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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효자송(천년송)도 지키기 힘든 세상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09. 10. 18.

 

효자송(천년송)도 지키기

 

힘든 세상이야기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년리 만년마을에 있는 반송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반송은 높이 10m, 수간 폭 15m, 밑줄기 둘레 3.5m, 중간 둘레 3.8m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특히 이 반송은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줄기와 가지가 구별이 없는 다른 반송과 달리 밑동에서 1.8m까지 한 줄기로 올라가 200-300년 된 중간가지 등 16개의 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 눈길을 끈다.

 

 

이 반송은 밑에서 올려다보면 수십 마리의 용이 뒤엉켜 승천하는 듯한 웅장함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연두색 솔잎을 두른 천년 거북이 기어 갈 듯한 자태로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반송은 그 특성상 정형적인 수형을 가지고 줄기가 밑둥에서부터 갈라지며 생활력이 소나무 만큼 왕성하지는 못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특성을 뒤집기라도 하듯 만년마을의 반송은 밑둥에서 1.8m까지 한 줄기로 올라가 16개의 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 있는 것이 밑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웅장함을 보입니다.

 

 

1778년 안산김씨 김필택(金必澤)이 사헌부감찰 행 진해군수 겸 김해진관 병마절제도사에 제수됨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 연꽃방죽 후등에 있는 반송으로 부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망운지정의 마음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위로하고 선산을 지킨다는 뜻에서 심었다고 합니다.

현재 마을에서는 효자송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망운지정(情) : (望 바랄 망,   구름 운,   어조사 지,   인정 정)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객지에 나온 자식이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정을 가리키는 말

    
《당서()》에 보이는 내용이다. 당()나라 때 적인걸()은 고종() 때 대리승()이 되어 1년 동안 1만 7000명을 올바르게 재판하였다.

 

그뒤 강남순무사(使)가 되어서는 음란하거나 민심을 미혹하는 사당 1,700개소를 없애고 예주자사(使)로 있을 때에는 무고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2,000명을 구제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후일 내준신()의 모함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병주()의 법조참군()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의 부모는 하양()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적인걸이 타이항산[]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한 조각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저 구름 아래 살고 계시겠지." 그리고는 흰구름을 쳐다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고() 비탄에 잠겼다.

망운지정이란 이렇게 타향에서 자신도 신고를 겪지만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자식의 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후일 그의 평판이 높다는 말을 들은 측천무후는 다시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고, 재상이 된 후 그는 장간지()·요승() 등을 추천하여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아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다.

 

어느 날 측천무후가 상서랑()으로 합당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아들 광사()를 추천하는 등 일 처리에 사사로움이 없었다 한다.  망운지회()라고도 한다.

 

 강진군 도암면 덕년리 지도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재실 영모당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재실 만세재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칠은정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평목재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죽림정

강진군 도암면  안산김씨 승곡재

거북이 형상 (왼쪽 머리부분)

주민들은 “이 소나무는 위에서 보면 푸른 거북이 기어가고, 아래서 보면 용 수십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다”며 “나무 형태가 웅장하고 푸른 빛깔이 싱싱해서 예부터 마을 영물로 여겨져왔다”고 말했다일명 천년송이라 불릴 정도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많은 세월동안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며 마을과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이 천년송은 그야말로 마을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이 반송은 문중 묘 뒤의 대나무 밭에 있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데다 이 마을이 생긴 이래 전쟁에 한 번도 휩쓸리지 않아 원형을 잃지 않고 잘 커 온 것으로 수목전문가는 말했다.  

 

연꽃방죽과 천년송이 어우러진 생태공원 조성에 있어 천년송을 보호수로 정하려하다가 이미 개인에게 팔려 넘어가는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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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제174회 강진군의회 (제3차 본회의, 2008.12.15 월요일)

 

안녕하십니까? 윤희숙 의원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강진 군민 여러분 !

      ---- 일부 생략 ----

그동안 본 의원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수집한 자료와 지역 활동 등을 통해 수렴한 각계각층의 군민들의 여론을 토대로 시정과 개선이 필요한 몇 가지 분야에 대해 군정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만년마을「천년송」보존대책에 대하여 질문 드리겠습니다.

