되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업적 때문에 생애가 미화되어서도 곤란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엘비스는 어느 누구보다 더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고, 그에 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위대한 가수”에서 “약물 중독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기 일쑤다. 엘비스의 사후에는 특히나 “신화

깨트리기”의 경향을 지닌 비판과 폭로가 연이어졌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그런 경향은 그의 생전에나 사후

에나 “신화 구축하기”가 지나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애초에 미화와 은폐가 컸던 까닭에 폭로와 고발의 후유증 역시 컸던 것은 아닐까. 이런 논란과 검증이야말로

한 인물이나 사건이 역사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벌어지게 마련임을 기억한다면, 한 사람에 대한

다양한 (물론 때로는 좀 심한 경우도 있지만) 평가를 무작정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다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찬사뿐 아니라 비난까지도 청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책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들>(정영일 옮김, 대종출판사, 1978)은 아닐까 싶다.

엘비스는 사망 직전인 1976년에자신의 친위대인 ‘멤피스 마피아’ 가운데 세 명(레드 웨스트, 소니 웨스트,

데이비드 헤블러)을 돌연 해고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들은 엘비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책을 썼는데, 위의 책은 그 번역본이다.

다분히 선정적인 내용이지만 엘비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비록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악의가

있다 치더라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엘비스의 음악에 관한 보다 진지한 논의는 찰스 T. 브라운의 <비틀즈 뒤집기>(박상철 옮김, 꾼, 1997)의 관련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목만 보면 마치 비틀즈에 관한 책 같지만, 원제는 “로큰롤의 예술”(The Art of Rock and Roll)로 엘비스

에서 시작해 비틀즈를 거쳐, 포크 록, 아트 록, 잉글리시 록, 컨트리 록, 헤비메탈로 발전해 나가는 로큰롤의

역사를 주요 장르와 음악인 별로 일별하는 책이다. 저자는 엘비스의 음악적 스타일을 가사, 보컬 특징, 무대

매너, 신앙심과 성적 매력,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의 여러 가지 주제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엘비스의 본령이 가수이니만큼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수이리라. 아울러 지금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의 활동 초기와 말기의 공연 모습을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어서, 그의

전성기 때 모습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