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불교와 안산
(1) 화엄종과 경덕국사 신라 말 국가의 불교 통제가 무너지고 후삼국을 거치면서 다원적인 불교 세력이 형성되었다. 태조는 당시의 불교계를 적극 보호한다는 이념을 내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나, “신라의 불교사원에 대한 통제가 무너지고 귀족과 토호들이 원당(願堂)이란 명목으로 사원을 무질서하게 창건함으로써 나라가 망하였다.”고 훈요(訓要)로써 다음 왕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는 건국과 더불어 불교계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태조는 훈요의 둘째 조에서 사원은 각각의 종파를 고수하고 이들 간에 서로 바꾸거나 빼앗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태조는 다원적인 종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파는 고유성을 가지고 소속된 사원은 같은 종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교계는 물론 국가에 유익하다는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태조가 다종파를 인정한 것은 국가의 불교계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고 추측된다.
그 결과 고려에서는 여러 개의 종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다. 화엄종(華嚴宗)·유가종(瑜伽宗)·천태종(天台宗)·선종(禪宗;조계종<曹溪宗>) 등이 그러한 예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화엄종이었다.
고려의 화엄종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에 의하여 완성된 교학불교(敎學佛敎)에 기원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학파 시대를 지나, 신라 말에 의상과 그의 계승자에 의하여 창건된 지방 사원을 중심으로 수도인 경주의 통제를 벗어나 종파로서의 독립성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하나의 종파로서 화엄종을 인정하였다.
고려의 화엄종은 법왕사(法王寺)와 귀법사(歸法寺)와 같은 중앙사원을 중심으로 광종 때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면서 가장 우세한 종파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균여(均如)와 탄문(坦文)은 고려 초기 화엄학의 대가였으며, 왕권의 강화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여 준 대표적 화엄 승려이기도 했다.
그후에도 화엄종에서는 안산 출신인 김은부(金殷傅)의 아들인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과 같은 여러 왕사·국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고려 중기에는 왕자나 종실에서 출가한 고승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외척 문벌 세력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자로서 화엄종에 입문한 대표적인 이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었다. 의천은 화엄종의 승려로서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의 가르침을 받고 활약하였지만, 그는 그 뒤 천태종을 개창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무신란 이후 화엄종은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문벌의 후예들과 연결되어 여러 차례 도전하다가 종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지방에 기반을 둔 사원과 고승에 의하여 겨우 종세를 유지해 왔으나 공민왕(恭愍王)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종세가 더욱 침체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화엄종은 주로 고려 전기에 크게 떨쳤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고려 전기에 화엄종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민의 단합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화엄종에서 안산에 본관을 둔 김은부의 아들인 김난원이 한때 그 종파를 대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안산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김난원58)은 앞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듯이 김은부의 둘째아들로, 목종 2년(999년)에 태어나 문종 20년(1066년)에 죽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에 왕사에 임명되어 문종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죽은 뒤에는 승려의 지위로서는 가장 높은 국사(國師)에 추봉(追封)되었고 경덕(景德)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화엄종의 인맥으로 보아도 고려 초기 화엄의 대가였던 균여와 탄문에 이어 특히 문종 치세에 화엄종 최고봉의 지위와 권위를 누렸다. 그리고 그는 휘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원경왕사와 의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경덕국사 묘지명 **
판 독 문
해석문
(2) 천태종과 대각국사
천태종은 원래 광종(949~975년) 때 「천태4교의(天台四敎儀)」를 지은 체관(諦觀) 등에 의해서 주창되었다.59) 그러나 그들은 고려에서보다 중국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므로 고려에서 종파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독립된 종파로서 천태종을 성립시킨 사람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은 그의 자(字)이고 본명은 왕후(王煦)였는데, 문종 9년(1055년)에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숙종 6년(1101년)에 죽었으며 대각은 그의 시호였다. 문종이 김은부의 외손자였으므로 의천은 김은부의 외증손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출가하여 선생으로 모신 김난원, 즉 경덕국사와도 혈연 관계에 있었다. 의천 쪽에서 보면 김난원은 아버지(문종)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의천의 출생도 안산 김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 당시 왕사였던 화엄학의 거장 김난원에 의하여 정식 승려가 되고 그에게서 불교(특히 화엄학)를 배웠다. 그러므로 그의 불교의 바탕은 화엄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천의 특성은 화엄에 그치지 않고 그 밖의 여러 분야에 걸쳐 불교를 두루 섭렵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심지어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에 이르기까지도 깊이 공부한 바 있었다.