 

우리 강진군 도암면 만년마을의 대나무밭에서 수령이 천년 가량 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송이 발견되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반송은 높이가 10m에 이르고 수간 폭이 15m, 밑줄기 둘레가 3.5m에 이며 중간 둘레만 하더라도 3.8m에 이르는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특히, 반송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줄기와 가지가 구별이 없는 다른 반송과는 달리 밑동에서 1.8m까지 한 줄기로 올라가고 200~300년 된 중간가지 등 16개의 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 있어 밑에서 올려다보면 수십 마리의 용이 뒤엉켜 승천하는 듯한 웅장함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연두색 솔잎을 두른 천년 거북이 기어 갈 듯한 자태로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수목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 반송은 한 문중 묘 뒤의 대나무 밭에 있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데다 이 마을이 생긴 이래 전쟁에 한 번도 휩쓸리지 않아 원형을 잃지 않아고 막 다듬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하고 있어 국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진귀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의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만년마을에서 발견된 반송에 비해 그 수령이나 수형이 많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서울 종로구의 백송과 서울 조계사 백송도 천연기념물 제8호,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만년마을에서 발견된 반송은 당연히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되는데 천년송의 보존대책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그 나무에 욕심을 내는 개인의 매수자가 여기 저기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 산림녹지팀장 문장기 산림녹지팀장 문장기입니다.

윤희숙 의원님 외 세 분께서 7건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윤희숙 의원님게서 질문하신 도암 만년마을 소재『천년송』보존대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암면 만년마을 218번지 묘지 1,488㎡에 소재한 『천년송』보존을 위하여 천연기념물 및 보호수로 지정하여 국가 및 군에서 관리코자 소유자와 2~3차례 협의하였습니다만, 합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앞으로 『천년송』과 부지 매입 등 소유자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통해서 천연기념물 등 보호수로 지정 관리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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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마을 천년송 수난

 

지난해 12월 초 매매→ 군의회 보호수 지정요구 '이상한 행로'

2009년 08월 28일 (금) 11:06:32 주희춘 기자 ju@gjon.com

 

강진군이 도암 만년마을의 천년송(실제 수령은 350년 정도)을 매입해 보호수 지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난항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가격 절충이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속내가 복잡하다.

 

강진군이 이 나무의 보호수 지정을 추진한 것은 지난해 12월 군의회에서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고 나서 부터였다.

 

군은 군의회 요구를 받고 나무 매입비와 부지매입비등으로 5천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군은 나무와 주변 땅값을 각각 1천만원 정도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공원을 조성하는데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올 상반기 들어 군이 천년송과 주변 부지 매입에 나서면서 적잖은 장애물이 발견됐다. 천년송은 지난해 12월 초 강진읍의 A씨에게 1천만원에 사실상 넘어갔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합해 800만원이 오간 상태였다.

 

 

▲ 도암 산정리 만년마을 소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어 군이 매입에 들어가면서 A씨가 천년송의 가격을 4천만원대까지 생각하는 입장이고, 나무의 전 주인이면서 주변 토지의 주인인 B씨는 평당 15만원대의 땅값을 평가하는 상황이었다. 나무 주변의 땅은 1320㎡(400여평)에 이른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A씨는 지난해 12월 5일경 강진읍 C씨로부터 천년송을 매입하라는 권장을 받고 B씨에게 계약금 200만원을 지불 했다. 다시 몇 일 만에 중도금 500만원도 지급했다.

 

A씨는 충남 유성의 한 조경업체에 4천만원대에 나무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군이 보호수 지정을 추진하면서 멈칫하고 있는 상태다.

 

A씨는 "나도 경제적 이윤을 위해 천년송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윤을 보지 않고 군에 나무를 넘길 수 있겠냐"고 했다.

 

나무 주인이었던 B씨도 할 말이 많았다. B씨는 몇 년전 군에 나무를 희사하겠다는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나무를 강진읍 종합운동장 등에 옮겨 심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는 군이 난색을 표명했다. 높이 10m, 수간 폭 15m, 밑줄기 둘레 3.5m, 중간 둘레 3.8m에 이르는 나무의 이동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다. 예산문제도 있었다.

 

그후 B씨의 경제형편이 어려우지면서 지난해 12월 초 불가피하게 나무를 팔게 됐다. 그런데 나무의 소유권이 넘어간지 보름도 안되어서 이런저런 말이 들려왔고 군이 나무를 매입해 보호수로 지정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A씨는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나오지 않던 보호수 이야기가 나무를 매각하자 마자 나왔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땅값을 높게 부르는 이유는 일종의 항의표시라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마을주민들의 심정 또한 안타깝다. 마을주민들은 천년송을 결코 밖으로 유출시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 천년송의 가지가 죽고 있어 체계적인보존이 시급하다.

