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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공예태후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08. 11. 7.

공예태후(恭睿太后)에 대하여


공예태후(恭睿太后)는 1109(예종 4)∼1183(명종 13). 고려 인종의 비. 성은 임씨(任氏). 중서령 원후(元厚)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이위는 외손녀 공예태후가 출생하던 날 황색의 기가 중문에 세워져 기 끝이 선경전(宣慶殿)의 치미(鴟尾:궁정·성루 등의 대들보 위에 장식한 기와)에 얽혀 나부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15세에 평장사(平章事) 안산김씨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에게 시집가던 날 방문에 지효가 이르자 갑자기 신부(妃)가 병이 나서 파혼을 하였는데, 이때 점술가가 신부 병을 점치고는 국모가 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인종도 이상한 꿈을 꾸고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두 딸을 쫓아버리고 임씨를 맞아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삼았다. 이자겸의 두 딸이 쫓겨난 것은 인종을 해치려는 이자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데 이유가 있었다.



1127년 태후가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며 태후 집에 은기(銀器)들을 하사하고 태후를 극히 총애하여 1129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후 왕자 경(暻)과 명종(明宗)을 잇따라 낳으므로 인종은 왕비를 위해 수시로 은전을 베풀었으며 왕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왕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


1129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태후가 낳은 의종이 즉위하자 왕태후로 높이고 전(殿)을 후덕(厚德)이라 하였다. 태후는 의종·대령후 경(大寧侯暻)·명종·충희(冲曦)·신종의 다섯형제와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의 네 공주를 낳았다.


75세를 일기로 1183년 생을 마치며, 순능(純陵)에 장사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이듬해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제사를 지냈다. 인종왕은 왕자가 탄생될 때마다 태후에 대한 은전을 베풀어 고을 명칭도 "길이 흥할 고장"이라하여 "長興"이라 이름지어 하사했다고 전한다.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나서 고려 17대왕인 인종의 비가 되신 공예태후 임씨. 그녀는 장흥의 명칭과 이 고을을 부사골로 승격시키신 장흥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사적 자세히 알기


공예태후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인종4년(1126) 6월에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를 폐출하고 전중내급사 임원애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15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아사지(娥死池 또는 娥池)의 전설 등도 있으나, 고려사의 열전 제1권 후비(后妃)편중에서 ‘인종(人種)편’ 중에서 요약하여 소개함.


‘공예태후 임씨는 중서령 원후의 딸로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이다. 비(妃)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위(瑋)가 꿈을 꾸니 황색 깃발이 그 집 중문에 세워져 기 끝이 선경전(宣慶殿)의 기와에 얽혀 나부꼈다. 이위가 말하기를 ‘이 딸은 후에 마땅히 선경전에서 놀 것이다’ 고 하였다.


15세 때에 평장사 안산김씨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지효가 신방문에 이르니 비(妃)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게 되어 파혼하였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딸은 국모가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겸이 이 말을 듣고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보냈다.


1년 후 부졸의 꿈에 청사의 대들보가 갈라진 구멍에서 황룡이 나오므로 원후의 집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인종의 꿈에 참께(荏子) 5되와 해바라기 (黃葵) 3되를 얻었는데 척준경(拓俊京)이 해몽하기를 ‘임자(荏子) 5되는 임(任)씨 성을 가진 왕비에게 5왕자를 낳을 상서요, 황규(黃葵) 3되는 3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종 4년에 자겸의 2딸을 내치고 임(任)씨를 맞아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다.


5년에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하조(下詔)하기를 ‘그대는 임씨의 덕문에서 들어와 장남을 얻으니 길몽에 화합하였도다. 이에 좋은 선물을 보내노라’고 하였다.


7년에 왕비로 책봉하고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옛날 왕들이 천하를 가짐에는 자기만의 덕이 아니고 반드시 내조가 있었도다. 이로써 책명하여 왕비를 삼노라고 하였다. 8년에 대녕후 경(臺寧候 暻)을 낳으니 왕이 또 조서를 보내어 ‘그대가 천재(天宰)의 매(妹)에 비길만한 자질로 왕의 배필이 되어 남아를 출생하였으니 은사를 내리노라’ 고 하였다.


9년에 명종(明宗)을 낳으니 또 조서를 내려 ‘그대 任씨는 나의 내직을 맡아 궁중에 위치하고 아들이 많음도 그대의 어짐에 말미암음이라 고 하였다.

16년에 비(妃)의 어머니 이씨가 죽으니 왕이 소복을 입었고, 이씨에게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을 증직하였다.


왕후가 의종, 대녕후 경, 명종, 원경국사 충희, 신종 및 승경, 덕령, 창락, 영화 4궁주를 낳았는데, 의종이 즉위하여 왕태후를 삼고, 전(殿)을 후덕(厚德)이라 하였으며, 선경부(善慶府)를 세워 관속을 두었다.


처음에는 둘째아들(暻)을 사랑하여 태자를 삼고자 하였으므로 왕(毅宗)이 이를 원망하였는데, 어느 날 태후를 모시고 말씨가 거칠어지니까, 태후가 뜰에 내려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니 우뢰와 번개가 진동한지라 왕이 놀라 태후의 옷 밑으로 숨었는데, 갑자기 전각의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 후부터 모자관계가 처음같이 되었다. 명종 12년에 충희가 죽으니 왕은 태후가 비통할까 두려워 아뢰지 않았는데 수개월 후에 사실을 안 태후는 다른 장수들이 죽인 것으로 알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때에 신종이 평양공(平諒公)으로 있을 때 역시 병을 얻어 문후를 못 들였는데, 태후는 평양공도 충희와 함께 화를 입은 것으로 의심하다가 수레를 타고 문후를 드리니 태후가 울며 기뻐하였다.


