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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불사사의,기타

세계 7대 新 불가사의

by 연송 김환수 2008. 10. 19.

                                                     

 만리장성                   마추픽추                 페트라     

                                                              

 브라질 거대 예수상         치첸이트사                    콜롯세움                   타지마할    

 

                                                                                                                                                   

중국 만리장성 [萬里長城]  

(병)Wanli Changcheng (웨)Wanli Ch'angch'ang (영)Great Wall of China.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

허베이 성[河北省] 북부 옌산 산맥[燕山山脈]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km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기원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츠펑[赤峰]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은 간쑤 성[甘肅省]의 민 현[岷縣]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황허 강의 북쪽을 감아돌아 조의 장성과 합쳐지는데, 그 동쪽 끝을 연의 장성과 연결하여 츠펑부터 랴오양[遼陽] 부근에까지 증축했다.

 

전한시대 장성의 동부는 거의 진대(秦代)의 것 그대로였으나 서부에는 간쑤의 회랑지대를 흉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제시대(武帝時代)에 우웨이[武威]·주취안[酒泉] 2군(郡)을 설치하여 그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그후 장예[張掖]·둔황[敦煌] 2군을 설치하여 거기에 축성했던 장성도 주취안으로부터 서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시켰다. 후한시대에는 흉노(匈奴)의 세력이 쇠퇴하여 중국과 싸울 힘을 잃었기 때문에 장성의 보수는 행해지지 않았다.

 

삼국시대에서 진대(晉代)에 이르기까지 5호(五胡)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어 대거 중국으로 침입해왔다. 그들은 자유롭게 장성을 출입했고 내지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족이 세운 진이 양쯔 강[揚子江]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화북지역으로 들어온 선비(鮮卑)는 북위(北魏)를 세웠으나 급속히 중국화했고, 외몽골에서 일어난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장성의 개축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것은 시황제시대의 것을 보강하는 수준이었다.

 

북위의 영토를 이어받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도 큰 돈을 투입하여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했다. 이 장성은 산시 성[山西省] 리스 현[離石縣] 부근부터 보하이 만 부근까지 약 1,500㎞에 이르는 규모로서 현재의 장성 선의 위치에 새로이 축성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방의 고대 장성, 즉 전국시대에 시작되어 한과 북위시대에 보수되어온 옛 장성은 버려져 유적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개수와 변천

수(隋)는 중국 통일 후 장성의 보수에 힘쓰는 한편,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자세가 방어보다는 공격 위주로 되었기 때문에 장성을 보수하거나 신설하는 일은 없었다. 오대(五代) 이후 장성 일대가 요(遼)·금(金)·서하(西夏) 등 이민족의 영토가 되어 장성은 거의 방치되었다. 금대에 들어와 몽골 고원의 동쪽 끝에 살고 있던 타타르족(몽골족의 한 부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興安嶺山脈]의 서쪽에 새로 대규모 장성을 축조했다.

 

이 장성은 현재의 치치하얼[齊齊哈爾] 북서부의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을 넘어 그 일대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리다 인산 산맥[陰山山脈] 북측 초원의 서쪽으로 뻗어 바오터우[包頭] 북방에 이르렀는데 그 유적은 지금도 단속적으로 남아 있다. 원은 몽골과 중국땅 모두를 지배했기 때문에 장성이 필요없었으며, 만리장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몇 번이나 만리장성을 넘었던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 Livre des merveilles du monde〉에 만리장성에 대해서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축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 만리장성의 자태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영락제시대(永樂帝時代)까지 북방민족에 대해 공격적이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방어적으로 되어 역대로 만리장성을 개축했다. 주로 북제시대의 유적을 기초로 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상당 부분 신설한 것도 있다. 장성의 축조는 이미 영락제시대에 시작되었다. 우선 산하이관부터 다퉁에 이르는 구간을 강화했고, 이어 정통연간(正統年間)에는 베이징의 정면 부분이 2중으로 축성되었다. 더욱이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이 개수되었는데 이 부분은 수의 장성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가정연간(嘉靖年間)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동부에서 착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전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장성이 만들어졌다. 서쪽 부분은 한대에 축성된 이래 거의 버려진 채로 있었으나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에 이어 간쑤에 이르는 부분이 축성되었고, 이어 란저우[蘭州]에서 자위관까지 연장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거의 완성된 것은 16세기말이었다.

 

명은 만리장성을 북방의 제1선으로 삼아 거대한 주둔군을 배치하고 구역을 나누어 방위를 담당시켰는데 이것을 구변진(九邊鎭)이라고 불렀다. 명대에는 만리장성을 변장(邊牆)이라고 불렀다. 북변의 변장 이외에도 요동(遼東) 변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 변장은 산하이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랴오닝 성[遼寧省] 선양[瀋陽]·카이위안[開原] 부근에까지 이른 뒤 남하하여 압록강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주 및 몽골에서부터 신장[新疆]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을 통일한 청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잃고 황량한 상태로 20세기 전반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정비사업에 착수하여 산하이관과 바다링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황토를 건조시키면 단단한 점토가 되므로 판축은 간단한 공법이었으며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황토를 틀에다 넣어 건조시키면 햇빛에 말린 벽돌이 되는데 이것을 구운 것이 전이다. 전으로 장성의 외곽을 둘러싸는 공법은 명대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서 지역적으로는 산시[山西] 동쪽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산시 서쪽 구간에는 전 이외에도 햇빛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부분도 있다.

