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영령암(英靈庵)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상원사에 들어가 승당이 터만 있고 집이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대산은 천하의 명산이요, 상원사는 또한 큰 사찰이다. 승당은 성불하는 곳으로 천하의 운수승(雲水僧 )이 모이는 곳인데,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하고 이에 사방으로 쫓아 다니며 인연을 구하니,
판서(判書) 최백청(崔伯淸)의 부인(夫人) 안산군김씨(安山君金氏)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최백청과 함께 의논하고 돈을 내어 시주하였는데, 부인 자신이 시주한 것이 매우 컸다. 병진년(우왕 2, 1376)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정사년(우왕 3, 1377) 겨울에 끝마쳤다.
그 해 겨울에 승려 33명을 맞이하여 10년좌선(十年坐禪)을 시작하였는데, 반이 되는 5년째인 신유년에 성대하게 법회를 열어 그들의 정성을 다하게 하니, 그 해 11월 24일 달이 이미 기울었는데도 승당이 이유없이 저절로 밝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찾으니, 승당 중앙 앞으로부터 촛불이 나와 있어 여러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바로 그 불꽃이 산중의 여러 암자에서 서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으니, 세상 사람들은 ‘김씨의 지극한 정성이 이룬 것’이라고들 하였다.
김씨가 그 일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더욱 감동하여 믿고 숭상하였으며, 노비와 토지를 희사하여 상주(常住)의 자본으로 삼고,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해왔다. …(후략)
출전 : 『목은선생집(牧隱先生集)』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 上院寺 僧堂記)
키워드 : 고려 여인, 품위, 정절
상원사 [上院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절.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중 창〕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 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안산김씨(安山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당우와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東文選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朝鮮寺刹史料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 1-강원도 Ⅰ-(사찰문화연구원, 1992)
충주최씨 시조 최승(崔陞)은 본래 당나라 장군으로 846년(신라 문성왕 8년) 신라에 기근이 들어 도둑무리가 창궐하자 당나라 무종의 명으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평하였고,889년(진성여왕 3년) 신라에서 원종(元宗), 애노(哀奴)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벌(東征), 이를 평정하여 은자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고 그후 예성(蘂城, 충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낸 최옥(崔沃)을 비롯하여 문하시랑을 지낸 최백청(崔伯淸), 좌찬성을 지낸 최숙청(崔叔淸),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復射)를 지낸 최우청(崔遇淸), 직제학의 최원유(崔原儒), 검교정승(檢校政丞)의 최렴(崔濂), 이조전서의 최자, 판관의 최중청(崔仲淸) 등 여러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최승은 신라 문성왕 8년(846)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아지자, 중국 당나라 무종(武宗)의 명을 받아 이들을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또한 통일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였다.
영모사는 남쪽을 향해 있으며 앞쪽에 있는 문은 가운데를 높힌 솟을대문이고 최승이 살았을 때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석교가 있다. 충주 최씨의 시조인 최승과 선조 8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문하시랑 [門下侍郞] [명사]<역사> 같은 말: 문하시랑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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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상원사와 문수보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위치한 상원사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오대산은 중국의 오대산처럼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효명왕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차를 달여 문수 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다가 서라벌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효소왕이었다. 그는 재위 4년때인 696년에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阮)’을 창건하여 문수보살상(문수동자좌상)을 봉안했고 20년 후에는 동종(국보 제36호) 을 조성했다.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가 인근에 위치하기도 한 상원사는 문수보살의 가피(加被) 영험이 전하는 기도도량 으로 이름이 높다. 조선시대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진여원을 중창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해 원찰(願刹) 로 삼은 이야기와 효명왕자의 설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신라 효명왕자 공양 올리고 보위에 오르다 조선 세조, 문수동자 친견…난치병 고쳐 고양이 도움으로 자객의 피살음모 면해
#1 신문왕의 두 왕자 보천과 효명왕자는 일찍이 세속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수행자로 살기 위해 오대산으로 향했다. “우리 형제 이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평생 수행하며 생사해탈을 이뤄보자.” “네, 형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순간이고 허망한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대산에서 자연을 수행의 도반으로 삼아 반드시 견성해 윤회의 사슬을 끊겠다고 발원을 했습니다.” 세조가 문수동자로부터 가피를 입어 피부병을 고친 내용(사진 좌)과 신라 보천왕자와 효명왕자가 문수보살에게 공양 올리는 모습을 담은 벽화. 두 형제가 오대산에 이르렀다. 갑자기 땅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며 형 보천이 있던 자리에 암자가 지어졌다. 보천왕자가 말했다. “나는 이 암자이름을 보천암이라 정할 것이네. ” 말이 끝나자 암자의 현판에는 ‘보천암(寶川庵)’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보천암에서 남쪽인 효명왕자가 있던 곳에도 연꽃이 피어났다. “형님, 제가 기거할 암자는 ‘효명암(孝明庵)’이라 이름짓겠습니다.” 그러자 역시 효명암의 현판이 암자에 걸렸다. 두 형제는 아무 부족함 없이 오로지 일심으로 생사해탈을 위해 정진에 정진을 할 따름이었다.