평양공이 ‘어머님의 병환은 마음에서 난 병이니 풍악으로 즐겁게 하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풍악을 연주하며 장수를 빌었더니 조금은 차도가 있었으나 얼마 후에 (명종 13년, 1183.11월) 작고하니 수(壽)는 75요, 순능(純陵)에 장사지내고 공예태후라고 시호를 올렸다.


이듬해에 금나라 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제문(祭文)에 ‘오직 영(靈)은 좋은 문벌로부터 와서 후번(候藩)의 빈(嬪)이 되니 처음에는 부도(婦道)로 부군(夫君)을 도우고 나중에는 어머니의 자비로 자식을 보전하다가 갑자기 작고하니 진실로 애련하도다. 부의와 주효로 전을 드리오니 혼백이 있거든 흠향하소서’ 라고 하였다.


위 내용은 고려사 중에서 세가편이 아닌 열전편의 기록이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표현도 없지 않으나, 공예태후의 인품에 대한 단면들을 알 수 있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흔히들 우리 임씨들은 아들보다는 딸들이 더 총명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공예태후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 5남 4녀 9남매 낳아, 인종의 애정 독차지

 궁에 들어오 공예태후는,

 - 인종 5년(1127) 여름 4월 경오일에 장남을 낳고

 - 인정 7년 2월 기사일에 왕비로 책봉

 - 인종 8년 2남 대녕후 경을 낳고, 인종 9년 10월 경진일에 아들

   호(皓)를 낳고

 - 인종 11년(1133)에 장남 철(撤, 후에 현(晛) 왕태자로 책봉

 - 인종 19년 정월에 왕태자 철이 관례, 인종 21년(1143) 왕씨가

   태자비로 간택

 - 인종 21년 7월에 경신일에 아들 탁(晫)을 낳고

 - 인종 24년 2월 갑자일에 인종은 임종 직전 왕위를 태자 현(晛)양위

   하니, 이가 곧 의종(毅宗)이다. 의종 1년(1146) 3월 공예태후는

   왕태후로 승격

 - 의종 2년(1148)에 왕자 경(暻)은 대령후, 호(皓)는 익양후, 첫째

   공주는 승경궁주, 둘째공주는 덕녕궁주로 책봉

 - 의종 5년 4월에 셋째누이를 창락궁주, 넷째누이는 영화궁주로 책봉

 - 의종 10년 (1156) 9월 정미일에 정안공 임원후 별세

 - 의종 24년 (1170) 9월에 의종은 정중부에 의해 퇴위, 익양공 호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명종이다.

 - 명종 3년 10월에 이의민에 의하여 사살당하니, 향년47세요

   재위 25년이었다.


○ 명종의 모친사랑 지극

 고려사는 명종과 공예태후에 대해 ‘왕은 지난 시기에 의종이 불효하던 것을 징계로 삼았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태후를 지성으로 섬기고 종실, 외척간에도 화목하게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미일에 왕태후 임씨가 죽었다. 태후가 병석에 누웠을 때에 왕(명종)이 친히 약을 달이고, 여러 날 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태후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왕이 너무 울어서 눈이 물었었다. 태후가 죽은 후에 왕은 의창궁 곁 저택에 외빈을 하고 조석으로 가서 몹시 슬퍼했다.


이에 대하여 재상들이 애통한 마음을 억제하라고 청했으니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갑인일에 태후를 순릉에 장사하였다. 왕이 의창궁으로부터 도보로 미륵사에 이르러 상복을 벗고 제상궁으로 옮겨 앉았다.


무오일에 양부 재추들이 대성돌에서 표문을 올려 일상 식사의 반찬을 종전과 같이 하자고 청했으니 듣지 아니하였다. 등, 왕태후를 여윈 후 보여준 그의 효행의 모습들이다.


○ 태후의 외가는 고려 유수의 문벌인 수주이씨

 공예태후는 장흥임씨 일문을 고려의 명문 벌족으로 찬란하게 꽃피어낸 임원후의 딸이다. 임원후는 부인을 두 번 맞았는데, 한 분은 문하시중 수주 이위의 딸이요, 또 한분은 참지정사 경원 이식(李軾)의 딸이었다.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두 부인중 이위의 딸이었다. 이위의 부친은 시중 이정공(李靖恭)으로 시호가 문충이었다. 이정공은 수주이씨로 개국공신 희목의 후손인데,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한 뒤 82년 참지정사로 국사를 편찬하였던 고려조의 문신으로 86년 문하시중 상서이부판사로 치사하였다.


이정공의 아들이었던 이위 역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 예종때 복관 형부상서를 거쳐, 1110(예종5) 문하시랑평장사가 되고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던 명신이었다. 예종 16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을 거쳐 태부(太傅)가 되어 계양백(桂陽伯)의 작호까지 받고 치사했으며,


22년(인종 즉위년) 계양공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후에 외손녀인 공예태후가 인종의 비(妃)가 되자 중서령을 더하고 또 진정(鎭定)공신의 호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공예태후의 외가가 되는 수주 이씨 역시 고려 유수의 문벌이었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태어난 태후였기에 훗날 왕비로 책봉되는 영예를 입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국모로서 태후, 고려사에 길조 4번이나 기록

 일국의 국모 특히 훗날 칭송 받는 국모가 될 사람은 태생부터가 그러했지만 태어나면서 그리고 자라면서 여느 사람과 다른 신비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사 열전에는 외조부의 태몽 외에도 국모와 관련된 꿈이야기가 3번이나 더 나온다. 태후가 김인규 아들 지효와의 파혼 이후, 점장이로부터 들은 장차 국모가 될 것이라는 병점과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강등되었을 때 판관의 대들보와 황룡의 꿈,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 3되를 얻은 꿈 등이 그 것이다.


