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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삼별초 왕으로 옹립 승화후 온은 평양공기(안산김씨 외손) 후손

by 연송 김환수 2008. 10. 7.

고려 삼별초가 왕으로 옹립했던 승화후 온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승화후 온(承化侯 溫)은 당시 왕이었던 원종과는 좀 먼 친척 관계입니다.
고려 8대 왕 현종의 아들 평양공 기(平壤公 基)가 승화후의 직계조상입니다.

평양공 기는 안산김씨 원혜태후 소생으로 문종의 친동생입니다.

 계보는
현종(顯宗)----평양공 기(平壤公 基)----낙랑후 영(樂浪侯 瑛)----승화백 정(承化伯 楨)----한남공 기(漢南公 杞)----신안후 성(新安侯 城)----계성후 원(鷄城侯 沅)----청화후 경(淸化侯 璟)----승화후 온(承化侯 溫)


촌수를 따지자면...

현종
평양공 기-----(형제)-----문종
낙랑후 영-----(사촌)-----숙종
승화백 정-----(육촌)-----예종
한남공 기-----(팔촌)-----인종
신안후 성-----(십촌)-----명종
계성후 원-----(12촌)-----강종
청화후 경-----(14촌)-----고종
승화후 온-----(16촌)-----원종

직계로 따지면 승화후 온은 원종의 16촌 형제입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근친혼 했다는 사실 잘 아시죠? 그렇기 때문에 16촌 형제라해서 매우 멀어보이지만, 사실은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승화후의 대고모(할아버지의 누나)가 강종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인 원덕태후(元德太后)입니다. 그러니깐, 실제로는 내외종 6촌이 되겠지요

게다가 16촌이라고 해서 매우 멀어보이는데요..고려의 왕족들이 대부분 후사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입니다.  출처 : 고려사(高麗史) 열전

운림산방에서 진도읍으로 가다보면 의신-진도읍간 군도로와 만나는 삼거리 오른쪽에 왕온묘가 있습니다. 

 

도로 이정표 이 이정표 밑에 왕 온묘 이정표가 있습니다.

왕 온묘 이정표

 

- 오른쪽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오르막 길이 있는데 여기로  올라가야 하나 봅니다.

 

조금을 올라오니 묘가 보입니다.

 

전 왕온묘 안내문 - 전남 기념물 제 126호 입니다.

 

고려 원종 12년 (1271) 5월 고려장수 김방경과 몽고장수 홍다구가 병선 400척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대규모 총공세를 펼쳐 10여일동안 벌어진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은 �기다가 죽임을

당하여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고개를 왕무덤재 또는 왕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이 고개에는 주인이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 5~6기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묘가 "왕온묘"로 전해지고 있다.

왕 온묘 - 수수합니다.

무덤 앞 석인상 - 근엄한 문무석상이 아닌 돌장승 같이 친근한 모습입니다.

 

고려의 자주를 꿈꾼 삼별초의 피 맺힌 항쟁

 

고려 정부가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몽고와의 치욕적인 강화조약에 반발한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을 지휘관으로 삼은 다음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1270년 6월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진도로 보내게 되는데, 이때 동원된 선박이 1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벽파진을 통해 진도로 들어온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삼별초는 이 곳 용장산성에 9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몽항쟁을 위해 차근차근 그 세력을 넓혀 나가게 되는데, 멀리는 탐라국에서 가까이는 완도와 거제도에 이르는 30개 도서지역을 장악하며 해상왕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1271년 5월 화포(火砲)와 화창(火槍)을 앞세운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용장산성은 힘없이 무너지고 삼별초의 처절한 패퇴가 시작된다.현재 용장산성에는 계단식으로 조성된 방대한 규모의 행궁지가 남아있을 뿐 대부분의 산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배중손장군이 산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오는 용장사의 석불좌상(유형문화재 제17호)과 삼별초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전시해 놓은 용장산성 홍보관이 마련돼 있다.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는 삼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몽연합군의 기세를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승화후 온을 위시한 김통정과 유존섭 등 간부 일행은 남쪽의 왕무덤재를 넘어 갑포로 방향을 잡았으며, 총참모장이었던 배중손장군 일행은 서쪽의 임회를 바라고 남도포로 방향을 잡았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퇴각하던 승화후 온 일행은 지금의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부근에서 여몽연합군과 첫 번째 격전을 치른다. 이 격전에서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항이 몽고의 장군 홍다구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곳이 바로 ‘왕온의 묘’가 있는 ‘왕무덤재’이다. 현재 왕무덤재에는 왕온의 묘 외에도 비교적 규모가 있는 5~6기의 묘가 더 있지만, 온의 아들 항의 묘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승화후 온이 타던 말의 무덤으로 알려진 ‘말 무덤’이 왕온의 묘로 오르는 길 우측 숲에 자리해 있다.