한 주민은 "나무를 파가면 도로에 들어 눕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진군이 반출 허가를 해주지 않으면 나무 또한 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

 

군 관계자는 "나무 가격도 문제지만 나무 반출허가를 내주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다"고 말했다. 결국 나무는 당초부터 다른 곳으로 팔려나 갈 수 없는 사정이었다는게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천년송이 지난해 12월 초 매매거래가 이뤄지고, 보호수 지정 논의가 나온 배경에 궁금증이 더해 지고 있다.

 

천년송 보호가 늦어지면서 나무의 가지가 여기저기 훼손되고 있어 대책도 시급한 상황이다.

 

 

만년마을 윤원주 이장은 "천년송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되는 마을의 재산이다"며 "천년송이 더 이상 논란에 휘말리지 않고 주민들의 쉼터로 보존될 수 있도록 지역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글을 정리하면서 느낀 제 생각입니다. 효자송(천년반송)은 많은

세월 만년마을의 역사를 지켜보며 마을과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상징이며 수호신입니다.

 

안산김씨 후손으로 효자송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조상님께는 얼굴

들기가 송스럽고 만년마을 다른집안 분들께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많은 분들이 효자송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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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년마을 윤원주이장(51)

 


  만년마을은 강진~해남간 18번 국도에서 지석마을과 산정마을간 군도 5호선을 따라 덕년리로 향하다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마을이다. 마을 앞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뒤쪽과 우측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이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개화가 늦어진 마을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갓을 쓰고 상투를 튼 남자들이 마을을 활보하였으며, 모내기때 줄모가 한참 보급될 때에도 줄모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계모내기(당시 기계는 뒤로 넘기며 모를 심는 틀의 일종)를 하며 옛 전통을 고집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강진읍이나 면 소재지로 나갈 때 걸어서 한치재를 넘어 다녔다. 또한 해남 옥천면과 계곡면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생활권이어서 해남장을 다니기도 했다. 도로가 나지 않은 옛날에는 걸어서 한치재만 넘으면 바로 강진읍 서산리로 들어서기 때문에 오히려 강진읍장으로 많이 다녔다. 하지만 도로가 난 뒤로는 오히려 해남장이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도암면 계라리를 삥 돌아가는 강진읍에 비해 해남 옥천이나 계곡면에서 버스를 타고 해남으로 가는 교통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만년마을의 주 소득원은 오랫동안 보리와 쌀이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기질 때문에 쉽게 타 작물을 시도해보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윤원주 이장은(51세) 10년 전인 99년에 만년마을로 귀농하여 농촌생활의 여러 애로점을 극복하고 이제야 조금 농업인으로 생활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보통 쉽게 말하는데, 무엇보다도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 농업입니다. 귀농하면서 ‘농사나 짓지’라고 우습게 생각한다면 금방 실패하고 맙니다.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많았지만 ‘저놈 그럴 줄 알았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각오하고 또 각오하고 오기로 살았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힘든 귀농생활을 이겨냈다.

 

정신적으로는 마을에 정착하지 못해 방황하며 허송생활을 보내는 괴로움이었으며 육체적으로는 디스크수술 두 번에 죽을 뻔한 고비까지 넘겼다.

 

윤 이장이 이러한 고비를 넘기며 올해 처음 실시한 이장투표를 통해서 이장이 되기까지는 아내 유정례(46)씨와 2남 정현(고3), 다현(고1)이 함께 참고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식당을 해서 돈을 좀 모았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왔는데, 적응을 못해 돈만 없애고 고민만 하다가 세월 보냈지요. 이곳에 외숙이 살고 계셔서 도움을 주었으니 망정이지, 완전 타지였다면 벌써 떠났을 겁니다.” 귀농하여 6년이 넘는 세월을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윤이장이 새롭게 마음을 잡고 농사꾼이 되기까지는 강진녹색문화대학을 1기생으로 수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논농사와 밭농사 양계업을 하고 있으며 황금약초 재배도 준비하고 있다. 만년마을은 현재 32호 가호에 66명이 거주하며 70세 이상이 80%로 고령화 되었다.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안산김씨이며 해남윤씨, 여산송씨 등 제각이 5채나 있어 해마다 시제를 모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금은 보리와 쌀 작목 외에도 감자와 아스파라거스 재배를 계속 넓혀가고 있는 분도 있으며, 황금 닭 양계업을 3사람이 종사하고 있다. 조금씩 새로운 작목에 눈을 뜨며 고소득에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만년마을은 1983년 가톨릭농민회의 영향을 받아 강진에서 가장 일찍 농민회 조직이 결성되었다. 1987년에는 도암농민회의 이름으로 농가부채탕감, 외국농축산물 수입중단, 농협의 농민자치적 운영, 행정의 공명정대란 슬로건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회 조직은 마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하여 낙후된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 눈에 금방 들어온다.

