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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근대현대 인물

청명 임창순 이분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

by 연송 김환수 2010. 6. 17.

한학자 청명 임창순 (任昌淳 1914.5.30∼199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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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충북 옥천 생. 호 청명(靑溟). 1963년 [태동고전연구소] 설립, 단절될 뻔한 우리나라 한학(漢學)의 맥을 이은 대가.


1960년 4ㆍ19혁명 당시 교수 시위를 주도했다가 해직된 후 만든 이 연구소는 인문학, 경제학, 심리학 등 각 분야 대학 교수 40여 명을 포함해 150여 명의 한학 인맥을 배출, 우리나라 한문 교육의 산실로 발전했다.

4.19혁명 당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쓰는 청명 임창순 교수

 

행동하는 지성 임창순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선 교수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방랑연운 청명 임창순'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연다. 2009.4.10 << 문화부 기사참조, 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

 

 

청명 임창순 서예전 (서울=연합뉴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방랑연운 청명 임창순'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마련한다. 청명은 애연가였다. 2009.4.10 << 문화부 기사참조, 서예박물관 제공 >>

 

서지학(書誌學)과 문헌고증에도 일가(一家)를 이뤄 문화재위원장을 지냈으며, 1998년에는 사재를 털어 [청명문화재단]을 설립, 지속적인 후학 양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학자·금석학자. 호 청명(靑溟).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靑山面) 출생. 1927년부터 6년간 충북 보은의 관선정(觀善亭)에서 성리학자 홍치유(洪致裕)를 사사하면서 한학을 익힌 뒤, 평생 독학으로 학문연구에 진력하였다.
  * 관선정 : 충북 보은 선병국 가문에서 관선정(觀善亭)이라는 건물을 짓고 뛰어난

                인재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선병국 가옥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yescheers/8597779


1945년 독학으로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같은 해 경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문교부 교수자격을 취득하고 1946년 대구사범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1952년 동양한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1954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1962년까지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1960년 4ㆍ19혁명이 일어나자 대학 교수단 시위에 이어 이듬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심의위원으로 참가해 1962년 해직되었고, 1964년에는 인민혁명당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3년에는 서울 종로구에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를 설립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 강좌를 열었다. 1974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水洞面)에 한문 서당인 [지곡정사(芝谷精舍)]를 세우고, 1979년 [태동고전연구소]를 이 곳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태동고전연구소]는 국학을 전공하는 인재양성소로 변모해 1998년까지 총 5,000여 명이 수강하였고, 그 가운데 40여 명의 대학교수가 배출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일명 '태동학맥'으로 부른다. 1985년에는 연구소를 한림대학교 부설 기관으로 넘기고, 1998년에는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한학ㆍ금석학ㆍ서지학ㆍ서예 등 한국 전통문화에 통달했으며, 문화재위원장(1985), 한국서지학회 회장ㆍ명예회장(1994-1999), 청명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8년에는 계간지 [통일시론]을 창간하였다. 경복궁 흥례문(慶福宮興禮門)의 상량문(1998)도 그의 작품이다. 1976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한국 금석집성(金石集成)> <당시정해(唐詩精解)>(1956) <한국의 서예>(일어판)

            <한국미술전집>(서예편) <신역옥루몽(新譯玉樓夢)> <한국금석집성>(1984)

【작품】경복궁 흥례문 상량문(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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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한학­후진 양성> - [조선일보](1999. 4. 13)


“이제 내 할 일을 다했다.”


지난 해 6월 후학을 위해 재단법인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한 직후, 임창순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재단법인 청명문화재단  :  http://www.chungmyung.org/

 

 

 

갖고 있던 집과 땅을 판 것은 물론, 소장한 문화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양도해 만든 기금 20억여 원으로 후학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든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노선비는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망구(望九)를 훌쩍 넘긴 나이, 친한 벗처럼 자꾸만 찾아오는 육체적 질병에도 학문을 향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80년대 중반 내놓은 <한국금석집성>(금석: 쇠나 돌로 만든 물건에 새긴 글자) 속편을 집필하기 위해 삼국시대 이후의 금석문(金石文)을 샅샅이 훑었다. 통일과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은 지난해 말, <통일시론>이라는 계간지 창간으로 꽃을 폈다.


