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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소유권 등기제도

by 연송 김환수 2009. 11. 17.

인간은 어떠한 상태로 태어나든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존엄하게 대우받아야 하며, 성별이나 종교, 피부색, 국적,

빈부차이, 사회적 지위, 신체적 또는 정신적 조건등에 관계없이

인간으로 태어나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글을 스크랩

하여 등재하였음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신분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어 노비제도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현대판 노예라는 학대받는 기사를 접할 때면 예나 지금

이나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에 대한 소유권 등기제도 = 노비 입안 문서

 

전북일보 관련기사.pdf

 

사람을 사고파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다.

 

천인 신분인 노비들은 얼마든지 사거나 팔수도 있었고 증여도

가능했다.

 

노비를 사고 팔 때는 토지나 가옥을 사고 팔 때와 같이 소유권을 이전하고 이를 관청에 신고하여 증빙을 받았는데 이러한 문서를 입안이라 하였다.

 

입안을 받는 것은 법으로도 규정되어 있었다.

 

노비는 토지와 가옥과는 달리 출산으로 인한 증가와 도망의

우려가 있는 움직이는 재산(動産)이기 때문에 소유권의 보전은

매우 중요하였고 또한 이중매매로 인한 쟁송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토지매매의 경우보다 입안의 필요성은 더 높았다.

 

마치 인간에 대한 소유권 등기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사진설명 : 1772년 3월 23일 강진군 열수면 군자리에 사는 유학 김재옥이 비 1구를 사고 관에 입안을

                      요청한 후 발급받은 노비매매관련 점연(貼聯)문서이다.

    

사진은 전라도 강진군 열수면(現 작천면)에 세거하던 안산김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문서로 매매문기로부터 입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문서가 이어 붙여져 있다.

 

접해 있는 부분과 곳곳에 관인이 찍혀있으며 이 문서에는 입안

받는 절차와 매도자의 매매동기, 기타 노비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1772년 봄에 김재옥은 같은 마을에 사는

김필채로부터 계집종 1명을 사들인 후 매매문서를 첨부하고

관에 입안을 요청하였다.

 

이를 접수한 강진 군수는 입안을 발급 해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매매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매도자 김씨와 증인 김씨를 불러 다시

일종의 확인서에 해당하는 초사(招辭)를 작성한 후에 입안문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로써 소유권 이전이 완료되었는데 이 과정에 소요된 기간은

불과 열흘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날 소유권이전 등기 시 매도자와 매수자가 계약을 한 후 각각

서류를 지참하고 관할 등기소에 신고하는 절차와 사뭇 비슷하다.

 

살펴보면 김재옥이 매득한 복상이라는 계집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몸값 열 냥에 팔려 어미 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소유권은 벌써 세 번째 바뀌게 되는 상황이었으니

지금 같으면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팔려가는 인간적 고통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조선시대 노비는 매매가 가능하였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가격도 말 한필보다 쌌으니 비록 사람모습이지만 법과 제도적

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소나 말과는 달리 쉽게 도망할 수도 있는 존재여서 노비의

소유권은 법과 제도로 보존되도록 절차를 둔 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전란과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이완은 노비매매제도와 절차에도 변화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즉 노비의 입안 절차 역시 조선후기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관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白文記)가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법제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씩 현대판 노비라는 제목아래 인간이 인간을

가혹하게 학대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 대한 최선의 가치는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아니가 싶다.                   

                                                                                               (정성미 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

 

                                                                                       출처 : 전북일보 2007년 3월 2일(금) 16면

 

8788

 

 

 

1784년 필사본 안산김씨문안(安山金氏門案) 3책 에서 김재옥 확인

 

 

 

 

  

 1784년(건륭49년) 정조8년 자료에서 김재옥(金再玉) 실명확인 (오른쪽 3번째)

 

 

기타 참고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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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立案) 이란 ?

과거에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관청에서 발급한 문서.

입안
6115kb

재산권이나 상속권을 주장하는 데 절대적인 근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 제도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실물이 많이 전하여진다.

