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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근대현대 인물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 (안동권씨)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7.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

 

민족을 위해 몸바침으로써 처절하게 몰락해버린 명문집안 출신 권기일의 이야기. 안동지방에서 관직과 학문이 끊이지 않고 당대 상당한 재력을 갖춘 명문집안이 순식간에 몰락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길거리를 돌며 간장을 팔아 삶을 연명한 이야기

 

                        [사람과 삶] 추산 권기일선생 손자 권대용씨

 

 

 


지금 제 처지는 넉넉지 않지만 부친과 조부가 자랑스럽습니다.

경북 안동의 명가(名家)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12대 주손

(胄孫·맏손자)인 권대용(權大容·57)씨는 독립운동가 추산 권기일(秋山 權奇鎰) 선생의 손자다.

하지만 추산 선생이 1912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3000섬지기로 40여명의 노비를 뒀던   명문거족의 자취는 10여년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추산은 전 재산을 털어 이시영(李始榮) 선생,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과 함께 만주에서 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0년 일본군에게 살해됐다.

 

그의 아들 형순(衡純)은 광복과 함께 1945년 9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형순씨는 거리에서 부인과 함께 리어카 간장 행상으로 연명했다. 안동 일대에선 양반의 장손이 행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하는 수군

거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형순씨는 평생 부친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잊지 않았다. “술 찌꺼기를 먹고 살아도 일본 놈 밑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며 고된 생활을 견뎌냈지만 가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그의 아들 대용씨는 현재 30여 년째 안동에서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1977년 뒤늦게 추산의 공로가 인정돼 건국포장을 받고 지금은 월 60만원 정도의 연금 등 보훈혜택을 받고 있지만 가문의 옛 위풍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다.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용씨는 “젊었을 때 한두 번 왜 원망이 없었겠느냐”며 “친척들이 못 살고 못 배웠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때면, 거꾸로 된 세상을 개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가족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만도

조상의 음덕이 아니겠느냐”며 웃는 여유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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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합니하(哈泥河)


                                                                                                   기사입력 | 2009-05-04

 

지난 13일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을 때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전시해 놓은 신흥무관학교 교재가 눈길을 끌었다.

교재는 채색강역형세도와 그 외에 몇 가지가 있었지만 간단하조잡해 보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에서 쓰던 교재라는 점에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 전시품을 보고 있노라니 수년전에 찾았던 만주 통화현의 합니하(哈泥河)가 떠올랐다.

장대로 쏟아지는 여름 장맛비를 맞으며, 불어난 내(川)를 건너 오릿길을 걸어 옛 신흥무관학교 터에 도착했다.


지금은 서너 채의 집들이 있고 주변은 온통 옥수수 밭인데 키를 훌쩍 넘어서는 옥수숫대로 그 일대를 한눈에 볼 수가 없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동녕, 이회영, 김동삼, 이상용 선생 등이 세운 신흥강습소를 합니하로 옮겨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1919년 5월 3일에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로 개교 하였다. 


그 신흥무관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강(합니하)이 둘러 흐르는 산기슭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요새였다.


훈련책임자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지청천 장군과 김경천, 신팔교 선생이었고 이 분들은 모여 드는 청년들을 잘 훈련시켰다.


이곳에서 훈련 받은 2,000여명의 독립군은 후에 각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교육·훈련과 농사를 병행했다.

안동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추산 권기일 선생은 그 곳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옥수수 밭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도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던 모양이다.


수년전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추산선생의 손자는 그 곳 어디엔 가에 묻혀있을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노재를 지내고 돌아왔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온 많은 젊은이 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피땀 흘리며 훈련을 하는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 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하겠다.                   지현기(대구지방보훈청)    경북일보 & kyongbuk.co.kr



 

권기일(權奇鎰)
⊙      호      : 추산(秋山)
⊙ 생몰연대 : 1886. 10. 5 ∼ 1920. 7. 3
⊙ 출 신  지 : 안동
⊙ 훈      격 : 건국훈장 애국장(90), 건국포장(77), 대통령표창(63)
⊙ 운동계열 : 한족회


1886(고종 23)∼1920.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본명은 혁린(赫麟).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2년 만주 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좌진(金佐鎭) 등 항일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扶民團)·자신계(自新契)·교육회(敎育會)를 통합,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자 구정(區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한족회가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군정부(軍政府)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외무담당·어사부장(御史部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에는 서로군정서 군사훈련학교의 비밀서류를 상해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소년독립군과 함께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史(金承學, 統一問題硏究會, 1965)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7·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8)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권기일 생가 (안동시 남후면 검안리) 1790년대 건립 추정  대지 180평, 건평 25평

권기일선생출생지(權奇鎰先生出生地)