위와 같이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 것은 이처럼 결코 인위적인 작용이 아니며, 신비스러운 하늘의 의지나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왕후마다 이러한 상서로운 꿈이야기 들이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님은 고려사 열전을 다 뒤집어 봐도 금방 알 수가 있고, 가정이지만 훗날 꿈이야기를 조작했다고 한다면 왜 굳이 공예태후에게만 이러한 길조(吉兆)가 있었음을 누누이 강조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 후덕한 요조숙녀였던 태후, 천복(天福) 타고 나,

 이자겸의 증조가 되는 이자연의 세 딸이 제 11대 문종의 비였으며, 자겸의 부친 호의 딸(자겸의 누위)은 제12대 순종의 비였고,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던 권신으로,


대대로 왕실과의 중혼으로 한 겹겹의 세도외척이였고, 예종의 비가 낳은 아들이 인종이니, 자겸은 인종에게는 외조부가 되었는데도, 인종에게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외손자이자 겹 사위인 인종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이자겸의 왕위찬탈 난이 실패로 끝나, 그의 가문의 몰락과 자겸의 딸들이 반역의 딸이 되어 폐출당하고, 대신 장흥임씨인 태후가 간택이 되었다.


인종왕비로 간택된 태후 임씨 집안은 제상 집안으로서는 후덕하고, 왕후 자신이 숙덕으로 칭송되었을 만큼 교양을 지니고 행실이 아름다운 문자 그대로 요조숙녀였다.


태후 임씨의 행실과 인품이 어찌 했는지는 태후가 아들을 낳았을 때와 왕비 책봉 때에 2회여 걸쳐 내린 인종의 조서(詔書) 그리고 뒷날 태후의 죽음을 당해 명종이 보인 효행의 태도나 금주(金主)의 조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가 낳은 소생 중에서 세명이나 왕이 된, 복도 많고 특이한 왕후였던 것이다. 그리고 폐출당한 이자겸의 3, 4녀 폐비 이씨들에게서는 소생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인종은 공예태후 외에도 병부상서 김선의 딸을 차비(次妃)로 간택해 입궁시켰는데 그녀에게도 소생이 없었다.


인종이 4명의 비를 맞아 들였는데도 공예태후 한사람에게만 5남 4녀가 있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태후의 복이라면 복이요, 그 복에는 천복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 태후의 예지와 두 아들의 비운

 태후는 구중심처의 여인이었지만 예지의 면에서도 인종보다 못지 않았던 듯싶다. 그려는 숙덕 했을 뿐더러 총명하고 사려 깊고 과단성도 있었듯 싶다. 인종이 장남을 일단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태후는 자신의 같은 아들인데도 왕의 자질에서는 장자가 차자보다 못하다고 여겨 왕에게 태자를 폐하고 대령후로 대신하자고 늘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왕이 들어주지 않아서 결국은 1146. 2월 정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태후의 장자인 현(晛)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제 18대왕 의종이었으며,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런데 의종은 환락주의자였고 더구나 환관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이루어질 만큼 무력한 정치를 펴 끝내는 정중부의 난을 야기 정중부에 의해 왕위자리를 아우였던 익양공 호에게 물려주면서,


이때부터 1백년간 무신정권시대를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왜 태후가 장자이고 이미 태자로 책립된 맡아들을 불신하고 대령후 경을 태자로 옹립해 줄 것을 주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이 태후가 장자보다 차자를 더 사랑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서 의종은 그런 모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령후 경을 몹시 경계하게 된다.


대령후 경은 끝내 역모로 몰려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유배지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실(史實)에서는 대령후 왕경의 자질이나 능력 등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대령후 경은 현명한 태후가 편애할 정도였으니, 분명히 장자인 의종보다는 나았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선 기록이어서 그는 역모자로 줄 곳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연대도 기록되지 않고 불운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 비운속의 말년, 국모 체통 잃지는 않아,

 둘째아들인 대령후 경 귀양과 넷째왕자인 원경국사 충희가 여러장군들이나, 명종이 무신들과 결탁하여 죽인 것으로 알고 분이 치밀어 올라 결국은 병을 얻지만, 무신집권의 혼란기에서도 국모로서 품위를 그녀는 결코 잃지 않았다,


한이 많아 분에 못 이겨 병을 얻었을 망정, 투기하거나 사심을 품지는 않았다. 비운의 말년이었지만 그녀는 명종이 그토록 비통해 할 정도로 자녀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인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을 맞아 금나라가 조문사절에 보낸 조문일절(서두의 고려사 소개 ‘제문’ 참조)은 그러한 태후의 삶을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현(懸)에서 군(郡)을 뛰어넘은 장흥부의 승격은 파격적 조치