 

문서 형식은, 발급 날짜와 어느 관서의 입안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증명할 내용을 기록한 다음 입안했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담당 관서의 실무자와 책임자가 서명하였다.

 

종류에 따라 입안 발급을 요청하는 소지(), 관계 문서, 관계인과 증인의 진술이 첨부되기도 하였다. 내용은, 매매나 상속으로 인한 토지·가옥·노비 및 기타 재산의 소유권 이전, 재판 결과[], 양자 입적[] 등이 있다.

 

경국대전》에는 토지·가옥·노비는 매매 계약 후 100일, 상속 후 1년 이내에 입안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관의 허락을 얻는 동시에 공증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 도망갈 우려가 있고 출산으로 재산 가치가 변하는 노비의 경우에는 조선 후기까지 그 규정이 지켜졌으나 토지와 가옥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부터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재판의 승소자는 소송사실과 승소내용을 밝힌 입안을 받았고, 양자를 들였을 경우에도 예조에 요청하여 그 사실을 증명받야야 했다. 정려() 사실도 부역의 면제와 같은 경제적 특전이 수반되었으므로 입안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 밖에, 죄인의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여 남에게 양여하는 경우나, 도둑을 맞았을 때 후에 참고하기 위하여 잃은 물건의 내용과 특징을 신고한 경우 등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다양하였다 .

 

재산권이나 상속권을 주장하는 데 절대적인 근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 제도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실물이 많이 전하여진다. 문서 형식은, 발급 날짜와 어느 관서의 입안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증명할 내용을 기록한 다음 입안했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담당 관서의 실무자와 책임자가 서명하였다.

 

종류에 따라 입안 발급을 요청하는 소지(), 관계 문서, 관계인과 증인의 진술이 첨부되기도 하였다. 내용은, 매매나 상속으로 인한 토지·가옥·노비 및 기타 재산의 소유권 이전, 재판 결과[], 양자 입적[] 등이 있다.

 

경국대전》에는 토지·가옥·노비는 매매 계약 후 100일, 상속 후 1년 이내에 입안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관의 허락을 얻는 동시에 공증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 도망갈 우려가 있고 출산으로 재산 가치가 변하는 노비의 경우에는 조선 후기까지 그 규정이 지켜졌으나 토지와 가옥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부터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재판의 승소자는 소송사실과 승소내용을 밝힌 입안을 받았고, 양자를 들였을 경우에도 예조에 요청하여 그 사실을 증명받야야 했다. 정려() 사실도 부역의 면제와 같은 경제적 특전이 수반되었으므로 입안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 밖에, 죄인의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여 남에게 양여하는 경우나, 도둑을 맞았을 때 후에 참고하기 위하여 잃은 물건의 내용과 특징을 신고한 경우 등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다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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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매매 문서와 매매 공증서(斜給立案)

 

보령에 사는 홍상선(洪尙善)이 남포향교로부터 노비(奴婢)를 구입한 매매 문서와 노비 구입 사실을 관청으로부터 공증 받는 과정에서 작성된 일련의 공문서입니다.

  

 노비 매매 문서와 매매 공증서(斜給立案)  조선시대/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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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년 3월8일 이 생원댁에서 노비2명을 尹 兵使宅으로 45냥에 파는 매매문서입니다.

              

명문(明文) 노비매매문서  조선/1712년(숙종38년)/38.2×42.5cm/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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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노비 문서전남 순천 송광사 소장 

이 ‘노비첩’은 길이 66㎝, 폭 57㎝의 크기이다. 지원(至元) 18년이라는 원 세조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어 고려 충렬왕 7년(1281)의 문서임을 알 수 있다.