만주의 한족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권기일(1886∼1920)이 1886년 10월 5일 태어난 집이다.
1912년 중국 봉천성(奉天省)에 망명하여 천가장(千家長)으로 활약하는 한편, 이시영(李始榮), 김좌진(金佐鎭) 등과 접촉하여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도감·경리·재무 등을 겸임하였다. 1917년 정치외교위원으로 활약중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교육회 위원, 한족회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구정(區正) 등으로 활약하다가 1920년 일경에 사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인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추산(秋山) 권기일(權奇鎰ㆍ1886∼1920) 선생의 손자가 최근 조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도장을 안동독립기념관에 맡겨 왔다.
 손자인 권대용씨가 맡긴 도장은 추산 선생의 이름이 한자로 또렷이 새겨진 물소뿔 도장으로 추산 선생이 1912년 만주로 떠나기 직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기증된 도장은 당시 추산 선생이 독립운동자금 관리를 맡으면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추산 선생이 1920년 8월 15일(음력 7월 2일) 34살의 젊은 나이에 신흥무관학교 부근 수수밭에서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되면서 도장은 주인을 잃었고 그 뒤 지금까지 87년 동안 가족들이 소중히 간직해 왔다.

 

 

권기일 집안의 수곡대장이다. 작성시기는 1869년 9월 5일이며, 지역은 안동 춘평(春坪: 현 의성군 안평면 삼촌리로 추정)이다. 대장은 일부 결본상태로 166두락의 땅에 경작자가 45명이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수곡량은 1,115말이다(권기일 유품).

 

2008년 2월 13일 추산 권기일의 후손인 권대용 선생님께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유물을 기탁하셨습니다.
안동권씨세보와 전적·문집류 160권, 고문서 240점 등 총 400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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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찾는 친일파 후손, 땅 잃는 독립군 후손

TV 리포트 |  파이미디어 [2005-08-17 08:53]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16일 방송된 MBC `PD수첩`은 이 말이 우스개 소리가 아닌 현실임을 입증 했다.

이날 방송은 최근 이완용 송병준 같은 친일파 후손들이 땅찾기 소송에 가려진 독립 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선조들의 빛바랜 사진과 유품,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이 전부였다.

 

방송에 따르면 독립 운동가 권기일 선생은 엄청난 토지를 모두 처분하고 독립 운동에 나섰다.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된 선생이 남긴 것은 독립 운동 당시 사용했던 도장 하나가 전부였다.

그의 후손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안동에서 독립 사관학교의 역할을 한 `협성 학교` 설립자인 김성일 선생은 모든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이주해 해외 독립 기지 건설에 주력했다. 

 

그의 후손은 "삶이 어려웠겠다"는 제작진의 질문에 “짐작해 보면 모르나. 사람 없지 돈 없지 모든 교육을 못 받았다”며 힘든 삶을 헤쳐왔음을 시사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로 무장 독립 투쟁에 앞장 선 일송 김동삼 선생의 가족은 해방 후

44년이 지난 1989년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동의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사용됐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은

후손들이 찾을 엄두 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석주 후손은 무려 10여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집안. 이 과정에서 집안 장손 4대가 희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후손들은 집의 명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석주 선생의 한 후손은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나와도 집도 바로 잡아 놓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희생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었다. 이 같은 현실은

방송이 소개한 민족문제 연구소와 한 언론사가 조사한 독립 운동가의 생활실태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조사결과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 중 58%가 무직, 1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학력은

대졸은 16%에 불과한 반면 중졸이하와 무학이 50%를 넘었다. 이런 현실에서 약 60% 독립

운동가 후손들이 하층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시청자들은 “독립 운동자를 이렇게 무시하는 나라가 어디있나”(zones29) “친일파

재산 환수법을 촉구한다”(ds2qiz), “대한 민국의 정통성은 일제인가”(semipower) 등 분통을

터뜨렸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선 독립 운동가들이 후대에 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국가에서조차 인정

받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나설까.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 소송이 줄을 잇는 가운데 선조의 땅 찾기를 포기한 한 독립 운동

가의 외침은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을 보는 듯 했다.

“친일파 후손들은 법의 보호를 받아서 땅을 찾고 독립 운동한 사람은 법이 없어서 땅을

못 찾는다... 어떻게 매국노의 재산은 법이 뒷받침 되어서 찾을 수 있고 독립 운동한 사람의

재산은 법이 없어서 못 찾아준다. 이게 나라라고 할 수 있나.

 

                                     ”(사진=석주 이상룡 선생과 임청각)[TV리포트 조헌수 기자  

                                                                               pillarcs3@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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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秋山(추산) 權寄鎰(권기일) 선생 기념비

일젱에 항거해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8년 만에 중국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참살 당한 순국열사 추산 권기일 선생이 우리 안동 권씨 가문에 계십니다.
추산 선생은 1912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등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보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다가 순국하셨습니다.