 당시 장흥은 정안현(定安懸)으로 영암군에 소속되었는데, 인종 때에 공예태후의 탄생지라 하여 현재의 이름인 장흥(長興)으로 고쳐 부(府)로 승격시켰다. 지금의 장흥군은 공예태후에 연유한 것이다. 고려의 지리지라 할 수 있는 고려사 권 57 지제 11에는 장흥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는 ‘장흥부는 원래 백제의 오차현(烏次懸)인데, 신라 경덕왕은 오아(烏兒)로 고쳐서 보성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와서 정안현(定安懸)으로 고치고 영암 관할 하에 소속시켰으며, 인종 때에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다. 원종 6년에는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고, 충선왕 2년에 옛대로 낮추어서 장흥부로 하였다. 와 같이 정안현의 장흥부의 승격은 공예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그 연유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장흥의 성씨(20)/장흥임씨(10)-공예태후(상)

 

고려사열전에 전하는 공예태후 임씨

장흥타임스 기자 webmaster@jhtimes.net

□고려사 열전의 공예태후


고려사 열전 제1 편에는 고려시대 왕비들의 열전이 소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공예태후 임씨에 관한 전기는 꾀 비중있는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에 관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공예태후 임씨는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이요, 문하시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비가 탄생한 날 밤, 이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이 그 집의 중문에 세워지면서, 깃발의 꼬리는 선경전(宣慶殿) 치미(옛 궁전의 지붕 용마루 끝에 붙인 짐승모형)를 싸고 돌며 휘날리는 것이었다. 비가 출생하자, 이위는 특별히 사랑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에 궁궐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녀가 성년(15세)이 되어 안산김씨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 지효(之孝)와 약혼하였는데,

 

(金仁揆:?∼1142, 고려시대의 문신. 문하시중 경용景庸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1117년에 좌승선左承宣이 되었으며, 인종 22년 좌간의대부·지주사가 되고, 24년 검교사공·이부상서·문하성지사檢校司空吏部尙書門下省知事를 지냈다. 사돈 이자겸이 실각한 뒤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복직되어 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는데, 성품이 너그러우며 인물이 출중하여,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그를 칭찬하였다-필자 주)

혼례날 밤에 김지효가 신부의 집 대문에 이르니, 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결혼을 사절하고 신랑을 돌려보낸 후 임원후는 점쟁이에게 병점(病占)을 치게 하였더니, 점쟁이는 "근심할 것이 없소. 이 처녀는 비할 바 없이 귀하니 반드시 왕후(국모)가 될 것이요"라고 하였다.


당시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왕에게 바쳤는데, 이 소문을 듣고 아주 싫어하였다(이미 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낸 이자겸으로서는 임원후의 딸이 왕비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필자 주). 그래서 이자겸은 즉시로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여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켜버렸다.


그로부터 일년여가 지난 후 개성부 막료(판관)의 꿈에 태수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지며 큰 구멍이 생기더니 황룡(黃龍)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자 막료는 예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임원후를 방문하고 그 꿈 이야기를 말하면서 축하하기를 "사또 댁에서 반드시 큰 경사가 있을 것이니 꼭 알아두십시오"하고 말한 일도 있었다.


또 인종이 일찌기 꿈에 들깨 5 승(升=되)과 황규(해바라기) 3승(升=되)을 얻었다. 이 꿈 이야기를 척준경에게 말하니, 척준경이 해몽하기를 "들깨(荏·임)란 임(任)입니다. 임씨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이할 징조이고, 그 수가 다섯이니 다섯 아들을 낳을 길조입니다. 황규(黃葵)의 황은 임금 황(皇)자와 같으며, 규(葵)는 곧 규(揆·헤아림)로 도규(道揆,도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함)의 규(揆,법도)와 같으니, 이른바 황규란 임금이 도규를 잡고 국가를 통치하게 될 서조(瑞兆)이며 그 수가 셋인 즉, 아들 다섯 중에서 세 아드님이 국왕이 될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미리 이자겸의 두 딸을 내보내고 인종 4년에 임씨를 선택하여 궁중에 들여오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고 불렀다. 인종 5년(1127년)에 비가 의종(毅宗)을 낳았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그대 임씨는 덕망있는 가문의 출신으로 궁중에 들어와서 궁내여인들을 잘 관리하고 가르쳐서 오직 서로 경계하고 돕는 도리를 준수할뿐이고, 편파된 짓이나 사사로운 총애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없었소. 길한 징조가 꿈에 나타나 왕실의 맏아들을 낳았으니 근심(近臣)에게 명령하여 좋은 선물을 보내오"


조서와 함께 왕은 그릇, 포목, 곡식, 안마(鞍馬)를 주었다. 인종 7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그 조서(왕의 만족과 기쁨과 칭송이 행간에 넘쳐흐르는 조서-필자 주)에 이르기를 "옛날에 현철한 임금들이 천하를 영유(領有)한 것은 자기의 덕이 높은 데만 기인된 것이 아니라 대개는 현명한 아내(안해)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오. 내가 외람되게 대명을 받고 국가의 위업을 계승하여 지키면서 가정을 이룩한 것은 인륜의 대의를 존중하는 까닭이요 하늘이 정하여 준 현처는 나의 배필로서 적합하지 않을 수 없소. 아! 그대 임씨는 일찌기 여성다운 재질을 가지고 덕망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였소. 모든 행동을 반드시 예절에 맞게 하고 집에 있으면서 여성이 할 일들을 잊지 않았으며 비로소 후궁에 들어와서는 이제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 한 가정의 좋은 일이 될 뿐이리오. 실로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법전에 의하여 지위와 칭호를 높여주는 바이오. 이제 관리를 시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그대를 왕비로 책봉케 하오. 아아! 검소하고 절약하면 자기 몸을 보존할 수 있으며 삼가하고 공손하면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뜻을 잘 체득하여 길이 경사를 누리길 바라 ?"