 

만년마을은 마을이 세 곳으로 분산되어 있다. 아랫마을 ‘칠은정’에는 10가호, 윗마을인 만년1구에는 18가호, 구성동에는 4가호가 있으며, 마을 중간에 있는 연방죽은 완전 백색의 연꽃이 피어 사찰 등에서 촬영을 해가기도 한다. 윤이장은 8년 전 자비 사십 삼 만원을 들여 만년1구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마을이 세 곳으로 분산되어 있어 택배 차 등이 쉽게 찾아오지 못하고 헤매곤 하여 스스로 세웠다는 것이다. 2년 전에야 세워진 회관과 더불어 만년마을은 이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올해 참 살기 좋은 마을에 선정되어 희귀의 백색연꽃만 피는 연방죽 주변의 생태를 살려 넓혀 공원화할 계획까지 세웠다.

 

1778년 안산김씨 金必澤이 사헌부감찰 행 진해군수 겸 김해진관 병마절제도사에 제수됨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 연꽃방죽 후등에 있는 반송은 일명 천년송이라 불릴 정도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많은 세월동안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며 마을과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이 천년송은 그야말로 마을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연꽃방죽과 천년송이 어우러진 생태공원 조성에 있어 천년송을 보호수로 정하려하다가 이미 개인에게 팔려 넘어가는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연꽃방죽에는 많은 올챙이들이 군데군데 점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올챙이들이 황소개구리 올챙이인줄 알고 해마다 약을 뿌려 없애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올해 두꺼비 올챙이 일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현재 계속 관찰중이라고 한다.

 

윤이장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도로 개설 중인 용수로 개거 사업하는 곳에 두꺼비 올챙이들이 올라가다가 결국 빠져 죽어버리는 것을 보았어요. 자세히 보니 연꽃방죽에 있는 올챙이들과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보호하자고 했습니다. 올챙이들이 요즘 발이 나오고 있으니 관찰해야하는데 농사일로 올챙이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으니 고민입니다.”라며 웃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어느 마을이고 농토를 몸으로 갈고 닦아 터전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주변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주민등록을 마을에 두고 있다고 해서 마을 사람은 아닐 것이다.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현지 농민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만년마을은 오히려 발전하지 않아 좋은 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되기도 했다. 옛날 마을사람들이 늘 다니던 한치재에 도로를 개설하면 해남으로 다니던 발길을 강진읍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한다.

 

윤이장에 의하면 한치재 도로개설은 2011년 도로계획에 들어있다고 군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이미 도에서 추진하는 행복마을도 신청해 놓았다. 모두 11채가 신청하여 도조사도 끝낸 상태여서 좋은 결과를 낳는다면 만년마을은 생태공원과 한옥마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윤이장은 “귀농인들이 서로 들어와 살고 싶은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령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마을을 잘 가꾸어 나갔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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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성씨]  안산김씨(安山金氏)

 

                                                      2004년 01월 16일 (금) 00:00:00 김철 기자kim72@gjon.com

김씨는 가락국의 수로왕과 신라의 알지계로 크게 나뉜다. 알지로 시작된 김씨의 후손들은 38명이 신라의 왕계를 누렸고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에서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

 

경순왕은 아홉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중 은열(殷說)의 후손들이 가문을 번성시키고 이름있는 신하와 유학자등이 배출되면서 명문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안산김씨는 은열의 후손인 긍필(肯弼)을 시조로 한다. 이후 긍필의 후손들을 고증할 문헌들의 부족으로 고려때 공신에 오른 충무공 위(渭)를 일세조로 시작한다.

 

위의 증손자 정경은 조선 정종때 제2차 왕자의난에 공을 세워 좌명사등공신으로 연성군으로 봉해졌고 맹강은 조선시대 외교업무를 담당했던 승문원에서 교감을 지냈다.

 

맹철은 예조판서를 지내고 자형은 진주목사, 영은 조선시대 법률을 맡아보던 형조에서 참의를 지내면서 가문을 빛냈다. 또한 처암은 정조 19년에 사헌부에 근무하면서 너그러운 인품으로 죄인들을 관대하게 처했다는 죄목으로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돼 종3품에 해당하는 집의직까지 올랐다.

