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김씨(蓮城金氏) : 시조 : 김선필(金宣弼)
<천김록(천금록)>에 의하면 연성김씨는 사실은 안산김씨라 하였고, <김씨동원보>에는 시조가 선필이라 하였다.
선필은 부정을 역임하였고 그는 안산김씨 시조 긍필의 아우이며, 상호군 은부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 사적이나 세계는 미상이다. 연성은 경기도 안산의 옛 이름이다. 2000년에 총 228가구 655명이 있다.
연성김씨 인구 분포도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정(金鼎, 1593 癸巳生) : 사마시(司馬試) 인조2년(1624) 증광시 삼등(三等)
김수채(金受采, 1683 癸亥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45년(1719) 증광시 삼등(三等)
김광오(金光五, 1667 丁未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4년(1708) 식년시 삼등(三等)
김만채(金萬采, 1687 丁卯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7년(1711) 식년시 삼등(三等)
* 모두 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사마시 4명)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성김씨는
1985년에는 총 80가구 316명,
2000년에는 총 228가구 65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완산김씨(完山金氏)
시조 김정(金晸)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10세손인 김약선의 아들이다. 전주김씨 시조 김태서의 손자다. 따라서 완산김씨는 전주김씨와 뿌리가 같다.
과거 급제자는 김유정(金有鼎, 1630 庚午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식년시 병과(丙科), 김승길(金承吉, 1612 壬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홍(金烘, 1663 癸卯生) : 사마시(司馬試) 영조1년(1725) 증광시 삼등(三等), 김두환(金斗煥, 1861 辛酉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삼등(三等), 김응정(金應正, 1610 庚戌生) : 역과(譯科) 인조11년(1633) 식년시, 김광운(金廣運, 1711 辛卯生) : 역과(譯科) 영조1년(1725) 증광시, 김경희(金景禧, 1711 辛卯生) : 역과(譯科) 영조5년(1729) 식년시, 김효검(金孝儉, 1725 乙巳生) : 의과(醫科) 영조23년(1747) 식년시, 김만일(金萬鎰, 1725 乙巳生) : 의과(醫科) 숙종7년(1681) 식년시 등 모두 9명이다. 무과 2명, 사마시 2명, 역과 3명, 의과 2명이다.
본관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이다. 2000년에 총 201가구 653명이 있다.
아산김씨(牙山金氏)
시조 김신검은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김자연의 아들로 벼슬이 예조판서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세계를 알 수 없다. 의성김씨세보에 김용자의 후손인 안성파에 그의 부자가 보이는 점으로 보아 의성분파인 듯하다.
또 세계를 밝힐 수 없는 김구를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는데, 그는 자가 직지요, 호는 귀산으로 1416년(태종16) 친시문과에 급제, 사성 상주목사를 거쳐 1448년(세종30) 판종부사사가 되어 사서를 언해했고 1458년(세조4) 초학자회를 언해하는 등 한문을 국역하는데 공이 컸다.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러 치사했다. 경사에 밝고 성리학에 정통했다. 시호는 문장이다.
그를 시조로 하는 아산김씨세보에는 조선개국공신인 경주김씨 계림군파조 김곤의 현손으로 되어 있다. 그가 아산으로 낙향 세거하므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아산으로 했다. 그러나 경주김씨측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김구의 묘는 충남 아산군 일북면 사정리에 있다.
인물은 김응문은 1570년(선조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은계도 찰방을 지냈고, 김두문 역시 찰방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자는 김응문(金應文, 1537 丁酉生) : 문과(文科) 선조3년(1570) 식년시 병과(丙科), 김찬(金璨, 1537 丁酉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2명이 있다. 문과 1명, 무과 1명이다.
본관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2000년에 총 4가구 13명이 있다.
안성김씨(安城金氏)
시조 김돈(金墩)은 김알지의 후손인 김재영의 후손이라고 한다. 김재영이 신라 진성여왕 때 백제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안성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성으로 하였다. 이것이 신하에게 군(君)을 봉하는 법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은 없으며 고려 고종 때 김돈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김돈은 안성현에서 출생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 한림학사,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자는 김애순(金愛順, 1582 壬午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택(金澤, 1592 壬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언(金彦, 1588 戊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명달(金鳴達, 1633 癸酉生) : 무과(武科) 현종3년(1662) 증광시 을과(乙科), 김일춘(金一春, 1596 丙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바위(金岩回, 1593 癸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기충(金起忠, 1593 癸巳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김이복(金履福, 1761 辛巳生) : 사마시(司馬試) 정조22년(1798) 식년시 이등(二等), 김용기(金用基, 1781 辛丑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9년(1819) 식년시 삼등(三等), 김윤영(金胤永, 1825 乙酉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2년(1885)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10명이 있다. 무과 7명, 사마시 3명이다.