인종 8년에 대녕후(大寧侯) 경(暻)을 낳았을 때, 왕이 또 사신을 보내어 조서(왕의 임씨에 대한 경애의 정이 넘쳐나는 조서-필자 주)를 내렸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는 명특한 자질로 왕비의 존귀한 지위를 차지하였소. 부부간에 화목하고 기뻐하며 근로(勤勞)를 일삼았소. 생남할 경사로운 징조를 맞아도 다시 또 아들을 낳았으니, 나는 이를 심히 무척 기쁘고 축하하여 그대에게 예물을 주어 우대하지 않을 수 없소"하면서 다시 예물을 주었다.

인종 9년에 그가 또 명종(明宗)을 낳으니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그 조서를 내리기를, "그대 임씨는 나의 내직(內織,궁중의 집안 일)을 주관하는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었소. 첫아들을 낳아 벌써 세자가 되었고, 또 아들을 많이 두니, 이 또한 필시 그대가 어진 탓이라 생각하오. 이렇게 아들을 낳은 경사는 저 연매(燕媒)의 전설이 있는 아간후(娥簡后)의 그것과도 같다 할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소. 응당 우대를 받고 영원히 복을 누려야 할 것이라 여기면서 예물을 보내오"하였다.


인종 16년에 비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죽으니, 왕은 소족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였으며, 백관들은 글을 보내어 위문하고 3일간 소복을 입었다. 그리고 이씨에게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의 칭호를 추증하였다.


태후는 의종(毅宗), 대녕후경(大寧侯暻), 명종(明宗), 원경국사 충희(元敬國師沖犧), 신종(神宗) 등 네아들과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네 궁주를 낳았다.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존칭하고, 그의 궁전을 후덕전(厚德殿)이라고 하였으며, 부(府)를 설치하고 선경부(善慶府)라 하고 관속을 두었다.


당초에 태후가 둘째아들을 사랑하며 그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인하여 왕이 그(둘째아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왕이 태후를 모시고 앉아서 담화하다가 왕의 말이 태후의 뜻을 거슬렸던지, 갑자기 태후가 발을 벗고 맨발로 궁전에서 밖으로 내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뭐라고 맹세하니, 갑자기 우뢰와 소낙비가 내리며 천둥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번개불이 왕의 좌석을 향하여 번쩍였다. 순간 왕이 놀라고 겁이 나서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엎디어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궁중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 이런 하늘의 경고를 받은 왕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모자간의 사이가 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명종 12년(1182년)에 충희가 죽었는데, 왕은 태후가 비통해 할까 염려하여 알리지 않았더니 몇달 지나서 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장군들이 충희를 죽인 것으로 짐작하고(때는 무신들이 득세하여 장군들의 세상이었다. 또한 이미 10여년 전에도 큰 아들인 의종이 장군들에 의해 희생되기도 했으므로 왕태후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필자 주)분이 치밀어 드디어 병을 얻었다.


당시 다섯째 왕자였던 평량공(平諒公:후에 신종으로 즉위)이 치질을 앓아서 오랫동안 태후께 문안하지 못하였는데, 태후는 평량공(신종)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하였고 이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왕이 평량공에게 요여(腰與)를 타고 들어와 문후하고 위로하라고 명령하였다. 평량공이 문안드리니, 태후가 기뻐하는 나머지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네가 죽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너를 다시 보는구나!"하고 말했다. 평량공이 대답하기를 "어머님의 병환은 마음 속의 번민으로 발생된 듯하니 풍악이라도 들으시고 마음을 푸십시오"하고 권고하고는 관현악을 연주케 했다. 왕과 평량공이 축배를 올리면서 즐겁게 놀았더니 병세가 호전된 듯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또다시 위독하여 드디어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순릉(純陵)에 안장하였으며, 시호는 공예태후(恭睿太后)라고 하였다.


이듬 해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생각컨대 돌아간 분은 일찌기 명문의 딸로서 왕실로 시집와서 초년에는 부녀의 도리로서 남편을 내조하였으며, 만년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그 자손들을 보살피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습니다. 응당 부의를 보내야하겠으므로, 이제 주효를 갖추어 제사를 드리노니, 영혼이 있거든 이 성의를 받으시오"라고 하였다.


이상은 고려사는 열전 제1편에 수록된 공예태후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장흥의 성씨(21)/장흠임씨(21)-공예태후(중)

 

5남4녀낳아 인종 총애 독차지

고려사의 열전 인종 편을 보면, 인종이 공예태후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은 그의 부친인 임원후가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있을 때인 인종 4년(1126년) 6월 을묘일로 기록되어 있다.