하루는 두 형제가 오대산 봉우리에 올라갔다. 그런데 동쪽 편 만월산에 1만의 관세음보살 진신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 황홀하구나. 우리의 기도가 관세음보살님을 감동시켰나보다.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나 주시니 말이야.” 두 형제는 다시 남쪽 기란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1만의 지상보살이 나타났다. 서쪽 장령산에는 1만의 대세 지보살님이, 북쪽 상왕산에는 500나한이 나타났다. 가운데인 중앙의 지로산에는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환희심에 경탄한 두 형제는 현재의 상원사(진여원)에서 매일 문수보살에게 참배하고 예를 올렸다. 문수보살은 36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다가, 다시 수백, 수천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두 형제는 감로수를 길러 차를 달여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두 왕자가 떠난 신라 왕실에는 권좌를 둘러싼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신문왕의 아우는 왕의 두 왕자가 세속의 일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자 마치 권력을 잡은 것처럼 세력을 규합하며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은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두 왕자들을 왕위에 모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군사 500을 거느리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안 형 보천왕자는 자리를 피해 버렸다. 신하들은 하는 수 없이 차선책으로 효명왕자에게 간청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효소왕이 되었다.
#2 조선 제7대 임금 세조가 피부병 으로 고생을 하다가 오대산 상원사의 영험 소식을 들었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내 병을 고쳐야 하겠다. 내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갈 것이니 차비를 하도록 하여라.” 산 넘고 강 건너 굽이굽이 행렬을 지은 어가(御駕)가 보름여 만에 상원사에 도착했다. “아, 피곤하구나. 어디 가서 좀 씻어야겠어. 여봐라, 행렬을 물려라. 짐은 저기 아래에 혼자 가서 목욕을 해야겠다.” 세조는 계곡으로 내려가 몸을 담갔다. “아, 시원하다. 그런데 어디 등 좀 밀어 줄 사람 없나 인근에는 인적이 없었다. 때마침 지나가는 동자가 있어 세조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얘야. 이리 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렴.” “네, 그렇게 하지요.”
조선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하는 문수동자상. 동자는 계곡으로 내려와 임금의 등을 쓱쓱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이쿠, 시원하구나.” 세조는 오랜 여행으로 고단한 몸을 맡기니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듯 했다. ” 세조는 자신이 피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동자에게 다짐을 받으려는 듯 말을 걸었다. “얘야, 너 어디 가서 피부병에 걸린 임금님의 등을 씻어 주었다는 말을 하면 안된다. 알겠지?”
그러자 동자도 대답했다. “네, 임금님. 그런데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임금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동자는 등 뒤에서 또렷또렷 말했다. “임금님께서는 어디 가서 오대산에 갔더니 문수동자가 등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 순간 세조는 깜짝 놀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동자는 간 데 없고 피부병으로 진물이 범벅이 되었던 자신의 몸은 백옥같이 치료돼 있었다. “내가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고 가피를 받았구나. 문수보살님 감사합니다.”
세조는 감동하여 화공을 불러 자신이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그리게 하고, 그 모습대로 목조각 상을 만들어 상원사에 봉안하게 했다. 그 보살상이 현재 상원사에 봉안돼 있는 상원사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이다. 세조는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그리기 위해 상원사에 많은 화공을 불렀는데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그때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소승이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림을 그려 보셨는지요?” “네, 출가 전 조금 붓을 잡아 본 적이 있으니, 제가 그리는 문수보살님과 전하께서 친견한 문수보살님이 어떤지 살펴 주십시오.” 세조는 스님이 너무나 자신이 본 것과 똑같아 물었다. “스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라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세조가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했다는 전해지는 고양이 석상. 상원사에는 문수동자상을 모신 법당아래 두 마리의 고양이상이 있다. 이곳에도 세조임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상원사에서 피부병을 고친 세조가 상원사를 참배하기 위해 법당으로 향했다. 그때 고양이 두 마리가 세조의 옷 소매를 물고 법당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무슨 회괴한 일인가?”
세조는 황당해하며 법당을 뒤지게 했다. 그러자 법당 마루 아래에 임금을 살해하려고 한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양이 석상을 세웠다. 상원사 주지스님에게는 고양이 석상을 잘 관리하라는 의미에서 상원사를 중심으로 사방 80리 땅을 하사했다. 평창=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평창 진부나들목에서 나와 월정사로 향한다. 월정사 일주문을 지나 다시 10Km 정도 들어오면 상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 200여미터를 올라오면 상원사다. (033)332-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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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입구
▼상원사 전경
▼문수전
▼문수전 법당내부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호)..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에서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작품이 만들
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고양이 석상
▼관대걸이.. 세조가 상원사 앞 계곡에서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 두었다는 관대걸이다.
▼종각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영산전
▼청량선원
▼부도탑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의 오대산에 있는 사찰.
대한 불교 조계종 제 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신라 선덕여왕 23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 등을 창건하신 자장율사께서 창건.
지금은 종각만 남고 건물은 8,15 광복후에 재건한 것이며 현존 유물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호)가 있다.
오대산 중대사 사자암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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