본관 안성(安城)은 경기도 남쪽 끝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1998년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2000년에 총 790가구 2,519명이 있다.
안산김씨
안산김씨의 시조는 김긍필(金兢弼)이며, 고려 초기 사람으로 대보공 김알지
의 32세손이며, 일부 문헌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 후손으로 전해
지고 있습니다.
안산김씨 족보에 전하는 시조 김긍필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며,
선조로는 신라국 원성대왕의 후예로서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보공 은열의 아들로
안산현 개국후에 봉작되고 벼슬은 상서좌복야(식읍 1500호)입니다.
그의 아들 김은부는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안산개국후에 봉작되었고,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
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부인은 인주(인천)이씨 이허겸의 딸로서 인주이씨가
귀족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자연은 이허겸 손자다.
김은부의 큰아들 충찬은 병부상서 작은아들 난원은 문종의 왕사를 거쳐
경덕국사가 되었으며,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아들)의 스승이 되었다.
손자 원황은 공부상서, 병부상서 증손 경용은 평장사, 문하시중, 경용의
아들 인규는 이부상서, 후손 위는 문하시중, 그 후손들인 원상은 대제학
성경은 진주목사 등 대대로 큰벼슬을 지냈으며,
김은부의 11대 후손 김정경이 이조판서와, 좌명공신으로 안산군(연성군)
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4975(2000년).
김필(金珌) : 문과(文科) 중종14년(151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취의(金就義, 1548 戊申生) : 문과(文科) 선조18년(1585) 식년시 병과(丙科)
김수종(金秀鍾, 1774 甲午生) : 문과(文科) 정조24년(1800) 별시 병과(丙科)
김위(金瑋, ) : 문과(文科) 연산군7년(1501) 식년시 병과(丙科)
김옹(金雍, 1540 庚子生) : 문과(文科) 선조9년(1576) 식년시 병과(丙科)
김맹강(金孟鋼, 1540 庚子生) : 문과(文科) 성종14년(1483) 춘당대시 병과(丙科)
김화종(金和鍾, 1741 辛酉生) : 문과(文科) 정조11년(1787) 정시 을과(乙科)
김처암(金處巖, 1755 乙亥生) : 문과(文科) 정조19년(1795) 식년시 갑과(甲科)
김곤(金琨, 1755 乙亥生)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병과(丙科)
김항(金沆, 1646 丙戌生) : 문과(文科) 숙종5년(1679) 식년시 을과(乙科)
김양심(金養心, 1725 ) : 문과(文科) 정조24년(1748) 정시 병과(丙科)
등 모두 6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1명, 무과 18명, 사마시 35명, 역과 3명, 음양과 1명)
안산김씨 인구 분포도
안산이 별호(別號)인 연성(蓮城)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조선왕조 초인 1463년(세조 9)부터였다. 「안산군읍지」에 의하면 성종 때 좌찬성에 오른 강희맹이 세조 9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중국의 남경(南京)을 다녀오는 길에 중국에서도 그 자태가 곱기로 이름난 항주(抗州)의 전당강(錢塘江) 기슭에 자생하는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의 씨와 뿌리를 가져와 안산의 별서(別墅)에 심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꽃이 향촌에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연성이란 별호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연성과 관련하여 안산이 가장 영광스럽게 부각된 것은 1797년(정조 21) 8월 16일, 화성에 모신 정조 임금의 아버지인 장조(莊祖), 즉 사도세자의 능(陵인) 현륭원(顯隆園) 행행(行幸) 길에 정조 임금의 어가가 하룻밤 안산별궁(安山別宮)에 묵었던 사실이다. 이때의 행궁이란 따로 축조한 건물이 아니라 군의 관아를 이름이다.
위에 알려진 내용을 바로 잡아본다면
안산의 별호인 연성(蓮城)을 1463년(세조 9)에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의 씨와 뿌리를 중국에서 강희맹이 가져와 안산의 별서(別墅)에 심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연성(蓮城) 별호를 강희맹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 63년이나 앞선 1400년(정종 2년) 김정경이 한성부윤에 있을 때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에 책봉된 김정경이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봉군의 명칭은 주로 살고 있는 지역과 결부된다.
연성군 김정경의 연성(蓮城)은 그가 거성으로 삼아 거주했던 곳의 명칭이고, 고려시대 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안산읍성의 원래 명칭을 연성(蓮城)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blog.daum.net/yescheers/720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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