궁에 들어 온 이후 공예태후 임씨의 기록을 보면 △인종 5년(1127) 여름 4월 경오일에 장남 낳고 △인종 7년 2월 기사일에 왕비로 책봉되며 △인종 8년에는 2남 대녕후 경(大寧侯 暻)을 낳고 △인종 9년 10월 경진일에는 아들 호(晧)를 낳고 △인종 11년(1133)에는 장남 철(撤, 후에 현晛으로 개명)이 왕태자로 책봉되고 △인종 19년 정월에 왕태자 철이 관례를 치른다. 이어 △인종 21년(1143) 왕씨(王氏)가 태자비로 간택되고 △인종 21년 7월 경신일에 아들 탁(晫)을 낳았으며 △인종 24년(1146) 2월 갑자일에 인종이 별세하니, 향년 38세요, 재위 24년이었다. △인종 24년 2월 갑자일에 인종은 임종 직전 왕위를 태자 현(晛)에 양위하니, 이가 곧 의종(毅宗)이다. △의종 1년(1146년) 3월에 공예태후는 왕태후로 승격되며 △의종 2년(1148)에 왕자 경(暻)은 대녕후(大寧侯), 호(晧)는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고 첫째공주는 승경궁주(承慶宮主)로 둘째공주는 덕녕궁주(德寧宮主)로 책봉되고 △의종 9년(1155) 9월 정미일에 임원후가 별세한다 △의종 5년 4월에 샛째누이는 창락궁주(昌樂宮主)로, 넷째누이는 영화궁주(永和宮主)로 책봉되며 △의종 8년(1154) 9월 기미일에 정안공 임원애가 별세한다. △의종 24년(1170년) 9월에 의종은 정중부에 의해 퇴위당하고 익양공 호(晧)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명종이다. 의종은 명종 3년 10월에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사살당하니, 향년 47세요 재위 25년이었으며, 왕위를 내놓은 기간은 3년이었다.


고려사는 명종과 공예태후에 대해 "왕은 지난 시기에 의종이 불효하던 것을 징계로 삼았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태후를 지성으로 섬기고 종실, 외척간에도 화목하게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종 13년(1183년) 11월 계미일에 공예태후가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인종의 왕후가 되어 5남 4녀 9남매를 낳고, 남편과 자녀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임시였다.


명종의 모친 사랑 지극


고려사는 임종 당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미일에 왕태후 임씨가 죽었다. 태후가 병석에 누웠을 때에 왕(명종)이 친히 약을 달이고 여러 날 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태후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왕이 너무 울어서 눈이 물었었다. 태후가 죽은 후에는, 왕은 의창궁(義昌宮) 곁 저택에 외빈을 하고 조석으로 가서 몹시 슬퍼했다. 이에 대하여 재상들이 애통한 마음을 억제하라고 청했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갑인일에 태후를 순릉에 장사하였다. 왕이 의창궁으로부터 도로로 미륵사에 이르러 상복을 벗고 제상궁(堤上宮)으로 옮겨앉았다. 무오일에 양부(兩府) 재추들이 대성돌에서 표문을 올려 일상 식사의 반찬을 종전과 같이 하자고 청했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이하 명종 14년) 정월 초하루 신묘일에 정조 축하의식을 정지하였다. …4월 임신일에 연등회를 열고 이튿날 대회에 풍류를 구경하였으나, 태후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임시로 상원의 연등행사를 정지하시고 이날에 이르러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꽃을 꽂는등 여러가지 놀음만은 금지하였다. 4월 병신일에 금나라의 조문사절이 왔다. …정사일에 왕이 대관전에서 금나라 사신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사신은 그 연회가 길례(吉禮)를 좇지 않았다 하여 노여워서 참가하지 않았다. …6월 무진일에 왕이 또 금나라 사신을 위하여 대관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마침내 채붕(綵棚,비단으로 만든 시렁)을 만들지 않고 꽃도 꽂지 않았으며, 주악도 하지 않았다. …11월 갑오일에 왕이 친히 왕태후의 우제(虞祭)를 거행하였다."

이상은 명종이 왕태후를 여읜 후 보여준 그의 효행의 모습들이다. 왕태후가 별세한 지 5개월여 만에 금나라 사신들이 조의사로 파견돼 왔는데, 그들은 왕의 모후에 대한 조문행위가

 지나치다고 여겨 왕의 이같은 처신을 나무라는 조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도 왕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조문의식을 중지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었다.


"군자가 남의 집상(執喪)하는 뜻을 빼앗지 않는 것은 대개 교화를 바르게 하려 함이요…얼마 전에 보내온 글월에서 모친의 상사를 당하였다 하니 나도 듣기에 서러운데 왕은 이 슬픔을 어찌 견디겠소? 그러나 한 나라의 중책을 생각할 때 어찌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겠는가. 이에 우리는 이미 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왕이 평사시와 같이 정사에 임하도록 하였소. 상복을 입고 적을 격파한 옛 명장도 있었거니와 부모를 추모하는 효성은 마음 속에 있다 할 것이니 어찌 상복의 겉치레만 치중하리오…조상이 물려준 위업을 소중히 여겨 군민(軍民)에 대한 도리와 본분을 지켜야 할 것이니 왕은 속히 나라의 평안부터 보존하길 바라는 바이오.


태후의 외가는

고려 유수의 문벌인 수주이씨


공예태후는 장흥임씨 일문을 고려의 명문 벌족(閥族)으로 찬란하게 꽃피어낸 문하시랑 평장사 출신의 임원후(任元厚)의 딸이다. 임원후는 부인을 3번 맞았는데, 초취는 여진족 정벌과 동북 9성으로 유명한 문하시중 펴평 윤관(坡平 尹瓘/?∼1111)의 딸이였으며, 재취 역시 문하시중 수주 이위(樹州李瑋 1049∼1133)의 딸이요, 삼취는 참지정사 경원 이식(慶源李軾)의 딸이였다.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세 부인 중 이위의 딸이었다. 이위의 부친은 시중 이정공(李靖恭/?∼1099)으로, 시호가 문충(文忠)이었다. 이정공은 수주(樹州) 이씨로 개국공신 희목(希穆)의 후손이었는데, 문종(文宗) 조에 문과에 급제한 뒤 1059년(문종 13) 시예부외랑(試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 〈삼례도(三禮圖)〉54판, 〈손경자서(孫卿子書)〉92판을 신조(新彫)하여 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82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국사를 편찬하였던 고려조 문신이었다(86년 문하시중·상서이부판사로 치사하였다).