진정한 학자이자 선비의 모습을 육화(肉化)했던 그는 ‘속류(俗流) 근대화’의 탁류를 맞받으며 꿋꿋이 우리 것을 지켜낸 거인이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근대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14세 되던 해 충북 보은의 한 서당에서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성리학자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에게서 6년을 배운 게 고작이다.


그 뒤 집안 살림을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 들기도 했지만, 독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복 직후 중등교원자격시험에 합격, 경북중 교사로도 일했던 그는 문교부 교수자격심의위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 대구사범대ㆍ동양의약대ㆍ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사위어 가는 한학 연구의 불을 지피고 댕겼다는 점이다. 4ㆍ19 교수단 시위 주동 등을 이유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서 해직된 그는 1963년 서울 종로구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창립했다.


초창기 일반인을 상대로 한 한문 강좌에 주력했던 [태동고전연구소]는 1976년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옮겨가면서 국학을 전공하는 인재 양성소로 변화한다. 우리 한학연구의 최고 아카데미로 변신한 것이다.


지곡서당에서 배출한 제자 150여 명은 국문학, 사학, 철학은 물론, 법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 영역에 두루 퍼져 있다. 이곳서 배출한 교수만도 근 40명.


그는 최근 당시 200여 수를 우리말로 풀이한 <당시정해>를 40여 년만에 다시 고쳐 출간하는 등 최근까지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경복궁 흥례문 상량문도 썼다.


평소 뜻에 따라 고인은 화장된 뒤, ‘지곡서당’이 있는 남양주군 지둔리에 뿌려질 예정이다.


강직한 선비로 평생을 지낸 그가 가장 좋아했던 어구는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조선 한문학의 태두로 불린 신흠(伸欽,1566~1628)이 <야언(野言)>에 남긴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라는 어구를 무척 좋아해, 늘 가까운 곳에 걸어 놓았습니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야언 :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 선비는 뜻을 숭상하고, 배움을 두텁게 하며, 예를 밝히고, 의리를 붙들고, 청렴을 뽐내고, 부끄러워할 줄 안다. 하지만 또 세상에 흔치가 않다.’

 

1628년에 62세의 나이로 영면한 조선시대 학자 신흠이 저서 ‘사습편’에 남긴 글의 내용 일부다. 그의 지적대로 선비다운 선비는 어느 시대에도 흔치 않지만 없지는 않다.

 

이 시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象村 申欽선생(1566~1628)의 시로 뒤에 두 귀절이 최근 알려진 名句다. 백범 김구선생이 애송했다는 구절이다.


桐 千 年 老 恒 藏 曲 이요.   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梅 一 生 寒 不 賣 香 이라.   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 到 千 虧 餘 本 質 이요.   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 經 百 別 又 新 枝 이라.   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100번 꺾여도 새가지가 올라온다.

  

    

                                                                지곡정사( 한문서당)

 

한국 한학계의 거두로 1999년 85세에 타계한 청명 임창순이 선비의 대표적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럴 만도 하다는 사실은 청명이 생전에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항상 가까이 걸어두고 자신에 대한 경책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여겨지고 있는 글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흠의 또다른 저서 ‘야언’의 한 대목으로 이렇다.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곧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거문고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아 안락을 구하지 않는다.’

  

 

 

 

         祝靈山屹洞雲深(축령산흘동운심) 축령산 높고 골짜기 깊은곳

         三載芸窓講古今(삼재운창강고금) 삼년동안 서당에서 학문을 닦았네

         禮樂詩書如誦語(예악시서여송어) 禮樂과 詩書는 외어 줄줄 나오고

         風花雪月好聯襟(풍화설월호연금) 바람, 꽃, 눈, 달과 함께 우정도 깊었지

         聊將理義明人極(요장이의명인극) 열심히 고전을 공부하여 사람의 도를 밝힐뿐

         豈爲功名負素心(기위공명부소심) 어찌 공명을 위하여 본심을 저버리랴

         也應夢繞舊棲林(야응몽요구서림) 함께 살던 이곳을 꿈엔들 잊으랴


         第7期硏修員 卒業 典禮席上 賦此 靑溟 任昌淳(청명 임창순)

         1988년 2월 태동고전연구소 제7기 졸업식 석상에서 청명선생의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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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象村) 신흠 (申欽,1566 ~ 1628)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효종2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

       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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