이제 선생을 다시 역사의 무대로 모셔 와서 그 뜻을 새기기 위해 선생의 고향인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추산 권기일선생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업적을 다음 비문에서 우리는 잘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비문>


여기 대곡마을은 꺼져 가는 민족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몸 바친 추산 權寄鎰(권기일) 1886∼1920)선생이 나신 곳이다. 안동권씨 副正公派(부정공파)의 후예인 선생은 可徵(가징)공 이후 10대째 맏집을 이은 胄孫(주손)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친 洙道(수도)공과 모친을 여의고, 조부 憲鳳(헌봉: 통훈대부 사근도참판)공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지 위해 만주로 먼길을 떠났고, 선생도 그 길을 택하였다. 가슴에 타오르는 민족사랑의 열기가 그를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부모를 남겨둔 채 가족을 이끌고 1912년 3월 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 도착한 선생은 이상룡 김동삼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정학사에 합류하였고,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의 지역대표일 區正(구정)과 교육회 위원으로 활등하면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되는 동포사회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독립자금을 수송하다가 1917년에 일본정찰에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이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1920년에 일본군이 동포사회를 짓밟으니 ,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그 와중에 선생도 1920년 8월 15일 길림성 유하혈 합니하의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으니 , 망명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나라를 되찾으려 35세 젊음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추산선생!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숨결 이 배어 있는 이 마을에 돌을 세우노니 모두 옷깃을 여이고 귀 기울여 보라.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선생은 지금도 깨우치고 계시리니 .
                                                            -2001년 6월 15일-

                                                            안동대학교 교수:   김희곤 짓고
                                                            성균관대학교 교수: 김세일 만들고
                                                            추산 권기일 선생 기념비 건립위원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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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권씨능동재사(安東權氏陵洞齋舍)

중요민속자료 제183호

 

고려 삼태사 중의 한사람이자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을 제사하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마루·방·곳간 등 16칸을 처음 지었고, 숙종 9년(1683)에 누각 7칸을 더하여 지었다.

 

영조 19년(1743) 불로 건물이 모두 불타서 다시 지었고, 고종 33년(1896)에 다시 불이 나서 당시 70여칸이던 건물 중 임사청·전사청 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불타서 다시 지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왼쪽에 높은 축대를 쌓아 문루인 추원루를 세웠고, 누문 안쪽에 정면으로 재사 큰채가 있다. 큰마당을 둘러싸고 양 옆으로 안사랑채인 동재와 헛간채인 서재가 튼 ㅁ자를 이루고 있다.

 

동재의 뒷쪽으로는 별당인 임사청과 곳간채인 전사청·안채인 주사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日자 모양이다.


구조적인 면에서 큰 특징은 없지만 재사건물로는 보기드물게 큰 규모로 조선시대 제례행사의 성대함을 짐작하게 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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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이우당 종택(二愚堂 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9호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건물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임하지파(臨河之派) 이우당(二愚堂) 권환(權寏)의 종택으로 조선 인조(仁祖) 18년(1640)에 건립한 것이다.

 

이 종택은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사랑채 앞에 대문간채와 중문간채가 있었던 집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책방과 통하게 되어 있다. ‘ㅁ’자형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는데, 왼쪽이 안방이고 그 앞에 부엌, 아랫방 아랫 부엌이 있다. 집터의 모양을 따라 북동향으로 지었으나 대청을 북쪽에 두어 여름에 시원하게, 온돌은 남쪽에 아궁이를 두어 겨울에 따뜻하게 하였다.

 

사당은 본채의 남쪽에 위치하며 담장과 대문이 있다. 

 

 

 

 

 

 

 

 

 

 

 

 

 

 

안동(安東)권씨(權氏)의  역사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 즉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나왔다.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김행은 고려 태조와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태조는 김행의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라며 권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작위를 제수하였다.
권행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면서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하는 실제 영주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世襲)하였다.
고려 개국과 함께 안동권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권수평(權守平)은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권수평의 증손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이라는 명성을 떨쳤다.
분적종 및 분파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 1476년(성종 7)에 출간되었다. 중국 연호인 성화연간(成化年間)에 제작되어 ‘성화보’라 세칭하는데 본래 명칭은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이다.
수중공파(守中公派), 부호공파(副戶公派), 추밀공파(樞密公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동정공파(同正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별장공파(別將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중윤공파(中允公派),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대의파(大宜派), 추파(樞派), 검교공파(檢校公派)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봉화군
경상북도 안동시
경상북도 영주시
경상북도 예천군
경상북도 청송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196,566가구 총 629,29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