이정공의 이들이었던 이위 역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 되었을 때 선종이 각읍 수령들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윤관(尹瓘)·최사열(崔思悅)과 함께 각 도에 파견하고 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이때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예종 때 복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1110년(예종 5) 문하시랑평장사가 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록되었던 명신이었다. 예종 16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을 거쳐 태부(太傅)가 되어 계양백(桂陽伯)의 작호(爵號)를 받고 치사(致仕)했으며, 22년(인종 즉위) 계양공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후에 외손녀인 공예태후가 인종의 비(妃)가 되자 중서령을 더하고 또 진정(鎭定)공신의 호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공예태후의 외가가 되는 수주이씨 역시 고려 유수의 문벌이었다.

따라서 공예태후가 왕비로 책봉될 무렵(당시 임원후는 조정 안에서 부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전으로 그의 관직 또한 전중내급사 종6품직에 불과했다)에는 이정공-이위로 이어지는 수주이씨 임의-임원후으로 이어지는 장흥임씨보다 문벌의 명성으로나 권위 면에서 월등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까닭에서인지, 아니면 공예태후가 외가에서 태어나서였는지, 태후에 관한 태몽조차 친가인 임원후 쪽이 아닌 외조부의 꿈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다.


굳이 장흥임씨와 수주이씨의 우열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태후의 외가 역시 장흥임씨 못지 않는 문벌이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태어난 태후였기에 훗날 왕비로 책봉되는 영예를 입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호에 소개된 임원준, 즉임의의 셋째아들로 재상(평장사)을 역임했던 임원준(任元濬)은 일명 임원순(任元順)으로, 장흥임씨 世系表에서 중시조의 한 사람인 바로 임원순과 임원준은 동일인물임을 밝힙니다. 필자 주

 

장흥의 성씨(22)/장흥임씨(12)-공예태후(하)


국모로써 태후, 고려사에 길조 4회 기록


일국의 국모, 특히 훗날 칭송받는 국모가 될 사람은 태생부터가 그러했지만, 태어나면서 그리고 자라면서 여느 사람과 다른 신비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사 열전〉에는 태후 외조부의 태몽 외에도 국모와 관련된 꿈 이야기가 3번이나 더 나온다. 태후가 김인규(金仁揆) 아들 지효(之孝)와의 파혼 이후, 점장이로부터 들은, 장차 국모가 될 것이라는 병점과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강등되었을 때 판관의 대들보와 황룡의 꿈,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 3되를 얻은 꿈 등이 그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연이은 꿈 이야기에서 훗날 꾸며진 듯한 작위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 것은 이처럼 결코 인위적인 작용이 아니며, 신비스러운 하늘의 의지나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왕후마다 이러한 상서로운 꿈 이야기들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님은 〈고려사 열전〉을 다 뒤집어 봐도 금방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이지만, 훗날 꿈 이야기를 조작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굳이 공예태후에게만 이러한 길조(吉兆)가 있었음을 누누히 강조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길조 등은 태후의 숙덕·인품,

당대 민신을 반영


우리는 여기서 당대의 정치현실을 먼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 16대 예종(1079∼1122. 재위 1105.10∼1122.4)의 뒤를 이어 맏아들 해(楷)가 외조부인 권신 이자겸에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인종이다.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던 권신이었다. 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그는 연소한 태자(太子: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만들어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지만, 그의 권력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 (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다가 26년(인종 4)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고, 그를 반대하는거사를 일으킨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을 모두 살해한 후부터는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다 실패하여 척준경(拓 螂? 등에 의해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였던 인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자겸의 선대로 올라가면, 이자겸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의 중혼으로 한 겹겹의 세도외척이었다. 즉 그의 증조가 되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제 11대 문종(1019∼1083,재위 1046∼1083)의 비였으며, 자겸의 부친 호(顥)의 딸(자겸의 누이)은 제 12대 순종(1047∼1083,재위 1083.7∼1083.10. 재위 3개월)의 비였으며, 자겸의 차녀는 예종의 비였고, 예종의 비가 낳은 아들이 인종이니, 자겸은 인종에게는 외조부가 되었는데도, 자겸의 욕심은 끝간 데를 몰라 셋째·넷째 딸까지 인종의 비로 들였던 것이다. 딸을 둘이나 외손부로 삼은 것이다. 당시 인종은 14세의 어린 소년, 그러니 인종은 완전히 꼭두각시였고, 이자겸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것도 부족하여 외손자이자 겹사위인 인종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왕위찬탈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덕한 요조숙녀였던 태후,

天福 타고 나


이자겸의 왕위 찬탈 난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 200년동안 유지된 사직이 하마터면 다른 성씨에게 빼앗길뻔한 일대 위기였다. 그러므로 이자겸 난의 실패와 그의 따른 그의 가문의 몰락은 당시에서는 천벌이나 다름없었고 민심의 승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겸의 딸들이 하루아침에 반역의 딸이 되어 폐출당하고, 대신 장흥임씨인 태후가 간택된 데 대해 민심이 크게 환영하고도 남았을 것임에는 불문가지다.