 

 

 

 

 

 

여몽연합군과 다시 맞닥뜨린 곳은 ‘돌아온 백구마을’로 유명한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부근이다. 이곳에서의 격전도 삼별초에게는 쉽지 않은 전투였다. 승화후 온의 목을 벤 여몽연합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에 반해 왕을 잃고 패주만을 계속하던 삼별초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선 아직도 처참했던 당시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마을 앞 군데군데 남아 있는 작은 봉분들이 바로 그것이다. 돈지리 마을 앞 들판에 흩어져 있는 이 작은 무덤들을 마을사람들은 ‘떼무덤’ 혹은 ‘대분통’이라 부른다.

 

돈지벌 전투의 연장선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돈지벌 전투 중 피난길에 나선 삼별초의 궁녀들이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만길재에서 우황천이라 불리던 이곳 웅덩이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이는 몽고군에게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으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흡사한 사건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우황천의 대부분이 메워졌지만 진도군 신의면 돈지리 마을 입구에는 아직도 ‘삼별초 궁녀 둠벙’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웅덩이가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거쳐 간 곳은 금갑선착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북문재 정상의 금갑진이었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었던 김통정 일행은 고심 끝에 진도를 버리고 제주로 그 본거지를 옮길 것을 결정하게 된다. 최근 북문재 정상에선 김통정 일행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금갑진에 대한 발굴공사가 한창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럴 듯한 탐방로는 없다. 하지만 금갑리 마을회관이 있는 금갑슈퍼 앞 공터에서 금갑교회를 끼고 도는 작은 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금갑진에 오를 수 있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남도석성(사적 제127호)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퇴각 내내 여몽연합군의 집요한 추적을 어렵사리 뿌리친 배중손장군이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을 터다. 삼별초 항쟁의 주역이었던 배중손장군의 죽음으로 삼별초의 아홉 달에 걸친 짧은 영광과 10일간의 치열한 전투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배중손장군이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은 삼국시대 쌓은 성이지만 지금의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증ㆍ개축한 것으로 둘레 610m의 석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남도석성의 특이한 점은 성내에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인데, 성내에는 현재도 20여 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내에 있었던 객사에 대한 복원도 진행 중이다.

삼별초의 행적을 좇아 남도석성까지 발걸음을 했으면 진도군 지산면 세방리도 놓칠 수 없다. 진도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몇 해 전 기상청이 우리나라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한 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으로 촘촘히 떠 있는 다도해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인 곳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

시대 고려

생몰년 ?-1028(현종19)

본관 안산김(安山金)

시호 광선(廣宣)

활동분야 왕비


원성태후(元成太后)에 대하여   원성태후(元成太后)

?∼1028(현종 19).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제3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의 딸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내침하자 왕은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왕궁으로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었다.

이때 절도사인 은부는 왕을 영접하고, 그 딸로 하여금 어의를 지어드리게 하고,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왕은 이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삼았다. 정종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한편, 왕비의 두 자매도 함께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세 자매가 함께 한 왕의 왕비가 된 예는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다.

현종과의 사이에 덕종·정종의 두 아들과 인평왕후(仁平王后)와 경숙공주(景肅公主)를 두었다.