 

보존 상태가 좋아 내용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질 것은 당시 거란본대장경이 수선사에 있었다는 점과 주살(誅殺)을 당한 관료의 노비는 공사에 복속시킨다는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출가승에게도 노비를 물려주었다는 점과 원오 국사는 이를 사유로 하지 않고 수선사에 부속시켰다는 점 등은 고려시대의 사회상과 노예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수선사와 거란본대장경과의 관계와 문종 때 요의 도종(道宗)이 계속 보내 온 거란본대장경이 보관된 장소 등을 연구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노비첩’은 초서로 쓰여졌으며, 종이에 붓으로 쓴 것인데, 종이는 닥지이다.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至元拾捌年閏捌月 日

修禪社乃老所志事, 去甲寅年, 分國朝以誅流員將矣奴婢等乙, 公私分屬令是. 是次同年二月, 分主掌都官以事定別監, 出納乙據爲矣, 出父禮賓卿梁宅椿, 亦中卒宰臣鄭安婢世屯矣, 所生婢古次左年四十八矣身, 及右婢矣所生等乙, 官文成給事. 等用右古次左婢矣, 長所生逸三奴矣身乙良 同生弟別將梁弼矣身, 亦傳持使用爲遣. 出父亦中賜給支是後良中沙奇長. 留年所生奴巾三矣身以矣, 亦中行使內中在乙矣發願修爲本社安邀爲乎丹本大藏寶良中右巾三邀乙所生幷以屬令是白禀在等以爭望爲行隅有去等禁止爲遣鎭長速社令是良於爲事.

左承旨興威衛上將軍判司宰寺典理司事趙(手決)


수선사 내노(乃老 : 圓悟國師)가 진정하는 바는 지난 갑인년에 국가에서 사형 또는 유배형에 처한 관료 장군가의 노비들을 관서 또는 개인 집에 분속시키기로 하였다. 동년 2월에 주장도관이 사정도감의 배정 계획에 의거하여 본인을 낳아주신 아버지 예빈경 양택춘에게 고재신 정안의 비인 세둔이 낳은 비 ‘고차좌’(당년 48세)와 그의 소생 등을 문서로 작성하여 급여하였던 바 이상 ‘고차좌’가 낳은 장남 ‘일삼’ 노는 본인의 동생인 별장 양필에게 물려주고 출생부에게 사여한 (이 부분은 의미가 불분명함) 유년의 소생노인 ‘건삼’을 본인에게 주기로 하였는데, 본인이 발원수보한 본사에 봉안할 거란본 대장경에 대하여 오른쪽의 ‘건삼’을 그의 소생과 아울러 예속하게 하며 이탈하는 행위가 있을 때에는 금지하고 영구히 본사에 소속하게 할 것임.

 

<참고자료>

▪홍순탁, 1976, 송광사 원오국사 노비첩, 호남문화연구 8,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임창순, 1971, 송광사의 고려문서, 백산학보 11, 백산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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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노비호적문서’발견

 [한겨레] 한글로 작성된 노비 호적

  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백두현 교수는

   7일 이 대학 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된

   한글 노비 호적 문서를 공개했다.



문서는 한 장의 닥종이(세로 28.2cm, 가로 100.5cm)에 작성됐으며, 황해도 백천군에 살았던 3개 노비 호의 가계와 인물의 신분정보를 한글로 기록하고 있다.

 

  3개 노비 호 가운데 1개는 강희 5년(1666)에, 다른 2개는 강희 29년(1690)에 작성됐다. 백 교수에 따르면 노비의 소유주는 충청도 문의에 살았던 황이환이며, 이 문서는 황이환의 아들 황징이 작성해 그의 부인인 전주이씨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백 교수는 “호적은 원칙적으로 한문으로 작성하게 돼 있어 한글로 작성된 호적문서는 문헌상 기록에도 없는 데다 관청이 아닌 양반 집안에 전해져오던 노비 호적 문서라는 점에서도 매우 특이한 자료”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 문서가 작성된 17세기는 임진왜란 이후 상당수의 노비가 양민으로 전화하는 등 노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라며 “노비 소유주가 자신이 거느린 노비 계보를 명확히 문서화해두고 자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노비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사문서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실 안승준 박사는 “전답안과 같은 재산목록 개념으로 작성된 노비안에 일부 한글이 쓰인 경우는 있었으나 호적을 한글로 작성한 사례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글을 재산관리 차원에서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에서도 의미가 있다” 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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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83호 지정14년 노비문서   

 

 전가고적(傳家古跡)

'전가고적' 속에는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至正十四年奴婢許與文記)>가 들어있다.