 

군사 및 경제적 역할

만리장성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었으며 수비병이 주둔했다. 이러한 장소를 관(關) 또는 구(口)라고 부르는데 산하이관·구베이커우[殺虎口]·쥐융관·두스커우[獨石口]·자위관 등이 특히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선으로서의 군사적 의미이다. 그러나 북방민족은 세력이 강력해지면 간단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농경지대를 침입했고 화북의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다퉁과 사후커우[殺虎口] 사이, 장자커우[張家口] 부근, 두스커우, 구베이커우가 그들의 중요한 돌파지점이었다.

 

또 명대 말기에는 산하이관 정도가 청군의 침공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돌파되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둘러싼 몽골과 만주 간의 무역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왔다. 만리장성 부근의 촌락에서는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고, 대규모적인 것은 만리장성 안의 도시를 기지로 하여 대상을 짜서 오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명말 이래 귀화성(歸化城)과 같이 만리장성 밖에 있는 도시가 상업도시로 번영한 곳도 있다.

 

청대에는 중국의 상인들(특히 산시 상인들)이 정부의 뜻과는 달리 귀화성부터 몽골 고원의 오지에까지 상업을 위해 들어가기도 했다. 만리장성 너머의 무역로로는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만주 방면으로 가는 것이 있다.

 

이 경로로 만리장성을 빠져나오는 지점은 당 이전에는 구베이커우였으나, 요대에는 산하이관이 설치되면서 2곳이 되었다. 몽골 방면은 다퉁으로부터 북상하여 더성커우[得勝口] 부근의 관구를 통하는 것이 주요경로였으나 명말부터는 귀화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페루 마추픽추 [Machu Picchu]

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에 있던 고대 잉카 제국의 요새 도시.

마추픽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다. 2개의 뾰족한 봉우리 사이 말안장 모양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며 1911년에 와서야 예일대학교의 히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세워진 도시로서 마추픽추처럼 거의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은 채 간직된 경우는 드물다.

 

면적은 13㎢이고 신전 하나와 3,000개가 넘는 계단과 연결된 테라스식 정원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하나 있다. 건물의 석재가공 솜씨는 다른 잉카 지역에 비해 그렇게 세련되지 못하며 사람들이 거주했던 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요르단 페트라 [Petra]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시대에 걸쳐 아랍 왕국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페트라에 있는 앗데이르의 나바테아인 암굴 사원
이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 주(무하파자)에 있다. 페트라는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sa)이 관통하고 있는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용솟음쳤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모세 계곡은 연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도 부른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브라질 거대 예수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 (브라질 코르코바도산)

 
 

약칭으로 리우라고도 한다. 인구는 585만 544명(2000)이다. 대도시로 1763~1960년까지 브라질의 도였으며,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로 세계 3대 미항(美港)의 하나이다. 동쪽은 대서양 연안의 과나바라만(灣)에 면하고, 서쪽은 해발고도 700m가 넘는 가파른 산지가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시가는 코파카바나·이파네마 등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좁고 길게 뻗어 있으며, 항구 입구에는 팡데아수카르라고 불리는 높이 약 400m의 종 모양 기암이 있어, 항구의 표지 구실을 한다.
 
또 시가지 바로 뒤에 있는 높이 약 700m의 코르코바도 암봉(岩峰) 꼭대기에는 리우의 상징인 그리스도상(像)이 세워져 있다. 기후는 가장 더운 2월의 평균기온이 26.1℃, 가장 시원한 7월의 평균 기온이 20.6℃, 연평균기온이 23.1℃이다. 습도는 높으나 무역풍의 영향으로 서늘하여 코파카바나 해안은 해변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1502년 1월 1일 포르투갈의 항해자가 발견했으며, 발견자는 부근의 만(灣)을 강 어귀로 잘못 알고, ‘리우 데 자네이루(1월의 江)’라고 명명하였다. 최초의 식민은 프랑스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555년에 리우의 호수 부근에 상륙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포르투갈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으나, 1567년에 결국 포르투갈이 승리를 거두었다. 18세기에 미나제라이스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1808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1822년 브라질 왕국이 성립되자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다시 1889년에 브라질 공화국이 된 후에도 1960년에 브라질리아로 수도가 옮겨지기 전까지 이 나라의 수도였다.
 
코르코바도 산의 그리스도상
 

높이 710미터의 corcovado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리스도상은 확실히 세계에서 가장 잘알려지고 방문객도 많은 기념상 중 하나이다. 이 동상은 예수가 서서 팔을 펼친 형상인데, 이것은 이 활기찬 도시의 (리우데자네이루) 가장 유명한 상징중 하나이다.