시호는 원성왕후이고 명릉(明陵)에 장사하였으며 현종 묘실에 합장하였다.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

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 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원혜태후(元惠太后)

간략정보

시대 고려

생몰년 미상

본관 안산김(安山金)

활동분야

왕비

원혜태후(元惠太后)에 대하여

원혜태후(元惠太后)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4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이었던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도중 공주에 들렀을 때 납비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문종·평양공 기(平壤公基)·효사왕후(孝思王后)를 낳았다. 문종은 고려 제11대왕이 되고, 그뒤 고려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리고 평양공 기의 후손은 대대로 왕실 공주와 계속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집안으로 고정되었다.

처음에 안복궁주(安福宮主)라 칭하였다가 연덕(延德)으로 개칭하였고 사후에 원혜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능호는 회릉(懷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1025년에 왕비로 추봉되고 1027년에 평경(平敬)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종이 즉위한 뒤에 태후로 추존되었다.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7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제4비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하던 도중 공주지방에 들렀을 때 납비(納妣)된 언니들을 따라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효경공주(孝敬公主)를낳았다. 1028년(현종 19)에 원평왕후로 추증되었으며, 능호는 의릉(宜陵)이다.

 

인평왕후

생몰년 미상. 고려 제11대 문종의 제1비.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딸로 어머니는 현종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문종의 모후인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이 혼인은 친계로는 남매간 혼인이며, 모계로는 이종4촌간이 된다. 고려시대에 이와같은 근친혼은 태조가 어머니를 달리하는 그의 자녀를 혼인시키면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왕실혼의 한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복남매간의 극단적 근친혼은 광종·덕종·문종의 사례가 있을 뿐 그다지 많지는 않다. 왕자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근친혼의 사례가 있으며, 그런 경우 왕실 내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문종과 인평왕후와의 혼인은 모계 4촌이라는 면에서 종래의 혼인보다도 특이한 경우이다. 이는 현종이 김은부(金殷傅)의 세 자매를 모두 왕비로 맞고 거기에서 낳은 자녀를 서로 결혼시킨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참고문헌≫ 高麗初期 婚姻政策의 추이와 王室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평양공 기에 대하여

 출처 : 고려황제의 부마들에 대해서 다음 용지니요님 2006-03-10 14:14

현종의 아들을 알려진 순서대로 적으면 덕종, 정종, 문종 그리고 4번째가 평양공(平壤公) 기(基)라는 황자가 있었는데 이 평양공은 무지 형님인 문종에서 당합니다. 즉 문종의 자식은 많은데 이 동생이 황위를 노릴까 의심 하는거죠. 어딜가나 골육상쟁...
그 덕에 평양공은 자식 셋 중 둘하고 목숨을 잃고 막내 낙랑후 영(樂浪侯 瑛)만 살아남습니다. 평양공 부자의 죽음 뒤에는 문종의 왕비 친정인 경원 이씨(慶源 李氏)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죠.

즉 문종의 사후 전통(兄弟世襲)대로라면 동생인 평양공이 계승할까 외손자들의 안전을 위해 평양공을 제거한 겁니다.

경원 이씨라면 고려역사에서 그 유명한(?) 이자겸 가문으로 당시는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죠.
이 평양공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이 평양공의 남자후손들이 고려황제의 주된 부마들의 공급처 가문(?)이었습니다. 낙랑후가 처음 문종의 공주인 보령궁주(保寧宮主)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얻고, 이어 장남인 승화후 정(承化侯 禎)이 숙종의 딸 흥수궁주(興壽宮主)에게 장가를 들어 이 이후 자손들은 대대로 황제의 부마가 되죠.
즉 세대에 한 명씩은 부마가 된다는 겁니다. 아마 평양공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문종의 후손들의 보상심리가 아니었는지...
이후 공주들은 사촌이나 육촌인 왕의 왕비가 되지 않으면 종실의 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마는 그냥 종실이라고 생각해서 그다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 “종실=부마” 등식성립 >

 

야사로 보는고려의 역사 (최범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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