또 인종의 왕비로 간택된 태후의 임씨집안은 재상집안으로서는 후덕하고, 왕후 자신이 숙덕으로 칭송되었을 만큼 높은 교양을 지니고 행실이 아름다운 문자그대로 요조숙녀였다. 태후 임씨의 행실과 인품이 어찌했는지는 태후가 아들을 낳았을 때, 왕비 책봉 때에 2회에 걸쳐 내린 인종의 조서(詔書)와 뒷날 태후의 죽음을 당해 명종이 보인 효행의 태도나 금주(金主)의 조문을 보면 확연히 들여난다. 게다가 그가 낳은 소생 중에서 세명이나 왕이 된 복도 많고 특이한 왕후였던 것이다.


그곳뿐만이 아니다. 폐출당한 이자겸의 3·4녀 폐비 이씨들에게는 소생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인종은 공예태후 외에도 병부상서 김선의 딸을 차비(次妃)로 간택해, 입궁시켰는데,

그녀에게도 소생이 없었다. 인종이 4명의 비를 맞아들였는데도 공예태후 단 한사람에게만 5남4녀가 있었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태후의 복이라면 복이요, 그 복에는 천복이 함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후에 사가들이 작위로 태후에 대한 태몽 등의 꿈 이야기를 꾸몄다고 한다면, 태후가 바로 그처럼 천복을 받고 태어난 왕비요 왕후였기에 하늘이 마치 왕비로 예정했다는 식으로 그러한 꿈이야기나 길조등을 각색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의 예지와 두 아들의 비운


태후는 구중심처의 여인이었지만, 예지의 면에서도 인종보다 못지않았던 듯싶다. 그녀는 숙덕했을뿐더러 총명하고 사려깊고 과단성도 있었듯 싶다. 인종이 장남을 일단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태후는 자신의 같은 아들인데도 왕의 자질에서는 장자가 차자보다 못하다고 여겨 왕에게 태자를 폐하고 둘째인 대령후로 대신하자고 늘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에서 전하는, 태후의 하늘을 향한 기도와 갑자기 내린 소나기, 궁중기둥에 벼락이 내리고 왕이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엎디어 들어간, 하늘이 왕을 경계한 듯한 믿기 어려운 이적의 일화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반증하고 있다.


1146년 2월 장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태후의 장자인 현(睍)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제 18대왕 의종이었으며, 그의 나이 20세였다.


의종조의 실록을 보면, 태후가 그를 왕의 자질에 의심을 품었음직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의종은 한 마디로 환락주의자였고, 의종조에 이른바 '환관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이루어질만큼 무력한 정치를 펴, 끝내는 정중부의 난을 야기, 정중부에 의해 왕위자리를 아우였던 익양공 호(顥)에세 물려주면서 이때부터 1백년간의 무신정권 시대를 열게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왕이었다.


왜 태후가 장자이고, 이미 태자로 책립된 맏아들을 불신하고, 대령후 경(大寧候暻)을 태자로 옹립해 줄 것을 주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게한다.


태후가 장자보다 차자를 더 사랑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서 의종은 그런 모후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령후 경을 몹시 경계하게 된다. 대령후 경은 끝내 역모로 몰려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유배지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史實에서는 대령후 왕경의 자질이나 능력 등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명한 태후가 편애할 정도였으니, 분명히 장자인 의종보다는 나았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선 기록이어서, 그는 역모자로 줄곧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연대도 기록되지 않는 채 불운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의 도입은 무모한 짓이기는 하지만, 만일 왕경이 왕위에 올랐다면, 어떠하였을까. 최소한 의종조의 무능한 정치형태는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무튼 태후에게는 지아비인 인종의 죽음에 이어 자신이 지극히 사랑했던 왕경의 유배는 큰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비운 속의 末年,

국모 체통 잃지는 않아


그러나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태후는 의종과의 극한 대립은 없이 잘 견뎠던 같다. 대신, 자식 잃은 일은 두고두고 가슴 깊이 한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명종 12년(1182년)에 넷째왕자인 원경국사 충희가 죽자, 명종은 태후가 놀라고 비통해할까 봐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며, 몇 달 후에야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후는 여러 장군들이나, 명종이 무신들과 결탁하여 충희를 죽인 것으로 알고 분이 치밀어 기어코 병을 얻고 만다. 이것 역시 무신 득세 시대였던 당시 구중심처에 있던 태후 처지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때마침 다섯째 왕자 평량공(후에 신종)이 치질로 오랫동안 태후에게 문안을 못했는데, 태후는 그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줄로 알고 병세가 더 악화되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이것이 태후 이전에 한 인간이고, 5남 4년를 둔 어머니였던 장흥임씨의 말년이었다.

그러나, 무신집권의 혼란기에서도 국모로서 품위를 그녀는 결코 잃지 않았다. 한이 많아 분에 못이겨 병을 얻었을 망정, 투기하거나 사심을 품지는 않았다. 비운의 말년이었지만, 그녀는 명종이 그토록 비통해 할 정도로 자녀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인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을 맞아 금나라가 조문사절에 보낸 조문의 일절은 그러한 태후의 삶은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생각하건대 영가(靈駕:돌아가신 분)는 일찌기 명문의 딸로서 왕실로 시집와서 초년에는 부녀의 도리로서 남편을 내조하였으며, 만년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그 자손들을 보살피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습니다.…”

<장흥신문 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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