 

명국은 인조때에 인물과 산수화로 유명했고 후손 경념은 옥성, 흥명등 여러 학교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힘썻고 3.1운동에 참가한후 독립신보를 발간하고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대한독립사를 편찬하는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안산(安山)은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는 장구현이었다가 고려 초에 안산(安山)으로 개칭되었다가 개편으로 시흥에 병합됐다. 안산김씨는 지역을 위주로 크게 나눠지고 있다. 북한의 의주파, 강진파, 합천파, 괴산파, 포천파등으로 나눠졌다. 관내는 연성군의 아들인 을신을 시조로 하는 강진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안산 김씨가 강진에 처음으로 입향한 것은 경충(敬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충은 충남 아산에서 출생해 1508년 성균진사에 올랐으나 당시에 나라를 흔들던 사화 때문에 관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경충은 벼슬을 관두고 남하해 서기산 밑에 자리한 도암면 대치마을(현 만년마을)로 이사를 하게된다.

 

이곳에서 경충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손들의 세거지로 이어져왔다. 여기에서 후손들이 번창해 인근 만세마을과 어관, 산정마을로 퍼져나갔고 마량면 원포마을에도 안산김씨가 생활하고 있다.

 

관내에는 안산김씨를 대표하는 정각이 만년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름은 칠은정(七恩亭)이다. 강진을 처음 들어온 경충을 시작으로 5대에 걸쳐 7차례나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성은을 입어 제각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6일에 종친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만년마을에는 영모당(永慕堂)이 있다. 강진에 처음으로 들어온 경충을 위한 제각으로 매년 10월 15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인근 만세마을에는 만세재가 위치해 있고 어관마을에는 경모재와 귀후각이 자리하고 있다.

 

안산김씨 세거지라는 대형 표지석이 설치된 도암면 만년 마을에는 또 하나의 가풍이 이어오고 있다.

 

효자나무로 불리우는 200여년을 넘긴 소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진입로를 따라 마을 공동창고 앞으로 가면 높이 20여m, 폭10여m의 짙푸른 소나무가 대나무 숲속에서 자라고 있다. 이 소나무는 안산김씨의 선조인 필택이 지난 1778년 진해현감을 지내면서 식수해 200여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왔다.

 

소나무를 심게된 사연도 필택의 어머니 행주기씨가 지병으로 숨지자 묘옆에서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하게됐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김씨는 모친의 묘소옆에 한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못다한 효심을 표현한 것이다. 후손들은 이 소나무를 보면서 부모에 대한 효행에 대해 한번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안산김씨 출신으로는 서울법원에서 근무하는 김정만씨와 김형남씨, 의학박사로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김제봉씨, 서울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김경제씨, 전남대학교 교수인 김기연씨와 김승제씨, 강진군청에 근무하는 김응식씨, 광주대교수로 재직중인 김철원씨, 특허청에 근무하는 김종안씨, 국회사무처에 근무하는 김영환씨, 교통관리공단에 근무하는 김승범씨, 광주법원 부장판사로 근무중인 김관제씨, 강진읍에서 정진학원을 운영하는 김규식씨, 군동농협에 근무하고 있는 김대희씨, 강진군청 김선태씨와 김진관씨등이 있다.

 

도암 만년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문중의 제각을 관리하고 문중일을 도맡아 생활하고 있는 김세환(73)씨를 만났다. 김씨는 “강진의 안산김씨는 만연마을을 세거지로 출발했다”며 “지금은 외지로 나가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매년 제사를 모시는 10월에는 50여명이 문중사람들이 제각을 찾아 모여든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마을에는 나라에 은혜를 입은 일곱명의 선현들을 모신 제각이 있다”며 “선대 어르신들이 대를 이어 국익을 위한 꾸준한 활동을 이어온 결과”라고 자랑했다.

 

나라에 나라를 위세거지인 대치마을에 대해 묻자 김씨는 “과거에는 만년 마을을 대치라고 부르고 만세마을을 소치마을로 불렀다”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름으로 나이든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지명을 알 것”이라고 밝혔다.

 

안산김씨 강진파의 분포에 대해 김씨는 “세거지인 도암 만년 마을과 만세, 어관, 산정마을에 주로 생활하고 있다”며 “나주 남평과 해남 방춘리 일대에도 강진파가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과 인근에 위치한 각종 제각에 대해 김씨는 “예전에는 문중의 제각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생활했다”며 “지금은 제각을 관리하고 있으나 예전보다는 미흡한 편”이라고 강조했다.

 

문중일에 대해 김씨는 “조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문중일에 참여를 바란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가져줘야 문중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