* 전가고적(傳家古跡) : 전해져 오는 집안의 남아 있는 옛날 건물이나 물건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소지(所志) 6장,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로 오랜 년대를 내려오는 동안 좀이 먹어 훼손된 것을 1755년(영조20)에 다시 6장을 한 제첩으로 다시 꾸며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지정 14년 노비문서 : 고려조 공민왕 3년(1354년)

전남 해남군 고산유물전시관  소장   * 고산 윤선도 (1587-1671)

종목 : 보물 제483호
분류 : 기록유산 / 문서류/ 민간문서/ 명문류
수량 : 1첩
지정일 : 1968.12.19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윤형식
관리자 : 윤형식

 이 문서는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윤광전이 그의 아들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한 문서이다. 구성을 보면 소지 6장, 입안 2장 등 총 8장으로 된 문서이다.

 

소지 6장에는 윤광전이 노비를 상속하게 된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입안 2장에는 당시 이 지역의 책임자인 탐율감무가 이를 확인하여 상사의 결재를 신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고대의 문서가 매우 희귀한 상황에서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이며, 고려시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려시대의 노비문서(奴婢文書)이다. 소지(所志)6장, 입안(立案)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인데, 오랜 연대를 내로오는 동안 좀이 먹어서 훼손된 것을 영조(英祖)20년(1755)에 다시 6장을 한 장첩(粧帖)으로 다시 꾸며서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表題)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尹光琠)이 그의 적자(嫡子)로 소윤(小尹)의 관직을 가진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이다. 「소지(所志)」는 윤광전(尹光琠)이 그 사유를 상세히 적고 끝에 재주(財主)·정보(訂保)·필집(筆執) 곧 현노비(現奴婢)의 소유자 ·보증인(保證人)·대서인(代書人)의 성명과 수결(手決)을 붙여서 작성한 것이다.

 

「입안(立案)」은 당시에 담당구역의 지방관인 탐진감무(耽津監務)가 이를 확인하여 상사(上司)의 결재를 신청하는 문서이다. 문장의 내용은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다. 고대(古代)의 문서가 매우 희귀한 오늘날 이 문서는 송광사(松廣寺)의 노비첩(奴婢帖)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高麗)시대의 유일한 것이다.

 

윤광전(尹光琠)은 해남(海南) 윤씨의 선조(先祖)이며, 윤선도(尹善道)·윤덕희(尹德熙) 등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를 다시 꾸민 사람은 윤광전(尹光琠)의 12세손(世孫)인 윤덕희(尹德熙)이다. 노비첩(奴婢帖)끝의 덕희(德熙)가 쓴 발문(跋文)에 「종중(宗中)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들은 전가지보(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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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오래된 해남윤씨가 <노비허여문기>

 

한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신돈'은 고려 말의 정치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고려말 공민왕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신돈'은 신돈이라는 인물을 통해 공민왕이 왕권을 확립하고 개혁을 추구하려 하는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한천동 영모당 옆에 있는 광전의 묘역 전경
신돈을 앞세운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은 무신집권기와 원의 간섭하에서 미약해진 왕권을 재확립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왕으로 알려져있다. 고려사에서 공민왕대는 외부적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변란,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우여곡절의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고려시대의 역사관련 사료에서 당시 공민왕대의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재위기간이 짧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이처럼 역사적 주요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노비문서1

고려 말의 개혁군주라고 칭하는 공민왕을 꺼내게 된 것은 해남윤씨가의 첫 실존인물로서 중시조가 된 광전(光琠)이 당시 공민왕대의 인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해남윤씨가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이곳 조선의 땅끝 서남해안을 무대로 그 기틀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곳 서남해안지역 또한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해남윤씨가는 해남과 가까운 강진 지역에 그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 해남윤씨 노비문서가 들어있는 전가고적

녹우당 종택의 전시관에 들어가면 많은 고문서들을 볼 수 있다. 이 고문서들은 이 집안의 오랜 역사와 그 뿌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고문서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 쓰인 고문서다.