의천은 마침내 송나라에 유학해서 불교를 계속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화엄과 천태를 열심히 배우고 귀국하였으며, 교종(특히 화엄종)과 선종이 대립하여 있는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즉 그는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잡념을 멈추고 마음을 집중시켜 바른 지(智)로써 사물을 관조하여 그 본체를 밝히는 지관(止觀)을 중요시하는 천태종을 폈다.
이에 이르러 고려의 불교는 비로소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의천은 천태종을 열면서 선종 9산의 뛰어난 인재를 모집하였는데, 이것이 선종을 자극하여 선종 종래의 9산을 해체하고 조계종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여하튼 의천에 의하여 성립된 천태종은 그 세를 크게 떨쳐 나갔다. 의천이 거느린 문도(門徒)만도 덕린·익종·경란·연묘 등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문도들이 의천 이후의 천태종을 이끌고 나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후기에 이르러 천태종은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실천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전남에 있었던 만덕산의 백련사(白蓮寺;만덕사<萬德寺>)는 천태종의 대표적 사찰이었는데, 고려 후기에 민중을 교화하는 실천종교로서의 천태종을 상징해 주던 사찰이기도 하였다.60) 그러나 고려 후기의 천태종이 민중과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태종은 중앙의 귀족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귀족들의 세속적 이익 추구의 염원을 당시의 천태종은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유가종과 수리사
유가종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뒤 경흥·태현·진표로 계승되어 고려로 넘어왔으며, 고려에 와서 비로소 종파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가종의 세력은 고려 초기에는 크게 떨치지 못하다가 현종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크게 융성하기에 이르렀으며,
현종 이후 당대의 문벌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의 비호와 후원을 받아 발전하였다. 더욱이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모두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왕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유가종은 문벌귀족뿐만 아니라 왕실의 각별한 배려 속에 크게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현종은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지목하여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했는데, 이 현화사가 유가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인종 중기 이후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주 이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유가종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그 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비록 종파로서의 위치는 잃지 않았지만 그 세력을 떨치지는 못하였다.
현종은 아버지 안종의 묘를 경상도 사천에서 개경의 영취사 아래로 옮겼으며, 아버지를 위하여 가까운 곳에 진전사원으로서 유가종 사원인 현화사를 개창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이 현화사를 얼마나 중시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 이후 현화사는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되었으며, 유가종의 고승들은 대부분 만년에 현화사의 주지를 역임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었다.
물론 그렇게 안 되었다 하더라도 유가종의 고승들은 생애에 적어도 한 번쯤은 이곳 주지를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현화사는 유가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찰이었다.61) 현화사 이외에 유가종 사원으로 중요한 것은 해안사·천흥사·수다사·삼천사·월악사·수리사·법천사·금산사 등이었다. 이 중 수리사(修理寺)는 안산의 수리산에 있었다. 수리사는 고려 중기 유가종의 고승 관오(1096~1158년)가 주지한 적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이 수리사가 고려 중기에 어떻게 유가종의 유력한 사찰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화사가 현종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현종은 어째서 유가종에 관심이 많았을까. 그는 즉위 전 위태로울 때 유가종 사원에서 보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즉 그는 쫓기는 입장에서 오늘날 서울 근교에 있는 삼각산의 유가종 사원인 장의사·신혈사 등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원들이 인주 이씨와 안산 김씨와 일찍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주 이씨가 그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주 이씨는 대대로 유가종 승려를 배출해 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삼각산은 인주나 안산이나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웃해 있던 근접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수리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수리사는 아예 안산에 있었으므로 특히 안산 김씨와 전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안산 김씨와 왕실이 밀착되면서 유가종의 수리사는 더욱 커다란 후원 세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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