 

전체 구조물은 38미터 높이이고 동상만은 30미터로 계산된다. 손 한끝에서 다른 한끝까지의 폭은 28미터이며 기단 내부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이곳은, 코파카바나해안, 이파네마해변, Sugarloaf산이 보인다.

 

이 기념물은 1931년 10월 12일 브라질의 국경일인 성모마리아의 날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본래 브라질사람인 Heitor da Silva Costa에 의해 디자인 되었었다. 그는 또한 건설 기술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프랑스인 조각가인 sculptor Paul Landowski와 공동으로 했다. 이것은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지어졌으며, 필요한 자금은 기부금으로 부터 충당되었다. 그 기념상 기단에 있는 예배당은 1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상
 

코르코바도산에 있는 이 그리스도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전체 높이 30m, 양팔을 벌린 길이가 28m나 되는 거대한 석상

 
 
 
 

 

 

멕시코 치첸이트사 [Chichén Itzá]

폐허화된 고대 마야 도시.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 주 남중부에 있다. 건조한 지역인 이곳의 유일한 수원(水源)은 이 지역에 발달한 석회암층의 일부가 꺼져 형성된 우물(마야어로 cenote)이다. 유적에 있는 2개의 큰 세노테 덕분에 이곳은 도시에 적합한 곳이 되었고, '이트사의 우물 입구'(마야어로 chi는 '입구', chen은 '우물'이라는 뜻이며 이트사는 이곳에 정착한 부족의 이름임)라는 뜻의 도시명도 생겨났다.

 

치첸은 AD 6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선(先)고전기 또는 형성기(BC 1500~AD 300)부터 유카탄 반도에 살았던 마야인들이 세운 듯하다. 초기의 주요건물들은 ' 푸크'로 알려진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푸크는 남부 저지대 양식들이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구조물에는 아카브트시브(주문의 집), 치찬초브(붉은 집), 사슴의 집, 이글레시아(예배소) 및 몬하스(수녀원)가 있다.

 

10세기에 남부 저지대의 마야 도시들이 멸망한 후 치첸은 마야어를 쓰지만 멕시코 중부의 톨텍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거나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이 침입자들은 유적의 이름이 유래한 이트사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것은 논란거리이며 몇몇 연구자는 이트사가 이곳에 온 것이 200~300년 뒤의 일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카스티요(대[大]피라미드), 제의 목적의 공놀이인 틀라츠틀리를 하던 구장, 제사장의 무덤, 주랑(柱廊) 및 전사(戰士)의 사원과 같은 주요건물을 세웠다.

 

건물의 대부분은 초기 후(後)고전기(900경~1200)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후고기(1200경~1540)에 치첸은 마야판이라는 도시가 융성함에 따라 기울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치첸이트사는 욱스말 및 마야판과 결합하여 마야판 동맹으로 알려진 정치 연합을 결성했다. 1450년경 마야판 동맹과 마야판의 정치적 우위는 사라졌다. 16세기에 스페인인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야인은 많은 수의 작은 취락에 살고 있었으나, 치첸을 비롯한 주요도시들은 대부분 폐기된 상태였다.

 

 치첸이트사는 밀림에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에서 마야 인디언에게 성스러운 곳으로 남아 있었다. 유적은 19세기에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치첸이트사는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연구지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치첸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세노테 숭배라는 전설적인 전통이 있어 금과 옥으로 만든 장신구 및 기타 귀중품과 더불어 젊은이를 도시의 주요한 세노테에 던졌다고 한다. 이 전설은 1904년 유적 전지역을 사들인 미국인 에드워드 허버트 톰프슨이 세노테의 물을 빼 해골과 제물을 발견함으로써 확인되었다.

 

 

이탈리아 콜롯세움

로마에 있는 거대한 원형경기장.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인도 타지마할 [Tāj Mahal]

인도 아그라 교외의 야무나 강(줌나 강) 남쪽 연안에 있는 영묘(마우솔레움).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 마할이라고 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이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 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 자와브'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이 복합체의 북쪽 끝에는 영묘·모스크·자와브 등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와 자와브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과 아키트레이브(평방)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어,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색깔과 감촉에서 대조를 이룬다 (→ 피에트라두라).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얕은 부조 무늬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된 이 묘실에는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다. 이 대리석 무덤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기저기에 보석을 박은 투각(透刻)한 대리석 막이 둘러처져 있다. 정원과 같은 높이에 있는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타지 마할은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여겨진다.

 

 추억의 소야곡 

해운대 엘레지 

비내리는 고모령 

청춘고백

나는 울었네 

하룻밤 풋사랑

불효자는 웁니다 

산팔자 물팔자 

목포의 눈물 

비내리는 호남선

항구의 사랑 

고향의 그림자 

울지마라 가야금아 

죄많은 여인

시오리 솔밭길 

생일없는 소년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비내리는 고모령 

애수의 소야곡 

천리먼길 

소양강 처녀 

황홀한 고백

나침반 

연상의 여인 

돌이키지마 

빨간구두 아가씨 

모정의세월 

좋았다 싫어지면 

평양 아줌마 
꿈에본 내고향