이 '전가고적' 속에는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至正十四年奴婢許與文記)>가 들어있다. 해남윤씨가의 고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 우리나라 노비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에 중시조 광전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 노비문서에 쓰인 연대를 보면 이는 고려말인 공민왕 3년(1354)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통해 광전이라는 인물이 이 시기에 살았던 실존인물로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신돈'에서 신돈이 공민왕을 등에 업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는 것이다. 신돈 자신이 노비의 출신이라서 더욱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문에 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민변정도감은 원종 10년(1269년)에 최초로 실시되어 여러 차례 시행되었는데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노비문서3

이 제도는 기득권 세력인 권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실패하게 되는데 당시 이같은 사회상황 속에서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라는 고문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노비허여문기>에는 광전의 처가로부터 전래된 노비 1구(口)를 자식인 단학(丹鶴)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의 기록을 통해 해남윤씨가는 광전 대에 이미 노비를 소유한 향리(鄕吏) 집안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노비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해남윤씨가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처가 쪽의 힘이 컸다. 처가쪽의 사회 경제적 지위로 말미암아 재산이 사위(광전)에게 상속될 수 있어 향촌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 노비문서4

광전 대에 해남윤씨는 신흥무관 세력으로 성장하여 무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대에는 서남해안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무관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까지 광전은 지역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집안이었으나 거족(鉅族)인 함양박씨(咸陽朴氏)와 통혼하게 됨으로써 동정직(同正職)으로나마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혼인과 더불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전의 처인 함양박씨의 부(父)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환(環)이고 조부 박지량(朴之亮)은 몽고의 일본정벌 연합군 김방경의 휘하에서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 출전,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武德將軍)의 벼슬과 금패인(金牌印)을 하사받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러한 처가쪽의 사회 경제적 지위로 말미암아 <노비허여문기>에서 보여주듯 처가의 재산이 일정하게 상속될 수 있었다. 광전의 이같은 사회경제적 지위는 그가 향촌사회에서 어느 정도 재지적 기반을 구축했음을 말해준다.



해남윤씨는 강진땅에서 해남으로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자 녹우당에 터를 잡은 어초은 윤효정(1476~1543)대에도 당시 해남의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졌던 대부호 정귀영(鄭貴瑛)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어 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처복이 좋아 이같은 경제적 기반을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어 이후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당시는 남녀가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받은 때였으므로 이같은 상황은 당연한 것으로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더 평등한 세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 함양박씨와 함께 모셔져 있는 광전의 묘
한 장의 고문서 속에 고려말 상황이

이곳 <노비허여문기>에는 '탐진감무(耽津監務)'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이를 통해 당시 광전이 해남의 이웃 고을인 강진에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비허여문기>를 통해보면 광전은 3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 명은 요사(夭死한) 것으로 보이며 차남인 단학이 봉사조(奉祀條)의 노비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제사가 그에게 물려졌으며 이때 장자(長子)인 단봉(丹鳳)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니었나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노비의 매매는 토지나 가옥의 매매와 같이 매매 후 100일 이내에 관에 청원하여 입안(立案)을 받도록 하였다.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노비매매의 경우 토지매매의 경우보다 훨씬 엄격한 입안제도가 준행되었는데, 노비는 토지나 가옥과는 달리 살아있는 재산으로써 출산에 따른 증가가 있고 도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집의 노비매매는 양반이 직접 매매에 관여하지 않고, 양반에게 위임받은 노(奴)에게 대행시키는 형식을 취하였다.



후기사회로 접어들면서 고려의 노비신분 질서는 문란해진다. 무인정권 몰락 이후 나타난 몽고의 내정간섭, 권문세가의 등장, 농장의 확대, 빈번한 외침 등의 사회적 변화는 신분질서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공민왕(1352~1374)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국고가 바닥이 나 관직으로 상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항상 역사적 사실성과 흥미를 위한 허구성 사이에서 그 진실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서로서 광전이라는 실존인물에 대한 확인뿐만 아니라 고려말을 배경으로 한 당 시대인들의 다양한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새삼 기록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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